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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 / 행실대로 갚으시는 하느님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08 조회수1,502 추천수0 반대(0) 신고

도란도란 글방 

2020. 12. 08.

(공동번역성서)

그 행실대로 갚아 주시는 하느님

(로마2:6-11)

6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7 꾸준히 선을 행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고 8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면서 진리를 물리치고 옳지 않은 것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진노와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9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궁지에 몰리고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는 유다인들이 당하고 그 다음에는 이방인들까지 당할 것입니다. 10 그러나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영광과 명예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먼저는 유다인들이 누리고 그 다음에는 이방인들까지 누릴 것입니다. 11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차별없이 대하시니 말입니다.

 

가위 바위 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깔끔한 승부 방법으로, 인정을 받는 게임입니다. 가위 바위 보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고, 인도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 게임에서 발견되는, 인간들의 심리가, 제 관심을 끌뿐입니다. 얼마 전에 영국의 과학 대중지인 뉴사이언티스트지, 제가 앞서 말씀드렸던, 크리스티와 소더비의 가위 바위 보 사건이 예화가 된, ‘가위, 바위, 보 필승전략이라는 기사가 실렸어요. ‘어떻게 하면 가위 바위 보에서, 이길 수 있는가?’ 전략에 대해서 기사를 썼는데, ‘뉴사이언티스트지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위와 바위와 보자기 중에서, 가장 강한 걸, 바위로 생각하는 경향(傾向)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은연중(隱然中)에 상대가 바위를 낼 것이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이기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보자기를 먼저 낸다는 거예요. 모르셨죠? 실제 실험 결과, 첫 번째 게임에서 보자기를 낸 사람이, 압도적으로 가장 많았다 그래요. 그래서 크리스티가 가위를 내어서 이긴 걸 예화로 들어서, 설명을 한 거죠. 따라서 가위 바위 보 필승 전략은 첫 판엔 무조건 가위를 내라!’는 그런 기사였어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인간들의 동물적 본능에 관한 거예요. 분명, 가위와 바위와 보자기는, 각각이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어요. 가위는, 보자기를 자를 수 있지만, 바위에 의해 깨어지는 약점이 있어요. 바위는 가위를 깨뜨릴 수 있는 힘이 있지만, 보자기가 감싸버리면 지죠? 보자기는 그렇게 바위는 감쌀 수 있지만, 가위에게는 힘을 쓰지 못해요. 이렇게 가위와 바위와 보자기는, 각각의 장점과 단점으로, 서로 물고 물리는 용호상박(龍虎相搏)의 관계가 맞아요. 그런데 왜, 사람들의 마음속에, 바위가 가장 강한 것으로 각인이 되어 있느냐 말이에요. 바위는, 보자기가 감싸면 지는 거잖아요? 그러면 바위보다는 보자기가, 더 센 것이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강한 걸, 바위라고 인식(認識)을 하고 있을까?

 

사람들은요 깨고 부수어서 승리라는 것에는, 익숙해 있지만, 감싸서 승리하는 것에는, 동의가 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오히려 감싸않는 건, 내가 손해를 보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서, 지는 것으로 취급을 받는 것이 인간 세상이에요. 그래서 무조건 부수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이기기 위해서! 그런데 하늘의 승리는, 항상 감싸않으므로 비롯되는 승리라는 걸 아세요? 그걸 은혜라 그래요. 그래서 성전은, 항상 성령의 감싸않음, 덮으심으로 완성이 되도록, 성경에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성전은 바로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동거하게 될, 우리 자신이죠. 하느님은 성도를, 덮어서 완성해 내시는 분이에요. 그런데 그 은혜의 보자기는, 그 안에 바위를, 성전을, 옛 성전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부수어 내는 승리의 보자기예요. 그래서 보자기가 바위를 이기는 거예요. 인간의 선악구조에 의하면, 보자기와 바위의 세기는 비교가 안 되는 거예요. 바위에 비해서, 보자기는 약해 빠진 것으로 보이죠? 그러나 묵시(默示) 속에서는, 보자기가 바위를 덮어서 부수어 내는 게, 진리예요. 그래서 묵시 속의 삶의 원리와 역사 속 삶의 원리가, 정 반대라고 하는 거요. 거기가 바로 은혜의 나라요. 사랑의 나라요, 하느님이 왕이신 나라인 거예요. 가위 바위 보 안에도 그런 놀라운 철학이 들어 있어요.

 

따라서 인간들의 성 쌓기! 그 대 쌓기의 시도와 추구는, 성령의 보자기에 의해서 수시로 덮여서, 부수어지고 흩어지게 되는 거요. 그게 역사예요. 그렇게 해서, 요한묵시록에서 하늘의 장막! 하늘의 보자기로 덮여진 그 하늘 성전이, 하느님에 의해 완성이 되는 거요. 그러한 하늘 성전의 이야기가,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느님의 신에 의해, ‘없음이 이렇게, 공허와 흑암에 의해 덮여지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거죠.

 

그곳에서는, 그 어떤 피조물의 존재성과 주체성과 자율성도, 다 은혜의 보자기에 싸여서, 전부 삭제(削除)되고 부정(否定)되는 곳이에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늘 백성이, 홀로 존재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붙어 있는, 하늘 백성은 예수 한 분이에요. 성경에서 나머지는 다 지체(肢體)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런데 팔다리가 서로 떨어져서 자기의 존재성, 자기의 주체성을 챙기려고 할 때에, 독립성을 챙기려고 할 때, 자율성을 챙기려 할 때, 팔 다리가 머리에서 떨어져 나가서 제 마음대로 움직이면, 공포영화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역사라니까요. 지금!

 

그렇게 하느님나라는, 하늘의 백성이, 예수라는, 몸으로 홀로 존재하고, 나머지는 전부, 개별성과 개체성을 박탈당하고 차압당한, 집합적인 존재로서의, 교회만 존재하는 곳이, 하느님나라예요. 그래서 예수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된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요. 그래서 그곳에서는 자랑도 있을 수 없고, 차등도 있을 수 없고, 차이도 있을 수 없어요. 그런데 차등 상급론이 웬 말입니까? 팔이 좀 더 일을 많이 하지 않나요? 다리가 일을 더 많이 하지 않나요? 그걸 희생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지체는, 자기가 고생을 해서 일한 만큼, 자기가 먹게 되어 있어요. 손이 음식을 떠서 먹여 주지만, 그로 말미암아 손이 사는 거거든요. 그게 지체예요. 하느님나라란 말입니다. 그런데 차등 상급론이 웬 말입니까? 거룩한 하느님 나라 성전은,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서, 하느님의 은혜로만, 완료가 되는 거요. 하느님의 은혜의 보자기로 덮어서만, 시작되고 완료될 수 있는 게, 하느님나라란 말입니다.

 

오늘은 그러한 인간들의 성전 짓기, 집짓기가, 왜 그렇게 하느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지에 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로마서 2:8) 8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면서 진리를 물리치고 옳지 않은 것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진노와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바울로는 집을 짓는 걸, 진리(眞理)를 쫓지 않고 불의(不義)를 쫓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린 후에, 이게 죄의 본질이에요. 거기에는 하느님의 분노가 부어지게 된다. 아주 무서운 말을 하고 있단 말예요. 집짓기의 실체와 내용이 어떤 것이기에, 성경이 그것을 대표적인 죄로 지목을 하고, 이러한 무서운 저주(詛呪), 선언(宣言)을 하고 있는 것일까?

창세기로 가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드릴게요. 거기에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주 잘 나타나 있어요.

(창세기 11:3-9) 3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 내자.'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4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5 야훼께서 땅에 내려 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6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7 당장 땅에 내려 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 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8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 두었다. 9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온 땅을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바벨이라는 단어 자체가, ‘혼란스러운, 혼잡한이런 뜻이에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바울로가 오늘 본문에서 경고하고 있는 인간들의 집짓기는, 외모(外貌)로 판단하시지 않는 하느님 앞에 인간들의 외모! 행위(行爲)를 들이대는, 인간들의 세상 속 성전 짓기라 그랬어요. 그게 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집짓기에 대해 경고한 사도 바울로가, 그 단락을, ‘하느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로 맺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바로 그러한 인간들의 세상 속 성전 짓기, 집짓기의 죄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에피소드가 지금 읽은 바벨성, 바벨탑 건설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4절을 보면 인간들이 왜 바벨론을 건설하는 지가 세 가지로 나타나요.

그 첫 번째가 우리의 힘으로 하늘에 닿자그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와 동일한 이유예요, 그것이. ‘선악과 먹고 하느님처럼 되자!’가 우리 힘으로, 이 존재를 갖고, 하느님에게 닿자는 뜻이거든요. 그것이요! 그 선악과의 타락의 현장이, 바벨탑 건설의 현장에서 재현되고 있는 거요. 이사야서로 가면 그런 인간들의 바벨론 건설의 실체가, 기실 어떠한 것이었는지가 잘 설명이 되고 있어요.

(이사야 14:4) 4 너는 바빌론 왕에게 소리 높여 풍자의 노래를 불러 주어라. 웬일이냐, 폭군이 죽다니, 그 시퍼런 서슬이 사라지다니.

(이사야 14:12-15) 12 웬일이냐, 너 새벽 여신의 아들 샛별아(계명성), 네가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민족들을 짓밟던 네가 찍혀서 땅에서 넘어지다니! 13 네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아니하였더냐? '내가 하늘에 오르리라. 나의 보좌를 저 높은 하느님의 별들 위에 두고 신들의 회의장이 있는 저 북극산에 자리잡으리라 14나는 저 구름 꼭대기에 올라 가 가장 높으신 분처럼 되리라.' 15 그런데 네가 저승으로 떨어지고 저 깊은 구렁의 바닥으로 떨어졌구나!'

이게 마귀 이야기죠? 사탄 이야기! 그런데 창세기의 바벨성과 바벨론이, 70인 역으로 가면, 같은 단어라 했죠? 바벨탑 건설의 그 현장의 이야기가, 이 바벨론이란 나라 안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거예요.

바벨탑 건설의 현장에서, ‘자 우리가 하늘에 오르자! 우리의 힘으로 하늘에 오르자!’ 그런데 그 바벨론 왕을 마귀에 빗대어서 이야기 하는데, 그 바벨론 왕이, 바벨론에서 하려고 했던 게, 똑같더라는 거예요. 그 바벨론 왕이 누구겠어요? 루시퍼만을 지칭하는 걸까요?

바벨탑 건설의 현장에서, 하나가 되어 바벨탑을 짓고 있던 자들이 인간이에요. 보편적인 사람! 그런데 그들은, 집짓기란 단어가 그거라 그랬죠? ‘내가 주인공이 되어, 내 유익을 위해 하나로 모으는 것그게 집 짓기라고, 그 모든 인간들이, 다 바벨론 왕이에요. 그 세력을 집합적으로, ‘마귀!’라고 하는 거예요.

마귀를 딴 데서 찾으면 안 돼요. 그 마귀라는 실체는 있어요. 분명히! 그런데 그건, 우리 안에 있는 마귀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걔한테 다 책임전가를 시키면 안 된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이런 말씀은 다 에게 하는 말씀으로 읽어야 돼요. ! 하느님께서 바벨론 왕에게 뭐라고 일갈하세요? 지금부터 바벨론 왕은, 전부 여러분이에요. 느부갓네살? 여러분이에요. 그게!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겠다고? 너는 이제 음부에 빠뜨려서, 맨 밑으로 떨어지게 될 거야.’ 이것이 하느님의 일갈(一喝)이에요. 인간은 절대로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서, 하느님처럼 될 수 없는 존재임을 분명히 하시는 거예요. 그게 라는 걸 분명히 하시는 거예요. 그게 히브리스’, ‘자기 자리를 떠난 것’, ‘교만이라 그랬잖아요? 그게 하느님께서 분노로 깨버리실, 죄의 본질 중에 핵심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역사는,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에 올라서, 도덕 지키고, 윤리 지키고, 율법 지키고, 제사지내서, 착하게 살아서, 인간들이 추구하는 행복을, 쟁취하겠다는, 그런 추구와 시도로 점철이 되고 있는 거예요.

잘 생각해보세요. 이 바벨탑 건설의 에피소드가, 노아의 홍수 바로 뒤에 이어져 있어요. 그러면 탑을 하늘 꼭대기까지 쌓자는 건, 뭘 모면(謀免)하겠다는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 다시는 홍수에 죽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노아의 후손들이요, 그게 하느님 경외(敬畏)입니까? 홍수 후에 인간들이 생각해 낸 것이 고작, 탑을 하늘까지 쌓아서, 홍수를 면하자는, 방법론적 해석에 머물더라는 거요.

 

그렇게 인간들의 바벨론 건설! 집짓기의 그 첫 번째 패역함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에 닿아, 하느님처럼 행복하게 살아보겠다는 시도(試圖)였다면, 그 두 번째가 이름을 날려예요.

(창세기 11:4) 4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인간들의 집 짓기 안에는, 인간들의 자기 이름 내기라는 죄성(罪性)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높여서, 자기를 지켜내는 성()이요, 망대(望臺)로 삼으려고 최선을 다해요. 그게 바로 성 쌓기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성을 쌓는다는 사실(fact)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안에 인간들의 어떤 시도가,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지를 보라는 이야기예요. 이게 바로 우리의 성이다. 내 이름이! 인간들의 이름이! 그래서 그렇게 이름들을 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거예요. 교회에 나가도, 주보에다 이름을 적어 주면, 감사헌금 많이 합니다. <심지어 예전에 우리 창4동성당 지을때, 벽돌에다 이름을 하나씩 써 준다고 헌금 요구를 했는데, 그거 벽돌 쌓아지면 이름이 안 보이는데도, 그게 그렇게 좋아서 거기다가 이들을 새기고 했다고요. ‘이름 내는 것!’>그런데요 성경은 정반대로 이야기를 해요.

 

(잠언 18:10) 10 야훼의 이름은 튼튼한 성루, 무죄한 사람에게 안전한 피신처가 된다.

사람의 이름은, 역사 속에서 삭제되고 부정되도록 주어지는 거예요. 사람의 이름이 절대 자신을 보호하는 성전(聖殿)이나, 망대(望臺)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가는 게, 성도의 본무(本務), 자신의 이름을 내어서 하느님의 일을 돕는 자가 되는 게, 성도의 본무가 아녜요. ‘고지론, 성경을 완전히 반대로 해석하는 거요.

여기에서, ‘튼튼한 성루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가, 정확하게 번역하면, ‘strong tower’예요. Strong tower! 바벨탑 건설의 현장에서, 인간들은 뭘 'strong tower'라고 알고 있어요? ‘내 이름을 높이는 게 'strong tower'라고 이야기 하는데, 하느님은 여기에서, 야훼의 이름이, ‘strong tower.’ 이야기 하는 거예요. ‘야훼의 이름이 튼튼한 성루다!’

 

(시편 118:25-26) 25 주소서, 야훼여, 구원을 주소서. 주소서, 야훼여, 승리를 주소서. 26 야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우리가 야훼의 집에서 그대들을 축하하리라.

복 있는 자는 야훼의 이름으로 와야 돼요. 자기 이름으로 가면 안 돼요. 야훼의 이름으로 가야 된다는 건야훼가 담아내는 것만 담고 가는, 바보 되라는 거예요. 비워지란 뜻이에요. 내 이름이 삭제(削除)된다는 건, 나의 존재성(存在性), 야훼에 의해 차압이 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가 복 있는 자다.’라고 이야기한다 말입니다. 그렇게 야훼의 이름으로 오신 분에 의해서,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삭제당하고, 다른 이름을 받게 되는 거예요.

 

(요한묵시록 2:17) 17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감추어 둔 만나를 주겠고 또 흰돌도 주겠다. 그 돌 위에는 새로운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이름은 그 돌을 받는 사람밖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 누구 이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거예요. 안디오키아에서부터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었죠? ‘야훼 이름을 부르는 자는 산다. 그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로마서의 바울로 이야기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자기 이름을 부르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야훼의 이름을 불러야 산다. 그냥 알지도 못하고 막 부르면 산다는 뜻이 아녜요. 내 이름 말고, 야훼 이름을 불러야 산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 역사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바벨론을 건설하면서,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살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한 업적(業績)과 행위와 공로(功勞)를 내 놓아서, 자신의 명성(名聲)을 쌓는다 할지라도, 하느님 앞에 가면, 그 이름을, 삭제 당하게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 ‘그 이름을 없애버리고 새 이름을 준다.’라는 건, 그가 그 이름하에 쌓아 놓은 모든 것이, ‘없음이 된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갖고 가서 상을 받겠다는 게, 성화주의 아닙니까, 성화론?

 

하느님은 그 역사 속 행위를 근거로, 어떤 상()도 마련해 두고 계시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그건 이사야서에도 이 예언이 되어 있던 겁니다.

(이사야 62:1-2) 1 시온을 생각할 때, 나는 잠잠할 수가 없다. 예루살렘을 생각할 때,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의 정의가 동터 오고 그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르기까지 어찌 잠잠할 수 있으랴? 2 마침내 뭇 민족이 너의 정의를 보고 모든 제왕이 너의 영광을 보리라. 야훼께서 몸소 지어 주실 새 이름, 사람들이 그 이름으로 너를 부르리라.

새 이름으로! 그러니까 성도의 하늘 백성으로의 회복은, 하느님의 힘을 이용하여, 자기 이름을 내고 유명해지는 쪽으로 지향(指向)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쪽으로 지향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로가 맨 마지막에, 디모테오후서에서 다 떠났다. 다 떠났다. 디모테오야, 잠바 좀 갖고 와!” ! 오죽하면 그 주변에, 그 추위를 해결할 잠바 하나 줄 놈이 안 나온 거죠. ‘잠바 좀 갖다 줘!’ 끝이에요. 그것이! 삭제 당하는 거예요.

 

(요한묵시록 22:4) 4 그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의 이마에, 예수의 이름이 있다는 거, 그의 이름! 예수의 이름! 야훼의 이름이, 성도의 이마에 새겨져 있더라는 거예요. 이름을 빼앗긴 거예요, 자기 이름을!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하신 그 약속은, 너희들의 같잖은 이름 다 빼앗아 버리고, 진짜 떨치는 예수의 이름을 내가 주겠다는 뜻예요. 그게 아브라함의 인생이었잖아요?

 

(창세기 12:2)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바꾸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건 자기 자신의 존재성의 상실을 말하는 거고, 예수의 은혜라는 보자기 밑에서, 다시 살아나게 됨을, 의미하는 거요. 그러나 마귀의 세력(勢力),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내가 위해, 바벨론을 건설(建設)한다 말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하늘로 향하던, 바벨론의 실체(實體), 요한묵시록이 어떻게 묘사를 하고 있는지 보세요. 바벨론이에요, 요게

 

(요한묵시록 17:3-5) 3 그리고 그 천사는 성령으로 나를 감동시켜 광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진홍색 짐승을 탄 여자(음녀바벨론)하나를 보았습니다. 그 짐승의 몸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히 적혀 있었고 머리 일곱에 뿔이 열 개나 달려 있었습니다. 4 이 여자는 주홍과 진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단장하고 있었으며 자기 음행에서 비롯된 흉측하고 더러운 것들이 가득히 담긴 금잔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5 그리고 그 이마에는 '온 땅의 탕녀들과 흉측한 물건들의 어미인 대바빌론' 이라는 이름이 상징적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바벨탑의 현장에서,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내자!’라고 한 이름이, 바로 요 이름이었어요. 그래서 같은 바벨론에서, 그 이름이 등장하는데, 요건 하느님이 부수시는 이름이라 말이에요. 바벨론의 특징이, 세상의 이름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잖아요? 아니 지금도 우린 이렇게 살아요.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다니엘서로 가면요, 그 자기 이름을 내기 좋아하는 바벨론의 그 왕! 느부갓네살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걸 볼 수 있어요. 잊지 마세요. 바벨론 왕은 항상 입니다. 그리고 이 느부갓네살이 구원을 받았을까? 못 받았을까? 이런 거에 관심을 두지 마세요. 우리를 거기다 집어넣고,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까를 보시면 되는 거예요.

(다니엘 4:26-27) 26 꿈을 꾸고 열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왕은 바빌론 궁궐 옥상에 있는 동산을 거닐면서 27 혼자 중얼거렸다. '내 손으로 공들여 세운 대바빌론, 이것이 바로 내 영광을 떨치는 나의 왕도로다.'

내가 지었다!’라는 거예요. ‘이 성전! 내가 지었다는 거예요. ‘바벨론 성! 내가 지었다.’ 그런데 창세기 11장에선 하느님이 그거 부쉈잖아요? 여기서도 부수어져야 될 거 아녜요? 그때 바벨론 왕이, 하느님에 의해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뜯어 먹으면서, 짐승처럼 7년을 살게 됩니다. 이게 부수어지는 거예요.

 

(다니엘 4:30) 30 느부갓네살은 당장에 그 말대로 되었다. 그는 세상에서 쫓겨나 소처럼 풀을 뜯어 먹으며 몸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 젖었고, 머리는 독수리 깃처럼 텁수룩하게 자랐으며 손톱 발톱은 새 발톱처럼 길어졌다.

이게 다 저주 받은 짐승의 모습이에요. 이게 구나를 안 거예요. ‘바벨론 이거 내가 지었어, 내 능력과 힘 어떠냐?’라고 자랑했더니, 하느님이 짐승에 불과한 그의 모습을, 들로 쫓아내서, 보여준 거예요.

 

(다니엘 4:29) 29 너는 세상에서 쫓겨나 들짐승과 어울려 살며 소처럼 풀을 뜯어 먹을 것이다. 그렇게 일곱 해를 지낸 뒤에야 너는 왕국을 다스리는 분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라는 것과 그분은 자기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나라를 맡기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언제까지 짐승으로 살아요? ‘하느님이 지으신 거구나, 하느님이 주신 거구나!’ 이거 알 때까지, 짐승으로 사는 거요. 7년간의 광야 생활을 통해서, 자기의 이름과 명성(名聲)을 삭제당하고, 부정당하는 거예요. ‘네가 뭘 지었다고?’ 이거 물으시는 거예요. 우리 인생이에요, 그게요! ‘네가 뭘 지었다고?’ 그래서 결국에는, 자신에게서 일어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恩惠)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거요.

 

그러니까 바벨론 건설! 역사 속, 성전 건설! 죄인들의 집짓기가, 하느님에 의해 공격(攻擊)을 당하는 게 성도의 인생인 거고, 그 결과, 성도들은 하느님의 주인 되심,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깨닫게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31절로 가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어떤 고백을 하는지 잘 나타나 있어요.

 

(다니엘 4:31) 31 '나 느부갓네살은 기한이 차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 보다가 제 정신이 들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칭송하였다.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를 우러러 찬양하였다. 주는 영원히 왕위에 앉으시어 만대에 이르도록 다스리실 왕이시라.

이게 에페소서 1장에 나오는, 창세전 언약(言約)의 목적(目的)이었잖아요? 이게! 바벨론 건설의 주역인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이름을 자랑하다가, 칠 년간, 광야에서 풀을 뜯어 먹는 경험을 하고, ‘나는 짐승이구나.’를 알게 되는 거요. 전도서 3장에도 나오죠.

 

(전도서 3:18) 18 사람이란 본디가 짐승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밝히 보여 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뭐라 그래요? ‘내가 짐승이란 걸, 아는 게 우리 인생의 목적이다.’ 그러잖아요? 굉장히 기분 나빴죠? 그런데 그게 맞는 거예요. 다니엘서 5장으로 가면, 하느님께서 바벨론의 왕을, 짐승으로 밀어 내리셨던 이유가 조금 더 명확하게 기술이 되어 있어요.

 

(다니엘 5:20-21) 20 그렇게 마음이 높아져서 거만을 떨며 자기 생각만 내세우시다가 그만 옥좌에서 쫓겨 나 영화를 빼앗기고 21 세상에서 쫓겨 나 그 생각이 짐승과 같아져서 들나귀하고 어울려 지내며 소처럼 풀을 뜯어 먹고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 몸을 적시며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인간의 왕국을 다스리는 분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셨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야 왕으로 세우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신 것입니다.

바벨론! 세계 최강의 나라! 그 나라의 왕을, 소처럼 만들어서, 교회에게 뭔가를 설명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에요. 이 사람은 뭐냔 말이에요? 도대체가! 우리 때문에, 한 나라의 왕이 7년 동안 소처럼 풀만 뜯어 먹으면서, 광야(廣野)에서 살았다니까요. 우리의 인생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우리가 바로 바벨론의 왕이잖아요? 건설 현장의 주역이잖아요, 우리가?

하느님이 우리를 광야 인생 속에 던져서, ‘너희는 짐승이야, 너희들이 그거 지을 수 없는 거야. 성전은 내가 짓는 거야!’ 이거 가르쳐 주는 것. 거기에서 우리 이름이 부정당하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의 주권(主權)과 그분의 능력(能力)과 영광(榮光)! 그분의 하느님 되심을, 배우는 거예요. 다른 거 없어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자기의 존재성을 박탈당한 사람이에요. 하느님이신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자기의 존재성을 박탈(剝奪)당하십니다, 하느님의 뜻대로만 움직였어요. 그래서 하느님이 시키는 일만 했다 그래요. 거기에서 예수의 존재성은, 차압(差押)당하는 거예요. 하느님에게! 그랬더니, 결국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여 버리시네요. 하느님이! 그리고 나서 이름을 주세요.

 

(필립보서 2:7-9) 7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게 우리의 인생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예수가 이 삶을 먼저 산 거란 말이에요. 우리는 이 이름을 받는 거예요. 내 이름 차압당하고, 이 이름 받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새 이름의 수여(受與) 이전에, 반드시 선행(先行)이 되어야 하는 건, ‘라는 육적 존재의 죽음이에요. 그래야 새 이름이 주어져요.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은 내 이름이 부수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오롯하게 드러나게 되는, 죽음의 행진이어야 하는 거예요.

아까 이사야서에서, 바벨론을 뭐라고 불렀어요? ‘계명성!’ 새벽별이라는 뜻이거든요. ‘, 내가 계명성이야, 가장 밝은 별이니까! 계명성! 내가 계명성이야!’ 그건, 자기가 계명성이라고 우기는, 계명성이고 싶어 하는 인간들을, 하느님의 질책하심, 하느님의 비아냥이었어요. ‘, 계명성이여! 네가 계명성이야?

 

(요한묵시록 22:16) 16 나 예수는 내 천사를 보내어 모든 교회에 이 모든 것을 증언하게 하였다. 나는 다윗의 뿌리에서 돋은 그의 자손이며 빛나는 샛별이다.'

이게 내가 새벽별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이름 받으라는 거요. ‘너희들이 계명성 되려고 하는 게, 너희들이 지금 하느님처럼 되겠다고, 하늘로 올라가는 바벨탑 쌓는 거야! 내가 새벽별이야! 내가 계명성이야! 그러니까 이 바벨론들아, 나를 믿어라.’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성경이에요. 그렇게 성도는, 바벨론 왕으로서의 자신의 이름을 부정당하고, 삭제(削除)당하는 과정을 통과하며, 결국에는 그 이름 전체를, 예수님에게 빼앗기는 삶을 살아야, 맞는 거예요.

 

(요한묵시록 2:3) 3 너는 잘 참고 내 이름을 위해서 견디어 냈으며 낙심하는 일이 없었다.

보세요. 성도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못 살도록, 끌려가게 되어 있단 뜻이에요. 성도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만 살도록, 자신의 인생을 하느님께 차압(差押)당하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뭐 대단한 일을 하는 자로 성숙(成熟)된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존재일 수 도 없는 자로 드러나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야 예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영광(榮光)이 돋보이게 되고, 찬송 받게 되는 거니까요.

저는 고난을 받을 때마다, 반복(反復)하여 느끼는 게 있어요. 그럴 때마다, 성경이 있는 글자, 말씀 하나 하나가 수박만큼 크게 보여요. 그건 불변의 진리예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여러분의 육을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열심히 노력하고, 또 그런 걸 요만큼씩 맛볼 때, 여러분 삶에서 말씀이 안 보여요. 여러분 성경 한자 한자를 수박만큼 크게 보려면, 하느님이 여러분을 삭제해 나가는 과정을 반드시 겪어야 돼요.

 

(사도행전 15:16-17) 16 '그 뒤에 내가 다시 돌아 와 무너진 다윗의 집을 다시 지으려니 허물어진 곳을 다시 고치고 그것을 바로 세우리라. 17 그리하여 살아 남은 백성들이 다 주를 찾고 내 백성이 된 모든 이방인들까지도 모두 주를 찾게 되리라.

(이사야 43:7) 7 그들은 내 백성이라고 불리는 것들, 나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한 내 백성, 내 손으로 빚어 만든 나의 백성이다.

이게 성도의 실존(實存)이에요. 하느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자!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내 영광을 드러내가 위해, 도구(道具)로 창조한 자란 뜻이에요. 그게 성도예요.

 

다시 바벨탑 건설 현장으로 갑니다.

(창세기 11:1-2) 1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 2 사람들은 동쪽에서 옮아 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를 잡고는

바벨탑이 세워진 곳이 시날 평지, 그 시날 평지라고 번역이 된 단어, ‘비크아라는 단어는, 성경에 별로 안 쓰이는 단어예요. 평지(平地)! 바벨탑이 세워진 그 땅! 정확히 그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이 있는데, 그곳이 에제키엘서 37장이에요.

 

(에제키엘 37:1-5) 1 야훼께서 손으로 나를 잡으시자 야훼의 기운이 나를 밖으로 이끌어 내셨다. 그래서 들(‘비크아,’ 시날평지) 한가운데 이끌려 나가 보니 거기에 뼈들이 가득히 널려 있는 것이었다. 2 그분이 나를 그리로 두루 돌아 다니게 하셨다. 그 들바닥에는 뼈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모두 말라 있었다. 3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 날 것 같으냐?' 내가 '주 야훼여, 당신께서 아시옵니다' 하고 아뢰니, 4 그분이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마른 뼈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5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 속에 숨(생기! 르와흐)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그렇게 하느님의 신(기운)이 이제 덮여지는 거예요. 그 죽은 것들 위에, 덮여지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성전을 짓겠다고 하는 그들의 노력 위로, 지붕이 벗겨지고, 하늘의 장막이라는, 은혜의 장막이 내려와서, 이제 그들을 덮는 거예요. 그게 르와흐라는 거예요. 그렇게 생기가 덮었더니, 그 죽음의 현장이, 산 자의 모임! 군대로 살아나더라는 거예요. 그게 교회라는 거예요. 교회!

 

그러면 그 교회의 탄생 현장인 사도행전 2장을 한 번 떠 올려 보세요. 거기에도 다락방에 죽은 뼈들이 모여 있죠? 그런데 그 죽은 뼈들 위로, 불의 혀 같은 성령이 임하세요. 그랬더니 그들의 언어가 혼잡(混雜)해졌어요. 그것은 창세기 11장의 그 그림과 연결해서 생각을 하면, ‘흩어지는 거예요. ‘바벨이 되는 거예요 그게 혼란스럽다, 혼잡하게 되다.’ 이런 뜻이니까.

그런데, 그러한 하느님의 흩으심 속에서, 하느님의 성전, 교회가 완성이 되더라는 거예요. 뭐가 달라요? 바벨탑의 현장과! 성령이 덮는다는 게 다른 거예요. 성령으로 교회되는 거예요. 성령으로 하늘에 오르는 거예요. 아니 엄밀히 말해서, 하늘은 너희들이 탑 쌓아서 올라가는 게 아니라, ‘내가 갖고 내려오는 거다를 설명해 주는 게, 사도행전 2장이란 말입니다. 그걸 바벨탑 건설 현장과, 에제키엘서 37장의 마른 뼈 사건과 연결 시켜 보세요.

시날 평지에, 죽은 자들이, 흩어짐을 면하겠다고, 하나 되어 집을 지어서 하늘에 올라가겠다고, 바벨론을 건설하고 있어요. 이게 바벨탑 건설 현장예요. 하느님은 그걸 흩어 버리셔야 돼요. 그 행위 자체가, 죽은 행위예요 고게! 그래서 에제키엘서 37장에서, 그걸 마른 뼈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은 거예요. 그게!

인간들이 역사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에 도달해 보겠다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긴 하는데, 그 모든 시도와 추구들이 다 죽은 거다라는 거예요. 하느님은 그걸 살려내야 되죠. 그러기 위해선, 인간들의 집짓기, ‘, 우리가 하나 되어 흩어짐을 면하자라는, 그 인간들의 집짓기가 부수어져야 돼요. 인간들의 집짓기가 파해지려면, 성령이 그들을 덮어서 그들을 흩어야죠.

사도행전에도 나오잖아요? 성령이 임해서 교회가, 하나로 묶여지자마자, 또 흩어지잖아요? 그게 오순절 날 다락방에서 실현이 된 거요. 하느님이 인간들의 집짓기를 흩어버리셨더니, 하느님의 성전이 하나로 완성이 되더라는 거요. 그래서 그들이 그 흩어진 언어로, 한 메시지를 듣는 거란 말이에요. 이게 진짜 하나 됨이다를 보여주는 거요.

쉽게 말해서, 인간들의 이름이 부수어진 현장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연합(聯合)이 된 교회가 탄생하더라는 거요. 그러니까 죽은 뼈, 먼지들은, 스스로 힘을 규합할 수도 없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그 죽은 뼈들이 스스로의 힘을 발휘(發暉)해서, 행복에, 하늘에 도달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言語道斷)인 거예요.

하느님은 성령으로 그들을 덮으셔서, 그들의 그러한 시도(試圖)들을, 율법주의와 유대주의를 부수심으로 말미암아, 성화주의를 부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은혜의 장막 아래로 모으시는 거요. 그게 새 창조이고, 그게 구원인 겁니다.

 

(예레미야 8:1-2) 1 내 말이니, 잘 들어라. 그 때(회복)가 오면, 사람들은 유다 왕들의 뼈, 고관들의 뼈, 사제들의 뼈, 예언자들의 뼈, 예루살렘 주민들의 뼈를 무덤에서 파헤쳐, 2 해와 달과 하늘의 모든 별 아래 드러나게 하리라. 그렇게도 좋아서 섬기고 찾아 다니며 물어 보고 예배드리다가 그 아래 드러나고 말리라. 그 뼈들을 거두어 다시 묻어 주는 사람조차 없어 쓰레기처럼 땅에 굴러 다닐 것이다.

이렇게 율법을 지키고 제사(祭祀)를 지내서, 하느님의 선민으로서의 삶을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했던, 이스라엘! 이게 이스라엘의 실체였단 말입니다. 다 뼈더라는 거예요. 분토, 이게 더스트(dust), 먼지예요. ! 거기에 생기(生氣)가 부어지지 않으면, 그건 그냥 먼지다라는 뜻이에요. 바로 그 생기가 하느님의 은혜(恩惠)! 성령이란 말입니다. 그 보자기! 그 보자기에 덮여서, 인간들의 성전 짓기가 돌 위에 돌 하나도남기지 않고, 부수어지는 것, 인간들의 이름 내기. 하느님 흉내 내기, 이게 부수어지는 것, 그럴 구원이라 한단 말예요. 살리시는 분은 하느님 한 분이에요.

 

(신명기 32:39) 39 이제 알아라. 내가 바로 그다. 나 외에는 신이 없다. 죽이는 것도 나요 살리는 것도 나며 찌르는 것도 나요 고쳐 주는 것도 나다. 내 손에 잡은 것을 빼낼 자 없다.

이분이란 말이에요. 그게 . 그 신이! ‘르와흐나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나만 살려낼 수 있다는 거요. 너희들이 탑 쌓아서 어디로 올라오겠다는 거야? 그 이야기 하는 거요. 바로 그러한 하느님의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능력과 영광과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 역사와 인생이 존재하는 거란 말이에요.

이렇게 유대주의와 율법주의를 파하시고, 은혜로 덮으셔서, 당신의 백성을 창조해 내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요 한 곳만 예로 한번 설명해드릴게요.

 

(창세기 30:14-16) 14 보리를 거둘 때(맥추절, 오순절)가 되어 르우벤이 밭에 나갔다가 자귀나무를 발견하여 어머니 레아에게 갖다 드렸다. 라헬이 이것을 알고 레아에게 졸라 댔다. '언니 아들이 캐어 온 자귀나무를 좀 나누어 주구료.' 15 그러나 레아는 '네가 나에게서 남편을 빼앗고도 무엇이 부족해서 이제 내 아들이 캐 온 자귀나무마저 달라느냐?' 하며 역정을 내었다. 그러자 라헬은 '언니 아들이 캐 온 자귀나무를 주면 오늘 밤 그분을 언니 방에 드시도록 하리다' 하였다. 16 저녁때가 되어 야곱이 밭에서 돌아 오자 레아가 나가서 맞으며 '당신은 오늘 제 집에 드셔야 합니다' 하며 자기 아들이 캐 온 자귀나무로 치른 값을 해 달라고 하였다. 야곱은 그 날 밤 레아와 한 자리(동침)에 들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건, 야곱이 교회를 낳는 그림인 거예요. 그런데 어떠한 방식으로 야곱의 정실 자식이 태어나는지 잘 보세요. 이 안에 인류 역사 전체가 들어가 있어요.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외삼촌 라반이 레아를 줬을 때, 야곱은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7년을 더 일하겠다고 이야기했어요. 이건 아니라는 뜻이에요. 야곱이 사랑하는 이는 라헬이에요. 그래서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을 마다하지 않고, 일을 했어요. 신랑의 피로, 신부가 얻어지는 모습이에요. 레아는 라헬의 언니이고, 먼저 야곱의 신부가 되기는 하지만, 야곱의 정실부인은 아닌 거예요. 의미상으로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레아는 라헬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선택된, 구약의 이스라엘을 모형하고 있는 거예요. 먼저 줄기에 붙어 있다가 잘려나가고, 뒤의 것이 접붙임을 받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건 아브라함과 하갈, 사라의 이야기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모습이에요. 이게 언약의 조상들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잘 보세요. 자 이게 우리의 모습이란 말예요.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먼저 아들을 낳죠? 하갈이 먼저 신부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아들을 낳아요. 그런데 하느님이 그 이스마엘을 아들로 안 쳐줘요. 인간의 육적 힘, 생식 기능으로 만들어 낸, 어떤 열매를, 하느님이 아니라고 부정해 버리시는 거예요. 그걸 바울로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갈라디아서 4:22-29) 22 율법서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둘을 두었는데 하나는 여종의 몸에서 났고 하나는 종이 아닌 본부인의 몸에서 났습니다. 23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인간적인 육정의 소생이었고 본부인에게서 난 아들은 하느님의 약속으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24 이것은 비유로 한 말인데 그 두 여자는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산에서 나와서 노예가 될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그것이 하갈입니다. 25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나이산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지금의 예루살렘에 해당합니다. 현재 예루살렘은 그 시민들과 함께 종노릇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26 그러나 하늘의 예루살렘은 자유인이며 우리 어머니입니다. 27 성서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즐거워하여라. 아기 못낳는 여인이여, 홀로 사는 여인의 자녀가 남편있는 여인의 자녀보다 더 많으리라.' 28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사악과 같은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29 그러나 그 때 육정으로 난 자식이 성령으로 난 자식을 박해하였는데 지금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중요한 거예요. 육의 생식 능력으로 자식을 낳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거 하느님이 안 쳐주신다는 뜻이에요. 아브라함의 진짜 아내에게서는, 약속! 즉 은혜에 의해서, 이사악이 나오는데, 가짜 아내인 하갈에게서는, 육의 생식작용에 의한, 육신의 아들이 태어나요. 그 때는 아브라함이 힘이 남아 있었다는 뜻이에요. 이사악을 낳을 때는? 마른 장작이었어요. 그걸 바울로가 두 언약에 비유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해서, 자기들의 사유 자원으로 생산해 낸 건, 옛 언약! 즉 율법주의라고 하고, 완전히 무력한 죽은 뼈의 상태에서, 오직 은혜로 후손을 생산하게 된 사라를, 새 언약이라고 하는 거요. 그래서 바울로가 두 언약이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생산된 후손을, ‘성령을 따라 난 자라고 이야기를 해요. 성령이 덮어서, 보자기로 덮어서 난 그 자만, ‘하느님의 자식이다라는 뜻예요. 바로 이 이야기가 창세기 30장에서 모형으로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에서!

 

다시 창세기 30장으로 가면, 그때가 麥秋 때라고 그러죠? 맥추절은 다른 말로 오순절이에요.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이 지금 그림자로 나타난다는 것을, 여러분은 추론해 볼 수 있어야 되는 거죠. 말씀드렸다시피, 첫 번째 부인인 레아는, 라헬이라는 진짜 신부가 오기 전에, 진짜 신부의 중요함을 돋보이게 하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한 거예요. 레아는 하갈처럼, 육신의 힘으로 자식을 잘 낳았어요. 많이 낳았어요. 그런데 라헬은 태가 닫혀서, 자식을 못 낳았어요. 이때까지도 한 사람도 못 낳았어요.

어느 날 레아의 아들이, ‘합환채!’ 이게 히브리말로 드다임이라는 건데, 자줏빛 꽃이 피는데, 그 뿌리가 사람같이 생겼어요. 그걸 먹는 거거든요. 이게 환각작용도 있고, 마취작용도 있어서, 사람들이 정력제 또는 임신촉진제로 많이 썼다 그래요. 어머니 레아에게 선물을 해줘요. 그건 지중해 지방에서만 나는데, 거기서도 좀처럼 구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귀한 거죠. 합환채는, 임신을 하는데 아주 긴요하게 쓰이는 어떤 것이라고 알고 계시면 돼요.

라헬이 오랫동안, 자신의 태가 닫혀 있음을 안타가워 하던 차에, 그 합환채를 보게 된 거예요. ‘나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까지 내려간 거예요. 라헬은, 후손을 갖기 위해, 그 합환채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했던 거예요. 레아는 그런 합환채가 없어도, 자기의 힘으로 자식을 잘 낳던 여자예요. 그녀에게는 합환채가 별로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게, 당연한 거죠. 라헬은 레아에게서, 그 합환채를 사요. 그런데, 그 방법이 참으로 기묘하죠? 신랑을 주고, 합환채를 삽니다. 신랑을 주고, 합환채를 사요. 그건 하나의 모형이에요. 신랑을 구약의 이스라엘, 율법주의에게 빼앗기고, 합환채로 후손을 만드는 형국인 거예요. 그러니까 레아에게 빼앗긴 신랑은, 십자가 지시기 전의, 예수라 할 수 있어요.

예수님은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예요. 하늘의 하느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직접 설교를 했는데, 아무도 안 믿었단 말입니다. 자식이 없는 거요. 아무도 안 믿었어요. 결국, 그 예수는, 율법주의와 유대주의, 인본주의에 잡혀 죽어요. 30에 팔려서! 그 은 30은 출애굽기에 가면, 생명의 값이에요. 생기란 말입니다. 라헬이 남편을 레아에게 빼앗기는 형국이에요.

그런데 그녀의 손에 합환채가 들려 있어요. 그녀는 그 합환채로 말미암아 자손을 생산하게 돼요. 따라서 그 합환채는, 십자가 지고 율법주의에 맞아 죽으신 예수 대신에 내려오신, 성령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래서 맥추 때에요. 오순절에! 거기에서 태어난 이가, ‘요셉이에요.

 

(창세기 30:22-24) 22 하느님께서는 라헬도 돌보시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열어 주셨다. 23 마침내 라헬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는 '하느님께서 나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셨다' 하면서 24 아기 이름을 요셉이라 부르고 '야훼께서 나에게 아들을 하나 더 점지해 주셨으면 오죽이나 좋으랴!' 하였다.

그 요셉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팔리죠? 왜 그랬죠? 요셉이 고자질했어요. 그걸 보시고 여러분이, 참 팔릴 만하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치사하게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가서 고자질 해? 아뇨.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자기가 죄인 아닌 척하는 율법주의, 유대주의자들의 죄를, 반드시 폭로시키게 되어 있단 뜻이에요.

그래서 은혜에 의해, 합환채에 의해, 태어난 그가, 나머지 형제들의 죄를,, 고발하는 자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반드시 그 고발당한 자들은, 고발한 은혜의 자손을, 죽이려고 한다는 뜻이에요.

 

(갈라디아서 4:29) 29 그러나 그 때 육정으로 난 자식이 성령으로 난 자식을 박해하였는데 지금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지금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인데, 이게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에서 반복되고, 그리고 사도 바울로가 활동하던 그 초대 교회 때, 똑같이 있었던 거예요. 갈라디아서잖아요? 거기에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이단(異端)이 율법주의였잖아요? ‘, 예수 믿어. 믿어야 구원받지. 그런데, 요것도 지키자!’ 이게 율법주의예요. ‘예수 믿는 거는 아니니까, 율법 지켜서 천국가자!’ 이게 율법주의 아녜요. ‘예수 믿자. 그래 믿어. 그런데 거기에 요거는 보태자. 절기도 지키고, 먹는 것도 조심하자!’ 이게 율법주의예요. (요게 지금 어딜까?) 거기에다 대놓고, 바울로가 지금 이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너희들을 내가 떠나자마자, 그 거짓 예언자, 거짓 교사들의 말을, 금방 받아들였는데, 내가 이야기하는 건 왜 금방 잊어버리니? 내가 이야기 하는 게, 지금 이해가 가? 내가 그들에게 핍박받는 건, 옛날에 아브라함 때부터 있었던 일이란다. 그 이야기 해주는 거요.

 

그래서 요셉이 핍박받는 자로 나와야 되는 거요. 합환채에 의해서, 성령에 의해서 태어난 그가, 반드시 다른 형제들에게, 핍박을 받아야 돼요. ‘, 사회를 정화하고 깨끗하게 살자는데, 뭐가 잘못 됐어?’ 이러고 들고 들어오는 거죠. 누가 그게 나쁘대요? 은혜를 먼저 알고 가자는 거요. 그 자리로!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는, 인간들의 선악구조에 의해서, 열심히 착하게 살아서, 인간들의 자존심을 챙겨 갖겠다고 하는 자들이었어요. 그러한 자들에게 은혜로 태어난 자들이, ‘아냐, 하느님의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는 거지, 절대로 인간들의 바벨론 건설의 열심히 성취될 수 있는 게 아냐! 네가 조금 착한 일 많이 했다고, 선한 일 많이 했다고, 너 다른 사람보다 네가 낫다고 착각하지 마!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안 봐!’ 그래 보세요.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 하냐?’고 욕이나 바가지로 먹지.

자신들은 지금 열심히 종교 행위도 하고 선행도 해서, 자기들의 마른 뼈를 가리고 있는데, 덮으심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이들이, ‘이게 진짜 은혜야!’라고 자기들의 덮고 있는 행위들을 자꾸 베껴내는 거요. 그리고 자기가 입은 것을 자랑하는 거요.

여러분, 요셉이 유일하게, 요셉만 뭐 입고 있었어요? 채색 옷이에요. 그건 장자들이 입고 있는 옷이에요. 형들이 가만히 보니까, 요셉과 자기들이 다른 게 없어요. 그런데 걔가 자기들과 다른 건, 채색 옷 하나 입고 있는 건데, 아버지가 그만 좋아해! 결국은 그 형들이 그 옷을 찢어발겨 버려요. 일은 자기들이 더 많이 하고, 인간의 자존심은 자기들이 더 챙기고 있는데, 왜 저 옷을 입고 있는 저 놈만 좋아해? 그게 합환채를 입고 있는 성도의 모습이에요. 찢어발기는 거예요. 도대체 뭐냐고?

야곱도 마찬가지였어요. 야곱이 장자권을 획득한 게, 뭐가 잘나서요? 그 사람은 사기꾼이에요. 이름도 그냥 야곱이잖아요? 그런데 껍데기만 바꾼 거예요. 염소 털로 장자의 옷만 바꿔 입고 갔는데, 아버지가 장자라 인정해 주는 거예요. 그랬더니 열심히 나가서 사냥해서 진짜 열매를 갖고 온 에서가, 율법주의가, 야곱을 죽이려고 쫓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 전체의 내용이에요.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의 내용이라 말입니다.

그래서 아가서에서도 보면, 합환채라는 말이 딱 두 번 나오는데, 성경에서.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합환채 있는 들로 나가자!’라 하죠. 술람미는 교회거든요. 너는 성령으로 교회되는 거야. ‘네가 예루살렘 여자들처럼 예뻐서? 하예서? 아니잖아? 합환채가 있는 들로 나가자!’ 이러는 거예요. 그러한 인간들의 바벨론 건설과, 하느님의 은혜의 성전 건설이, 마지막으로 대결을 펼치는 장소가, 성경에 등장하는데, 거기가 아마겟돈이에요.

 

(요한묵시록 16:14) 14 그것들은 악마들의 영으로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자들이며 전능하신 하느님의 큰 날에 일어날 전쟁을 위해서 온 세계의 왕들을 모으려고 나간 자들입니다. 15 그 때에 '잘 들어라. 내가 도둑같이 오겠다. 벌거벗고 다니는 부끄러운 꼴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정신을 차리고 자기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16 그 세 악령은 히브리말로 하르마게돈이라고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았습니다.

계속 모으죠? 인간들을 포함한, 마귀의 세력들의 집짓기를 묘사한 거요. 그게 바로 하느님을 대적하는 행위다.’를 보여주는 거요. 이게 바벨탑 건설의 현장이다. 그래서 바벨론 이야기를 죽 하다가, 바로 이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아마겟돈 이야기가! 그런데 그게 하나로 모여서,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는 마귀세력들의 집짓기 현장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하느님의 명령이 떨어져요. 뭐라 그래요? ‘옷 입어라!’ 그러죠. ‘흩어져라도 아니고, ‘옷 입어라! 부끄러움을 가려라! 너희들이 모여서, 바벨론 건설하고, 바벨탑 건축해서, 나에게 올 수 있는 거 아냐, 옷을 입어라! 부끄러움을 가릴 아마포 입어라! 채색 옷 입어라! 은혜의 장막 입어라! 그래야 산다!’라는 거예요. 그게 아마겟돈 전쟁이에요. 하느님은 그걸 반드시 다 부수어낼 거라는 거예요. 인간이 하느님나라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의 은혜를 거저 입어버리는 거예요.

여기서 아마겟돈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히브리어 할마게돈’, 므깃도의 산이라는 어구에, 헬라어 음역이에요. 므깃도는 원래 모이다, 군대로 소집하다란 뜻이에요. ‘모으자. 흩어지지 말자’ ‘모이자! 가다드라는 히브리어 단어에서 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므깃도의 산에서, 인간들의 바벨성 쌓기가 완전히 파()해지고, 하느님의 승리가 완성되는 거예요. 그게 아마겟돈 전쟁이에요. 그게 창세기의 바벨탑 쌓기 현장의 다른 그림이에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성경은요! 즈가랴서 1210절을 보세요. 므깃도의 산이 여기 나와요.

 

(즈가랴 12:10-11) 10 내가 다윗 가문과 예루살렘 성민들에게 용서를 빌 마음을 품게 하리니 그들은 내 가슴을 찔러 아프게 한 일을 외아들이나 맏아들이라도 잃은 듯이 슬퍼하며 곡하리라. 11 그 날이 오면, 므기또 골짜기 하닷림몬에서처럼 예루살렘에 곡성이 터질 것이다.

므깃도 골짜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이 앞에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왕인 요시야가, 애굽에 의해 맞아 죽은 곳이 므깃도예요. 므깃도가! 그 때처럼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죽여서, 당시 구약은 왕이 백성을 다 품고 있는 거요. 그래서 왕이 잘못하면, 백성이 다 벌 받고, 왕이 잘하면, 백성이 다 복을 받고 그랬던 거예요. 고게 대표의 원리입니다. 요시야가, 그 착했던 왕, 개혁을 일으켰던 왕이 애굽에게 맞아서 죽었는데, 거기가 므깃도 골짜기이거든요.

그런데 그 골짜기에서, 하느님이 회복(回復)을 시키는 거예요. 내가 하느님에게 완전히 죽는 그 자리가, 회복의 자리란 뜻이에요. 귀 있는 이만 들으세요. 성경이 수박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만, 이해되는 내용인데, 이 므깃도 골짜기라는 단어가, 바벨탑이 세워졌던, 시날 평지와 같은 단어고, 에제키엘서의 마른 뼈 골짜기와 같은 단어예요. 이게 아마겟돈이란 말입니다. 그게 요한묵시록까지 죽 이어지는 거예요. 일관성 있게!

그러니까 하느님은, 인간의 자율성 발휘의 현장, 바벨론 건설의 현장에, 성령으로 침투하셔서, 그들에게, 은혜를 구하는 영! 용서를 구하는 영! 즉 성령을 부으셔서, 그들의 마음속에서, ‘네가 예수 죽인 자 맞아, 내가 죄인 중에 죄인이야. 그래서 나에게는 하느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라는 그게 슬픔이죠? 우리가 산상수훈에서 배운 거잖아요? ‘그 자기 부인의 고백을 격발해 내시고야 만다.’라는 뜻이에요. 그게 구원이에요.

그러니까 아마겟돈 전쟁은, 미래의 어느 날 일어날 전쟁이 아니라, 마지막에 완료라는 의미에서, 그런 전쟁이 마지막에 한 번 있을 것이라 라고 얘기하면, OK. 그러나 지금은 없는데, 나중에 한 번 일어날 것이다. 천만의 말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바벨론이 멸망해 가는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아마겟돈 전쟁은,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하느님의 바벨탑 부수기는,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계속, 승리하고 계시는 거예요. 성령으로 덮으셔서! 그래서 여러분 안에, 성령이 들어와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성령은 여러분의 이름을 빼앗아 가는 분이에요. 부수시는 분이에요. 보자기로 바위를 감싸는 분이란 말예요. 그런데 그 보자기는 바위를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부수는 힘이 있는 보자기라니까요. 은혜의 보자기! 은혜의 왕노릇! 이렇게 끊임없이 지속되고 반복되고 있는, 우리의 바벨론 건설의 현장에서 우리에게 부어진 그 성령의 정체! 생기의 정체를, 예레미야가 이렇게 밝혀줘요.

 

(예레미야애가 4:20) 20 야훼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메시아), 우리의 숨결(성령), 만국 가운데서 그 그늘 아래 깃들어 살리라 했는데 그마저 원수들의 함정에 빠져 잡히고 말았구나.

그러니까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를 꼭 붙들고 믿는 방법 밖에는 없어요. 끊임없이 바위이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은혜의 보자기가 덮어야만 되는 거요. 그리고는 우리를 부수어 내셔야 돼요. 인간들이 자신들의 선행체계나 지식체계를 동원해서, 자신들의 자존심을 챙기려 하고, 인간들의 주체성이나 존재성을 챙기려 하는 그 자체가, 인간들의 집짓기! 바벨론 건설인 거예요.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찬송하는 걸,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돼요. 여러분은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말 잘 듣고, 착한 일만 열심히 하다가, 결국에는 아버지를, 그 자기가 한 착한 일로 탄핵을 해버리는, ‘왜 아버지 나 이렇게 착하게 살았는데, 왜 난 잔치 안 베풀어줘요?’ 탄핵을 해버리는, 그 큰 아들의 삶을 본받으면, 안 돼요. 하느님은 그 큰 아들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는 바로 그 큰 아들이 되자고 하는데, 하느님은, 자기가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처럼 살던 짐승에 불과한 자였다는 걸 올바로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아들 삼아 주신 그 아버지에게 면목 없이 가서, ‘아버지,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저 종으로라도 어떻게 살게 해 주세요.’ 이 사람! 그 탕자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에페소서 1장의, 창세전 언약의 목적이, 찬양인 거예요. 찬양! 찬양! 찬양! ‘하느님의 찬양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인간들의 집짓기가, 왜 하느님의 분노를 부르는 거고, 왜 그것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건지, 잘 아시겠죠?

 

(말라기 1:4-5) 4 에돔은 '우리가 부서지고 허물어진 것을 다시 세우리라.' 고 하지만, 나 만군의 야훼가 선언한다. 저들이 아무리 세워도 내가 헐어 버리리라. 그래서 에돔 지방은 '죄받은 땅' 이라 불리게 되고 그 백성은 '야훼의 노여움을 받은 백성' 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5 너희가 이것을 두 눈으로 볼 것이다. 그제야 '야훼께서 이스라엘 국경 밖에서도 이름을 떨치신다' 하리라.

하느님은 계속 부수실 거예요, 그거나 그게 복이에요. 이게 우리의 역사이며 인생인 거예요. 우린 계속 쌓고, 하느님은 계속 부수어내시며, 결국에는 성령의 보자기로 덮어서, 우리를 살려 내시는 거요. 부수어지는 여러분의 인생! 이름을 빼앗기는 여러분의 인생! 그것이 하느님의 복()임을 잊지 마시고 잘 견뎌내세요. 딴 거 다 잊어버리고! , 가위 바위 보 할 때, 가위 먼저 내라더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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