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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먹보요 술꾼. (마태11,16-1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11 조회수1,310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2월 11일 금요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먹보요 술꾼.’ (마태11,16-19)


 

1독서<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이사48,17-19)

17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18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19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화답송 시편 1,1-2.3.4와 6(◎ 요한 8,12 참조)

◎ 주님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 행복하여라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제때에 열매 맺고잎이 아니 시들어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복음<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마태11,16-19)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이사48,17-19)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18)

 

이사야서 48장 18절과 19절은 주님을 떠나 징계를 받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토로된다.

하느님께서는 궁극적으로 당신 백성이 번성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명령과 규정을 주심으로서 옳은 길을 걷도록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오히려 하느님의 명령 듣기를 싫어하였다.

 

본문의 서두에 나오는 '루'(lu)는 가정법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했더라면' 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심경을 반영한다(민수20,3; 22,29; 여호7,7; 판관8,29). 새 성경은 이러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아~'로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축복의 근원이신 하느님, 그들의 삶을 복되게 하시는 하느님의 명령(신명10,13)을 경청했더라면, 그들의 삶은 이러한 고통이 없었을 것이고, 평화롭고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축복이 아닌 스스로가 자초한 고통스러운 징계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는 풍성한 평화를 경험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 심령과 삶에 놓인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서(시편68,20)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이끄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너의 평화'에 해당하는 '셸로메카'(shellomeka)의 원형 '샬롬'(shallom)은 단순히 전쟁이나 불화, 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떤 측면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상태(well-being)를 나타낸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인생 최대의 축복으로 여긴 것이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 평화를 강물에 비유한다. 이것은 생명을 공급하는 풍성한 소출을 맺게하는 물이 풍성한 강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넘치는 삶, 풍족하고 풍성한 삶을 살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인해 얻어지는 축복은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의로움'은 앞에 제시된 '평화'와 더불어 주님의 통치의 성격과 관련된다(이사32,17). 사실 의로움은 평화를 초래하는 원천이다.

 

여기서 '의로움'(정의)에 해당하는 '체다카'(tsedakah)는  하느님의 백성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올바른 삶의 태도, 의롭고 정직한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단지 법적으로 의로움을 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의로움을 누릴 수 없는 약한 자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자비와 연민을 베푸는 삶으로까지 확대된 표현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다 물결 같다는 표현은 그러한 삶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비유이다. 바다 물결은 그 흐름이 끊이지 않고,  한 파장이 다른 파장으로 연결되면서 계속된다.

 

하느님의 백성이 그의 명령을 겸손한 마음으로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산다면, 그들의 삶에서는 마치 바다 물결같이 의로운 행위, 자비로운 행위가 끊임없이 계속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그와 그가 속한 공동체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을 힘입게 하며, 그야말로 '샬롬'(shallom), 즉 완전한 평화를 누리는 형통한 삶,  부족함이 없는 삶의 자리로 이끌어 세울 것이다.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19)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이란 표현은 주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는 삶은 창세기 15장 5절과 22장 19절 있는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축복을 성취하는 첩경이 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는 이와 정반대의 결과 즉 저주스러운 일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즉 북부 이스라엘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흩어졌으며, 남부 유다 바빌로니아에 정복당하면서도 동일한 결과가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언약을 받은 다윗 왕가는 무너졌으며, 왕의 자손들 역시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다. 민족 자체가 멸절된 것은 아니었지만, 민족의 수효는 급감하고 말았다.

 

고대 세계에서는 자손이 번성하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큰 축복으로 여겨졌었다. 이스라엘은 범죄함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언약된 번성의 약속을 누리지 못하고 불순종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쇠퇴와 멸망의 길을 걷고 만다.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본문은 완료 시제가 아닌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이사야서 48장 18절과 19절 상반절이 완료 시제로 되어 있는 것과 다르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의 이름이 이미 끊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님의 계명과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그렇게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하느님의 명칭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이름을 지닌 대상의 존재와 성품, 사명과 활동 등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이름이 하느님 대전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그들에 대해 하느님께서 더 이상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시며,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과, 사제들의 나라(탈출19,5.6)로 삼으시고 축복의 통로로 삼으신 거룩한 직책을 박탈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하느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이같은 영예로운 이름, 그 안에 함축된 복된 직책과 임무들을 잃지 않았을 것이며 더 나아가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업신여김으로써 그 모든 축복에서 멀어지고, 심지어 바빌론에 의해 패망을 당하여 결국 그들이 지닌 거룩한 이름과 정체성까지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굳어진 틀과 고집을 버리고 찾는 지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을 장터의 아이들에 빗대어 지적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러 온 선구자이고,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보여주려고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요한을 마귀 들린 사람이라 합니다(11,18). 또한 죄인들, 세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예수님을 천박한 ‘먹보요 술꾼’(11,19)이라고 힐난합니다. 

하느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 자처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민족을 해방하는 위대한 인물로서 권위를 지닌 존재여야 했습니다.

메시아는 단식과 고행을 해서도 죄인들과 어울려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굳은 사고의 틀과 선입견을 지닌 그들의 눈에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도 메시아도 보일 턱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늘나라를 보지 못할까요? 왜 매순간 만나는 사람들과 사건, 자연의 변화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읽지 못하는 것일까요?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정관념과 선입견, 편견일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매여 있는 한 결코 영적 성숙에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은 이런 분이셔야 한다.’, '저 사람은 이래야 한다'라는 틀에 갇혀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굳어지고 왜곡된 사고의 틀과 고집스런 신념은 하느님이나 이웃과의 관계를 뒤틀리게 하고 영혼의 어둠을 가져올 뿐입니다. 

장터에서 편을 갈라 서로 소리를 지르며 노는 아이들은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11,17)고 합니다.

그들은 상대방이 무엇을 하든 듣지도 보지도 않고 호응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며, 자기 뜻에 맞는 것만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잊어버린 채 바삐 내 일을 하고 내 삶을 즐기며 욕구를 충족하고, 아쉬울 때만 하느님께 매달리는 나의 모습과 닮은꼴이지 않습니까?

고통받는 국민들의 한숨소리와 울부짖음에 귀를 막고 있는 정치 권력가들, 돈의 우상에 사로잡힌 자본가들, 가난한 이들의 아픔에는 무관심하고 정치 이념을 쫓는 종교지도자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닮고 따르는 우리 자신과 이 사회가 독단과 고집불통, 일방통행의 망령에 휘둘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1,19)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왜곡되고 굳고 삐뚤어진 생각에 걸려 넘어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참 지혜였습니다. 대림시기에는 굳은 생각의 틀과 고집에서 벗어나 함께 인간다움을 회복해 나가야겠습니다. 

주님! 제 안의 고착되고 치우치고 삐뚤어진 관념의 다발을 태워버리고, 지금까지 내 기준으로 쌓아오던 가치관을 괄호 안에 넣어버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순수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자신을 쏟아붓는 지혜로운 저희가 되도록 이끌어주소서! 아멘.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마태11,16-19)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16-17)

 

원문은 결과 접속사 ''(un; then)으로 시작되어 '그러므로(그렇다면무엇에 비유할까?'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결과 접속사 '운'(un)이 루카 복음 7장 31절이 29절과 30절에 이어 계속되는 것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써, 7장 29절과 30절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와 세례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의 경륜을 거절하고 저버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염두에 두고, 31절부터 34절까지 장터에 노는 아이들의 비유를 통해 그들의 완고함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비기랴?'로 번역된 '호모이오소'(homoioso; I can compare)의 원형 '호모이오오'(homoioo)는 형태나 성질 면에서 유사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이다.

 

보통 '비유하다'는 의미로 쓰이는 '파라발로'(paraballo) 동사는 '어떤 것을 다른 것의 곁에 놓다'라는 뜻으로서하나와 다른 하나를 견주어 비교하여 어떤 현상을 쉽게 설명해 주는데, '호모이오오'(homoioo)는 '파라발로'(paraballo)에 비해 매우 직설적 표현이다.

 

'호모이오오'(homoioo) 역시 어떤 두 대상을 놓고 비교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비유'라는 말보다는 '~와 같다'라는 직설적인 표현에 더 가깝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춤추어야 할 자리에 춤추지 않고애곡해야 할 자리에서 애곡하지 않는상황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아이들과 같았던 것이다.

 

또한'이 세대 사람들'은 다름 아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가리키며더 넓게는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저버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한편, 마태 복음 11장 17절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흉내내어 노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피리와 애곡으로 상징된 결혼식과 장례식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기쁨과 슬픔을 대표하는 날이다.

 

이것은 당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에 연관지어져 있다.

즉 세례자 요한이 죄사함의 세례를 베풀어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한 하느님의 정의의 심판을 외치는 것은그의 금욕적인 생활과 더불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비난과 무시를 받는 것이었다.

 

마땅히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슬퍼하며 죄사함의 세례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외면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로부터 천국 복음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비난과 냉담의 태도로 예수님을 배척하였다.

 

그들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될 회개와 천국의 복음을 듣고도 무관심한 그들의 태도를 보시고예수님께서 장터에서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비유로 들어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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