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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 제1주일] 깨어 있어라. (마르13,33-3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29 조회수1,815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1월 29일 주일

[대림 제1주일깨어 있어라. (마르13,33-37)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나해)를 시작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한결같이 기억하시고 아버지의 풍요로운 은총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우리 모두 순수한 사랑을 실천하며,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아드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깨어 기다립시다.


1독서 <주님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이사63,16-17.19ㄷㄹ; 64,2-7)

16 주님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17 주님어찌하여 저희를 당신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십니까어찌하여 저희 마음이 굳어져 당신을 경외할 줄 모르게 만드십니까?

당신 종들을 생각하시어당신의 재산인 이 지파들을 생각하시어 돌아오소서.

19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이다.

64, 2 당신께서 내려오셨을 때 산들이 당신 앞에서 뒤흔들렸습니다.

당신 아닌 다른 신이 자기를 고대하는 이들을 위하여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예로부터 아무도 들어 보지 못하였고 아무도 귀로 듣지 못하였으며 어떠한 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의로운 일을 즐겨 하는 이들을당신의 길을 걸으며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그러나 저희는 죄를 지었고 당신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당신의 길 위에서 저희가 늘 구원을 받았건만

이제 저희는 모두 부정한 자처럼 되었고 저희의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들도 모두 개짐과 같습니다저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어 저희의 죄악이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갔습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경배드리는 자 없고 당신을 붙잡으려고 움직이는 자도 없습니다당신께서 저희를 외면하시고 저희 죄악의 손에 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저희는 진흙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화답송 시편 80(79),2ㄱㄷㄹ과 3ㄴㄷ.15-16.18-19(◎ 4)

◎ 하느님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당신 얼굴을 비추소서저희가 구원되리이다.

○ 이스라엘의 목자시여귀를 기울이소서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분광채와 함께 나타나소서당신 권능을 떨치시어 저희를 도우러 오소서

○ 만군의 하느님어서 돌아오소서하늘에서 굽어살피시고 이 포도나무를 찾아오소서당신 오른손이 심으신 나뭇가지를당신 위해 키우신 아들을 찾아오소서

○ 당신 오른쪽에 있는 사람에게당신 위해 키우신 인간의 아들에게 손을 얹으소서저희는 당신을 떠나지 않으오리다저희를 살려 주소서당신 이름을 부르오리다

 

2독서<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1코린 1,3-9)

형제 여러분,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어떠한 말에서나 어떠한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복음 환호송 (시편 85,8) ○ 주님저희에게 당신 자애를 보여 주시고 당신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복음<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마르13,33-37)

33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4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35 그러니 깨어 있어라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저녁일지한밤중일지닭이 울 때일지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깨어 있어라.”

 

 

 

  대림 제1주일 제1독서(이사63,16ㄹ~17.19ㄷㄹ; 64,2ㄴ~7)


"주님, 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63,16ㄹ) 그러나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64,7)

 

'이사야'의 이름의 뜻은 '야훼는 구원이시다' 또는 '야훼께서 구원을 주신다'이다. 이사야는 유다 임금 우찌야가 죽던 해(기원전 740년)에 예언자 소명을 받았다. 

이사야 예언서는 1~39장(제1 이사야), 40~55장(제2 이사야), 56~66장(제3 이사야)로 나뉘어진다. 

제1 이사야 팔레스티나가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던 기원전 8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제2 이사야 기원전 550~519년 바빌로니아 유배생활을 배경으로 하며,

제3 이사야 바빌론 유배이후(기원전 538)부터 에즈라 느헤미야시대(B.C. 5C 중엽)이전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이사야서의 최종 편집은 이르면 기원전  5세기 중엽, 늦으면 기원전 3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제3 이사야로도 불리는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56~66장)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의 상황을 겨냥한다.  

 

이 대목 역시 저자 한 사람이 쓴 것이라기 보다 다양한 역사적 삶의 배경에서 나온 여러 신탁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이 대목에 모아진 신탁들은 몇 가지 공통된 주제를 계시하는데, 이 주제들은 1장에서 언급된 이사야서 전체의 중심 주제, 곧 구원의 보편주의를 재천명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당신께 충실한 남은 자들을 구원할 것이다.

둘째 이스라엘의 수도이며 하느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은 참다운 예배의 중심이 될 것이다.

셋째 하느님의 심판은 이스라엘과 그 주변의 경계를 넘어서 모든 민족에게 미칠 것이다(64,1-3).

넷째 주님의 구원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민족에게 확장된다. 

특히 이사야서 58,6~7과 61,1~2은 루카 복음사가가 예수님 공생활의 청사진을 그려내는 데 결정적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오늘 제 1독서는 제3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56~66장)에 해당한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의 상황을 겨냥하고 있다. 유배에서 돌아온 귀환자들의 상황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유배생활을 하지 않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방해 때문에 성전 재건과 성벽 재건이 지연되고 있었다. 

이런 여건에서 익명의 제3 이사야는 귀환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선포하면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반드시 완성될 것이라는 신앙의 확신을 심어 주는 것이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하느님께 충실한 '남은 자들'은 자기들을 중심으로 하느님께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막상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유배생활을 하지 않은 자들과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성전 재건과 성벽 재건이 난관에 부딪혀 지연된다.  

그래서 다시 주 하느님을 아버지로 절절히 부르며 지나온 삶의 여정 속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들을 회상하고 뉘우치며 비통어린 기도를 바친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관계는 자식을 결코 버릴 수 도 없고 버리지도 않으시는 부자(父子)관계이므로, 난관과 역경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기도를 바친다. 
 

"주님, 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63,16)

"그러나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64,7)  

이것은 이사야서 63장 8절의 설교 주제를 재론하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정녕 그들은 나의 백성,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자녀들이다'고 말씀하시고 모든 곤경 가운데 그들에게 구원자가 되어 주셨다." 

 

하느님께서 항상 아버지처럼 돌보아 주셨던 옛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난 후의 자기들에게도 적용되어야 마땅하다는 바램이 들어 있다. 

하느님을 '옹기장이'(토기장이: yocher: 요체르), 말하자면 '형성하는 자, 빚는 자' (one who forms), 이스라엘을 '진흙'으로 묘사하는 것은, 옹기장이가 언제든지 진흙으로 만든 작품이 잘못 되었을 경우 다시 해체하여 작품을 새롭게 만들듯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떤 곤경에서도 구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신뢰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소망을 간절히 외친다. '아, 당신께서는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이다.' (63,19) 

이 구절은 '간절히 바라오니, 주님께서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소서~'라는 뜻이다. 시편 62장 2절, 122장의 말씀대로 '구원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오기 때문이다. 

지금 현 상황에서 바빌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하느님의 역사(役事)와 임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므로, 하느님의 초월성 안에서 극적이고 초자연적인 개입(기적)만이 크고 중압감을 주는 '산들'같은 현세의 세력들과 권세들을 진동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대림절을 맞이했다. 작년에도, 몇년 전에도 대림절은 있었고, 내년에도 우리가 살아 있다면 대림절은 어김없이 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베틀레헴, 마음의 구유에 예수님은 어떤 주님과 구원자로 태어나시는가? 를 진지하게 물어 보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선행도, 애덕의 실천,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들도 주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속마음의 회개가 없다면, 그것은 주님 대전에 모두 개짐처럼, 바람에 휘날려가는 나뭇잎처럼(64,5)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거룩하신 사랑의 예수님을 우리 마음의 구유, 우리 가정의 구유, 우리 단체의 구유에 구원자로, 주인으로, 주님으로 모시기 위해 먼저 청소해야 할 것들, 크고 작은 것들이 많이 있다. 

이번 대림절은 얼마만한 성찰과 통회, 보속과 새로운 삶의 결심(정개)의 빗자루가 필요한가?



깨어 있어라

 

 대림 제1주간 복음(마르13,33~37)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3)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34)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5)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36)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37)

 

마르코 복음 13장 33절의 '조심하고'는 13장 5절의 '너희는 조심하여라', 13장 9절의 '조심하여라'13장 23절의 '너희는 조심하여라'와 동일하게 '블레페테'(blepete; be on guard)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여기서 13장 33절은 예루살렘 멸망과 종말의 징조, 종말에 가져야 할 성도들의 자세에 관한 교훈들을 다루고 있는 13장 마지막 경고 구절로서, 이어서 나오는 13장 34~36절의 문지기 비유를 통해 주어지는 영적 각성의 교훈을 도입하기 위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13장 33절의 '깨어 지켜라'에 해당하는 '아그뤼프네이테'(agrypneite; be alert; watch)와 13장 37절의 '깨어 있으라'로 번역된 '그레고레이테'(gregoreite; watch)가 다른 단어이다.

전자의 원형 '아그뤼프네오'(agrypneo) 어떤 일이나 사건에 대해 영적으로 주목하고 집중하는 상태를 말한다(히브3,17). 따라서 대개는 기도하라는 명령과 함께 사용된다(루카21,36).

그런데 후자의 원형 '그레고류오'(gregoreuo)는 육체적 수면을 가리키는 단어로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자에 해당하는 경우로서, 마지막 때가 될수록 영적으로 민감해져서 거짓 그리스도에 의해 유혹당하거나(마르13,5~6), 재난으로 인해 좌절하지(마르13,7~8)말아야 한다는 경고 구절이다.

예수님께서 13장에서 마지막 때의 징조나 거짓 예언자 등에 대해서 말씀하신 목적이 제자들로 하여금 깨어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모든 지혜의 참된 근원이신 하느님의 말씀에만 귀기울이며, 올바른 분별을 위한 기도에 힘쓸 때, 악한 자들이 흘리는 말들에 유혹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르코 13장 33절의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는 말씀은 앞의 13장 32절의 반복인데, 재림 시기를 하느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은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의 능력의 차등이나 제한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일의 질서와 기능적 측면의 구분만을 의미한다. 

'삼위'의 차원에서는 성부 하느님만이 재림의 시기를 아시지만, '일체'의 차원에서는 성자도 하느님이시므로 재림의 시기를 아시는 것이다.

여기서 초점은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재림 시기를 아시느냐 모르시냐의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 조차도 '일체'의 차원이 아니고 '삼위'의 차원을 강조하시며 모르신다고 하신 재림 시기를, 인간이 알려고 하거나 안다고 나서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지적하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성부 하느님께서는 재림 시기를 정하신 분이시고,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에 재림하시고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이며, 그때 성령 하느님께서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려는 마음을 부어주실 것이다.

그러나 여기 마르코 복음사가가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세지는 성부 하느님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종말의 때가 아니고, 종말을 대비하는 자세인 것이다.

 

이제 마르코 복음 13장 34절의 문지기 비유를 살펴본다. 여기서 중점은 주인의 여행 자체가 아니고, 주인의 여행으로 말미암은 주인의 부재 상황이다. 종들에게 있어서 주인의 부재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만들어진 공백 기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주인은 기약이나 의미없이 떠난 것이 아니고, 다시 올 날을 기약하고 갔으며, 종들에게 각자 할 일을 모두 분담시키고 떠났다. 이것은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믿는 이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준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불시에 다시 오시는데(마르 13,35), 믿는 이들은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 13장 34절에서 '종들에게'로 번역된 '토이스 둘로이스 아우투'(tois dulois autu; to his servants)는 직역하면 '그의 종들에게'이다. 

원문은 '아우투'(autu)라는 3인칭 소유격 인칭 대명사가 사용되어 하느님 나라의 권한이 주어진 것은, 그 종이 예수님께 속해 있을 때에, 즉 자신의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인격과 생명과 의지까지도 종속시키고, 그분의 뜻과 계획에 따라 살기로 한 종에게만 권한이 주어짐을 나타낸다.

여기서 '권한'으로 번역된 '엑수시안'(eksusian; authority)는 마르코 복음 전체의 관점에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마르1,22), 마귀를 복종시키는 (마르1,27; 3,15; 6,7) 말씀의 권한이고 죄사함의 권한이다(마르2,10).

 

따라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예수님의 종으로서 삶을 살기를 다짐함으로써 그분의 권한을 가진 교회는, 예수님께서 가졌던 권세를 가지고 병을 고치며, 마귀를 쫓아내고, 말씀을 선포하는 권한을 행사하면서(마르16,15~18), 하느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것이다.

또한 주인은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떠나는데, 여기서 '각자'에 해당하는 '에카스토'(ekasto; each; every man)는 일의 분배적 측면보다는 '한 사람씩'이라는 단위 주체의 개별성이 더 강조된다. 즉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일일이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에게 맞는 일들을 맡겨 주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할 일을'에 해당하는 '토 에르콘 아우투'(to ergon autu; his assigned task; his work)는 직역하면 '그의 일들'이다. 종은 주인에게 예속된 자들이기에, 그들의 맡은 일은 그들 자신의 일이 아니고, 주인의 일이다. 

그러니까 종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 집사(청지기)의 자세를  가지고 임해야 하는 것이다. 종들은 다만 주인의 일을 대신 맡아 행할 뿐이지,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주관적 생각이나 기분에 따라 맡은 일을 처리하면 안된다.

더욱이 주님께로부터 일을 맡은 제자들은 늘 깨어 기도로 묻고, 말씀으로 인도받으며,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선한 청지기라면, 주인이 먼 길을 떠나서 지금 자신과 함께 있지는 않지만, 마치 주인이 자신과 함께 있는 것처럼,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특히 이방인인 로마인들을 주 대상으로 복음을 기록했기 때문에, 밤을 세 단계로 구분하는 유대인들의 시간 구분과 달리 밤을 네 단계로 구분하는 로마인들의 시간 기준을 따르고 있다.

 

 

11.30. 대림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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