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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 제2주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마르1,1-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06 조회수1,353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2월 6일 주일

[대림 제2주일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마르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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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아라.>(이사40,1-5.9-11)

위로하여라위로하여라나의 백성을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높은 산으로 올라가라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

10 보라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보라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

11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화답송 시편 85(84),9ㄱㄴㄷ과 10.11-12.13-14(◎ 참조)

◎ 주님저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당신 백성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2독서<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베드3,8-14)

사랑하는 여러분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스러지며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11 이렇게 모든 것이 스러질 터인데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12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복음<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1,1-8)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대림 제2주일 제1독서 (이사40,1-5.9-11) 


"사막에 길을 곧게 내는 것, 골짜기를 모두 메우고, 산과 언덕을 낮게 하는 것, 거친 곳을 평지로, 험한 곳을 평야로 만드는 것"(3-4)

 

이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정지작업은 높은 것을 깎아내리고, 골짜기는 메우는 작업이다.

하느님 위에 올라간 영적 교만은 겸손으로, 죄악과 분열의 깊은 계곡은 회개를 통해 은총을 받을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다.

 

거칠고 험한 곳은 주님께 반항하고 대들고, 제 마음대로 하던 마음인데, 그 마음을 겸손과 온유의 마음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작업이 끝나면 '주님의 영광'(이사40.5)이 드러나 모든 사람이 그것을 다함께 보게 된다고 한다.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와 능력의 표징을 예루살렘에서 다시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시며,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시고 (이사40.9ㄹ~10ㄴ)상급과 보상이 무상으로 내린다(이사40,10ㄷ).

 

'상급'과 '보상'은 승리한 전사가 집으로 가져오는 노획물과 공물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주 하느님의 예루살렘 귀환이 승리의 행사로 묘사된다.

 

그분은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양무리)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이스라엘 백성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지도자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40.11).

이 목자와 양무리에 대한 시구는 시편 23.1~3과 유사하다. 목자는 대개 '임금'을 위한 비유로 쓰이며, '그의 양무리, 어린 양, 암컷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넓은 의미로 묘사한 것이다.

 

남부 유다의 성읍은 그들의 지도자들과 절대 다수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후에 수십 년동안 외면과 고통스런 상황으로 고난 받아온 사람들을 묘사한다.

예루살렘에로의 하느님의 귀환은 그들 모두, 특히 약한 자와 곤궁에 빠지고 궁핍한 자를 위한 목자의 외투 속 사랑을 가리킨다.

 

'젖먹이는 암컷들'은 '갓난 어린양들'과 함께 지내며 돌보는데, 양떼가 이동할 때마다 어린양들도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오늘 제 2독서(2베드3,8~14)에서 주님의 날이 도둑처럼 오며, 그날에 지구는 불에 의해 녹아버리며 사라진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주님의 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

(1)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생활 개선; 경건 생활)

(2) 티없고 흠없는 사람 ~구원받을 수 있는 영혼 상태

(3) 평화로이 그분 대전에 설 수 있다 ~양심의 평화를 누리며 주님 대전에 거리낌없이 설 수 있는 (주님 만날 수 있는) 자세.

 

우리는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 마음의 구유, 마음의 베들레헴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준비해야 한다.



 

대림제2주일 제2독서 (2베드3,8-14)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12-13)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주적 대심판이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신도들은 악이 횡행하고 거짓 교설이 난무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말고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주님의 재림의 날이 도래할 것을 기다리고 협조해야 한다.

 

여기서 '기다리고'에 해당하는 '프로스도콘타스'(prosdokontas)의 원형 '프로스도카오'(prosdokao)는 '(희망 중에기다리다'(사도 27,33)

즉 '바라고 기다리다'(루카 3,15)라는 뜻을 지닌 동사이다.

 

본문에서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쓰였으며주님의 재림에 대한 간절한 희망과 기대를 가지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앞당기도록 하라'에 해당하는 '스퓨돈타스'(speudontas)의 원형 '스퓨도'(speudo)는 영어의 'speed'의 어원이 되는 말로서원래는 '빨리 하다','서두르다'(루카 2,16) 란 의미를 지닌 동사이다.

 

본절에서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어 보이는 이유가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려는 하느님의 뜻 때문이라는 3장 8-9절의 말과 관련을 맺고 있다.

이것은 신도들의 믿음과 선행이 그 날을 재촉할 수 있다는 사상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3장 19절에는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라고 말하고 있다.

주님의 재림의 도래를 위해서는 최우선적 과제가 무엇보다도 선교인 것만은 사실이지만(마태 24,14), 재림의 때에 대한 준비는 '그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하고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착하고 거룩하고 신심깊은 생활(2 베드3,11; 1베드 2,12), 회개와 순종(사도 3,19.22-23)의 삶도 더불어 준비해야 한다.

 

선교를 비롯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땅한 회개와 신심(경건)과 순종 등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 및 거기에서의 영원한 삶이라는 궁극적인 성취를 앞당기는데 기여하는 요소들이다.


'그날이 오면'으로 번역된 '디 헨'(di hen)에서 전치사 '디아'(dia)의 축약형 ''(di)는 본문에서 목적격을 수반하고 있는데이것은 '~때문에'라는 원인의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본문은 '그날 때문에즉 '주님의 재림이 임하였기 때문에'란 의미이다.


이것은 그리스철학의 스토아 사상에서 그려지듯우주의 주기적인 대화재와 같은 자연 순환 과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적인 의지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버릴 것입니다.

 

'원소'(element)에 해당하는 '스토이케이아'(stoicheia)는 '스토이케이온'(stoicheion)의 복수형이다.

이 단어는 '진열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스테이코'(steicho)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는 '일련의 어떤 것'(series)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 단어가 그리스 철학에서는 '일련의 어떤 것을 이루는 기본 요소', '원소혹은 '첫째 원리'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절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우주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았던흙과 물과 공기 혹은 더 나아가서 '천체'등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즉 본문은 우주 만물을 이루는 모든 기본 기본 요소들이 빠짐없이 해체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불에 타 녹아버릴 것입니다'라는 표현이 10절에는 '불에 타 스러지며'로 나온다. '(뜨거운불에해당하는 '카우수메나'(kausumena)는 '불태워버리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카우소오'(kausoo)의 현재 분사 수동태로서 '불태워지면서'라는 뜻이다.

'스러지며'에 해당하는 '뤼테세타이'(lythesetai),'뤼테손타이'(lythesontai)는 묶인 것을 '풀다', '느슨하게 놓아주다', '분해하다','해체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뤼오'(lyo)의 직설법 미래 수동태로서 철저하게 해체되어 버릴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12절에는 '녹아버릴것이라는 단어 '테케타이'(teketai : shall melt)가 더 첨부되어 있다.

즉 본문는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이 불에 타면서 해체되어 버릴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천지 만물의 대변혁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며그리스도의 재림과 이어지는 종말의 대심판이 장엄하게 전개될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기다리고 있습니다(13)

 

베드로 사도는 거짓 교사들의 교설의 유혹에 맞서 확고한 재림 신앙을 가지며그에 합당한 생활을 권면하는 1장 12~3장 13절의 마지막 구절인 본절에서신도들에게 재림 및 종말에 관한 약속에 근거하여의로움이 실현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을 최종적으로 권면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에 해당하는 '프로스도코멘'(prosdokomen)은 '희망 중에 기다리다' '바라고 기다리다'라는 의미를 지닌 '프로스도카오'(prosdokao)의 직설법 현재 시제로서신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희망 중에 기다리고 있음을 나타낸다.

지금의 현 세계가 해체되어 소멸된다(10절과 12하더라도신도들은 그 후에 도래할 새로운 세상을 희망할 수 있고그 희망이 그대로 성취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희망이 없는 불신자들과는 다르다.

 

성도가 새 하늘과 새 땅을 희망 중에 기다릴 수 있는 것은 분명한 하느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이사야 예언서 65장 17절에서하느님은 "보라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고 약속하셨고이사야 예언서 66장 22절에서는"정녕 내가 만들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서 있을 것처럼너희 후손들과 너희 의 이름도 그렇게 서 있으리라." 고 약속하셨다.

즉 베드로 사도는 전혀 성경적 근거도 없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신도들에게 공허한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하여 실효성 있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로움'()로 번역된 '디카이오쉬네'(dikaiosyne)는 주격 단수이며, '깃든'(거주하는)으로 번역된 '카토이케이'(katoikei)는 직설법 현재 시제이다.

'의로움이 깃든혹은 '의가 거주하다'는 것은 불의와 부정이 가득 찬 이 세상과 대조적인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암시한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거하고 있는 그곳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견고하게 계속된다.

세상은 심판 가운데 멸망하지만믿는 자들 곧 '착하고 거룩하고 신심깊은 생활'로 주님의 날을 기다리던 자들에게는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좋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얻게 될 희망이 있음을 본문은 선명하게 밝히고 있다.

 

재림시의 그토록 엄청나고 끔찍한 대변혁의 사건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새롭고 안전한 새 세계의 창조를 위한 서곡(序曲)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재림에 관해서는 마태오 복음 13장 41-43, 19장 28사도행전 3장 19-23요한 묵시록 21장 1-2, 5, 10-27절 등을 참조하기 바란다.

 



대림 제2주일 복음 (마르1,1-8)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4)

 

여기서 '회개'로 번역된 '메타노이아스'(metanoias; repentance)의 원형 '메타노이아'(metanoia)의 동사형 '메타오에오'(metanoeo)에서 '메타'(meta)는 '다르게'라는 의미이고, '노에오'(noeo)는 '생각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원어로 볼 때, '회개'는 '다시 생각함'이라는 뜻이다. 즉 '회개'는 구체적으로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에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는 단순히 마음만 바꾸는 변화가 아니라, 행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마음의 변화(change of mind; 마태3,8; 2코린7,10)를 말한다.


사실 구약적 관점에서 '회개하다'(에제13,22)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 '슈브'(shub)는 '인간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돌아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회개'의 이러한 의미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1장 3절과 4절에서 두번씩이나 사용한 '광야에서'에 해당하는 '엔 테 에레모'(en te eremo; in the desert)라는 구절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즉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께서 계약 관계를 맺은 최초의 장소를 의미하는 '광야'(시나이 광야)에로의 돌이킴이라는 구약적 회개의 의미를 자신의 복음에 적용시킨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세례'로 번역된 '밥티스마'(baptisma)는 '담그다'는 뜻의 동사 '밥티조'(baptizo) 에서 파생되었으며, 이것은 원칙적으로 몸을 완전히 담그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물에 담그는 것이나 정결 예식으로서의 씻음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만(레위15,5~16), 회개의 의미로서 물에 담그는 것이나 씻음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교에서는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을 하는 경우에 한해서, 개종자를 물 속에 담금으로써 죄의 회개와 개종 의식을 하기도 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도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기에, 원칙적으로는 오늘날 세례 성사가 가지는 죄사함의 은총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당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정결함을 받기 위한, 문자 그대로 '회개의 세례'였다.


그래서 사도행전 19장 2절 이하를 보면,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이 사도 바오로에 의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사도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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