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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10,21-2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01 조회수1,060 추천수1 반대(0) 신고

 

 

2020년 12월 1일 화요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10,21-24)

   

 

1독서<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라.>(이사11,1-10)

그날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경륜과 용맹의 영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10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화답송 시편 72(71),1-2.7-8.12-13.17(◎ 7ㄴㄷ 참조)

◎ 주님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 하느님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정의와 큰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강에서 땅끝까지 다스리게 하소서

○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약한 이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 그의 이름 영원히 이어지며그의 이름 해처럼 솟아오르게 하소서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해 복을 받고그를 칭송하게 하소서

 

복음<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루카10,21-24)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하늘과 땅의 주님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그렇습니다아버지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또 아들 외에는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이사야11,1-10)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6)

 

이사야 11장 3-5절에서는, 주님을 경외함에서 우러나온 메시아 공의의 통치의 면모를 묘사하였다. 이제 11장 6절 이하 9절에서는 메시아 통치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신세계적 평화의 나라를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이 단락은 신,구약 성경 중에서 매우 큰 사랑을 받는 본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절들을 애송함으로써, 고단한 삶 가운데에서 평화와 용기를 얻고 있다.

 

먼저 이같은 평화의 나라가 성취되는 시기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육화)과 재림 사이 교회의 시간에 성취된다고 하는 해석이다.

이에 따르면, 이 왕국은 교회와 동일시되며,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난 교회에서는 원수와 싸움이 없고, 평화와 사랑이 넘쳐나게 될 것임을 본단락이 예언한 것이 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성취된다고 보는 해석이다.

즉 이 나라를,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뛰노는 세상이며, 젖먹이가 독사 굴 속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어도 아무런 해입지 않는, 생태계의 기본 원리인 천적 관계조차 사라진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신세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해석이 보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본단락의 묘사가 교회의 시간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여전히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남아 있으며, 슬픔과 근심,걱정과의 싸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면, 죄와 죽음은 사라지고, 슬픔도 근심도 눈물도 존재하지 않는다(묵시21,4.5). 그야말로 전혀 새로운 개념의 새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사야 예언서 11장 6절 이하 9절의 예언은, 교회의 시간에는 부분적으로 성취되다가 그리스도 재림 이후 완전하게 성취됨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메시아 왕국의 본질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왕국은 성경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실제로 새끼 양이 늑대와 함께 놀아도 해를 받지 않고, 사자 등 육식 동물이 옆에 있는 먹이조차도 물지 않는 세상이 된다. 즉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에서도 천적 관계가 없어지는 완전한 평화의 세계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둘째, 이 왕국은 영적인 나라인 것이다.

이 동물들은 인간의 다양한 영적 상태를 대표하는 것이 된다. 사나운 사람들, 압제적인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영적 세상에서는 가장 무력하고 연약한 자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서로 평화롭게 지낸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이 세상 가운데서 성령을 통해 거듭난 사람들 사이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교회안에서 가라지가 밀이 되듯이, 악인이 변해 선한 사람이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이러한 일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시점을 메시아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시점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셋째, 이 왕국은 메시아 왕국에서 죄와 죽음의 모든 위험이 다 사라진다는 사실을 비유를 사용하여 묘사한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

 

이상에서 설명한 메시아 왕국의 실현 시기와 본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각각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모든 해석의 가능성들을 열어 놓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이 단락에 접근하는 것이 좋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의 강생과 관련된 예언인 동시에,그것을 넘어서 재림 이후 완전히 성취될 예언이며, 영적인 현상에 대한 예언인 동시에 종말에,그리고 종말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질 예언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예언은 이사야 예언서 65장 25절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어 강조된다.

 

한편, 메시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세상에 나타나는 첫번째 현상으로서,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사는 것이 제시된다.

'늑대'(이리) 즉 '제에브'(zeeb)는 매우 사나운 들짐승으로서 새끼 양이나 새끼 염소와 같은 연약한 동물들을 먹이로 삼는다(요한10,12). 늑대(이리)의 이러한 점은 스바이냐 예언자가 탐욕스럽고 불의한 판관들을 '이리'로 표현하였고(스바3,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것은 마치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데서도 잘 드러난다(마태10,16).

 

또한 '새끼양'에 해당하는 '케베스'(kebes)는 아직 장성하지 않은 어린 숫양 의미한다(민수15,11). 이러한 '새끼양'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다.  그러나 이처럼 사납고 잔인한 늑대가 새끼양과 함께 산다는 것이다.

천적 관계를 형성하는 이런 동물들이 함께 산다는 것은 그러한 천적 관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여기서 표범은 앞서 제시된 늑대와 동일한 이미지를, 새끼 염소는 새끼 양과 동일한 이미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지내리라'에 해당하는 '이르빠트'(irbats)의 원형 '라바츠'(rabats)는 네 발 가진 동물들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옆으로 드러눕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

약육강식의 관계에서 서로 먹고 먹혀야 할 천적 관계에 있는 두 짐승은, 한편은 먹기 위해 웅크리고,다른 한편은 먹히지 않기 위해 경계하고 도피하고 도주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들 두 짐승이 함께 나란히 누워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것 역시 메시아가 새롭게 창조하는 세상의 모습을 선명하게 묘사하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경이로운 광경이다. 이러한 내용은 이어지는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라는 표현에서도 계속된다.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앞선 내용은 흉폭한 동물과 약한 동물,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이 천적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함을 열거법을 사용하여 묘사하였다. 이제 본문은 단지 짐승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짐승들과 인간들 사이에도 평화가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특히 인간 가운데 가장 연약한 어린 아이가 초식 동물은 물론, 사자나 표범 같은 사나운 육식 동물들을 몬다는 것은 태초에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인간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1,28)고 축복하신 것이 다시 회복됨을 의미한다.

 

메시아가 통치하는 새 세상이 되면, 과거와 다른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지만,  그것은 전혀 이상하거나 생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파괴된 창조 질서와 섭리가 다시 완벽하게 회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의 '어린 아이'에 해당하는 '나아르 카톤'(naar katon)은 또 다른 측면에서 메시아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어린 아이처럼 연약하면서도 동시에 죄를 모르는 순수한 분으로서, 죄와 무관한 새로운 세계, 죄를 청산하고 새롭게 조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의 지도자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7)

 

11장 6절에서 이어 7절에서도 암소와 곰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그것들의 새끼들도 함께 어울림을 묘사하고 있다. 원문에 보면 '곰'에 해당하는 '도브'(dob)는 여성형, 즉 암곰을 가리킨다. 잠언 17장 12절에서는 매우 사나운 짐승으로 '새끼잃은 암곰'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새끼잃은 암곰은 몹시 민감하여 새끼에게 다른 짐승이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아가 통치하는 왕국에서는 이러한 동물의 본능까지도 변하게 될 것임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는다고 묘사횐다. '여물'(풀)에 해당하는 '테벤'(theben)은 볏단을 말려 작두로 썬 짚을 지칭하는 것으로서(창세24,32), 이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집에서 기르는 소의 먹이이다.

육식을 하는 사자가 그 습성을 버리고 여물을 먹게 되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송곳니도 평범한 어금니로 변해야 하고, 그 체질도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차 메시아가 통치하는 나라에서 이루어질 완벽한 평화가 어떤 것인지를 함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젖먹이가 독사 굴위에서 장난하며'  (8)

 

8절은 젖먹는 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장난하는,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젖먹이의 피부는 유약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이처럼 유약한 아이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독사굴에 손을 넣는 장면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끔찍한 결과만이 예상된다.

 

그러나 본절에서 이사야는 그렇게 해도 전혀 해가 없을 것이라고 서술한다. 이것은 메시아가 통치하는 평화의 나라에서는 해를 받는 일이 전혀 없을 것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장난하며'에 해당하는 '웨쉬아샤으'(weshyashah)의 원형 '샤아으'(shaah)는  어린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즐겁게 노는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이다(이사66,12). 이것은 세말에 이루어질 메시아 왕국의 도래에 따른 놀라운 변화, 제한없고 완전한 평화의 구현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선명하게 확증하고 있다.

 

한편, 이처럼 젖먹이, 젖뗀 아이가 아무런 염려도 없이 독사굴에 손을 넣고 장난하는 이러한 일은 독사의 이빨이 빠지고, 그 독이 완전히 제거된 것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독사의 이빨이나 독은 악의 요소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메시아를 통해 구현될 새로운 세계에서는 악의 요소가 자취를 찾을 수 없을만큼 완전히 제거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복음(루카10,21~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아루어졌습니다." (21)

 

루카 복음 10장 21절에서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신다. 여기서 '즐거워하며'에 해당하는 '에갈리아사토'(egalliasato; rejoiced)의 원형 '아갈리아오'(agalliao)는 '높이다'는 뜻을 지닌 '아갈로'(agallo) '껑충껑충 뛰다'의 뜻을 지닌 '할로마이'(hallomai)가 결합된 합성 동사로서 '몹시 기뻐하다', '크게 기뻐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종말론적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와 관련된 기쁨을 표시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크게 즐거워하신 것은 예수님의 열린 영안에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펼쳐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루카 복음 10장 21절과 22절의 말씀 또한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속에서 신적(神的) 통교와 성령의 감동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 준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하느님과 직접 대화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는 표현은 유대인에게 익숙한 구약적 표현으로서, 창세기 14장 19절과 22절에서 비롯되는데, 무엇보다도 온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위엄을 보여주는 호칭이다.

또한 '아버지'에 해당하는 '파테르'(pater)는 아람어 '압바'(abba)에 해당하는데, 여기서는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간의 부자 관계를 잘 보여주는 매우 친근한 호칭인 것이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여기서 '이것을'로 번역된 '타우타'(tauta)는 가까운 사물이나 내용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 '후토스'(hutos)의 복수형으로서 '이것들'(these things)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즉 그가 베푼 기적들과 말씀의 선포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 나라의 복음 및 일흔 두 제자들이 체험적으로 터득한 것들 모두 다 가리킬 것이다(루카10,9.11절).

 

하느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음을 대조법을 통해 매우 선명하게 나타낸다. 

'지혜롭다는'으로 번역된 '소폰'(sophon; wise)은 '지혜있는'을 뜻하는'소포스'(sophos)에서 비롯되었고, '슬기롭다는'으로 번역된 '쉬네톤'(syneton;prudent)는 '지식있는', '이해하는'(마태11,25; 사도13,7)을 뜻하는 '쉬네토스'(synetos)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지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지식도 있는 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들은 율법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겼던 당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들은 공교롭게도 자신이 가진 지혜와 지식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느님의 계시, 곧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루카11,42~52).

 

그렇다면,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과 대조되는 '철부지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철부지들'이라고 번역된 '네피오이스'(nepiois; little children; babes)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 ,즉 '편견과 아집으로 때묻지 않고 천진무구하여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율법이나 종교 위식을 엄밀히 수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족한 지혜와 보잘것 없는 지식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루카14,13.21.24).

이 구절은 전통적 유대 사상인 지혜로운 현자들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는다는 생각을 완전히 뒤엎는 역설적인 말씀이다.

 

교만과 아집으로 가득 차 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하느님의 나라가 숨겨진 반면에, 영적으로 주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했던 세리와 죄인, 가난한 이들, 병자들, 소경들과 장애인들(루카14,21)에게는 계시로 나타나졌음을 밝혀 주고 있다.

이 구절은 하느님의 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마음을 갖지 아니하면,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마태18,3.4)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 상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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