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11,28-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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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20-12-09 | 조회수1,214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0년 12월 9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11,28-30) 2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나를 부르신다,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시간으로~)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고생하는, 그래서 ‘신앙이 오히려 짐이 되어버린 이들아 오너라.’ 하신다. 그 절망과 고생길에서 돌아서서~~희망과 구원의 길인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로 돌아오라 하시는 것이다. (탈출15,23.25) 23 (이집트 탈출 후 과야길에~) 마침내 마라에 다다랐지만, 그곳 마라의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다. = 마라(아람어), 마리아(히브리어)- ‘쓴 물’ 25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나무 하나를 보여 주셨다. 모세가 그것을 물에 던지자 그 물이 *단 물이 되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우시고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시험하셨다. = ‘쓴 물’에 ‘나무 하나’, 곧 십자나무(예수)가 들어가 썩어져서(죽어서) 쓴물이 단물이 되는, 곧 생명수가 되는 것이다. 다시~ 죄인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의인이 되는, 그것이 하느님의 구원의 규정과 법인 것이다. 십자나무의 희생, 그 의로움의 예수님이 구원(안식, 생명)의 길, 진리라는 것이다. (2코린5,21)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갈라2,21) 21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율법(제사와 윤리)을 통하여 의로움이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 온유(溫柔, 폴라우스-풀어주다) 겸손(謙遜, 타페이노스-하느님 앞에 낮은 자)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낮은 자세로 순종하셔서 우리를 묶고 있는 모든 죄의 법에서 풀어 해방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 당신의 멍에 십자가로, 그러니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아야(배워야)한다. (갈라3,13) 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21,23) 23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그날로 묻어야 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땅을 부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 내가 달려야할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대신 달리셨으니, 그 예수님의 十字架가 내 십자가라는 것이다. (1배드2,24) 24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십자가)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 예수님의 멍에, 그분의 십자가로 얻는 의로움과 안식이다. (마르8,34)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사람의 계명, 도리, 그 의로움이 구원의 힘,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그동안 걸었던 길, 그 자신을 버리고(부인하고) 제 십자가,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그분을 따르는 그분의 제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죽음(부인)과 예수님의 죽음이 만나는 것이 구원이며 안식이라는 것이다. 물론 내 삶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상황, 여건들, 그리고 힘들게 하는 가족과 이웃들을 내 십자가로 지고 가야 한다. 그럴 때 예수님을 모른다면, 절망과 미움과 악의, 그 죄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그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다. 엊그제 봤던 그 중풍병자에게 주님께서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는 내 현실의 십자가는 희망이 없는 죽음으로 끝날 뿐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아멘. *함께 묵상을 나눈 교우님의 신앙체험을 소개합니다. 저는 세례받고 얼마 되지 않은 때에 구역의 한 자매님으로부터 무서운 큰 충격적인 말을 신앙의 조언으로 듣고, 불안과 공포증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본당 신부님의 말씀대로 매일미사를 열심히 다니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으나, 마음 한가운데에는 늘 큰 무거운 근심 덩어리가 있었습니다. 그 후 모 수도원에서 마음을 정화하는, 전 삶을 되돌아보는 프로그램에 참석해서 열심히 했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 되어 급기야는 정신과 약을 꽤 오랫동안 먹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본당의 모든 전례와 행사에 빠지지 않고 지구봉사와 철야기도, 그리고 온갖 피정을 찾아 다녀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어떤 피정, 어떤 가르침을 들어도, 신부님의 강론 말씀도 도덕과 윤리의 말씀이셨기에 안식(쉼)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앙이 오히려 무거운 짐이였습니다. 급기야 점점 더 심해져서 하던 모든 활동을 전부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성경을 붙들고 씨름하기 시작했습니다. 할 것이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본당, 활동, 종교행위, 행사에 더 열심했고 묵주기도도 남들보다 더 열심히 했습니다. 본당에서 시키는 일은 다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본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성경을 봤습니다. 처음엔 말씀을 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느껴지지가 않았습니다. 도덕과 윤리로 봤으니까요. 그래도 성경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다른 것은 다 해봤고, 모든 것이 소용없음을 너무 잘 알았기에 해보지 않았던 성경말씀에 희망을 걸어 보기로 작정하고 매달렸던 것입니다. 성경을 붙들고 온 방을 헤매며 울며 매달렸습니다. 어느 순간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말씀이 내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어는 사제에게도 배우지 못하고 들어보지도 못한 성경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성령께서 가르치신다는 말씀이 실감 났습니다. 그렇게 말씀 안에서 말슴이 주시는 쉼, 안식의 삶을 요즈음은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알 수 없다는 그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속에 살고 있습니다. 말씀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왜? 하느님의 말씀을 못 받고 사람의 말을 받아 너무나 힘든 시간, 헛된 시간을 살았나~ 왜 사람의 법규와 규정과 교리에 묶여 무거운 짐 같은 신앙을 살았나~ 억울한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요즘, 코로나로 미사 드리지 못하고 성체도 못 모셔, 많은 이들이 힘들어 하지만 저는 그 미사와 성체의 실체이신 말씀이신 주님과 함께 생활하니 든든합니다. 성경을 하느님의 뜻으로 먹고 자고 하는 이 시간이 행복합니다. 오늘도 ‘오라’하시는 그 말씀 안에서 살렵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보고 들을 수 있도록 눈과 귀를 열어주신 삼위일체 하느님, 찬미와 감사와 영광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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