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12.09)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09 조회수1,256 추천수7 반대(0) 신고

(수원교구 성지, 어농 성지 성당)

2020129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러시아의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이야기는

아주 유명합니다. 그는 정치적

희생양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총살형이 집행되기 바로 직전에

형 집행이 중지되었지요.

죽음의 문턱까지 경험한 그는

다시 살았다는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다짐을 했습니다.

이제 내 인생은 바뀔 거야.

나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거야.

삶은 선물이야. 삶은 행복이야.

인생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어.” 실제로 그는

이 체험 후에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1초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뒤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

책을 출판할 수가 있었지요.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이 이 사건 이후에 나왔습니다.

도스토옙스키처럼 극적인 체험이

있어야만 변화될 수 있을까요?

사실 그와 똑같지는 않겠지만,

절망의 체험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절망 안에만 머물러 있다 보니,

이 순간이 극복되는 순간을

잘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절망 안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변화될 수 있는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절망과 시련이

찾아오면 불평불만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그냥 머물러

주저앉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린 나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절망과 시련을 이겨내고

그 안에 담겨 있는 희망을 찾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용기가 되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주님의 멍에는 적당히 무거워

그것을 멘 이들에게 오히려

힘을 북돋아 줍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강을

건너갈 때 머리나 가슴에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간다고 합니다.

강 중간쯤에 세찬 급류가 흐르는데,

무거운 돌로 인해서 급류에

휩쓸리지 않고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짐이 자신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 무거운 짐이 주님의 멍에입니다.

짐이 없으면 편할 것 같지만

더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편할 것 같은 멍에가

편한 것이 되며, 주님께서 주신

모든 짐이 그렇게 무겁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은총을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떠받칩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용서할 줄 아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사랑할 줄 아는 힘도

가지고 있지 않다

(킹 목사)

기대치 낮추기

갓난아기 때 목을 가누고

웃는 표정을 짓기만 해도

주변에서 손뼉을 치며 좋아합니다.

여기에 약간의 시간이 더해져서,

일어나 걷고, 어리숙하지만

말을 하게 되면 더 큰 힘찬

응원의 손뼉을 칩니다.

그런데 갓난아기가 아니라

더 큰 성인이 이렇게 한다면 어떨까요?

그 모습에 어떤 사람도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른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행동을 누가 했느냐에 따라

반응은 이렇게 다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대치의 차이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에 대한 기대치는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에

별것 아닌 행동에도 크게 와 닿고

또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성인 어른에게는 전혀

다른 기대치를 가집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똑같이 한다면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받아들이는 조건 중 하나는

이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 아닐까요?

너무 높은 기대치로 인해서

계속해서 부정적인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대치가 낮아진다면 어떤 행동도

못 받아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실천이

그렇게 어렵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수원교구 성지, 어농 성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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