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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 (마태7,21.24-2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03 조회수1,401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2월 3일 목요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 (마태7,21.24-27)

 

1독서<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간다.>(이사26,1-6)

그날 유다 땅에서는 이러한 노래가 불리리라.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빈곤한 이들의 발이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화답송 시편 118(117),1과 8-9.19-21.25-27ㄱㄴ(◎ 26ㄱ 참조)

◎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찬미받으소서.

○ 주님은 좋으신 분찬송하여라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사람을 믿기보다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제후들을 믿기보다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 정의의 문을 열어라그리로 들어가 나는 주님을 찬송하리라이것은 주님의 문의인들이 들어가리라당신이 제게 응답하시고 구원이 되어 주셨으니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 주님구원을 베풀어 주소서주님번영을 이루어 주소서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주님은 하느님우리를 비추시네

 

복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마태7,21.24-27)

21 “나에게 주님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제1독서 (이사26,1-6)

 

그날 유다 땅에서는 이러한 노래가 불리리라.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1-3)

 

주님의 최후의 심판과 메시아 왕국의 승리를 예언하는 이사야 예언서 24-27장은 이사야의 소묵시록으로도 불리워진다.

이사야서 26장 1절이하 19절은 이러한 소묵시록의 일부로서, 주님의 구원의 성에 입성하는 남부 유다의 찬양 신앙 고백의 노래를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 26장 1절은 이러한 내용을 도입하는 서론으로서, 종말의 날에 구원받은 남부 유다 백성들이 하느님의 구원하심을 찬양하게 되리라는 예언이다.

물론 여기서 남부 유다는 상징적으로 하느님께서 선택하시어 구원하신 백성들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본문의 서두에 나오는 '그날'에 해당하는 '빠이욤  하후'(baiyom hahu)는 이사야서 24장부터 27장까지 계속적으로 있는 표현으로서(이사24,21; 25,9; 26,1; 27,1.2.12), 이어지는 예언의 내용들이 미래의 어느 한 날에 반드시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이 표현은 주님께서 당신 계획안에 어떤 시간을 정해 놓으시고, 그때 당신의  뜻을 수행하실 것을 암시한다.

 

그날은 악인들이 자신의 교만과 포악함으로서 연약한 자들을 더 이상 착취하고 핍박할 수 없게 되는 날이며, 세상에서 고난당하던 주님의 백성들이 완전한 구원을 받는 날이고,  주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온 천하에 드러내시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진정한 왕으로서 인정을 받게 되는 날이다.

 

본절에서 이 날은 남부 유다 민족이 훗날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국가를 재건하는 날이라는 역사적 시간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종말 이후 실현되는 주님의 영원한 날이라는 초월적 시간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유다 땅에서는'에 해당하는 '뻬에레츠 예후다'(beerets yehudah)는 팔레스티나의 유다 민족이 사는 땅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영적으로 장차 이루어질 하느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이사야서 26장 1절 이하 7절까지는 장차 구원의 성에 입성한 자들의 환희와 신앙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먼저 이들은 자신들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을 고백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 하느님의 신실한 백성들고난 중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견고히 지킨 성도들장차 올 세상에서 하느님의 완전한 구원의 은총으로 복락에 들어갈 자들을 의미한다.

 

또한 '견고한 성읍'에 해당하는 '이르 아즈'(ir az)는 인간의 견고한 성읍(이사25,2.12)과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하느님께서 겸손한 성도들을 위해 건설하신 도성을 의미한다.

이 도성은 인간의 탐욕의 충족을 위해 건설된 성읍이 아니라, 빈곤하고 가난하고 힘없고 의로운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성읍이다.

 

한편 묵시록에서는 이 성읍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예언하고 있다(묵시21,9-27). 

혹자는 이 성읍이 남부 유다 백성이 바빌론의 포로에서 귀환한 이후에 새롭게 재건할 예루살렘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성읍은 느헤미야가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벽을 재건한 예루살렘으로 볼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성문이 열려 있고 모든 의로운 자들이 들어가게 허락되었다는 사실(이사26,2)을 감안할 때, 이 성읍은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묵시록에서 예루살렘 성의 문들이 열려있고, 종일토록 닫히지 않는다고 묘사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묵시21,25).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원문은 '예슈아 아쉬트 호모트 와헬'(yeshuah ashyth homoth wahel)인데, 문자적으로는 '그가 구원을 성벽과 보루로 세우실 것이다'(God makes salvation its walls and bulwalks; he sets up salvation as walls and bulwalks)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이 성에 거주하는 주민을 보호하는 것이 돌이나 흙으로 지워진 건축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의 능력임을 보여준다.

 

앞의 이사야서 25장 12절에서 제시된 모압의 높은 요새가 허물어진다는 사실과 대조를 이루며,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완전하게 보호하여 주심을 보여준다.

 

한편, '성벽'에 해당하는 '호모트'(homoth)의 기본형 '호마'(homah)는 '방어벽','벽으로 둘러싼 상태'를 의미하는 명사이며, '보루'에 해당하는 '와헬'(wahel)의 기본형 '힐'(hil)은 '벽','방어','참호','성채' 등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이처럼 유사한 의미의 단어를 연이어 사용한 것은 독자들에게 마치 겹겹이 쌓인 성벽을 연상케 해준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것은 성벽의 견고함을 강조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본문은 명령형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명령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명령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지적되어 있지는 않다.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 그날에 구원으로 건설하실, 그 견고한 성읍의 문이 반드시 열려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개념은 묵시록 21장 25절의 예언과 완전히 맥을 같이한다.

그리고 성읍의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은,주님의 구원의 문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오늘날은 본문의 예언이 실현되어 거의 모든 나라에 교회가 세워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 안으로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뽑힌 자는 적기 때문이며(마태22,14).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테살3,2).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신의'에 해당하는 '에무님'(emunim)의 원형 '에문'(emun)은 원래 '진실하다', '확실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어원 '아만'(aman)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진리', '진실', '신실', 성실', '충성'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잠언13,17; 14,5; 20,6).

희랍어 구약 성경 번역본인 70인역(LXX)은 이를 '진리'를 의미하는 희랍어 '알레테이아'(alletheia)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에문'(emun) 곧 '신의'를 지키는 자들이란, 하느님의 신실성을 확신하는 가운데,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의 지조를 지키면서 언제나 진리 가운데 머무르는 자를 말한다.

 

그들은 여기서 '의로운 겨레'에 해당하는 '고이 찻디크'(goy tsadiq)로 소개되어 있는데 이것은 직역하면 '의로운 이방인'이다. 여기서 '의롭다'는 개념, 즉 '찻디크'(tsadiq)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성취하는 의(義)가 아니다.

 여기서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의로움은 하느님의 은혜를 겸손하게 받아들인 가운데, 하느님께서 진정한 구원자이신 것을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이며, 하느님의 뜻을 받들면서 살아가는 삶의 열매를 수반하는 의로움이다(로마3,23.24).

 

한편, 그들은 '고이'(goy) 즉 '이방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단어는 혈통적 의미의 이스라엘 백성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을 나타내는 명사 '암'(am)에 대칭되는 단어로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이방 민족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런 그들이 장차 의롭게 될 것이며, 하느님의 구원의 성읍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구원의 문을 이방인들에게까지 활짝 열어 놓으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른 것이며, 복음 전파로 이방인에 대한 구원의 문이 열리게 될 것임 암시한다(마태29,19.20).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자'에 해당하는 '예체르 싸무크'(yetser samuk)는 마음이 요동하지 않으며 언제나 일관되게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자를 의미한다.

여기서 '심성'(심지)에 해당하는 '예체르'(yetser)는 '형성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마음에 형성된 계획, 의향, 목적 등을 의미한다(창세6,5; 신명31,21; 1역대28,9 ;29,18).

 

심성이 한결같다는 것은 헛된 우상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하느님 만을 섬기는 것을 말하며 바다 물결처럼 이리저리 요동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는 어떠한 유혹과 시련에도 타협하거나 굴하지 않고, 오직 주 하느님만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삶을 산다.

 

한편, 이사야 예언자는 이러한 사람에게 '평화'가 주어질 것임을 선언한다.

'평화'를 의미하는 '샬롬'(shallom)은 본래 완전하고 온전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최상의 복이 바로 이 '샬롬'인데, 그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은 심성을 가진 자, 심지가 견고한 자들이다.


이러한 평화는 오직 주 하느님의 영적 지배안에 철저히 머물러 있어야만 온전히 누릴 수 있으며,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만 경험할 수 있는 영적 차원의 복이다. 이런 축복 안에 있는 자들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요동하지 않으며, 불안감과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지 못한다.

본문에서 이 단어가 두번이나 똑같은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여기서 주어지는 평화가 '완전한 평화'(complete peace)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복음(마태7,21.24~27)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1)

 

마태오 복음 7장 15~20절이 열매를 통한 거짓 예언자의 분별과 경계의 교훈이라면, 7장 21절부터 23절까지는 그리스도를 거짓으로 추종하는 자들에 대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나에게'에 해당하는 '모이'(moi; to me)는 일인칭 대명사 단수 여격으로 '바로 나 자신에게'라는 뜻이다.

 

그리고 '주님'에 해당하는 '퀴리오스'(kyrios; Lord)는 단순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하느님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자주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시고, 구세주로서 고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주님'이란 호칭을 두 번 거듭 사용한 것은 매우 큰 종교적인 열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주님께 대한 신앙 고백을 하고 열정으로 기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진정한 열정이 아닌 가식이나 위선, 이기적인 기도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실천적인 신앙을 가져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계신다.

 

마태오 복음 7장 21절은 영어의 'not ~ but'의 용법과 같이, 전자를 부정하고 후자를 긍정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여기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자를 대조시켜, 전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반면, 후자는 들어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여기서 '주님, 주님!'하는 자는 진정으로 주님을 바로 알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입술로만 고백하는 거짓된 신앙을 가진 자가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말씀하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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