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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 / '에파타(열려라)‘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02 조회수1,405 추천수0 반대(0) 신고

도란도란 2020.12.02..

(공동번역성서)

'에파타(열려라)‘

 

성경은, 이 세상 사람들이 산 자라고 부르는 자들을, ‘죽은 자라 그러고, 이 세상이 죽었다고 판단하는 자들을, 산 자라고 부르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경이, ‘산 자에 대해서, 생명이 있는 자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하고 있는지 창세기부터 출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2:7) 7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여기서 숨(생령)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가, ‘하이 네페쉬 하야예요. 중간에 아담이란 단어가 있지만, ‘하이 네페쉬 하야 아담!’ 그게 살아 있는 사람,’ 그걸 산 자라고 부릅니다. 거기에 쓰인 하이라는 단어는, ‘살아 있는이란 뜻도 있자만, ‘흐르는, 군대이런 뜻도 있어요. 그런데 에제키엘서에 보면 마른 뼈에서 살아난 자들을, ‘군대라고 부르는 거요. 산 자라고 부른 거요.

군대라는 말은, 이제 살아났으니 어디 가서 싸우라는 뜻이 아녜요. 살았다는 말예요. 그리고 하야는 동사인데, ‘하야동사의 명사형이 야훼예요. ‘야훼, 우리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세 이름 중 하나예요. 야훼,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구원을 받으시는 하느님, ‘야훼예요. 성도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로 옷을 입게 된다는 사실이, 여기에 이미 암시(暗示)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산 자의 이름이 하이 네페쉬 하야예요.

창세기 1장에는, ‘엘로힘이라는 하느님의 이름이 나오고, 2장과 3장에는 야훼 엘로힘,’ 엘로힘 야훼라는 이름이 나와요. 그리고 뒤에는 그냥, ‘야훼란 이름만 나옵니다. 다 달라요. 하느님께서 아파르, 즉 티끌, dust’에 불과한 어떤 존재를, 하느님과 방불한 존재로 만드실 것이라는 언약이, 그 이름들 속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산 자를 하이 네페쉬 야훼 하야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죄와 구원이라는 그런 도구를 사용해서 설명하시는 게, 이 역사이며, 성경인 거예요. 그렇다고 그 이름들이 곧 하느님의 실체는 아닙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느님에게 이름이 왜 필요해요? 이름이라는 건, 나를 다른 사람과 구분하고, 나를 설명하는 기능을 가진 게 이름이에요. 만약 온 세상에, 존재가 나 밖에 없으면, 이름이 왜 필요해요? 나는 그냥 면 돼요.

그런데 창세기 이전에는 하느님 홀로 계셨잖아요? 그 분의 이름은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 분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건, 하느님께서 어떤 존재들을 창조하신다는 것이고, 그 이름으로 다른 존재들과의 구별을, 의도하고 계신다는 거고, 또 다른 존재들에게 당신을 설명하시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이름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감지조차 할 수 없는, 진짜 그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설명용으로 제시된 이름일 뿐인 거란 말예요. 그래서 창세기 11절에 주어가 없는 거예요. 창세기 11절 보세요.

(창세기 1:1) 1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창조) 내셨다.

한글성경에는 마치 이 구절의 주어가, ‘하느님, 엘로힘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서의 엘로힘, 남성 복수입니다. 그런데 지어(창조) 내셨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 ‘바라라는 단어는 단수 동사예요. 그러니 이 문장의 주어는, 단수로 존재하는 어떤 분인 거예요. 엘로힘은 주어가 될 수 없어요.

이 문장을 히브리 원어에 맞게 직역을 하면, 숨어 있는 주어, 보이지 않는 어떤 분, 진짜 계신데 요한이 감지할 수 없는 걸, ‘()’라는 글자로 표현한다고 했죠? 감지할 수 없는 건 없는 거예요. 그 보이지 않는 어떤 분! 숨어 있는 주어가 엘로힘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하늘들이에요. 거기 쌍수예요. 하늘들과 땅을 지어(창조)내셨다예요. 직역을 하면!

이 말은 보이지 않는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는 그 분을 뭐라고 불러야 될 줄 몰라요. 그 분께서, 피조물에게 설명용으로 주어질, ‘엘로힘 하느님으로 하늘과 땅이라는 형태 속에 창조하셨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느님이라는 그 분! ‘없음이라는 그 분은, ‘라는 그 분! 그러나 진짜 계신 그 분은, 유한에게 설명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설명용 하느님, ‘엘로힘이 하늘과 땅이라는 것으로, 天地라는 것으로 창조했다는 그 말은, ‘하늘과 땅! 천지가, 그 하느님을 내용을 담고, 모형으로 창조가 되었다는 그런 말이에요.

하느님께서 엘로힘이라는 하느님을 창조했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 설명용 하느님이신, 엘로힘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해, 하늘과 땅으로 시작을 하셨다는 거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유한에게는 절대 포착이 안 돼요. 포착할 수 있는 그런 어떤, 엘로힘이라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하늘과 땅으로 주시는 거란 말예요.

 

한처음,(太初)’이라고 번역이 된, 베레쉬트.’ 성경의 첫 단어가 베레쉬트예요. ‘太初.’ 그 베레쉬트는 파자를 하면, 히브리어에는 원래 자음 밖에 없잖아요? 베이트, 이라는 뜻이에요. 성전이라는 뜻이에요. 문자에는 다 뜻이 있거든요. 빌딩이 거기서 나온 거예요. , 성전. 이게 두 번째 글자예요. 레쉬이게 시작, 머리예요. 그리고 알레프, 하느님! 사람! !’ 이런 뜻이거든요. 그래서 소를 성경이 많이 재료, 소재로 써서 설명하는 거요. 그리고 이게 분석, 되새김.’ 요드편 손이에요. 손으로 펴서 이렇게 주다.’ 그리고 타우가 맨 마지막 자인데, 완성의 표거든요.

그래서 히브리어는, 이 맨 처음 알레프부터 타우까지. 전부 이렇게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완성으로 끝나요. 글자 자체가! 그러니 어떻게 하느님을 안 믿어요? 히브리어는, 성경을 글자 하나하나를 파자(破字)하잖아요? 그 글자 하나하나가 다 복음(福音)이에요. 은혜고. 그리고 그 문장이 복음이고, 성경 전체가 또 다 은혜예요. 복음이에요. 그런데 이 자연이 그걸 그대로 담고 있네!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님이 안 계시다고 할 수 있어요? 몰라서 그런 거지.

그러니까 이 문장을, 히브리 원어에 맞게 그대로 직역을 하면, 이런 거죠. ‘보이지 않는 어떤 분! 그러니까 성전의 시작, 그 머리이신, 그 하느님이, 그 하느님을 잘 설명하므로, 시간 안의 존재들에게, 손을 펴서, 넘겨주는, 완성의 표이게 뭐예요? 성경이잖아요? 이게. 그리고 그게 역사예요. 그래서 이걸 천지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베레쉬트는 그 자체가 성경이고, 그것 자체가 천지이며, 역사예요. 그래서 성경이 그 단어로 시작해서, 그 단어를 하나하나 풀어주는 게 성경이에요.

그런데 보이지 않는 성전이신 하느님은, 이 땅에 보이는 성전을, 이건 다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라고! 그 역할을, 하늘과 땅이라는 현상계가 담당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그걸 그 안에 설명되어 있는 하느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하느님을, ‘엘로힘이라고 하는 거고, 진짜 그 내용이신 하느님은 몰라요. 이름이 원래 없는 분이니까!

자 그런 걸 다 축약한 게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성막이잖아요? 성전이고! 그 땅이라는 단어 에레츠도 파자를 하면, ‘하느님, 시작, 이에요. , 그물.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건지기 위해 그물을 던지기 시작한 곳이 땅이에요. 세상! 여기서 건져 올려가는 거요. 땅이라는 그물에, 모든 존재가 다 걸려 있어요. 그런데 주인이, 그 그물에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갈라서, 나쁜 고기는, 타는 불 속으로 던지는 것! 이게 예수님의 그물 비유입니다. 다 그물에 걸려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물을 던지면 이 바다를 향해서. 바다는 위엣 물, 아랫물 중에 아랫물을 모형, 상징하는 거예요. 바다 속 물고기들은, 거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도망가죠? 저는 고기들이 그게 뭔 줄 알고 도망가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가요. 고기들이 그게 뭔지 알까요? 그런데 도망가요. 기가 막히게! 그물을 던지면!

인간들은 그 진리의 그물을 그렇게 싫어한다는 걸 보여주는 거요. 그게 죄인들의 속성(屬性)이에요. 물고기들의 동력은, 꼬리에서 나오는 걸 잘 아실 거예요. 그래서 장어 같은 것도 꼬리를 그렇게 먹으려고, 이 웬수들이 말이에요. 바다, 즉 아랫물에 속한 자들은, 전부 꼬리의 힘으로 살아요. 그걸 ()’이라 그래요. 그 꼬리의 힘이 좋을수록 잘 피해 도망가거든요. 진리의 그물을!

반면에 바다 속에서는, 물고기의 머리가 별로 쓸모가 없어요. 물고기가, 그물을 피해 도망가는데, 물고기의 머리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냥 맛만 있어요. 어두일미! 꼬리가 발달하지 않고 머리만 큰 고기는, 그물을 던지면 백발백중 다 걸려요. 그러나 그렇게 낚여야 사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을 구원하는 걸, 사람을 낚는다 그러는 거예요. 거기서 나와야 된다니까요. 아랫물에서!

그걸 빗대어서 성경이,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라!’는 거예요. 뭐 어디 가서 핫바리 이런 거 하지 말라는 게 아녜요. 고지론을 주장하는 놈들이 꼭 요걸 갖다 써 먹죠.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마라!’ 머리는 누구예요? 예수예요. 예수와 연합된 자가 되어야지. 너희들이 바닷물, 아랫물, 세상에서, 꼬리 너희들이 힘으로, 도망다니다 보면, 진리에 절대 못 걸린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러한 아랫물! 그 땅 속의 부정한 물고기들! 성경에서 물고기는 부정한 거예요. 난태생, 그건 다산(多産), ‘디그라는 단어가 다산! 알로 많이 낳는, 물고기가 알을 얼마나 많이 낳는지 보셨죠? 그 생육과 번성은,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완성하시는 건데, 우리가, 우리의 힘, 인간의 힘으로 자랑하겠다고 생육 번성하는 걸, ‘다그라 그래요. 그게 죄거든요. 그래서 난태생(卵胎生)은 부정하다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모든 짐승들이 다 난태생이에요. 사실은 엄마가 애를 태()속에 갖고 있다가 양수가 터지죠. 그게 알이 깨지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모든 인간이 다 부정하다 그러는 거예요. 그 난태성들은 다시 나야 되는 걸, ‘거듭 난다라고 하는 거란 말예요. 박혁거세, 주몽, 김수로, 이들만 알에서 난 게 아니라, 우리 다 알에서 나는 거예요. 난태생이에요. 그러면 부정한 거란 말예요.

그런 물고기들! 부정한 것들이 바다에서, 저주의 바다에서, 꼬리의 힘을 빼앗기고, 진리의 그물에 걸리기 위해서는, 예수가 그들의 머리가 되어야, 꼬리가 꼬리의 힘이 빠지는 거예요. 그래서 진리이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한 거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내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거예요. 교회가 완성이 되어야 예수가 머리로 앉을 수 있는데, 아직 십자가 이전이니까, 예수님이 머리로 앉을 곳이 없었다는 그런 말예요. 집도 절도 없었다는 게 아니라.

여러분 그 당시에는, 웬만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중산층 이상이었어요. 예수님도 꽤 잘 사셨다니까요. 여러분이 괜히 미루어 추측해서 그렇지. 제자들도 다 잘 살았어요. 그래서 부자 이야기할 때 제자들이 그러면 우리도 못 가나? 그런 거예요. 여러분 조그만 조각배에서 그물을 던질 수 있어요? 없어요. 그들이 그물을 던졌다는 건, 선주였다는 거요. 그 때 당시의 선주는, 굉장한 부자들이었어요. 그런데 그 배를 버렸다고요? 천만의 말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자, 베드로가 고기나 잡으러 가자그랬어요. 그 배 안 버리고 짱 박아 놓았다가, 그거 다시 가지고 고기 잡으러 간 거예요. 그들은 부자였어요. 뭘 알아야 설교를 하죠. 그렇게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란 말예요.

그리스도 예수로 축약되는 하느님의 언약의 말씀을, 진리로, 머리로, 갖고 있는 자만, 그 하느님의 그물에 걸리는 거죠. 하느님께서 말씀을 주어야 걸리는 거요. 여기에서 말씀이 던져지면 그걸 이해하는 자가, 예수를 머리로 갖는 거고, 그들이 아들이 되는 거고, 진리의 그물에 걸리는 거란 말예요. 그걸 구원받았다, 살았다 그래요.

저주의 바다에서는 꼬리로 다녀서 산 것 같지만, 그건 죽은 거예요. ? 그건 호흡이 안 돼요. 물고기는 기체 교환을 하지 호흡을 안 한다니까요. 그런데 성경에서 산 자는 전부 다 숨을 쉰다 그래요. 호흡한다 그래요. 그런데 물고기들 중에 호흡하는 물고기가 있는데, 고래, 돌고래. 그래서 포유류라 그러죠. 물고기, 어류 아녜요. 호흡을 하는 건, 땅의 것이라는 거고, 그걸 숨을 받았다, 생기를 받았다, 성령을 받았다, 말씀을 받았다, 그들이 산 것이다, 바다의 것 아니다, 이런 뜻이란 말예요.

그렇게 호흡, 생기, , 콧김, 말씀, 진리가 들어가야 산 자가 되는 거요. 생명이 되는 거요. 그들이 아랫물인 바다에서 나온 자란 뜻이에요. 거길 애굽이라고도 그러고, 소돔과 고모라라고도 그러고, 세상이라고도 그래요. 거기서 나와야 돼요. 그래야 숨을 쉬어요. 그런데 물고기는 자력으로 숨을 쉴 수가 없으니까, 기체 교환만 하니까, 하느님이, 누군가가, 숨을 줘야 돼요. 이게 천국 백성의 창조 메카니즘이라니까요. 그런데 저희들의 능력으로 살았다고 하는 놈들은 뭐냐고요? 도대체가!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뭐냐고요. 자 거기서 못 나온 자들을 바다의 물고기 아랫물 속의 부정한 것. ‘네페쉬, 죽은 자라고 하는 거요. 죽은 자예요.

(에제키엘37,9-10) 야훼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너 사람아,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 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10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숨이 불어 왔다. 그러자 모두들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

죽은 뼈! 마른 뼈! ‘더스트, 아파르예요. 가망 없는 것! 거기에 네페쉬에 생기, ‘르와흐’, 생기, 호흡, , 바람, 다 똑같은 말이에요. 그게 들어가니까 그 죽은 뼈가 살아나는데, 군대가 돼요. 생령의 그 하야가 되는 거요. 하이가 되는 거죠. 그런데 예레미야는, 불어넣어주는 그 콧김, 생기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레미야애가 4:20) 20 야훼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 우리의 숨결, 만국 가운데서 그 그늘 아래 깃들어 살리라 했는데 그마저 원수들의 함정에 빠져 잡히고 말았구나.

숨결을 뭐라 그래요? 야훼의 기름 부으신 자, 이 단어가 메시야예요. 이 단어가 메시야, 기름 부은 받은 자! 이 숨결은 메시야, 말씀이신 예수! ‘아크, 르와흐코의 성령! 코의 호흡! 코의 생기! 그거 막으면 죽어요. 그래서 생명이 코에 있다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거죠.

메시야! 그리스도! 그게 크리스토스! 그리스도는 그 오미크론, 시그마 고게 붙으면 무조건 존재거든요. 기름 부음을 받은 어떤 것들인데, 그게 존재가 된 게, ‘크리스토스예요. 그리스도인! 여러분도 기름 부음 받은 자, 그래서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그 숨, 호흡을 불어 넣어 살릴 수 있는 존재가 된 거요. 바로 그 그리스도! 생기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제자들에게 부어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22-23) 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성령)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 , 성령을 불어 넣으신 다음에, 그 호흡을 받아 산 자들에게 뭔가를 지시를 하는데, ‘가서 죄를 용서()하는 일을 하래요. 용서해 주는 일을 하래요. 생명을 주는 일을 하래요. 숨을 불어 넣으라는 말이잖아요? 그게!

심지어 예수님은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거라 그랬죠, ? 그 때는 성령이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예수님 때는 예수님의 말, 진리를 아무도 못 알아들었잖아요? 그런데 우리 때는,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면 알아듣는 이들이 있다니까요. 그걸 더 큰 일이라고 하는 거요. 여기서 하다라고 번역이 된 말이, ‘아피헤미’ ‘용서하다, 없애버리다라는 뜻이에요. ‘없애버리다!’ 죄를 없애버리는 걸, 용서라 그래요.

여러분 죄가 뭡니까? 하나인 진리를, 선과 악이라는 걸로 쪼개서, 이 세상의 것으로 오도(誤導)하는 걸, 죄라고 해요. 한 마디로 말이 없는 상태’, ‘진리가 없는 상태이게 나하쉬뱀이라는 단어가 그 말이거든요. 그래서 뱀이 나오는 거예요. 진리를 진리로 못 알아먹고, 엉뚱한 과녁을 쏘는 상태! 이걸 죄라 그래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호흡을 받아서, 생명을 받아 산 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산 자. 살아나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용서라는 건, 단순히 윤리, 도덕적인 잘못을 사해주라는 말이 아니겠죠? 자기들이 무슨 권리로, 무슨 자격으로 그걸 해요? 용서라는 건, 그 죄를 없애버린다는 뜻인데, 우리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니까요. 그럴 자격도 없고!

용서는, 네가 나에게 해코지해서, 내가 기분 나빠진 거, 이제 그렇게 기분 안 나쁘도록 노력해 볼게. 우리는 이걸 용서라고 생각해요. 속으로는 그냥 꽁하고 있는데, 겉으로만 나 기분 안 나뻐! 용서했어!’ 이런다니까요. 그건 불교인들도, 힌두교인들도, 이스람교인들도 다 하는 거예요. 꼭 성령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그것 자체를 없음으로 없애버리는 걸 말해요. 그런데 이미 벌어진 걸 없애버릴 수는 없는 것 아녜요? 방법이 없나요? 있어요. 죄란 법에 의해 규정되는 거예요. 따라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길은, 이미 있던 그것을, 아예 없던 것으로 돌려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건 이미 벌어졌기 때문에, 법을 없애버리면 돼요. 그러면 죄가 없어져요. 그걸 용서라 그래요. 선과 악의 구조 자체를 파괴해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죄가 용서해져요. 그러면 그 죄의 열매인 죽음이 물러가죠. 죽음은 죄의 삯이니까. 그래서 그걸 산 자라고 부르고, 그걸 전해주어서, 그를 용서하는 자를 살리는 자, 그리스도라고 하는 거예요. 콧김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진리가 되면. 그런데 그 일이 언제 일어났어요? 그리스도가 호흡을, 숨을 성령으로 불어넣자, 말씀을, 진리를 불어넣자, 그 일이 일어나는 거요.

, 영은 요한복음에서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그렀으니까, 거기에서의 영은 성령이에요. 중성으로 그려져 있으니까. 하느님의 말씀, 그 진리, 그 진리를 올바로 깨닫는 순간, 그는 선과 악의 법에서 자유롭게 풀려나게 되고, 그 즉시 용서를 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며, 하느님은 하늘에서 고것만 인정해 준다는 뜻이에요. ‘, 콧김, 메샤흐, 그 말씀, 진리에 의해서, 선과 악이라는 법에서 벗어나, 거기에서 용서를 받고 용서를 전해 주는 고것만, 하느님이 인정한다는 거요.

그런데 그 용서는, 나에게서 제일 먼저 일어나야 돼요. 나를 용서할 수 없는 이들은, 절대 를 용서할 수 없어요. ? 그 용서라는 진리를 전해줄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용서받지 못하면! 나에게 용서받지 못하면!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세요라고 기도하라 그런 거예요.

이 말은 일차적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 이게 율법이잖아요? 그래서 율법에 의하면 살인한 자는 반드시 돌로 때려 죽여야 돼요. 그런데 그 구약이 파괴된 때가 은혜의 신약 시대잖아요? ‘그 법에 의해 일어났던 심판이 이제는 은혜로 용서되는 시대가 되었다라는 선언이죠. 그래서 우리를 살인한 자도 은혜로 용서할 수 있어요. 구약에서는 죽여야 돼요. 이게 선이에요. 구약에서는! 율법에 의해 죽여야 된다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죄지은 자를 그렇게 은혜로 용서해 주는 시대가 된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용서받았군요 라고 아는 거! 그런데 그 안에는 그보다 더 깊은 진리가 복선으로 숨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당신을 우리로 묶죠?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가 되신 형국이에요 그러니까 이 주의기도문은, 그리스도 예수와 제자들이, ‘우리라는 한 몸으로 묶이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현실을 설명하는 거란 말예요.

그렇게 예수가 성도의 머리로, 호흡으로, 생기로, 콧김으로, 우리로 연합이 되게 되면, 죄인인 육신이 그리스도로 옷 입혀지는 거잖아요? 그렇게 소멸되어 버리는 거란 말입니다. 예수로 우리가 옷 입으면. 그래서 속옷, 겉옷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겉옷으로 우리에게 입혀주어야. 그래서 속옷 이야기가 나오면 겉옷 이야기가 나오는 건데, 그건 다음에 이야기해 줄게요.

그렇게 하느님의 언약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되면, 그를 묶던 법이 사라지고, 모든 더러운 것이, ‘없음이 되는 거요. 그 상태를 용서(容恕)’라고 하는 거요. 법이 없어진 상태!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 그 진리의 현실이 어떻게 이해되어질 수 있어요?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만 이해되어지기 때문에, 깨달아지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듣는 그 자만이, 용서와 관계있는 자가 돼요. 그걸 생기! 호흡! ! 이런 걸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에요.

이런 겁니다. 하느님의 언약도 모르고, 우리의 처음 자리 인식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죽은 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은혜로 진리를 복음으로 받아요. 그 전에는, 선과 악의 율법 구조 속에서, 자신의 행위나 됨됨이에 의해, 자신을 평가하잖아요? 그런데 자기 자신은 자기를 누구보다 잘 알아요. 아무리 사람들에게 착한 척, 순결한 척 해도, 자기는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안다니까요. 그래서 절대 자기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런데 진리가 깨달아졌어요. 내게서 법이 사라졌구나!’라는 진리가 이해되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어버리셨기 때문에 나를 정죄할 법이 없어져버렸어요.

신호등이 있을 때는, 신호위반이 위법이 되지만, 신호등 자체가 없어져버리면, 신호위반이라는 죄 자체가 없는 것이 되는 것처럼, 그런 상태가 된 거예요. 그 때 나는 과감히, 나를 넌 자유야!’하고 용서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는 거요. 바로 그 깨달음이 없는 자는, 하늘에서 용서한 자가 아니다이 세상에서 용서해라! 그래야 하늘의 하느님도 널 사()하신다.’ 이야기를 하는 거요. ‘이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여, 다 풀어!’ 그러니까 하늘에서 푼 자는 이 땅에서 반드시 풀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시라니까요. 아니 용서가 됐다니까요.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고 사망과 상관없이 된 나를 용서한 뒤에, 그 진리를 다른 이에게 전했을 때, 그 사람이 , 그런 거야? 그럼 나도 용서 받은 거네!’하고 살아날 때, 죄와 관계없이 되어야, 사망과 관계없는 거고, 죄의 삯이니까! 그래야 그걸 산 자라고 하니까. 그렇게 살아날 때 우리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게 되는 거예요. 내가 무슨 자격이나 권세가 있어서가 아니라. 물론 말씀에 권세는 있지만!

그렇게 해서 죄라는 것과 상관이 없어진, 사망과 상관없는 성도가 탄생되는 거고, 그들이 생명 있는 자, 산 자가 되는 거요. 그러니 예수보다 더 큰 일을 하고 있는 산 자들인 거죠. 이게 바로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가 담고 있는 내용이에요. 아니 더 나아가서, 그들은 살려주는 영! 살려주는 말! 진리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일을 하고 잇는 자들이 된 거란 말예요. 우리는 먼지지만,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느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용하신다는 그것에 감동하는 거예요.

, 그렇다면 이걸 아는 자들에게 있어서, 인간 세상이 정의해 놓은 죄라는 것과 의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이 진리를 알게 됐어요. 악과 선이라는 게, 이 진리를 안 자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요? 거짓과 진실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어차피 모든 것이, 보이는 모든 게, 보이지 않는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하늘과 땅! 위의 것과 아랫것이라면, 그것 자체가 뭐 그리 가치가 있는 거냔 말예요. 선악의 법에 묶여 있는 자들에게는 그게 대단히 큰 거지만. 그러나 진리인 하나에서 하나로 묶어내는 자들에게, 그게 무슨 가치가 있는 거냐고요? 그러나 진리 안에서는, 선과 악이 하나고, 거짓과 진실이 하나이며, 더러움과 깨끗함이 하나고, 어둠과 빛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거요. 한 마디로 진리는, 현상계에서 벗어나버리는 힘을 갖고 있단 말에요. 그래서 용서가 되는 거예요. 아무 것도 아닌 게 되는 거예요.

이 세상 모든 건 다 뭐예요? 가짜. 그래서 환상이라 그래요. 잠깐 보였다가 없어지니까 환상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은 영원한 게 아닐, 여기를 환상이라 그러는 거요. 그걸 꿈이라 그러는 거예요.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보이지 않는 진짜를 설명하기 위한 모형으로서의 가짜니까. 따라서 이 현상계의 모든 건 다 가짜예요.

심지어 여러분이 신주 단지 모시듯이 심장 가까운 곳에 대고 다니는 성경도 가짜예요. 앞 뒤 다 끊어서 또 요거만 이야기하면 안 돼요.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이 진짜예요. 그걸 하나님으로, 진리로, 못 풀면, 그게 가짜라니까요. 그냥 그건 로고스라니까요. 그건 그릇이에요. 성경 속에서 그 진짜를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전부 가짜를 읽고 있는 거고, 가짜를 연구하고 있는 거고, 가짜를 신앙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제 참과 거짓을 한 번 살펴보자고요. 참은 뭐예요? 성경에서 참은, 항상 알레떼이아인데, 그 단어가 진리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참은 진리 밖에 없어요. 진리 아닌 모든 건 다 거짓이에요. 따라서 성경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 성경은 표피적으로만 보는 성경은 전부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그 거짓말을 전하는 자들을, 거짓 예언자! 거짓 사도라고 하는 거고,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거예요.

진짜 말, 진리를 설명하는 자들을 그리스도, 크리스토스라고 하는 거고,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와 반대되는 게 아니라, 비슷하게 흉내 내는 게 적그리스도예요. 앤타이크라이스트(AntiChrist). 그러면 이제 가짜와 거짓은 필요 없는 거예요? 아녜요. 우리는 유한에 있기 때문에, 가짜와 거짓이 없으면 진짜를 못 알아먹어요. 그래서 가짜들이 있는 거예요. 여기에!

하느님은 그렇게 현상계에 가짜와 거짓을 사용해서 보이지 않는 진리를 설명하는 거니까! 가짜 성전을 모형으로 주시고, 그런데 그 안에는 하느님이라는 진짜 성전이 메시지로 들어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하느님은 이건 가짜다, 그러고 부수라 그래요. 그런데 그 안에서 하느님을, 진리를 읽어낸 사람들이 있었다니까요. 그들에겐 그건 진짜라고요.

 생명나무 열매를 설명하기 위해, 선악과가 필요하고, 진짜 성전을 설명하기 위해, 옛 성전, 율법이라는 성전이 필요한 거고. 진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구약의 율법, 모세 오경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렇다면 그게 다 악이며 가짜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로마서에서의 바오로의 진술이란 말예요. ‘율법이 악하냐?’ 금방 5절까지는 율법 가지고는 다 죽어! 그래놓고 율법이 악하냐?’ 그러잖아요? 그 말이에요.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걸 성경이 죄라고 하고 악이라고 하지만 그건 진짜 선을 모형 하는 그릇이란 말예요. 따라서 그것이 진리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다면, 그것 자체는 악이 될 수 없는 거란 말예요.

 

히브리어 첫 글자인 알레프, ‘하느님이라는 뜻과 라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랬죠? 그리고 그 문자는 사람이란 뜻도 가진 문자예요. 거기에는 아주 심오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그건 나중에 설명해 드리기로 하고, 지금은 하느님과 소애 대한 이야기만 해요. 아무튼 성경에는 소와 그 멍에의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거예요.

소는 가짜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이 진짜인데, 인간들이 하느님을 소로만 보면, 멸망이다를 설명해 주는 거란 말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때때로 소로도 얘기하는 거예요. 벧세메스로 법궤를 운반하던 두 마리의 소, 하나는 하느님,’ 하나는 예요. 교회란 말예요. 말씀을 운반하고 하느님과 함게 제물이 되어 죽어버리는, 그리고 말씀만 남는 이야기! 그게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두 소의 이야기란 말예요.

그리고 내 멍에를 메라.’ 그리고 금송아지, 금소예요. 송아지 아녜요. 금 소 이야기. 이런 것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 거란 말입니다. 소는 하느님을 표피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지만, 그 자체가 하느님이 아닌 건데, 율법주의 하에서는, 하느님이 그 표피적인, 겉모습인 소로만 보인다는 거요. 그걸 상징적인 사건으로 그려놓은 게 금소사건이에요. 출애굽 광야에서!

그렇게 소라는 모형 안에 담긴,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신을 그저 소로만 인식하는 걸, 종교라 그래요. 그래서 고등종교에, 소를 그렇게 숭상하는 종교가 많은 거예요. 절간의 법당 외벽에 보면 소 그림이 많죠? ‘심우도예요. 그게요! 진리를 찾아가는 열 가지 단계! 진리를 소로 표현한 거요. 힌두교에서도, 소를 숭배하는 게 괜히 그러는 게 아녜요.

진리는 원래 하느님 말씀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그걸 다른 종교들이, 표피적으로 이해를 하여, 잘못 오해하여 종교를 만든 거예요. 그래서 모든 종교의 경전이, 성경과 싱크로율이 아주 높다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옛 선비들이 소를 타고 유유히 여행을 하는 기우행을 즐겨했고, 그런 그림이 많은 거예요. 옛날 그림에 보면! 소를 타고 다니는 그림이 있지 말 타고 다니는 그림은 없어요.

노자도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전파하려 하다가 대적들에게 막혀서 안 되겠다고 싶었을 때, 소타고 어디로 사라졌습니다. 장자는 항상 제자들에게, ‘소처럼 되라고 무위자연의 도를 설명했어요. ! 그게 고대시대 때부터, 사람들은 소와 코끼리가, 인도에서는 이 코끼리가 나오면서, 소가 되고, 소가 코끼라와 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항상 진리를 모형한단 말예요.

그 소와 코끼리를, 진리를 설명하는 짐승이라고 생각해서, 소와 코끼리를 숭앙하거나, 숭배하는 일을 많이 했어요. 특히 힌두교에서는 소와 코끼를 동시에 진리로 섬기면서,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적들을, 소와 코끼리의 그림으로 그려 놓기도 해요. 그들의 서책을 보면,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를 소들이 하고 다니는 걸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요즈음도 소에게 기도합니다. ‘병 고쳐주세요! 복 주세요!’ 이렇게. 하느님의 모형이었다니까요. 그게.

그런데 성경을 그렇게 소로만 보는 인간들이, 여전히 하느님을 소 취급하고 있는 거요. 오늘날 교회가! 99% 이상이 다! 법당에 그려진 심우도, 그 수준으로 밖에 이해를 안 해요. 하느님을. 힌두교인들 보고 저놈들은 어떻게 소를 믿어? 이럴 자격이 없다니까요. 오늘날의 교회가! 우리는, 여러분은 어때요?

상상한다는 말이 코끼리 상()자잖아요? 석가모니가 ,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하지 마!’ 다리만 만지면 기둥 같고, 배만 만지면 천장 같고, 꼬리만 만지면 뱀 같고, 그거 진리 아녜요. 그게 다 모여져야 진리란다. 그래서 상상이란 말을 쓴 거예요. 코끼리를 생각하라! 그런데 진리가 뭔지 모르니까, 진짜 엉뚱한 상상만 하는 거라. 소가 뭔지를 생각하라. 그게 성경을 묵상하라 말예요. 엉뚱한 거 상상해서, 저희들이 하느님을 만들어내고 이런 거 하지 말란 말예요. 지금 전부 소 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잖아요?

이스라엘은 출애굽 당시에 세상을 대표하고 상징하던 그 애굽 18왕조의 주신(主神), ‘하돌이라는 암소와 아비스라는 황소였어요. 그 애굽의 주신이! 그런데 하느님이 거기서 꺼집어내서, 이스라엘에게 너희들이 믿는 하느님은 뭐니? 한 번 만들어 보랬더니, 걔네들도 소를 만들어 내더라는 거예요. 애굽과 너희들은 똑같은 놈들이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거기서! 애굽도 소고, 너희들도 소! 나는 그냥 어디를 가든 음메 음메 구나. 를 위한 하느님 그게 풍요의 신이거든요.

그렇게 소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 진리이신 하느님을 설명하는 모형이에요. 그건 심판의 대상이며, 저주의 대상이에요. 그 소는 죽어야 돼요. 그래서 율법의 돌 판이 그 앞에서 깨어진 거예요. 엘리사가 진리를 쫓아갈 때 죽여 버리고, 태워버리고, 먹어버리고 간 거예요. 그래서 소는 가짜예요. 그러나 진짜인 하느님을 담고 있는 그릇이에요. 그래서 소도 필요해요. 그러나 그 소는 제물로 죽는 소란 말예요. 그리고 하느님으로 다시 살아야 돼요. 반드시 진리 안에서.

, 그럼 보잔 말예요. 힌두교인들이 보는 소는 그저 소지만, 저는 그 속에서 하느님을 읽습니다. 여러분도 그 소를 보면서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을 읽어요. 진리가 뭔지 이제 알았으니까. 우리는 그 소 속에서, 하느님을 상상한단 말예요. 진짜! 그렇다면 그 가짜인 소가 나쁜 겁니까? 아니란 말예요. 있어야 된다 말예요. 세상에 지금 있는 거예요. 지금 이 가짜가!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우상이요, 가짜요, 악한 거요, 마귀가 될 수 있지만, 진리를 아는 자들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모형일 뿐이에요. 그래서 그 둘은 하나라니깐요. 그래서 그걸 용서(容恕)라고 하는 거예요.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닌 게 되는 거라니까. 진리를 설명하는, 모형 하는 어떤 것이니까. 그래서 나에게서 선과 악이 다 수용(受容)이 되는 거요. 그게 선악체계에서 벗어난 거란 말예요. 악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보일 때, 우리는 가난과 부유, 아름다움과 추함, 어둠과 밝음, 이런 것 사이에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나라에 가면, 어떤 얼굴로 태어나도 괜찮아요. 그렇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그 둘로 보지 않을 수 있는 상태를, 하느님나라라 그러고, 그게 진리예요. 그런데 항상 그렇게 둘로 보는 거. 과녁은 여기 하나가 있는데, 항상 둘로 나누어서 이리로 가거라! 저리로 가거라! 선으로 가거라! 악으로 가는 걸 과녁을 벗어나다, ‘하마르티아,’ 그걸 죄라 그래요. 범죄라는 단어도, ‘파라프토마이,’ ‘옆으로 떨어지다, 옆으로 치우치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씨가 길 가에 떨어지면 안 돼요. 길에서 치우쳐 떨어졌다는 거예요. 길이라는 진리에 떨어져야 돼요. ‘아니 그런데 씨가 길 위에 떨어지면 안 되잖아요? 밭에 떨어져야지!’ 그런데 그런다니까요. 길 가에 떨어지면 안 된다 그래요. 그 말은 길에 떨어지라는 얘기예요.

그렇게 선이나 악이나 한 방향으로 치우쳐버리는 게 곧 죄예요. 그들이 어떻게 용서를 알 것이며, 어떻게 자신을 용서할 것이며,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용서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겠어요? 그들이 다 죽은 자들인 거예요.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라! 그거 다 물고기들이에요. 적그리스도들!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아니, 더 욕을 해 주고 싶은데, 내 마음을 잡아 갖고. 적그리스도들이에요. 그렇게 진리는 모든 걸 하나로 아우르는 힘이 있어요. 그걸 자유(自由)라 그러고, 그걸 연합이라 그러고, 그걸 생명이라 그래요. 그래서 하나예요.

그들은 하느님이라는 실체가 없이, 자신들은 존재일 수도 없다는 걸 알아요. ? 하느님이 계시니까. 그래서 우리의 형상, 모양 이런 단어가 나오는 거예요. 달이 해라는 실체를 그리는 것처럼! 하느님이 우리처럼 생겼다는 그런 무식한 소리 하지 말고, 하느님이라는 실체가 없이, 우리는 존재일 수도 없다는 사실도 알지만, 그래서 하느님이 그래서 언제든지 지옥에 흙으로 버리신다 해도 아무런 할 말이 없게 되는 거예요.(그게 지옥이잖아요? 땅이, 흙이 그냥 흙처럼 사는 거.)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진리이신 말씀이 자기에게 들어와서, 자신을 하느님으로 연합시켜내어서, 그리스도인으로 창조해내셨다는 것도 알아요. 그들 자신이 진리가 되어 버린 거죠. 그래서 그들이 가는 곳에 자유가 있고, 그들이 가는 곳이 하느님나라예요. 그래서 진리가 된 성도는 지옥에 안 가는 게 아니라, 여기서 자기 스스로 지옥과 상관없는 자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가 가는 곳에 자유가 있고, 법이 없어졌어요. 자유가 있고, 그가 가는 곳에 선악의 법이 사라져요. 그가 가는 곳에 부유와 가난이라는, 추함과 예쁨이라는, 아름다움이라는, 이런 이중적, 선과 악의 구분이 없어지고, 진리로 모든 게 하나로 아우러지는데, 거기가 왜 안식이 없고 행복이 없고, 기쁨이 없겠느냐고? 우리가 아직 육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걸 풍성히 못 누려서 그렇지!

그 진리가 된 자가 이제 완성이 되어서 그가 가는 곳아 다 하느님나라가 되는 거요. 그래서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지옥에 못 가는 거예요. 관계없는 자가 되는 거라니깐요. 그래서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그 진리를 못 알아먹고, 법에 묶인 상태로, 아무리 착한 일 주렁주렁 매달고 가봐야 여러분은, 그 법 때문에 흙처럼 살게 되는 거요. 지옥이에요.

여러분이 그렇게 그 진리로, 그 법을 깨버리지 못하면, 죽어도 천국에 못 가요. 이 땅에서 여러분을 풀어 주어야 돼요. 용서해야 돼요. 그게 지옥을 깨버리는 거라니까요. 땅에서 묶이면 하늘에서도 묶여요. 아니 이건 뒤집어 말해서, 하늘에서 푼 자는, 이 땅에서 반드시 자기를 풀어주게 되어 있어요. 자유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고요. 그래서 성경이, 하느님나라로 가라고 하지 않고, 하느님나라가 온다 그런 거요. 여러분에게 와야 돼요. 그게 먼저! 어디 저 태양계 밖에 만들어진 곳이 아녜요. 천국은 진리가 깨달아질 때, 그 진리와 함께 그 성도 안으로 침노해 들어오는 거예요. 진리와 하나가 된다는 건 하느님과 함께 한 멍에를 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멍에는 소가 메는 거라 그랬죠? 소는 누굴 상징한다? 하느님. 그 하느님과, 히브리 멍에는 항상 두 마리가 한 멍에를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진 이 멍에는 네가 여기에 끼게 되면 쉽고 가벼워. ? 하느님이 다 하시니까. 그래서 쉽고 가볍다고 하는 거예요. 런데 그건 곧, 나의 이 육적 존재의 가능성을 다 부정하고, 멸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십자가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진 십자가를 멍에라고도 하는 거예요.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 그게 연합이에요. 그렇게 소 두 마리가 한 멍에를 요렇게 지고 있는 모양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단어가, 에이레네라는 단어예요. 원래 문자는 다 상형문자였으니까. 그 단어가 평화, 평안이란 뜻이잖아요? 걸 연합이라 그러고, 혼인잔치라 그러고. 고 상태를 안식, ,화 평안이라 그래요. 그래서 내 멍에로 들어오라 그러는 거예요. 하느님이 자꾸, 내 멍에로 들어오라. 네가 지지마라는 거예요.

그렇게 하느님과의 평화를 전하는 자들을 용서하는 자라고 하는 거고, 하느님과 그들을 중매하는 자라고 하는 거고. 마태복음에서 그들을 복 있다고 하는 거요. 평화롭게 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하느님의 멍에로 여러분을 밀어 넣는 거요. 자꾸! 그들이 복이 있대요. 그들이 이 땅에서 푸는 자들이에요.

이렇게 분명 진리가 된 성도들에게, 맡겨진 역할이 있어요. 죽는 날까지 죄 안 짓고 가는 것! 그건 사기고 거짓말이에요. 맡겨진 역할이 있어요. 진리가 되면 진리를 항기로 뿜어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살린다니까요. 용서한다니까요. 그렇게 용서가 되어 하나가 된 상태를, ‘사랑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하면, 하나가 되는 거요. 성경에도 그 둘의 관계를 하나라고 하고, 그래서 그 관계가 요철이 맞는 거처럼 딱 맞게 되는 거예요. 인간의 신체 구조도 그렇게 되어 있는 거요. 모든 게 진리를 담고 있다니깐요. 그래서 사도가 그 진리의 현실을 자신의 말로 반복해서 전달한 거예요.

(갈라디아서 5:1-4)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2 나 바울로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아무런 이익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3 할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다시 강조합니다. 할례를 받는 사람은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를 지는 것입니다. 4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어졌고 은총에서 벗어났습니다.

이 자유가 바로 생명인 거고, 그리스도인 거고, 진리인 거고, 영인 거고, 말씀인 거예요. 따라서 올바른 진리의 말씀을 깨달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그 호흡을 받은 자들이고, 생명을 얻은 자들인 것이며, 물속에서 나온 자들인 거고, 아랫물에서, 그 말씀을 올바로 전해 주는 이들이, 평화롭게 하는 자고, 용서하는 자들인 거고, 매인 것을 푸는 자들인 것이며, 영을 전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아주 읽기가 쉬워지잖아요? 다 같은 이야기이니까. 그런데 그 말씀의 진리를, ‘로만 전하게 되면, 그게 곧 말은 말인데, 내용을 전달하지 못하고, 소리로만 전하는 거니까, 그걸 방언이라고 그래요. 성경이요. 어떤 목사나 사제님들이 쓴 방언이라는 책 다 엉터리예요. 다 잊어버리세요. 성경이 말하는 건 그런 얘기 아녜요.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그런 게 아녜요. 잘못 된 말! 못 알아듣는 말! 곡해되어진 말! 그걸 설명하기 위해, 그건 비진리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모든 종교에 방언이 있는 거예요. 중들도 똑같이 방언하고요. 힌두교인들도 똑같이 방언합니다. 모든 종교에 다 있어요. 남묘호랑개교에도 있어요. 증산도에도 있어요 그게 하느님의 은사로 주어지는 거면, 그리스도교에만 있어야 돼요. 그런데 절에도 방언이 있고 힌두교에도 있고, 이슬람교에도 있고, 그건 진리가 아닌 모든 것! 그리스도교도 태반이 진리 아닌 걸 전하고 있으니까, 거기에도 방언이 있다니까요. 못 알아듣는 말! 너희들 못 알아듣는구나! 을랄랄라. 그러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그리스도교에도 방언이 있는 거예요. 그 진리가 아닌 모든 건 다 방언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모든 종교에 방언을 심어 놓은 거예요. 하느님이요! 그러나 그 속에, 진리인 자가 캐치해 낼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니까요. 쉽게 말해서, 방언은 껍데기뿐인 말! ‘로고스라고 할 수 있고, 예언(豫言), 그 방언의 내용인 레마를 예언이라 그래요. 포춘텔링(fortune-telling, , 運勢)이 아녜요. 앞에 있는 어떤 일을 얘기해 주는 거! 이거 아니라니깐요. 성경에 나오는 예언은!

따라서 모든 방언(方言), 모든 로고스에는 내용이 반드시 담겨 있어요.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생기! 즉 호흡을 주었다는 건, 내용을 담은 말! 호흡이 말이라면서요?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라 그랬으니까. 호흡, 성령을 줬다는 건, 진짜 참 내용인 진리! 말을 줬다는 뜻이잖아요? 말씀을 줬다는 뜻이잖아요? 그 말씀이라는 자체를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보이지 않는 어떤 하느님을, 유한에게, 보이는 걸로 설명하는 게, 다 말씀이잖아요? 그래서 하느님을 말씀이라고 하는 거지, 말씀이 뭐야?’ 그런 거 고민하지 마세요. 하느님을 설명하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 수준에 맞게!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 분이 진짜 하느님의 형상이다, 그러잖아요? 사도 바오로가! 그래서 말씀이에요. 하느님을 설명하는 거니까.

 

그런데 잘못된 말이 뭐냐고? 그게 텅(tongue), 글로싸(glossa), 방언이라고 그걸 번역한 거란 말예요. 그게! 에서 말이 나오니까. 모든 소리에는 뜻이 담겨 있어요. 모든 소리에! 지금 애기가 응애하는데도 뜻이 담겨 있다니까요. 진리로 들어야 된다니까. 저걸!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4:7-13) 7 피리나 거문고 같은 생명없는 악기도 소리는 납니다. 그러나 악보대로 분명하게 연주하지 않으면 무슨 곡이 연주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8 또 나팔 부는 사람이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누가 전투준비를 하겠습니까? 9 이와 같이 여러분도 이상한 언어로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결국 여러분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셈입니다. 10 세상에는 갖가지 말이 있지만 뜻없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11 그런데 내가 어떤 말의 뜻을 알아 듣지 못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과 나는 서로 외국인입니다. 12 성령의 선물은 여러분이 갈망하는 것이니 되도록 풍성하게 받으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교회를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13 그러므로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은 그것을 해석하는 능력까지 얻으려고 기도하십시오.

이게 해석(통변)하기를 기도하라는 말이 아니란 말예요. 넌 방언만 해? 나는 해석(통변)도 하는데.’ 웃기지들 말라고 하세요. 여러분, 참 뜻이 모든 소리 안에 들어가 있어요. 여기 이야기 하는 것처럼! 그런데 참 뜻이라는 건, 알렛떼이야, 진리라 그랬죠? 그래서 주님도 나는 참 포도나무! 그 진리 포도나무야그랬어요. 예수님이요. 진리란 말예요. 모든 게 진리를 담고 있어요. 심지어, 욕 속에도 진리가 담겨 있어요. ‘개의 자제분(개 자식)’!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와 상관없는 이방 여인을 향해, ‘라고 불렀죠. 예수님이 욕하셨다니까요. ‘라고. 넌 개야.’ 그렇게 진리와 상관없는 이방의 자식들, 그들은 저주 받아 마땅한, 심판받아 마땅한 거예요. 하느님이 은혜로 살리지 않으면! 그래서 개 자식이라는 욕이 있는 거예요. 그건 죽는다. 그래서 욕이에요. 그게 칭찬이 아니잖아요?

영어 욕에도 많아요. ‘산 오브 비-’ 뭐 그런 거 있어요. 음녀의 아들이란 뜻이에요. 음녀의 후손! 우리 묵시록에서 봤잖아요. 성적인 욕들 많죠? 머더(murder) , 아비의 침상에 올라 간, 살인, 전부 다 간음의 이야기예요. 그러니 욕을 들으면서도 그 안에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면, 그 욕이 나에게 욕이 되겠느냐고요? 그걸 자유라 그래요. 진리를 아는 이들은, 그 모든 소리에서, 진리를 읽어내어요.

그래서 저는, 사실 찬송가보다는 유행가를 더 많이 불러요. 차라리 유행가 중에 은혜 받는 진리의 내용을 담은 게 더 많아.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하하하)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나그네요 이방인인 나의 삶을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나요?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 길.’ 그러나 아버지 집으로 향해 가잖아요.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하하하하) 진리로 가는 길은 하행선으로 가는 길이에요. 뭐 왜 교인이 유행가를 들어? 왜 이상한 영화를 봐? 그런 거 보면서 진리를 깨달으면 뭐가 잘못됐냐고? 그런데 단지 믿음 없는 자들이, 그냥 그것 갖고 시험 들까봐, 안 하는 거죠. 그래서 바오로도 율법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있는 것처럼, 그러나 계속해서 그렇게 안 하조. ? 그가 진리를 알아들으면 그 다음부터는 , 내가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우리 선생이 일부러 내 수순에서 그렇게 했구나.’를 알기 때문에, 그냥 율법 있는 것처럼 하면, 그게 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해주는 것뿐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유행가 같은 거 안 부르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7절을 보면 생명이 없는 어떤 것들이 내는 소리가 있는데, 그 소리는 피리소리인지 거문고 소리인지 못 알아듣는 거요. 그러니까 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소리를 내는 자가, 생명을 가진 자냐? 아닌 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죠. 이게! 소리가 중요한 게 아녜요. 그러므로 네 혀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않으면, 그 말하는 게 다 허공에 말하는 것과 같다. 글로싸(glossa), 방언. 네 혀가 너의 생명 없음으로 말미암아 방언이라는 어려운 말, 못 알아먹는 말, 생명 없는 말을 하면, 그건 열매로 맺혀지지 않고, 그건 허공에 던져지는 소리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코린도전서13장에서는 그러잖아요? 일만 마디의 방언을 해도 그건 울리는 꽹과리야. 쉬운 말은? 그걸 진리로 풀어낸 예언이겠죠. ‘레마겠죠. 쉬운 말을 하라. 그러는 거예요. 진리가 뭔지도 모르면서, 성경을 방언으로만 말하면, 외국어예요. 글로싸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방언을 말하는 자, 방언이지만, 성경을 이야기할 거 아녜요? 로고스를 이야기할 거 아녜요? 그걸 모르고 이야기하는 것뿐이지. 그러니까 통역을, 해석하라. 이게 이해되어지고, 그 이해되어진 진리만 전해지게 해 주세요.’가 방언하는 자들아! 로고스로 말을 할 줄 아는 자들아! 내용은 모르는 자들아! 이게 네 안에서 해석,통역이 되어 이해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뜻이에요. 그래야 예언을 할 게 아녜요? 그래야 레마를 전할 게 아닙니까?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게 신령한 것이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신령한 것이 뭐예요? 141절에도 나오죠. ‘신령한 것을 구하라!’ 성령집회에서 말하는 그런 것들을 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방언으로 그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통역해서, 진리로 받아들여, 그걸 진리로 전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고게 신령한 것을 구하는 거라고 바오로가요! 제 얘기가 아니라. 그걸 근거로 위로 올라가 보세요.

(고린도전서 14:4) 4 이상한 언어(방언)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도울 뿐이지만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은 교회에 도움을 줍니다.

덕을 세우다. 오이코노미건축하다는 뜻이라 그랬죠? 방언, 로고스로! 그러니까 말을 전하긴 전해요. 뭐 좋은 이야기도 하는데, 그게 레마,’ 예언이 아닐 때는, 그게 자기는 뭐를 했기 때문에, 열매는 안 맺었는데 이게 쌓이게 되면, 나를 건축하는 게 된다 말입니다. 그게 자기의 덕을 쌓는다.’예요. 내 안에 덕이 쌓인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데 그 건축자들은 항상, 모퉁이 돌인 예수를 집어 던지는 건축자들이라 말예요. 그건 안 되는 거죠. 그럼 예언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죠? 교회가 세워진다! ‘교회가 하느님의 성전으로 유익하게 세워진다.’예요. 그게 교회의 덕이 된다는 뜻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예언으로 통변된 방언! 이것이.

성경을 방언으로, 소로만 읽고 전하는 자는, 자기의 건축물을 세우는 거예요. 엉터리 말을 전하는 자는, 자기의 ()’만 건축하는 꼴이 되고, 진리를 전하는 자는, 교회를 세우는 자, 참 성전을 이해하고, 그 참 성전을 설명하는 거니까! ‘, 그게 내가 성전이네요.’가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거란 말예요. 하나하나 벽돌들이 들어오잖아요? 여러분이 육적 성숙을 이룬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자, 용서하는 자, 화평화롭게 하는 자, 살리는 자가 된다는 말이에요.

(고린도전서 14:5) 5 나는 여러분이 모두 이상한 언어로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만일 이상한 언어를 해석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이 교회의 이익이 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 더 위대합니다.

? 로고스로 말하면, 다 누구나 해야 되잖아요? 그러나 그게, 예언으로 나오지 않으면, 그건 네 로 쌓일 수 있으니까. 이게 통역이 되어서 나에게 예언으로 오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내가 예언으로, ‘레마로 보낼 수 있게 해 주세요. 이 기도하란 뜻이에요. 방언하기를 구하라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어떤 기도회에 가면, 순 개소리를 왈왈 왈왈이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아요. 그게 개들이에요. 뭔 소리인지 모르니까. 그게 텅(tongue)이라니까요. 글로싸! 진의를 알고 로고스를 던지라는 거예요. 그래서 일만 마디 방언보다, 뜻을 알고 전하는 예언 다섯 마다기 낫다고 하는 거예요. 일만 마디 방언도 있어야 되는 거죠? ? 그 안에 진리가 담겨 있으니까. 성경 안에 진리가 담겨 있으니까. 그러나 그걸 못 알아들으면, 이게 외국어, , 방언이 되는 거라니까요. 그러나 없으면 안 돼요. 그래서 일만 마디 방언, 괜찮아! 그러나 그걸 진리로 못 알아먹으면 인 거예요.

그리고 그 다음 어구가 이렇게 이어지죠. ‘만일 이상한 언어를 해석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이 교회의 이익이 된다면 몰라도 그러잖아요? 고린도전서 이 이야기는 방언을 해라, 말아라.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없어요. 아예! 진리가 담기지 않은, 뜻도 내용도 모를 외국인의 방언! 그건 말씀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소리와 글로, 방언으로, 로고스를 진리로 전할 때에는, 반드시 진리로 해석이 된 상태에서 전하라는 거예요. 그게 생명 있는 성도니까. ? 그게 숨! 말을 받은 자니까. 그래서 숨, 생기, 성령, , 말씀, 진리를 받으면, (tongue)을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진리를 이야기하게 되는 거예요.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거꾸로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에서도, 바로 그 방언! ‘글로싸 거기도 나와요. 성령이 임하니까, 방언이 터졌잖아요? 그 글로싸와 똑같은 단어가 어디 나와요? 성령! 불의 혀! 이 텅(tongue)이 글로싸. 똑같은 말이에요. 인간들의 방언과 불의 혀! 진짜 하느님의 혀에서 나온 그 말! 그 말이 대조가 되고 있어요. 그런데 말이, 성령이 임했잖아요? 불의 혀처럼. 그러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요? 열다섯 개의 외국에서 온 디아스포라들이 이걸 어떻게 번역을 하여 자기가 자기 나라의 말로 알아듣더라.

바벨론의 저주가, 바벨탑의 저주가, 거기에서 텅(tongue)으로 갈라졌잖아요? 못 알아듣는 말로, 성령에 의해. 거기서 회복이 되는 거예요. 저주가 은혜로 회복이 되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구약에서, 그 저주 받은 율법, 소로만 읽혀졌던 율법에 의해, 계명에 의해, 3,000명이 소 만들었다가 도륙당한, 3,000명이 이 불의 혀, 진짜 글로싸가 와서, 이게 통역이 되니까, 3,000명이 살아 올라온 거예요. 베드로가 그 불의 혀! (tongue)을 받아서, 예언으로 던졌더니, 설교를 했더니, 3,000명이 살아 올라와요. 교회로! 성전이 건축되더라. 그게 방언의 이야기예요. 여러분은 어떤 혀를 갖고 계십니까? 어떤 말을 담고 계세요? 죽이는 혀, 방언입니까? 살리는 혀, 예언, 진리, 영의 말입니까?

(야고보서 3:5-6) 5 이와 같이 혀도 인체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엄청나게 허풍을 떱니다. 아주 작은 불씨가 굉장히 큰 숲을 불살라 버릴 수도 있습니다. 6 혀는 불과 같습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부분이지만 온 몸을 더럽히고 세상살이의 수레바퀴에 불을 질러 망쳐 버리는 악의 덩어리입니다. 그리고 혀 자체도 결국 지옥 불에 타 버리고 맙니다.

혀는, 말은, 그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불의 혀여야 되는데, 지옥 불에서 나오는 혀들이 있다는 거예요. 고건 멸망에 쓰이는 거요. 그 방언은! 예언이 안 된 방언! 로고스!’ 거기에만 머물러 있는 거! 그래서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그 혀를, 그 말을, 표피적 가짜! 소를! 진리를 고쳐 주는 게, 여러 군데 나와요.

(마르코복음 7:33-35) 33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군중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어 손가락을 그의 귓 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34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 하고 말씀하셨다. '열려라' 라는 뜻이었다. 35 그러자 그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말이 분명해지는 게 복이요, 그게 사는 거란 얘깁니다. 이게! 생수이신 예수가 침, 생수를 그의 혀에다 대니, 묶였던 게 풀리고, 말이, 진리가 되어 터져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귀머거리! 벙어리! 그 이야기예요. 진리를 방언으로만 듣는 자들을, 귀머거리! 벙어리라 그래요. 못 들으니 말 못하는 거고. 그걸 예수님이 와서 진리로 고쳐내는 사건이라니까요.

에파타, 열려라! 이제.’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해. 내가 다 통역해서 넣어 줄 테니까. 제대로 듣고, 진리만 말해. 이야기하지 말고, 하느님 이야기해! 에파타! ‘열렸네. 귀가 열리고, 진리를 말하는 거예요. 법에서 풀려나 나를 용서하는 거예요 하느님과 이미 같은 멍에를 멘 에이레네, 평화의 상태, 화목제가 이미 드려졌다는 거! 이 자유! 여기에 진짜 찬양, 찬송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하느님께서 우리의 혀! 우리의 말! 우리의 方言을 예언으로, 진리로 바꿔주세요. 그것만 복이에요. 분명하게, 그 복음만 들으시고, 분명하게 그 복음만, 진리만 말하세요. 아직 분명하지 않으면, 입 닫고 침묵하세요. 다른 사람 죽이지 말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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