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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 말씀을 맡은 이스라엘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07 조회수1,292 추천수0 반대(0) 신고

 

도란도란 글방 2020.12.07.

 (공동번역성서)

 말씀을 맡은 이스라엘

(로마서 3:1-2)

1 그러면 유다인이 나은 점이 무엇이며 할례의 이로운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2 과연 여러모로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맡겨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이 역사의 시작과 끝과, 내용과 모양을, 이미 정확하게 완성시켜 놓으신 상태예요. 그래야 전지전능(全知全能)이죠? 그건 지금 성취해가고 있는 과정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완료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에 의해서, 이 역사와 인생들은 완전히 파악이 된 상태예요. 아담, 하와, 마찬가지예요.

하느님도 예측(豫測)하지 못한 우발(偶發)적인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 하느님께 이미 파악되었던 거고, 아니 엄밀히 말하면, 파악 정도가 아니라, 이미 그 분에 의해 작정되었고, 계획되었던 겁니다. 그래야, 하느님이에요. 예측도 못하고, 자기가 계획했던 일을 서둘러 수습해야 하는 그런 분은, 하느님 아니란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그리고자 하시는 내용을, 각각의 인생과 그들이 살아야 하는 그 역사, 히스토리(history)라는 그 캔버스 위에, 겉으로 보아서는, 각기 다른 모양처럼 보이는, 화풍이 다르면, 다른 모양인 것 같지만, 피카소가 그리는 그림! 고호가 그리는 그림! 한 대상을 봐도, 다르게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대상은 하나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의 그림을 그리고 계신 거예요.

이 역사와 우주와 인생! 각자는 거대한 하나의 캔버스예요. 거기에 어떤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지금요! 우리가 막 사는 게 아녜요. 지금 우리가요! 하느님은 뭔가를 그려내고 계시는 거라니까요. 여러분의 인생(人生)! 마치 수천 개의 퍼즐이 각기 개체로 막 존재하다가, 하나로 모여 맞추어지면, 거대한 어떤 그림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거예요. 하나하나도 그 그림이지만, 그게 맞춰지면, 그 거대한 하나의 실체가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지금, 이 역사와 인생에, 어떤 그림을 그리고 계신 걸까요, ‘예수라는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 거예요. 이해가 잘 안 가시죠?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대로, 아버지를 설명하러 오신 분이라 그래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그러죠 그러면 하느님은 예수를 이 역사 속에서 그리신다는 건, 하느님 자신을 지금 이 우주와 역사와 인생을 통하여, 그려내고 계시는 거란 말이에요.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느님을, 보이는 역사(歷史)와 공간(空間)과 인생을 통해서, 지금 그려내고 계시는 거예요.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왜 하느님이 주이시며, 느님이 알파와 오메가여야 하는지를, 당신의 백성들에게 3D 입체 영상으로 잘 그려서 보여주고 계신 거란 말입니다. 절대로 이 우주(宇宙)와 역사와 인생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녜요. 여러분의 인생도 여러분 거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하느님이에요.

인간이, 하는 일이나, 그들의 됨됨이에 의해서, 상벌(賞罰)이 주어지는 식의, 그 인간 주연(主演)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이 세상이 아녜요. 세상은 지금 여러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그려내는 도화지란 말이에요.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를 그려내는, 하느님 주연의 대하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란 말입니다. 인간들은 조연(助演)도 아니고 엑스트라도 아니라, 무대장치예요. 그런데, 이 그리스도교마저 인본주의가 되어 버리니까, 인간들이 주인공이 되어 버린 거예요. 아니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조연 역할은 해보겠다는 게, 이게 지금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되어 버린 모양이란 말입니다.

 

(골로사이서 1:15) 15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창조물보다 먼저 나셨다는 게, 하느님도, 예수님도, 피조물이라는 게 아녜요.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 구절을 가지고, ‘예수님도 피조물이다!’ 이렇게 주장하는데, 그런데 절대 속으시면 안 돼요. 이거 원어로 보면 선재(先在)하셨다는 뜻예요. 먼저 계셨다.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려면 먼저 계셔야죠? 하느님이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 표피적으로 성경을 읽으면 안 됩니다. 표피적으로 읽으면 성경은 도덕적인 이야기, 윤리적인 이야기, 이 세상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경제적으로 잘 사는가, 이런 것으로 보이지만, 그 표피 속에 들어 있는 진의(眞意), 수박 알갱이를 뜨면, 그게 다 예수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응전하시면 안 돼요. 여러분은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이단들이 얼마나 논리적인 아세요? 다 넘어가게 되어 있어요. 저에게 데려오세요. 그런데 나는 살살 피해 다니면서, 딴 사람들을 그냥, 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게요. ‘당신들이 신천지인지, 구원파인지, 지방교회 사람인지, 여호와의 증인인지 나는 알바는 없는데, 당신들이 이 교회를 흔들기 위해서는, 나를 제일 먼저 밟고 가야 돼. 그런데 당신들은 상대를 잘못 골랐어. 그러니까 말씀 잘 듣고 회개하고 구원 받으세요.’ 쥐새끼처럼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예수 믿으세요!

 

(골로사이서 1:16-17) 16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예수)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

(로마서 11:36) 36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 아멘.

만물의 존재 이유가 뭐예요? 예수 안에서 존재하는 것! 그것만이 하느님과 함께 영원을 사는, 하늘의 존재하는 걸 설명하기 위해, 이 만물이 존재하는 거예요. 그걸 그려내는 거예요.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걸 그려서 설명하기 위해, 만물이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쉬운 말로, 예수 안에서, 예수를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 바로 만물의 하느님나라의 피조물의 본질적 의미이며, 만물의 존재 원인과 목적이라는 뜻이에요. 예수 없이는, 아무리 화려해 보이고 근사해 보여도, 그건 다 허상(虛想)이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 만물이 존재하는 거예요.

예수와 관계없는 모든 건, 존재로서의 성립 자체가 불가하다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만, 모든 게 존재일 수 있어요. ‘있음이 되기 위해선,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그건 곧 예수가 그 안을 채운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걸 연합이라고 그래요. Union with Christ! 그거, 예수 안에서 내가 존재가 된다는 건, 내 주체성과 존재성이 부정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주체성과 존재성을 챙기기 위해서, 하느님을 사용하는 종교가 됐단 말입니다. 그걸 올바로 깨닫고, 자기존재를 부인 당하여, 예수 안으로 흡수되는 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래서 교회를 예수를 머리로 한 지체(肢體)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가 머리가 되면, 자기의 존재성이 부정 돼 버려요. 머리가 명령하지 않은, 그런 행위를 지체가 스스로 하기 시작하면, 그건 중풍이에요. 그게 뇌성마비인 거예요. 예수가 머리라는 건, 예수의 뜻 안으로 내가 흡수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 상태를, 그렇게 연합된 상태를, 순종(順從)이라 그래요.

순종은, 하느님이 지키라고 하는 율법의 세목 몇 개를 지켜 내는 게 순종이 아니라 그랬습니다. 순종! 사마라는 단어 자체가, ‘완전이란 뜻을 함의(含意)하고 있는 단어죠. 그러니까 완전히 순종이 되는 건, 예수 안으로 항복되어 들어가 버리는 게, 자기가 온전히 부인되어 지는 게, 하느님이 생기를 !’ 불어 넣지 않았으면, 그냥 죽은 흙 맞구나! 아담 맞구나!’ 요거, 요 자리로 들어가서, 하느님, 내 삶에 하느님의 뜻을 그려내세요.’를 순종이라 그러는 거요. 그걸 연합이라 그러고, 그걸 다른 말로 안식(安息)’이라 그러죠.

안식이란 단어 자체가, ‘내가 일을 하지 않는다.’란는 뜻을 함의하니까! 그게 안식, 하느님 나라예요. 하느님이, 나를 통하여, 하느님의 능력과 생명력을 부어서, ‘바라크!’ ()을 부어서 하느님을 그려내는 걸, 하느님나라라 그래요. 그런데 내가 선악과 먹고, 선악의 분별을 내가 하면서 하느님처럼의 삶을 추구하는 걸, 마귀의 세상이라 그러는 거예요. 그건 창세기에서부터 친절하게 설명이 되고 있어요.

(창세기 2:1-3) 1 이리하여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테텔레스타이!’) 2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3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

여기에도 天地萬物이 등장해요. 그 천지만물을 하느님이 창조하세요. 창세기 1장의 첫 창조는, 하느님나라라는, 그 묵시 속의 새 창조의 모형이라 그랬죠? 첫 창조는, 새 창조의 모형이란 말예요. 그런데 그 천지만물의 그 창조 끝에, 안식이 등장해요. 일곱 째 날에 안식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죠. 안식이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묵시 속에 완료된 하느님의 나라의 현실을 가리키는 거예요.

, 골로사이서에서는, 천지와 만물의 창조 목적이, 예수로 수렴되고, 골로사이서와 로마서에서는, 예수에게서 나와서, 예수로 다시 들어가는 거예요. 예수라 말이에요. 천지만물의 창조 목적이! 그런데 창세기에서는, 그렇게 천지만물이 다 이루어진 상태를, ‘안식(安息)’이라 그래요. 그렇다면 예수와 안식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거란 말이에요. 성경을 지금 유기적으로,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머릿속에 떠올려서 생각해 보자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사도 바울로는, 천지만물이, 예수가 누구이며, 예수의 하시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창조가 되었다고 하고, 창세기를 쓴 모세는, 천지만물이, 안식으로 결과지어진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바울은 천지만물이 예수로 수렴 된다 그러는데, 모세는 천지만물이 안식으로 향하고 있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 둘을 조합하면 어떤 이야기가 됩니까? 안식(安息)! 즉 하느님나라는 예수가 홀로 성취한다는 걸 설명하기 위해, 천지만물 창조가 된 것이다.’라는 결론이 도출 되는 거예요.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여섯째 날까지 일을 하시죠. 물론 상징적인 여섯 째 날을 말하는 거예요. 어떤 일을 하세요? 아버지께서 일을 하시니, 나도 일을 한다.라고 하시면서 창세기 2장의 그 아버지의 일을 말씀하시면서, 새 창조를 설명하세요. 예수님은 지금 새 창조를 이루려 오신 거잖아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이, 창세기 1장과 똑같은 이튿날, 이튿날, 이튿날의 일곱 날로 구성이 된 거잖아요?

그 창세기 2장의 아버지 일을 인용하셔서 예수님이 새 창조를 말씀하세요. 새 창조의 일을 여섯째 날에 마치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러실 텐데. 여섯째 날에 마치는데, 여섯째 날은 금요일이고 안식일이 토요일이잖아요? 여섯째 날은 금요일입니다. 여섯째 날, 금요일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예수님이 그 날 죽으신다 말예요. 그래서 여섯 째 날까지 일을 하신다고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창세기와 연관시켜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어떤 일에 의해, 뭐가 성취돼요. 그 여섯 째 날! 그러니까 과월절, 금요일에, 십자가가 서요.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서, 창세기 2장에 쓰인 단어, ‘다 이루었다.’ 창세기 2장에서는, ‘천지만물이 다 마치고,’ 십자가 위에서는,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 다 이룸의 모형이 첫 창조라 말입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하느님의 선언이, 십자가 위에서 세상에 떨어진다 말이에요. 거기에서의 다 이루어짐, 예수의 죽음에 의한 다 이루어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다 이루시고, 죽으심으로, ‘교회!’ ‘하느님나라가 탄생한 거예요. 하느님나라인 교회가, 예수의 십자가로 완전히 완성됐다,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창세기에서도 여섯 째 날 인간이 만들어지죠,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져요? 하느님께서 우리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를, 사람을 만들자!’ 그러고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그러죠. 그날 만들어진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어떻게 만들어졌죠? 남자가 잠이 들어요. 죽는 거요. 죽음을 메타포하는 거죠? 옆구리가 뚫려 갈비뼈가 적출이 되어, 물과 피! 여자가 애 낳을 때 나오는 거예요. 물과 피를 쏟으면서, 교회, 여자, 신부가 탄생이 되는 거죠? 그 이야기를, 예수님의 십자가가 여섯 째 날! 골고다에 서므로 말미암아, 교회가 탄생되는 걸로 다시 설명해 주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다 이루어지는 거예요. ‘테텔레스타이!’

그 이야기! 예수의 죽음,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백성은 성취되고, 그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거라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게, 역사이며, 인생인 거라 말이에요. 성경은 전부 그 이야기만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 관점으로 성경을 보지 못하면, 여러분은 수박 껍데기만 핥고 있는 거란 말예요. 예수로, 복음으로 풀리지 않는 성경은, 성경이 아니에요.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란 말입니다.

간디나 성철스님이 죽을 때까지 읽었던 그 성경은, 성경이 아니라니까요. 그분들은 우리보다 더 열심히 읽었어요. 루소는 100번 읽었다니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그래놓고 왜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쓰고 죽었단 말입니다. ? 표피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다른 종교와 다를 바 하나도 없어요. ‘착하게 잘 살아서, 하느님나라 가서 상 받자!’ 그러면 뭐 하러 예수 믿습니까? 절에 가지! 순 무공해로 밥도 맛있는 거 줘! 스님들 얼마나 착해요. 착한 사람은 다 거기 있는 것 같아. 얼굴이 훤~~~해 광채가 나.

 

보는 바와 같이, 창세기 2장은, 천지 만물이 다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리고 안식으로 설명하는 거고, 바울로는 그 현실을, 예수를 위하여, 예수를 말미암는 만물의 그 본질적 존재의의(存在意義)로 설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묵시 속, 그 목적! 창세전, 언약이라 그러죠. 에페소서 1장에서는. 그 창세전 언약이, 예수에 의해 완료가 되는, 그 커다란 구속사의 그림을 설명하기 위해, 천지와 만물이, 거기에는 인간도 포함되는 거예요, 모형으로, 재료로 창조가 된 거고, 그렇게 하느님의 창세전 계획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료가 된 상태! 그 상태를 안식이라고 해요. 중요한 건, 그 안식이라는 개념은, ‘일하지 않음이라는 내용을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거라는 걸 잊지 마세요. 그래서 율법에는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까지 엄히 금한 거예요.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 하느님나라는 예수의 십자가에 의해서만, ‘너희들이 무엇을 안 보태줘도, 예수 홀로 이루시는 것이다.’라고!

옛날 재건파에서는, 그런데 이걸 곡해를 해서 짜장면도 못 사먹게 하고, 뭐 주일날 돈도 못 쓰게 하고, 머리에 파마하고 와도 안 됐어요, 그때는! 일을 했잖아요, 얘가? 곱슬곱슬하게. (하하) 미련한 짓인 거예요. 그건요! 안식, 하느님나라는 너희들이 일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노력으로 운영되고 유지되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성취되고, 하느님의 은혜로 존재하는 나라라는 걸 계시로 담고 있었던 거예요. 그게 복음이란 말입니다.

그러한 복음이라는 전체의 그림이, 역사와 인생 속에 그려지는 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로기온! 말씀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내용인 거예요. 하느님이 붓을 잡으시고, 하느님의 일을 그려내는 모습을 상상하시면 돼요. 그 내용을 로기온!’ 그래요. ‘로고서아녜요. 말씀을 맡았다에서의 로기온은 바로 그거란 말입니다.

그걸 그려내는 자의 자격이나 됨됨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하느님이 당신이 그려내는 내용을, ‘로기온이라 그래요. 그걸 맡았다는 건, 나는 도구로 사용되어 진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말씀을 맡았다는 건, ‘하느님이 그들을 캔버스로 사용해서, 하느님의 언약을 그려내신다.’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맡은 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유익이다란 뜻이에요.

혹자들은 말씀을 맡았다는 걸, 준행 의무의 차원에서 설명을 하곤 하는데, 그거 아니란 말이에요. 줘 놓고 지키나 안지키나 한번 볼까?’ 이게 말씀을 맡은 게 아니란 말이에요. 이스라엘은 그 말씀을 지켜낼 재간도 없었고, 지켜내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로가 유익이라는 말을 한단 말입니다. 하나도 안 지키고, 오히려 예수를 죽였단 말이에요. 말씀으로 오신 그분을! 그랬는데 그들에게 유익이 있다 그러잖아요? 어떤 이는 그 유익이란 단어를, 하느님의 유익으로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유익이라는 단어는 유대인에게 걸쳐있는 단어고, 맡은 자에게 걸려있는 단어지, 맡긴 자를 수식하는 단어가 아니에요. 분명, 맡은 자에게 유익이란 말예요. 안 믿었는데. 차근차근 설명해드릴게요.

 

이렇게 이 역사와 인생이, 예수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의, 필연성을 설명해 내는 거라면, 그 예수가 오셨을 때, 말씀이 오셨을 때, 그 말씀 앞에 있는 자들이,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어야 돼요? 구원이 필요한 자로 존재하고 있어야죠? 예수님이 구원자!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내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다란 뜻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가 자기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라는 이름을 갖고 왔어요. 하느님이! 그런데 다들 너무 잘하고 있어요, 여기에. 그럼 내가 여기 왜 온 거야?’ 이렇게 될 거 아닙니까? 그러면 역사와 인생이 예수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 역사와 인생이 예수는 필요 없는 거야. ‘인간들도 스스로 이렇게 잘하는데.’라고 예수를 부정하는 게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역사와 인생이, 예수를 설명하고 예수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그런단 말예요. 그러면 이 모든 것이,  구원이 필요한, ‘없음이라는 게 폭로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이 오실 때, 그리고 말씀이 떨어질 때, 그들이 그걸 즉각 믿어주면 안 된다 말입니다. 심지어 아담조차도, 말씀이 떨어졌어요. ‘먹지 마!’ 그랬더니 먹더라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해! 얘가 먹든 안 먹든 그건, 하느님은 관심이 없어요. 얘가 이걸 먹어야, 먹은 그 없음의 자리, 그건 정녕 죽으리라,’ ‘무트 타무트잖아요? ‘없음! 죽음!’이에요.

그런데 그를 내가 어떤 능력으로 살려내는지 나를 설명하는 게, 역사고 성경이지, 내가 명령했더니 잘 지켜서, 얘가 안 먹었네, 먹었네, 여기에 관심이 없단 말예요. 성경은요! 그런데 이걸 인본주의, 인간중심으로 읽다보면, 왜 그때 그걸 먹어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원죄에 빠져서. 이리로 가는 거예요. 여러분 한 번만 더 깊이 생각을 해 보세요. 성경을요. 그리고 하느님에 대해서 한번만 더 묵상해보시라 말입니다. 그렇게 수시로 실수하고, 그걸 수시로 make-up하기 위해, 또 다른 대책을 세워야 되는! 그게 하느님이에요?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가 반드시 필요해요. 성경을 인간중심으로 보게 되면, 인간이 뭘 해야 하느님이 기뻐하실 것인가로 자꾸 관심이 쏠리게 돼요. 그렇게 보는 게 종교(宗敎)예요. 성경을 하느님 중심으로 보게 되면, 하느님은 인간을 통하여 당신을 어떻게 설명하시는 가에 관심을 갖게 된다 말예요. 성경은 후자의 관점으로 봐야 되는 거예요. 자기 부인, 자기 부인 하니까, ‘그래 나를 부인해야 돼, 이거 꾹 참아야 돼.’ 한 대 때리고 싶은데, 벼르는 거! 그건 벼르는 거지, 그거 언젠가 터지면 죽어요.

자기 부인은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부인이란 거 자체가, ‘없음이란 뜻이에요 부인(否認)! 내가 부인되니까, 나는 없음입니다. 원래 죽은 흙이잖아요 내가? 하느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주지 않았으면, 그냥 죽은 흙! ‘네페쉬란 말이에요. 원래 없음인 나를 확인해 가는 걸 자기 부인이라 그러지, 어떻게 해서든지 허벅지를 찔러가며 나를 부인 시켜야지. 노력하세요, 그렇게 노력했더니 잘 안되죠?

그 때, ‘하느님의 은혜가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 했는가?’ 요걸 자기 부인이라 그래요. ‘내가 해냈어, 나는 해냈어, 쟤는 못했어. 난 담배 끊었어, 쟨 아직도 피워. 나는 부인 된 거고, 쟤는 아직도 부인 안 된 거야.’ 만약에 그 담배 피는 사람이, ‘하느님, 저는 이 담배 하나도 못 끊는, 이런 죽은 흙입니다, 하느님 도와주세요.’ 그러고 뻑뻑 빤다면, 걔가 자기 부인된 거요. 제발 여러분, 그냥 표피적으로 그냥 스쳐가는 상식으로,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아무튼, 구원자 예수! 은혜의 하느님을 설명하고 그려내는 게, 이 역사와 인생의 목적인 것이기에, 구원을 받은 자들은, 구원을 받아야 할 자로 예수를 기다리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은 죽을 때 까지요. ‘하느님 내가 죄인 중에 괴죄인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말년에 그 고백했죠? 그때 딱 한 번하고 간 게 아니라, 그 사람은 그리고 계속 밀려 내려갔던 거예요, 하느님에 의해서! ‘하느님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고, 율법으로는 흠도 없는 자였는데 남들이 다 저사람 만큼만 살아라고 이야기를 한 사람인데, 내가 죄인 중에 죄인 맞네요.’ 그 말은 하느님, 나는 하느님이 구원 안 해주면, 지금이라도 언제든지 지옥에 떨어질 그런 존재입니다.’ 이 고백이거든요. 이걸 진심으로 했단 말이에요.

다시 설명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 역사와 인생, 우주라는 공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라 그랬어요. 성경에서 읽었잖아요? 캔버스란 말입니다. ‘내가 내 영광을 위해 창조한 그들을 오게 하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된 거예요. 하느님은 거기에 예수를 그려내세요.

그런데 예수는 자기 백성! 모든 백성 아녜요. 자기백성이란 말이 굳이 들어가 있는 건, 그 자기백성 밖에 또 다른 백성이 있다는 뜻이에요, 자기 백성만을 죄에서 구원할 자예요. 예수가!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떤 상태라는 거요? 구원을 받아야 하는 상태라는 거요. 그래서 하느님은 안식! 즉 하느님나라가 누구에 의해, 어떤 희생을 전제로 성취가 된 것임을 그려내시기 위해, 아담들의 입에 선악과를 쑤셔 넣어, 이 마귀의 세상으로 내려 보낸 거예요.

럼에도 불구하고, 무트 타 무트!’ 정녕 죽어야 할 너희들을 내가 어떻게 살려내는 지! 나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보기 쉬운 곳에 선악과를 심어 놓은 거예요. 먹으라는 것입니다. 아니 먹을 수밖에 없는 존재란 거예요, 너희들은. 내 은혜가 빠졌을 때는, 이걸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통하여 확실히 깨달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조금만 선한 일, 기특한 일 해놓으면, 적어도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나는 그거 안 먹었을 텐데. 적어도 내가 예수님 당시에 있었으면,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게 막았을 텐데. 그게 베드로였다니까요. 그렇게 막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뭐라 그랬어요? ‘이 사탄아.’ 그랬단 말이에요. ? ‘너는 못 막아, 거짓말 하지 마! 못 막아!’ 금방 들통 났죠. 저주하며 세 번 부인 할 놈이, ‘죽지마세요.’ 그랬어요. 목숨 걸고 막겠다, 그랬단 말입니다. 하느님은 그걸 원하는 게 아니란 말예요.

나는 이렇게 닭 울기 전에, 하느님을 저주하여, 세 번 부인할 그런 자니까, 하느님 나를 좀 도와주세요.’ ‘너 진짜 나 사랑해?’ ‘주님이 아시잖아요?’ 뭘 알아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주님이 아시잖아요?’ 그건, 그 사랑의 주체를 던져드리는 거예요. 돌려드리는 거예요. 내가 주님을 사랑할 수 없는데, 주님은 나를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만드실 거잖아요?’ 그게 바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줄 주님이 아시잖아요?’란 뜻이란 말입니다. 그분을 붙드는 거예요. 십자가를 붙드는 거예요.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그런데 그걸, 십자가를 붙들기 위해선, 내가 또 노력을 하게 돼요. 그게 하느님이 나를 끌고 가는 방법이란 말예요. 그런데 이걸 아는 사람은, 그걸 해냈다 할지라도 하느님을 찬양하지, ‘나는 해냈고 너는 못 했다로 못 간다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열심히 노력해서, ‘하느님, 괜찮아 저기 있으라.’ 그래요. 아주 위급한 상황에만 와서 도와 달라 그러고, 자기들이 해서, 자기를 자랑하는 종교가 됐다 말입니다.

그래서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교회에서도 난리가 나는 거요. ‘왜 날 안 알아 주냐고.’ 밖에서 안 알아주니까 여기 와서라도 그냥, 어떻게 나를 드러내 보려고 아! 정말 유치해요. 집구석에서 마누라들이 남자 취급 안 해주니까, 여기 와서 또 어떻게, 잘 좀 해주세요, 집에서. 여기 와서 성질 안 내게. (하하하)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았을 때에, 자기 자신들의 실체를 올바로 자각하고, ‘나는 죄인 중에 죄인이 맞고, 그래서 마땅히 구원을 받아야 할 자입니다.’라는 자기 부인의 고백을 하는 자를, 성도라 하는 거고, ‘여기도 괜찮은데 왜 우리가 여기를 떠나는 구원을 받아야 돼?’ 애굽에서 나가는 게 구원이거든요. 갈대아 우르에서 나가는 게 구원이거든요,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가는 게 구원이거든요. 그런데 거기는 다 살기 좋은 곳이었단 말예요. 최고의 쾌락이 있고, 최고의 재미가 있던 곳들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여기서 나가야 돼, 아니, 구원이란 건 이런 걸 더 극대화 시켜주는 게 구원 아냐? 요게 민속 메시아사상이에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원하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 달라고, 아니, ‘여기 괜찮은데, 우리가 원하는 걸, 우리 힘을 이용해 만들어낼 테니까, 당신은 그냥 도와주기만 하세요.’ 요걸 불신자라 그래요. 그런 나라가 마귀의 나라인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 지옥 자식들까지도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직접 그려내시는 분이에요.

 

(로마서 9:21-23) 21 옹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낼 권리가 없겠습니까? 22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진노와 권능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당장 부수어 버려야 할 진노의 그릇을 부수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참아 주셨습니다. 23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비의 그릇에 베푸실 당신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비의 그릇은 후에 영광을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만드신 것인데

진노의 그릇! 자비의 그릇이 따로 만들어져 있다 말에요. 그리고 거기에다가, 하느님의 자비를 그려내고, 용서를 그려내고, 사랑을 그려낸다니까요. 그리고 하느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 지를 그려내고. 이렇게 하느님은 지옥에 떨어질 자들도 미리 정하셔서, 어떤 게 지옥 자식인지를, 그들의 인생이라는 캔버스 안에 그려내세요.

하느님은 그렇게 당신 자신이, 모든 것의 라는 걸, 만 천하에 공표하시기 위해서, 이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필요했던 거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창조한 게 아니란 말예요. 제발 기고만장(氣高萬丈)하지 마세요. 역사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녜요. 그래서 히스토리(History)인 거예요. 그 분의 이야기. 히즈 스토리 (His Story)!

(필립보서 2:8-11) 8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10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여서, 지옥에 있는 놈들까지도, ‘하느님이 주! 주인 맞네요.’라는 시인(是認)! 고백을 끌어내시는 게, 하느님의 목적이란 말예요. 하느님을 알리시는 거예요. 하느님이 누구인가를!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지옥의 자식도 필요하다니까요. 아니 우린 가만히 있었는데 왜 만들어서 지옥에 넣으세요?. 없음의 자리가 지옥이에요.

제발 불교의 무간지옥, 이런 개념으로 지옥을 오해하지 마시란 말이에요. 힘들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곳이 맞아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하느님 없이 사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안다면, 그까짓 지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 지옥을 이 세상에서 경험해 본다면, ‘하느님, 차라리 내 눈알을 빼세요. 내 껍데기를 벗기세요. 아니 나를 태우세요.’ 이 말이 나와야 돼요. 하느님 없는 그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몰라요. 그런데 왜? 자기들이 주인공이니까! 그렇게 답답한 거예요. 이게! 동화 수준으로 아픈데 안 가기 위해 예수 믿고.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것!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구비 되어 있는 곳에 가기 위해 예수 믿어요. 뭐 이런 그리스도교가 다 있어요?

하느님의 백성과 하느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일하심에 의해 성취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 역사와 우주라는 모델 하우스가,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 하느님이라는 걸 알리고, 이 만물의 역할이 종결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하늘의 계시를 알아야 할 자들이, 모두 알아먹었을 때, 이 역사와 인생과 우주라는 모델 하우스가 철거(撤去)되고, 오롯이 예수가 주인이 되고 예수만 드러나는, 하느님나라가 서게 되는 거예요.

(히브리서 1:10-12) 10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주님, 한 처음 땅을 만드신 이도 주님이시요 하늘을 손수 만드신 이도 주님이십니다. 11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주님은 영원히 계십니다. 만물은 옷처럼 낡아질 것이요 12 주님은 그것들을 겉옷처럼 말아 치우실 것입니다. 만물은 옷처럼 변할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같으시고 주님은 영원히 늙지 않으십니다.'

왜 만들어 놓고 멸망(滅亡)시키느냐고요? 그러면 그건 멸망하기 위해 창조된 거 아녜요? 그리고 뭐만 남는다, 그래요? 예수만 남아요. 첫 창조에 속한 모든 게, 묵시록에 가면 나중에는 해까지도 사라지죠. 그리고 진짜 빛인 예수만 남잖아요? 예수가 드러나면, 창조에 속한 모든 건, ‘그건 아니구나, 이건 모델 하우스였구나!’ 설명용으로! 옛 언약에 속한 모든 게 다 그렇게 사라지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만 남는 거예요. 연대가 다함이 없다라는 말이 영원이에요. 누구만? ()님만!

그러니까 모든 건, ()!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거라는 게 맞는 거죠, 다 낡아진대요. 멸망하여 없어진대요. 그러니까 주님이신 예수가 설명이 되면, 그 나머지 설명용 도구들은, 다 사라지게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성숙되고 착하고 멋진 그림을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그려낸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이제 짝짝 맞추어서 예수! 그게 그려지면, 그건 지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그 믿음의 선진들의 인생이, 하나도 그가 산 게 없어요. 그 믿음의 선진들의 인생은, 하느님의 은혜의 지우개로 박박 지워지고, 하느님이, 당신이 쓰신 그들의 인생이 기록되어 있어요. 거기에! 그 말은 이 역사가, 두 개의 가치가 처절하게 싸우는 장()이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치와 피조물들의 의기투합과 연합에 의한 바벨성이라는 그 가치와의 싸움인 거죠. 그런데 결국은, 예수라는 가치 앞에, 모든 것들의 이 연합이, 만물의 연합이 산산이 부서지고 낡아져서, 예수라는 가치만 오롯하게 승리의 기호로 서게 되는 거죠. 그래서 뜨인 돌이 전체, 세계 최강국이 모여 있는, 그 전체 신상을 한 방에 부숴버리는 거예요. 이게 역사의 싸움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지역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도, 예수라는 가치와, 인간이라는 가치가 전쟁을 벌이게 되는 거요. 교회 안에서도! 교회 안의 전쟁 중에 가장 무서운 전쟁이 바로 그러한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전쟁이에요.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인간들의 처음 자리를 자각하게 하시고, 확인하게 하세요. 예수님이 그러죠. 이걸 아는 게 너희들에게는 허락됐지만, 쟤네들에게는 허락 안 됐다,’ 그러죠.

모든 건 하느님의 허락 하에 일어나는 거요. 여러분이 뭘 해도 그건 하느님이 허락하신 거지, 여러분의 의지와 선택을 발동하여 성취해 낸 것 아녜요.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자기 백성만 죄에서 구원하는 자!’인 거예요. 그런데 죄가 뭐예요? 인간이 자신을 믿고, 자신의 능력을 신뢰해서, 인간 자신들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모든 게, 다 죄예요. 그 안에 들어 있는, 사건화 되어 밖으로 나오지 않은 마음까지도, 죄라 그랬어요. 성경은요!

그래서 이 땅에서 열심히 공로를 쌓아서, 하늘나라에 가서 상을 받겠다고 하는 사람은, 죄를 짓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주인공이 되겠다는 거 아녜요, 그건? ‘거기 가서도 난 상을 받고야 말거야!’ 상을 왜 받아요? 쟤랑 나랑, 차등이 있어야 내가 돋보일 거 아닙니까? 이게 상의 역할이잖아요? 고게 마귀의 생각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슬람 교인들이 폭탄을 조끼로 입고, 마구 터뜨려 버리는 거예요. 자실 폭탄 테러로! 상을 받으려고요. 어떻게 그리스도교가 그런 저급한 종교가 되 버렸느냐고요? 거기에서 구원을 받는 거, 그게 뭐겠어요? ‘하느님과 관계없이, 이 역사와 인간들이 내어놓는 모든 게, 비록 선해 보이고 신실해 보인다 할지라도, 다 배설물이군요. 우리 안에서 예수가 행하신 그 일만이 진짜 가치이고, 선이고, (),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그 어떤 것도, 다 배설물이군요.’ 요거를 아는 걸 구원받은 자라 하는 거예요.

(필립보서 3:2-8) 2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들을 조심하십시오. 형식적인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 3 영적으로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며 세속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진정한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4 하기야 세속적인 면에서도 나는 내세울 만한 것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세속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하려 든다면 나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더 많습니다. 5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으며 난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6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7 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배설물, )로 여기고 있습니다. ~

그걸 알게 되자, 그리스도가 얻어지더라는 거예요. 율법은 바로 그 역할로 주어진 거란 말이에요, 여러분에게. ‘그걸 지켜내면 내가 차곡차곡 카운트해서 상을 줄게가 아니라, 그걸 지키건 못 지키건, 그것으로 우리는 예수를 알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때문에, 우리에게 유익인 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경을 대할 때 죄라든지, 구원이라든지, 은혜라든지, 이런 것들의 개념을 국어사전의 개념으로, 동화책 수준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돼요. 죄라는 건 단순히 인간들이 합의하고 정의해 놓은, 도덕과 윤리! 그리고 사회법이 요구하는 어떤 행위규범을 잘 준수하지 못하는 거 아니라 그랬어요. 인간들은 얼마나 교묘하고 교활한지, 그런 거 몇 개 정해 놓고, 요거만 안하면 잘 사는 것, 착하게 하는 것이라고 저희들끼리 정해 버렸다 말이에요.

그러나 하느님은 안 그래요. 지나가는 여자보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이라 그래요. 그리고 그건 돌로 쳐서 죽여 버리라!’ 그런단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아니야, 사건화 되어 저질러지지 않은 것까지 어떻게 벌을 하겠어?’하고 자기들끼리 합리화를 시킨다 말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죄()라고 알고 있어요. 지금까지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까지도.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느님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한 피조물이,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살 때, 다 죄예요. 그게! 죄인이에요, 그것이. 숨 쉴 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쉬나요? 내가 살라고 쉬죠? 여러분은 숨 쉬는 것까지도 죄예요. 그러니까 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종적인 관계 속에서만 그 개념 성립이 가능한 거예요. 인간들 사이에서의 그 횡적 관계에서는, 기실 죄라는 개념이 성립이 안 돼요. 서로의 영광을 위해서 살 의무가 없어요. 그러나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데, 우리가 우리의 영광을 위해 살 때, 그걸 죄라고 한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 사이에서는, 저마다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는데 무슨 죄가 성립이 돼요?

그래서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도, ‘내가 하느님께만 범죄 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나는 그동안 착하게 살았는데, 그게 착한 게 아니었군요. 진짜 착함과 진짜 죄가 뭔지를 내가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래서 사도 바울로가 지금 말씀을 맡은 자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시편 51편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쓴 거라 그랬잖아요? ‘하느님은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다.’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 3, 4절이 거기서 인용된 거란 말입니다.

다윗이 이야기한 것처럼, 죄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서만, 그 개념이 성립이 될 수 있는 거지만, 그렇게 내가 내 영광을 위해서만 살 때, 다른 이들을 무시하고, 다른 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어요. 그것도 죄 맞아요. 그러나 진짜 죄는, 하느님과 나와의 종적관계에서만 성립이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관계에서의 이해득실의 결과로 죄를 따진다니까요. ‘쟤가 날 때렸어요.’ 죄예요. ‘쟤가 내꺼 훔쳐갔어요.’ 죄예요. 모두 나예요. 하느님은 없어요. 교회(성당)에서 유일하게 실종된 게 있는데, 그게 하느님이에요. 버리라고 한 율법은, 덕지덕지 다 끌어 모아 놓아놨는데, 진짜 계셔야 할 하느님은 없어졌어요. 교회(성당)에서!

, 그렇게 죄라는 게,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종적인 관계에서만 성립이 되는 거라면, 어떻게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서, 죄라는 게 생산이 될 수 있을까요? 창조된 자인데, 피조물이 어떻게 창조주에게 죄를 지어요? 혹자들의 주장처럼, 하느님이 죄를 조성한 건가요? 하느님이 죄를 만들었어요? 아니면, 또 다른 혹자들의 주장처럼, 인간들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겁니까?

여러분, 하느님께서 이 역사와 인생이라는 걸, 굳이 창조하셔서, ? 창세전에 이미 우린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 하잖아요? 에페소서 1장에서. 그러면 묵시 속에서 그렇게 되었으면, 그냥 묵시 속에서 하느님나라로 넣으면 되는데, 왜 굳이 한시적인 모델하우스인 역사와 공간을 만들어서, 왜 여기에다 인간들을 내려 보내느냐 말예요? 그 이유는, 완성된 하느님나라 속에서의, 하느님나라 백성의 그 위상(位相), 얼마나 대단한 것임을 암시(暗示)하는 거예요. 여러분 원래 존재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 밖에 존재는 없었어요. 맞죠? ‘코아세르베이트같은 유기물질이 갑자기 빅뱅에 의해서 막 생물이 되고, 거기서 진화가 되어 이렇게 된 거 맞아요? 존재는 하느님 밖에 없었어요.

그러면 하느님 이외의 모든 존재는 원래 자리가, 처음 자리가, ‘없음이어요. ‘()!’ 그런데 하느님나라가 뭐냐 하면, 그 무()였던, 없었던 어떤 것들이, 하느님나라에 들어와서 하느님과 방불(彷佛), 하느님이 누리는 모든 것을 함께 누리는 곳이 하느님나라예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니, 심지어 하느님과 연합이 되어, 하느님이 우리의 처소가 되고, 우리가 하느님의 처소가 되는 이런 엄청난 존재가 되는, 원래 없음! 그 어마어마한 존재, 그 존재들이, 감히 나는 없음이었다.’라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존재로, 우리는 신분이 격상될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들이, 거기에서 , 나는 원래 없음이었구나!’라는 걸 모르면, 고게 자기의 자리를 떠나는 마귀란 말이에요. 그러면 그러한 일이 없기 위해선 우리는 반드시 이 역사와 이 우주 속에서, 인생 속에서, ‘나는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은 흙에 불과한 자가 맞습니다. 죄인 중에 죄인 맞습니다. 은혜 베풀어 주세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혜가 필요해요. 자비로움이 필요해요!’ 요걸 배우고 가는 게 신앙생활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내가 여기서 뭔가 열심히 해서 다른 이들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아서 올라가는 종교가 됐다 말이에요. 물론 그러한 것은 열매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인간들은, 은혜를 모르는, 복음을 모르는 인간들은 그걸로 자기를 끝까지 자랑해요.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심판대 앞에서, 하느님, 내가 이렇게 착한 일을 많이 했는데, 왜 나를 모른다, 그러세요? 내가 언제 안 했습니까?’ 그런단 말이에요. 염소들이요! ‘내가 언제 안 했습니까?’ 하느님은 거기에 관심이 없어요. 너 나 알아?’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이거 이렇게 해 왔는데요.’하고 있는 거죠. 예수님이 뭐라고 하죠? 난 너 몰라!’ 그러는 거예요. 그 말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알고 가는 거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어떤 일을 하고 가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하느님이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인생에 ,붓을 가지고 그 착한 일, 선한 일을 그리실 때는 죽으라고 하세요. 아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최선을 다해서 하세요. 그리고는 하느님이 이렇게 날 사랑하셨구나. 이게 바로 성도가 하늘나라에서 사는 자기부인의 삶! 자기 비움의 삶! 희생의 삶! 맞는 거구나!’ 배우면 돼요. 그러나 그게 여러분의 자랑이 되면 안 된다 말입니다. 제발 좀 알아들으세요.

그리스도교 역사! 교회사가 계속 인간 중심으로, 이때까지 2000년 동안 흐르다 보니까, 아무리 은혜를, 십자가를, 피를 이야기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드문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내가 다시 갈 때, 믿음을 보겠느냐?’ 믿는다 하는 이들을 많은데, 진짜 믿음은 없는 거요. 믿음은 뭐예요? ‘나는 아니니까 도와주세요!’ 그 상대방을 의존하는 걸, 믿음이라 그래요. 그런데 자기들이 다 하고 있어. 그러니까 내가 믿음을 보겠니?’ 자기들을 믿고 있는데, ‘내가 믿음을 보겠니?’ 그러는 거요.

 

이 역사와 인생은, 이미 이루어진 것에 대한 이해와, 설명용인 거지, 여기에서 행해지는 행위와 업적과 공로에 의해서, 결과가 변하고 도출되어지고 생산되어지는 게 아녜요.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부터 출발시키는 거예요. 여기에서 그건, ‘없음이잖아요? 혼돈과 공허가 뭐라고 했어요? 혼돈은, ‘There's no structure.’ structure, 구조물이 없어. 공허는? ‘emptiness.’ 구조도 없고, 그릇도 없고, 내용도 없으면, ‘없음이지 뭐예요? 그게 혼돈과 공허예요.

그런데 거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뚝 떨어지니까, 뭔가가 생기더란 말이에요. 창조가! 그런데 왜 거기에서 출발시키느냐고요? 하느님이! 하느님이 혼자 다 하셨다 가르쳐주기 위해서예요. 그래서 혼돈과 공허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그리고 애굽에서 출발시키는 거예요. 애굽은, 이스라엘이 가고 싶어 간 게 아니라,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면서, ‘내가 보낼 거야!’ 그러고 보낸 거예요. 그리고는 거기에서 나오는 게 구원이다를 가르쳐주세요. 그런데 나오면? 고생 직싸게 하는 거예요.

애굽은 죄악의 세상의 모형이죠? 애굽은, 노아의 세 아들 중에 저주 받은 함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함은, 덮으심의 은혜를 모르는 자의 모형이죠? 하느님께서, 노아의 방주를 사용하여, 노아를 구해낸 건, 노아가 뭐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은혜를 부어, 그냥 거저 덮은 거다!’를 설명하기 위해, 노아를 벌거벗겨서, 술 취한 자로, 죄인으로, 에덴동산에 선악과 따먹은 아담으로, 확 폭로시키고, 셈이 그걸 그냥 덮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이게 복음이다를 설명하는데, 함은? ‘, 벗었네. , 그렇게 살면 돼?’ 이게 율법이잖아요? 요게 애굽이란 말입니다. 거기서 건져내어, 아냐, 너희들은, 하느님이 덮어서, ‘없음인데 그냥 살려낸 게 복음이야.’를 설명하는 게, 고게 구원이잖아요? 그래서 애굽으로 넣어서, 거기서 건져내버리는 거란 말입니다.

애굽에서는 인간들의 노력과 열심에 의해서, 인간들이 원하는 것이, 차등 있게 주어지죠! 생각해보세요. 그들이 원했던 게 뭐요? 채소와 마늘과 고기죠? 어떻게 하면 먹을 수 있어요? 종살이 열심히 하면 먹을 수 있어요. 요걸 마귀의 나라라 그래요.

종들은 자기가 한 성과에 의해 반대급부를 챙길 수 있는 게 종이에요. 이게 마귀의 나라란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러는 겁니다. ‘난 이제 너희를 종이라고 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서, 하느님이 거기서 건졌더니, 종살이 때 먹던 그 것! 계속 달라 그래요. 하느님이 그 것 아니라고 거기서 건져냈더니, 그 때 그거 달라 그러는 거예요. ? 하느님이 은혜로 주는 만나는 맛이 없어요. 내가 중심이니까. 내 입맛대로 찾는 거예요. 이게 큰 일 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해도, 전부 나! ! ! 내꺼! 내 가족! 내 교회! 거기에서 예수님, 부처님만 빼면, 저기 해인사에서 드리는 기도와, 여기서 드리는 기도가 뭐가 달라요? 이름만 빼면! 그러니까 성당(예배당)에 앉아서, 무당 짓거리들을 하는 거예요. !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고도, 구원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를 못했다는 거예요. 분명히 어린 양의 피로, 아무 공로 없이, 거저 구원받았어요. 인방과 문설주에 그 피를 발랐더니, 우슬초로 발랐더니, 살았어요. 그러면 구원이 이거구나!’ 알아야 되는데, 인간들은 못 알아먹는단 말이에요. 거기에 40년 광야 생활이 필요한 거요. 이게 여러분의 인생이에요. 이게 역사란 말이에요. 거기에서 인간들이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지, 얼마나 불가능한 지가 그려지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의 인생이라니까요. 그래서 결국 옛사람! 1세대가 죽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의 인생이에요. 그래서 계속 지리멸렬 죽어가는 거예요. 여러분이요! 이건 점점 성숙하고 발전해야 되는데, 예수를 알면 알수록, 내가 불가능한 존재라는 게 점점 드러나! 이게 옛사람이 죽는 거예요. 그리고 2세대! 새 사람이 그냥, 은혜로, 여호수아, 예수와 똑 같은 이름이죠? 예수 앞세워 거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거 깨닫고 나는 안 되네요. 도와주세요.’ 그러니까 은혜의 왕! 예수가 와서 끌고 가는 거예요. 나를 따르라!’ 여러분 그게 구원이라 말입니다.

그들이 일단 애굽에서 나왔어요. 그러면 구원 받은 거예요. 그들은 반드시 가나안 땅에 들어가요. 광야에서 다 죽었잖습니까? . 1세대 60만은 죽었지만, 2세대 60만이, 똑 같은 인간들인데 은혜로 들어가요. 그건 옛사람, 광야! 인생 속에서 반드시 죽여, 부정시켜서, 새 사람으로 내 나라에 데리고 들어간다는 모형인 거지, 거기서 죽은 자는 다 지옥 간다는 건 아녜요. 모세도 거기서 죽었어요. 그런데 변화산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보면, 분명히 그 광에서 많이 죽었지만, 안식에 들어간 자가 있었다, 그래요. 히브리서 4장에서.

그러면 하느님은, 그들의 존재의 자격과 됨됨이의 유무에 상관없이, 무언가 거기에 계속 그려내고 있었던 거예요, 거기에서. 예수를 그려내고 있던 거예요. 그래서 이들이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굽을 그리고 있으니까, 이들에게 광야 40! 인생을 허락하셔서. 여러분이 이미 구원 받았는데, 이 역사 속에서 굳이 내려와서, 광야를 살게 되는 거죠. ? 도대체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던 자이며, 어디서 구원받았는지를 그림으로 지금 배우는 거예요. 우리 인생을 통해서! 그게 여러분의 인생의 정확한 목적이에요. 왜 사냐고 묻거든? 그냥 웃지 마시고, 예수 그려내기 위해 산다고 이야기하세요. 모든 인생이 다 그래요.

하느님은 광야 40년을 통과시키시면서, 구원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그들의 역사와 인생을 통해서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을 해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광야 40년 동안의 그 삶 속에서, 구원받은 자들에게 다시 율법이 주어지고. 그 율법 안 지키면, 다시 애굽으로 몰아넣는다는 얘기가 아녜요. 그래서 홍해를 닫아 버린 거예요. 하느님이! 다시는 못 돌아간다고. 그런데 율법을 뭐하러 줘요? 역사 속에서 그걸 배우라는 거요. 너희들이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그리고 그 옛사람들이 다 죽는 일이 또 그려지고, 놋 뱀 사건이 또 그려지고, 성막 짓기가 그려지고, 모세의 죽음 등의 그림이, 그들의 40년 광야 역사 속에, 계속 그려지는 겁니다. 거기서 그려진 건, 다 인간들의 불가능이에요. 인간들은 혼돈과 공허구나! 하느님이 은혜로 놋 뱀으로, 그걸 그냥 쳐다 본 자만, 은혜로 구원해야 되는 거구나!’를 그려내는 게, 여러분의 신앙생활이고 교회인 거예요.

잘 생각해보십시오,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주인공이 되어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떼를 쓰면서, 하느님을 원망했죠? 마귀의 나라(애굽)에서, 그들이 원했던 게 야채와 마늘과 고기였어요. 그리고 법 같은 거! 이런 거 말고, 그냥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거! 율법이 없었어요. 애굽에서는! 나왔더니, 내가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내 마음대로 살 수도 없어요. 내 주체성과 존재성이 묵살되어 버려요. 그런데 이게 하느님의 구원이래요. 인간들은 이게 뭐야? 그러면 왜 나온 거야, 우리가? 이건 죽는 거지, 이게 뭐예요?’ 그래서 모세에게 그러는 거예요. ‘, 우리를 죽이려고 데리고 나왔니?그런데 하느님은 끝까지 맞아, 너희를 죽이려고 데리고 나왔어! 애굽의 수치 잘라내고, 옛 사람의 죽음이에요 죽이고, 내가 너희들 안에 넣은 내 예수로, 너희들을 반드시 내 아들 만들어내어, 나는 내 나라에 데리고 들어갈 거야!’ 이게 광야 40년이란 말이에요.

여러분의 인생 속에, 야채와 마늘과 고기가 아닌, ‘만나가 이제 쏟아집니다. 그런데 그 만나, 맛이 없어요. 오죽하면 이름이 만나겠어요? 맛있어서 만나가 아니라, ‘What is this? Nothing!’ 이게 만나예요. ‘이거 뭐야? 아무 것도 아니네.’ 아니 구원받아서 광야에 나왔으면 뭔가 좋은 게 나올 줄 알았더니, ‘이게 뭐야? 아무 것도 아니네.’ 이게 만나예요. 구원받았다고, 뭐 하느님이 꽤나 도와줄 줄 알았더니, 병도 안 고쳐줘, 사업이 안 되는데, 부자도 안 만들어 줘. 기적도 안 일어나. 만나예요. 그러나 그것이 진짜 생명의 양식임을 알게 되는 게 바로, 성도의 인생인 거예요. 왜냐하면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종살이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걸, ‘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은 그러한 자들을 마귀의 세간이라고까지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아담들은, 그게 죄인 줄을 몰라요. 그래서 거기서 건져내 줬더니, 자꾸 그리로 돌아가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구원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광야에서 계속 끌고 다니면서, 하느님이 그들에게 애굽이나, 너희들이나 똑같아!’ 이거 가르치신 거예요. 너희들이 뭐가 잘 나서 구원한 게 아니라, ‘애굽이나, 너희들이나 똑같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이나 세상 사람들이나 뭐가 달라요? 그 사람들이 더 착하지. 심지어! 이스라엘과 애굽이 똑같다는 걸 하느님이 이렇게 말씀하세요.

(민수기 14:22-23) 22 나의 영광을 보고도, 내가 에집트와 광야에서 나타낸 힘을 보고도 이렇게 거듭거듭 나를 시험하고 나의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은 그 누구도 23 내가 저희 선조에게 주겠다고 맹세한 땅을 보지 못하리라. 이토록 나를 업신여기는 자는 결코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을, 열 번 청종(聽從)치 아니하는 사람이 파라오잖아요? 그를 하느님이 걍퍅한 자라고 그래요. 당시 고대시대 때 왕은, 한 나라의 대표예요. 애굽 전체! 마귀의 나라를 모형 했던 애굽 전체가, 하느님을 열 번 청종치 않았다 말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똑같았다는 뜻이에요. 광야에서 너희들은 애굽 왕과 방불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들은, 애굽이 그렇듯 도저히 하느님나라, 내 나라에 못 들어가는데, 그게 23절이에요. 그런데, 내가 너희를 왜 넣어줘야 되니? 은혜로요! 그거 설명하는 거예요. 인생은! 여러분은 그 은혜를 아냐고요, 그 은혜를?

그래서 말씀을 맡은 이스라엘이 끝까지,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율법을 어길 수밖에 없는 마귀의 세간들로, 드러나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끝까지 옛 사람을 죽여내고 하느님나라에 데리고 들어갔다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가 드러나는, 돋보이는, 캔버스로 사용된 거예요. 이스라엘이요! 이게 말씀을 맡은 거예요. 그게 유익이라 말이에요. 성도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도 혹 인생 동안 그림으로 나타날 수 있어요. ‘, 이 새끼 말 더럽게 안 듣네, 진짜!’ 이렇게. ‘저걸 살려야 돼?’ 여러분 주변에 그렇게 보이는 사람 있죠? 그걸, ‘가짜다. 저거는!’ 이렇게 함부로 단죄해 버리지 말란 말이에요. 그리고 누구는 슈바이처나 간디처럼, ‘, 저 사람들은 저렇게 살았으니까, 하느님이 하느님의 일을 맡긴 사람들이 맞네!’ 이렇게! 예수도 안 믿은 사람!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논문으로 유명해진 그 사람이, 무슨 하느님의 아들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건, 그 정도가 아니란 말예요. 그래서 율법을 받고 지키지도 못한 그들을, ‘말씀을 맡은 자라고 하고, 그게 유익이다!’라고 바울로가 이야기 하는 거예요. 어렵죠?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 여기다!’

그러한 애굽은요,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부터 미리 암시(暗示)되고 있어요. 하느님은, 최초의 하느님의 백성인 아담과 하와의 입에, 선악과를 물려서, 밖으로 쫓아내시는 것에서부터, 구원이 무엇이며, 은혜가 무엇인지를, 그들의 인생과 그들이 엮어내는 역사를 통해서 그려내세요. 선악과를 물고 마귀의 종이 되어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그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뭐예요? 안목의 정욕! 먹음직도 하고? 육신의 정욕! 보기에 우리를 지혜롭게 할만도 하고? 이생의 자랑! 그런 것들을 추구하면서, 오직 자신들의 그 하느님처럼 되자!’하고서 먹었잖아요? 하느님처럼의 그 삶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그 아담들의 그 무화과 나뭇잎 옷을 손수 찢어버리고, 당신의 아들의 피로 짠 의의 흰옷을 입혀내시는 은혜의 그림이, 에덴동산에서부터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까지 그 그림이 계속 반복되어 그려지는 거예요. 아니 이 역사를 다 꿰어 맞추면, 은혜! 예수! 십자가! 그것 밖에 없어요.

마찬가지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느님의 은헤의 필연성을 그려내실 때, 하느님의 백성들을 모형하고 있던 이스라엘이, 빛이 왔는데 빛을 못 알아보는 어둠이었다고 그러죠? ‘내 백성인데 내 백성이 못 알아보더라.’ 그런데 결국 교회를 만들어내고 가셨단 말이에요.

(요한복음 1:5, 9-11) 5 그 빛이 어둠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9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10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11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생명을 만들어내는 게, 나 하느님이다를 그려내는 거예요. 또 반복합니다. 하느님은 그 어두움 중에서, 당신이 선택하신 어떤 자들에게 복을 부으셔서, 그들의 눈과 귀를 열어, 그들의 처음 자리를 깨닫게 하시고, 왜 하느님의 백성들은, 예수에 의해서만 말미암게 되는 가를, 그려내시는 거란 말이에요.

(마태복음 13:14-16) 14 이사야가 일찌기,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고 말하지 않았더냐?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이게 자신들의 처음 자리를 온전하게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 율법이며 할례였단 말이에요. 지키라고 준 게 아니라, ‘우린 죄인 맞네요! 하느님! 생기를 불어 넣어주세요.’ 요 고백하라고.

(로마서 3:19-20) 19 우리가 알다시피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그 율법이 명령하는 모든 것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은 말문이 막히게 되고 온 세상은 하느님의 심판에 복종하게 된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아무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 줄 따름입니다.

그렇죠?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처음자리! ‘난 죄인이며 구원이 필요한 자가 맞습니다!’라는 걸 확인시키기 위해 주신 게, 율법이라 그러고, 신약에서는 뭐라 그래요? 율법이라는 단어가, 신약에서는 성경이란 단어로도 쓰이고, 또 그건 말씀이라는 단어로도 쓰여요. 따라서, 구약의 율법이나, 할례! 또는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설명하며, 최종적으로 성취된, 하느님나라의 모든 원인과 결과를 그리로 집중시키기 위한 도구였던 거지, 그걸 지켜서 하느님께 올라오라고 준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걸 출애굽 광야 시대의 만나와 안식일로 설명해 준 거예요.

(요한복음 6:48-51)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50 하늘에서 내려 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출애굽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내려왔던 그 만나라는 건,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은혜의 그 하늘 양식을, 모형 하던 거였어요. 분명해요, 그건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만나를 준 이유를, 하느님이 그들에게 만나를 준 이유를, 신명기 8장에서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성경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의 양식이라고도 표현하지만, 요한복음 1장에서는 말씀이라고도 얘기한다 말이에요. 율법! 할례! 이게 말씀이거든요. 예수! 말씀! 만나! 율법! 다 같은 걸 상징하고 있어요, 지금요. 그런데 왜 구약의 율법으로는 사람들이 다 저주 받아 죽고, 신약의 그 율법의 본체! 예수! 그 신약의 율법으로 오신 예수는 어떻게 살리느냐 말이에요? 이게 Key Point란 말입니다.

만나에만 한번 집중해서 설명해드릴게요. 어떻게 그 만나가 예수를 그려내고 있었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광야에서 6일간 일을 하게 하세요.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머물러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어요. 수시로 텐트 걷어!’하면 가야 되니까. 그럼 무슨 일을 해야 돼요? 신발 만들어야 되나? 신발은 해지지 않았어요. ? 의복도 해지지 않았어요. 뭐 해야 돼요? 날씨? 여기처럼 따뜻해요. 대단하게 땔감 같은 거 없어도 돼요. 무슨 일을 시켰어요? 6일 동안?

아니 광야에서, 율법 주잖아요? 안식일날 일하지 마!’ 무슨 일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들이 6일 동안 만나 거둬들이는 일 했어요. 그리고 안식일 날, 그거 하지 마!’ 그랬어요. ‘그거 하지 마! 하면 죽어!’ 그럼, 만나가 말씀! 율법! 예수예요.

6일 동안의 삶? 여러분의 역사예요. 안식이 묵시란 말예요.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 6일 동안 역사를 여러분이 사는 거예요. 그런데 이 동안에 뭘 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그러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일이 뭡니까?’ 예수님이 하느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거다라고 그랬죠? 그러면 예수를 여러분이 믿는 자가 되는 게, 여러분의 일을 하는 건데, 예수를 믿는 다는 건, ‘내가 하는 일은, 하느님나라에 가는 데 전혀 쓸모가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죠?

그러면 6일 동안 만나를 끌어 모으는 건 예수를 내 힘과 노력으로 붙들려고 끌어 모으는 거예요. 그리고 먹는 거예요. 그거 먹고 에너지 삼아, 안식으로 가겠다는 거죠. 정작 하느님은, 그 안식일에 만나를 끊어버렸어요. 그리고는 그 전 날 거줘 줘버려요. 이건 뭐냐 하면? 만나를 끌어 모으려고 하는 인간들의 노력이, 안식으로 못 간다는 걸, 경험하게 하시고, 그리고 이 안식으로 들어갈 때는, 반드시 하느님이 거저 주는 예수에 의해 들어간다는 걸 설명하는, 도화지라 말이에요, 여기가! 그래서 만나가, 예수라는 그 만나가, 그들에게 주어졌는데, 그들에게 일하라!’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맞아요. 여러분 열심히 사세요! 착하게 사세요! 제발. 이웃을 사랑하세요. 그러나 그것으로 여러분의 그 노력으로 안식의 나라! 못 들어간다는 걸 반드시 깨닫고, 혹시 그 삶이 진심으로 우러나온다 할지라도, 예수가 내 삶 속에서 만들어 낸 거란 걸, 인정하는 그 자리로 가는 거예요. 성도는!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 만나를 율법이라고 명확히 이야기 하는데, 한번 보세요.

(출애굽기 16:25-30) 25 모세가 말하였다. '오늘은 이것을 먹어라. 오늘은 야훼의 안식일이니, 오늘만은 들에 그것이 없을 것이다. 26 엿새동안은 거두어 들일 것이 있겠지마는 이레째는 안식일이니, 이 날에는 거두어 들일 것이 없다.' 27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레째 되는 날에도 거두어 들이려고 나가 찾아 보았다. 그러나 있을 리가 없었다. 28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언제까지 나의 명령과 지시를 따르지 않으려느냐? 29 야훼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주었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그래서 여섯째 날에는 이틀 먹을 양식을 주지 않았느냐? 이레째 되는 날에는 누구든지 밖으로 나가지 말고 제 자리에 머물러 있어라.' 30 그래서 백성들은 이레째 되는 날은 쉬었다.

아무 알도 안 했다는 거요. 쉬었다는 거요. 그게 하느님나라예요. '사벳(Sabbath), 안식‘. 하느님이 육 일 동안 완전히 마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서, 너희들의 먹이가 되어, 예수가 이루는 나라가 안식의 나라임을 보여주는 거요. 그게 만나와 안식일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출애굽기 16:4) 4 그러자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 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 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리라.

만나를 갖고, 그들이 진짜 율법을 지켜 하느님나라에 갈 수 있는 가를, 내가 한 번 시험하여 그림으로 보여 줄게 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안식일 날 만나 거두러 나간 사람 다 죽었어요. 여러분 그걸 불신앙(不信仰)이라 그래요. 인본주의는 그 짓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집 팔아서 헌금하고, (loan)해서 미리 십일조 당겨 내고! ? 복 받으려고, 상 받으려고. 헌금은 내는 만큼 손해예요. 그건 반대급부로 여러분에게 안 주어져요.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나를 위해 예수가 먼저 헌금으로 드려지고, 하느님이 나를 사셨으므로 내가 하느님께 나를 드린다는, 신앙고백으로 드리면, 이게 유익이지, 빚내서 미리 당겨서 내면, 하느님이 계산해서 열 배로 튀겨주는 거! 그런 그리스도교 없어요. 그냥 헌금하는 거, 이거 손해다고 생각하면, 헌금하지 마세요. 그런 사람은 헌금하고 죄짓는 거예요. , 그걸 시나이 산에서 주어진 율법으로 한번 설명해 보세요. 여러분,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지죠? , 율법은 지키라고 주는 거, 분명히 아녜요. 아니 성경에 씌어 있잖아요? 왜 대답을? 아 내 물어보면 다 함정(陷穽)이 있는 줄 알고, 대답을 못하죠? 아니잖아요? 죄를 인식(認識)하게 하는 게 율법이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게 내려오면, 인간의 죄가 폭로(暴露) 되죠? 당연히 죄를 인식하게 하는 게 율법이니까! 첫 언약의 율법! 첫 십계명의 돌판! 율법이 시나이 산에서 내려 왔을 때, 인간의 죄가 폭로되죠? 하느님이라고 만들어 놓은 게, 금송아지였어요. 풍요의 신! 이게 죄예요. 우상 섬김! 하느님이 이건 다 죽여야 된다, 그랬어요. 분명히! 그래서 도륙(屠戮)시킵니다. ‘칼 가진 자 나와라!’ 해서. 삼천 명을 죽이죠. 그 때 모세가 가로막죠? ‘하느님, 날 죽이세요. 날 죽이세요!’ 중보자 예수의 모형이에요. 하느님이 내가 너 봐서 살리겠다.’ 그래요.

그리고 두 번째 율법을 줘요. 이게 새 언약이어요. 이 율법은 법궤(法櫃) 속에 들어갑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의 모든 전쟁은 이 법궤를 앞세우고 가야 돼요. 하느님의 전쟁은, 바로 그 전쟁이란 걸 보여주는 겁니다. 어떤 전쟁이냐 하면? 이스라엘은 두 번째 율법, 돌 판이 내려 왔을 때, 뭘 기억해야 했냐 하면,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 이렇게 멀쩡한 게 아니라, 모세라는 중보자가 우리를 막고 서서, ‘하느님, 날 죽이세요. 그리고 얘들을 살리세요.’라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산 것이다.’를 두 번째 돌 판을 보고 항상 환기(喚起)해야 됐어요. 우리는 은혜로 산 것이지 율법을 이렇게 지켜 산 거 아니다.’를 아는 그 믿음으로 야훼의 전쟁을 치러야 이기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이제 이스라엘이 안식일에 들어가기 위해선, 만나와 안식일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이 광야 40! 이게 6일이에요. 광야 40년 동안 배워야 할 것이 뭐냐면,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로 안식의 땅에 들어가는 거지, 우리의 힘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다!’를 알기 위해선! 그러면 그들 앞에서, 그 안식의 땅 앞에서, 그들 대신에 누가 죽어야 되잖아요? 안식일, 7. 안식일 전날 예수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안식일이 온 것처럼, 교회가 완성된 것처럼, 그들이 안식의 땅에, 이게 히브리서란 말이에요. 그들이 안식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그 앞에서, 바로 앞에서, 6일 째 저녁에, 누가 죽어야 된다 말이에요? 그 앞을 가로 막아 섰던 모세가 죽어야 된다 말이에요.

성경은 전부 예수만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가, 가나안 땅이 보이는 거기서 죽는 겁니다. 내가 죽어 너희들이 살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새 사람 이스라엘이, 은혜로, 예수로, 여호수아 앞세워, 아무 공로 없이 들어가는 거예요. 이걸 복음이라 그래요. 걸 여러분의 인생과 역사가 그려내는 거예요. 그리스교를 유치(幼稚)하게 도덕과 윤리(倫理)의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말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 마귀의 세상에, 선악과를 물고 내려와서, 마치 마귀처럼 사는 그림을 그려내고 있는, 그 이유를 아시겠어요? 여러분은 예수를 그려내면 돼요. 자꾸 여러분 자신을 그리려고 하지 마세요. 하느님이 그렇게 안 놔두세요.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는 예수만 그려져야 돼요. 하느님이 여러분을 그렇게 만드셨어요.

(갈라디아서 4:1-5) 1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상속자는 모든 재산의 주인이지만 그가 어릴 때는 종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2 그래서 자기 아버지가 정해 둔 때가 올 때까지 보호자와 관리자의 지시를 받습니다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는 자연숭배에 얽매여 종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4 그러나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5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율법 아래 나게 하셔서,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해 내신 것처럼, 우리 또한 죄 된 세상에, 선악과 입에 물려 내려 보내셔서, 은혜(恩惠)가 뭔지 잘 가르쳐서, 때가 되면 하느님나라로 다시 불려 올리시는 거! 요걸 역사가 담고 있는 그림이라 그래요. 종노릇에서 시작해야, 자유와 해방(解放)과 구원의 의미를 잘 알 수 있다 말이에요. 따라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통해서, 가장 먼저 고백해야 하고, 가장 마지막에 고백해야 하는 것은 동일하게 하느님, 저는 죄인(罪人)입니다. 하느님의 은혜가 떠나면 언제든지 마귀의 세간일 수밖에 없는 죄인이니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여야 하는 거예요. 그걸 믿음이라 그래요. 나를 믿는 게 아니라, 예수의 은혜를 믿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안식(安息)에 관한 말씀을 주시고, 이렇게 경고(警告)하는 거요.

(히브리서 4:1) 1 하느님께서 당신의 안식처에 들어가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살아 있으니 여러분 가운데 그 기회를 놓쳐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2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 기쁜 소식을 듣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도 그것을 믿지 않았으므로 그 말씀이 그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결합(結合)해내지 못하더라. 말씀을 듣고! 안식이 나오죠? 안식에 못 들어가는 자가 있는데, 그건 말씀을 듣고, 그것으로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사는 구나!’하고 말씀과 화합(和合), 결합해내지 못하는 자. ‘, 이거 열심히 지켜서, 성숙한 모습으로 가야지!’하는 사람들이 안식에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말씀이 유익(有益)되지 못하다, 그래요. 오히려 못 지킨 이스라엘에겐 유익했다 그랬는데, 이 사람들에게 유익되지 못했다 그런다니깐요.

여러분,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공고히 하는데 쓰이는 거지, 우리의 의지(意志)를 발동시키는 게 아녜요. 믿음을 공고히 한다는 게 뭐예요? 예수의 십자가를 더욱 꼭 붙든다는 뜻이에요. ‘이거 놓치면 죽구나!’ 이렇게.

(히브리서 4:10) 10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마치고 쉬신 것처럼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 간 이도 그의 일손을 멈추고 쉬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느님이 안식일(安息日)을 주시고, 그때는 절대 나가지마 그랬는데, 나간 놈들이 있었단 말예요. 그런데 안식일에 이미 들어갔다 이 말은, 안식이 뭔지 알았다는 뜻이어요. 그들은 쉬더라는 거요. 여러분에게 이 쉼이 있나요? 이 자유가 여러분에게 있냐고요? 이 자유가 여러분을 방종하게 할까요?

여러분 사람들이 감옥에서도 일을 하죠?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강제로 노역을 합니다. , 자유로운 사람! 무언가에 매여서 종노릇 하는 사람! 이 둘이 일을 할 때 어떤 것이 더 효율성이 있는 일이 되는지 아세요? 감옥에서 일 해보셨어요? 안 해 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하하하) 아무런 효율성이 없어요. 북한에서 자기 집 앞에 있는 호박하고, 집단 농장에 가서 농사짓는 호박하고 비교해 보면, 2배 차이가 난다 그래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허락하신 이 자유를 아는 이들이, 방종(放縱)해요? 놀아요? 불성실하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누가 은혜를 이야기 하면 논다 그래요. 이라는 건, 하느님을 찬송하면서, 나의 모든 걸 하느님께 맡기는 걸 이라 그러지, 아무 것도 안 하는 걸 쉼이라고 하지 않아요. 오해하지 마세요.

이제 그 자유가 있는 사람은 내 꺼기 때문에 해요. 내가 누군지 정확히 알기 때문에 한다니까요. 진짜 기쁘죠. 그들에겐 자랑이 없어요. 그들은, 그 쉼에 들어간 자들은, 자신이 입고 있는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에, 그런 세상적, 상대적 평가(評價)에 휘둘리지 않아요. 쉬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걸 많이 모아서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풍성하게 해야, 내가 가려진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힘들어 죽겠어. 그런데 그런 스펙이 별로 없어도, 하느님이 이미 ()’의 흰옷을 입혀 놓으셨기 때문에, 밖에서 부끄러움이 안 보여요. 그걸 아는 자가 쉰다고 하는 거예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자라고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안식에 들어간 자예요. 여러분 안식에 들어가셨어요? 아니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십니까?

그렇게 만나가, 율법이, 말씀이, 우리의 처음 자리를 확인케 하는 게 맞다면, , 말씀이 여기서 떨어질 때, ‘, 여기 구원이 필요한 곳이구나. 죄인이구나, 어두움이구나, 혼돈과 공허구나!’가 퍽퍽 터져야 돼요. 따라서 말씀이 올바로 전달된다는 건, 듣는 이들의 죄가 얼마만큼 확실히 드러나느냐로 결정이 되는 거예요.

말씀, 율법, 만나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거지, 그걸 모아서 에너지 삼아, 안식으로 가는 게 아니라고 성경이 분명히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의 자존심을 살살 긁어주는 그걸 듣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이 인간들이요! 그리고 그들을 붙들기 위해, 그 이야기를 해주는 겁니다. 그 안식의 이야기를 하고, 왜 갑자기! 갑자기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 얘기를 하는지 보세요.

(히브리서 4:12-13)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 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 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13 피조물치고 하느님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날칼!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칼입니다. 예수라는 그 말씀이 인간에게 떨어지면, 이게 쌍날칼, 메스가 되어, 메스는 누구에게 필요한 거죠? 죄인에게! 그 환부를 도려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어디까지 도려내야 하느냐 하면, 혼과 영과 골수와 관절까지! ‘, 이거 골수까지 다 죄구나. 이거 뼛속까지 다 죄네. 피까지 죄구나!’ 이걸 발가벗겨 드러내는 게 말씀이라는 거요. 그런데 너희들이 말씀을 지켜서 안식으로 간다고 하니까, 하느님이 다 죽인거야.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의 대주제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예요. 대제사장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 멜기세덱도 나오고, 제사 제도도 나오고 하는 거예요. 그걸 설명하면서, 갑자기 말씀을 던지는 게 뭐냐 하면, , 율법, 만나, 말씀이 너희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쪼개 드러내는 건데, 그걸 지켜서 에너지 삼아 안식으로 가겠다고? 그들은 죽는다는 뜻이에요. 이게. 그래서 히브리서 중간에 이 말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아까 히브리서 41, 2절을 봤을 때, 거기에서 그 들은 말씀을 믿음으로 화합지 않는 자들은 안식에 못 들어간다, 그랬죠. 여러분 어떤 말씀을 들으시든, 여러분은 그렇게 말씀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통해서, 부인된 자아! 아니 부인될 수밖에 없는 자아! ‘없음이니까. 그게 부인이에요.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자아! 그걸 확인하고, 그 속을 채우고 들어오신 예수를 찬송하고 감사하며 기뻐하시면 돼요. 그걸 안식이라 해요. 사바스(Sabbath), 안식! 피조물의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해 내는 걸 안식이라 그런다, 그랬잖아요, 창세기에서? 인크루지오 구조 설명하면서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성경이 죽음을 안식이며, 쉼이라 하는 거예요. ‘옛 자아의 죽음!’ 내 옛 자아의 죽음의 마지막 지점이 육적 자아의 죽음이잖아요? 이 육신의 죽음! 그 때 옛 자아가 죽는 거요. 새 몸으로 태어나는 거니까.

(이사야 57:1-2) 1 올바른 사람이 망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건한 사람이 사라져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다마는, 올바른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실상은 재앙을 벗어나 2 평화를 누리러 가는 것이다. 올곧게 사는 사람은 모두 자기 잠자리에 누워 편히 쉬리라.

죽음은 평안으로 들어가는 거래요 안식(安息)이에요. 안식으로 들어가는 거요. 여러분이 안식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여러분의 육적 자아가 죽어야 돼요. ‘난 없음 맞네요. 아니네요. 그래서 하느님이 십자가에서 날 죽이고 시작한 거군요.’ 뭘 쓸 데가 있어야지. 그래야 조금이라도 살려 놓지. 죽인 거예요. 그걸 깨닫는 걸 자기부인이라 그래요. ‘, 저거 깨고 싶은데 참는다.’ 이거 자기부인 아녜요. ‘확 이혼해 버리고 싶은데 에이, 내가 참는다.’ 그렇게 해서 사는 거는, 그게 잘 사는 거요? 그냥 법적으로만 있으면 돼요?

히브리서 기자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라는 건, 예수를 믿어라!’라고 외치는 거지, 착한 일 많이 해서 안식에 들어가라는 말이 아녜요. 한 번 잘 읽어 보세요. 제발 좀 앉아서! 드라마 같은 거나 보지 말고 맨날 음악이나 듣고, 하지 말고, 앉아서 성경을 곰곰이 읽어 보세요.

자고로 역사란 게쉬테히스토리아로 나눕니다. ‘ ‘게쉬테, 그 어떤 것도 개입이 안 된 진짜 역사예요. 순전한 역사! ‘히스토리아는 기록자의 정성이 개입된 거죠. 이 세상의 역사기록은, ‘게쉬테가 있을 수 없어요. 모든 인간은 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역사를 기록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중요한 건, 읽는 사람들도 그걸 히스토리아로 기록된 걸 히스토리아로 자기의 성정을 보태서 읽어버려요.

성경은 게쉬테!’ 예수라는 게쉬테가 기록되어 있는 거예요. 역사는, 예수라는 게쉬테가 기록되어 있는 건데, 사람들이 거기에 자기 이성과, 그동안 자기가 어줍잖게 배웠던 것들을 가미해서, 도덕과 윤리를 가미해서 히스토리아로 읽어내는 거죠. 그러니까 이게 율법이 되고 짐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성경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분을 기쁘게 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그걸 쟁취해 낼까? 이리로만 가는 거예요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을 배운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인간의 자존심을 챙기고 있었던 거요

성경(聖經), 역사(歷史), 우리의 인생(人生), 하느님을 그리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하느님을 몰라요. 인간만, 인간의 자존심만, 덕지덕지 붙어 있는 거예요. 더럽게! 여러분은 인생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세요. 그래야 쉴 수 있어요. 그들이 안식(安息)에 들어간 자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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