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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결코 단죄함이 없다 (로마 8:33-3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13 조회수1,017 추천수0 반대(0) 신고

 

성경바로알기 2020. 12. 13.

(공동번역성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결코 단죄함이 없다

 

33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34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 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로마8,33-34)


(2디모4:3-4) 3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듣기 싫어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은 자기네 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마음에 맞는 교사들을 끌어 들일 것입니다. 4 그리고 진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며 낸 이야기에 마음을 팔 것입니다.

허탄한 이야기를 해주면 會衆은 좋아합니다. 바른 교훈, 진리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궁금해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사욕을 채워 주고, 자신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그런 허탄한 스승을 두려고 합니다. 대부분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인간은 nothing 이며 하느님이 전부다라면, 허탄한 스승들이 말하는 거짓말은 인간이 전부고 하느님은 너희를 도와주는 분이야 " 이런 것입니다.. 인간 보편의 자존심. 보통 이런 그럴듯한 목표 지점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보상과 상급에 대해서 살짝 흘려주면 사람들은 시원해합니다. 그게 사람들의 그 마음이 지향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 마음의 실체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성숙과 발전에 도움이 되는 그런 말씀을 전해준 그 허탄한 설교자를 칭찬합니다. 그 설교자는 인간 보편의 자존심을 긁어 주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온 세상이 심지어 타 종교인까지도 그를 칭찬합니다.

(루가 6:26) 26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해 주고 존경하는 그런 司牧을 하는 사람, ‘올바른 교회 상이다, 올바른 사목자 상이다하며 세상까지 칭찬해 주는 그런 교회와 사람은 사질 거짓 예언자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교회, 진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모두에게 칭찬받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모두라는 건 어려운 뜻 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칭찬하는데세상도 같이 칭찬하면 그게 모두입니다. 진짜 사목자는 어떤 이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한 비수를 던지는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수십 년 동안의 삶 전체를 헛된 것으로 부정해 버리는 못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보편적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뒷전으로 미뤄 두고 정말 원치 않는, 인간들이 원치 않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만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처럼 사는 삶을 추구하는데, 자꾸 아니라고 내려가라고 하는데 인간들의 지존심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회 정의나 도덕, 윤리적 사회, 세상 보편적 가치도 인간의 목적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이 같이 칭찬해 줍니까? 어떻게 그러한 이들을 온 세상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하겠습니까?

그러나 거짓 예언자들은 보편적 인간의 지향성과 방향성을 잘 압니다. 그래서 인간 보편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말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있다, 그 성숙한 지경이 있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성도의 자격, 성도의 열심, 성도의 헌신 등 성도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제시하고 거기에 미달되는 사람들에게 야단과 격려, 당근과 채찍을 교대로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반드시 따라오는 게 말씀에 나오는 訟事斷罪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도달하지 못 한 목표 지점을 제시받습니다. 그러면 즉시 자기를 송사하고 단죄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비친 나 말고 내가 아는 나는 절대 속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 제시된 목표 지점이 이 세상이 온통 합의하는 거룩하고 정의롭고 성숙하다고 하는 목표 지점일 때에는 그 사람의 단죄와 송사가 더욱 심해지고 커집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기 행위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내가 뭘 그렇게 못하고 있단 말인가?’ ‘ 왜 아직도 이 모양이야? 넌 정말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인간인 거야?’ 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그분의 은혜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와 됨됨이를 근거로 주어진 게 아닌데도 하느님의 말씀을 그렇게 허탄한 율법으로 받게 되면, 하느님의 그 은혜 와 사랑을 쓰레기 취급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온 통 잊어버리고 또다시 나에게 몰입하게 되는 것이죠. “왜 아직도 매일미사를 이렇게 못 나가! 왜 남들은 단식을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너는 단식 한 번 못해! " 이렇게 자기를 무시하고 학대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송하고 자랑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시선은 그 사랑을 향해야지 자신의 육을 향하면 안 됩니다. 그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로만 죽었다고 그러지, 전부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도 그 사람에게는 안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너 어떻게 사는지 한 번 볼 거야하십니다. 그 무시무시한 십자가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나를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인군자로 칭송받고 있는 사람이라 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육을 스스로 바라보면 송사와 단죄밖에 나올 게 없습니다. 하느님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게 존재의 결핍입니다. 그래서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자기를 바라보면 늘 부족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성숙한 사람이라고 칭찬받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기 가슴을 치면서 내 탓이오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를 송사하고 단죄하고 있는 사람들을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본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죠


오늘날 교회에서도 죄를 민감하게 인식하고 ““내가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하며 그 불안함을 해소하려고 열심히 헌신만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훌륭한 신앙인이 됩니다. 그리스도교는 죄와 무관한 자가 되는 거지, “내가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라는 그 자리에 머물러서내가 이 모양으로 살면 안 되겠죠?" 하면서 자기 몸을 불 태워버 리면 그걸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십자가 신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거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린 죄인 중에 죄인 맞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 그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들어온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의 죄를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는 그 수준에 머문 사람들은 여전히 율법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의 신학이 아닙니다. 아닌 것 같지만 그 사람들이 진짜 무서운 율법주의인 것입니다. 그러한 송사와 정죄의 율법 은 절대로 생명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보십시오.

(로마 8: 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나 죄와 사망의 법은 똑같습니다. 그냥 말씀입니다. 성령, 성경 말씀, 예수의 말씀, 말씀이신 예수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죄와 사망의 법이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그게 내용으로 깨달아져서 생명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해방된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단죄가 웬 말이냐고 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나온 2절을 원문에 맞게 다시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줬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율법을 진리로 이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누가, 무엇이 우리를 단죄하겠느냐? 십일조 좀 못 한다고 단죄 받아야 되냐? 교회 봉사 좀 게을리한다고,  교회 좀 몇 주 빠졌다고 마귀새끼인 것입니까? ‘진리의 말씀으로 해방된 자들을 도대체 무엇이 다시 구속할 수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런 걸로 우리의 신앙의 성숙을 판단하려고 하느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오로가 세상에 일만 스승은 있지만 아비는 없다고 한 것입니다. 아비는 무엇입니까? 그에게 생명을 주는, 아들에게 생명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아비가 없다는 것입니다. 도덕 강연이나 윤리 강론을 잘 들어 보면, 인간 보편의 부족함을 송사하고 단죄해 주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늘 결론은 앞으로 이렇게 살아.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에서는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말씀은 그 부분에 대해서 아주 단호합니다. “너희를 의롭다 하신 이는 하느님이야라고 합니다. 법을 설명하고 도덕을 논하는 인간들이 설정하고 상정해 놓은 의의 기준에 맞춰서 의인이 되고 죄인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의롭다 하신 이는 하느님이야. 그런데 무엇으로 너희를 단죄할 거야?"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그 사랑을 부어 주신 게 구원이지 않습니까. 하느님이 너희를 그렇게 의롭게 하셨는데또다시 너희를 무엇으로 단죄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의롭게 된 성도에게 있어서 그 모든 것은 선의 재료이고 선물인데도대체 무엇이 단죄의 대상이 되며 송사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이게 로마서 8장의 맥락입니다.

로마서 8장 전체는 그런즉 의롭게 된 자들 그들을 무엇이 단죄하겠느냐?"를 그냥 다 풀어 놓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겪는 환난이나 고통이 하느님이 너희를 벌하려고 주신 것이냐?" 이런 뜻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동성애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제게 이메일을 했는데, 그런 비정상적인 , 정체성을 가진 자신을 죽이고 싶다는 내용 이었습니다. 죽이고 싶을 만큼 자기가 밉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 그래서 저에게 상담을 한 거겠죠.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으로 단죄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까? 그거 못 고치면 천국 못 갑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자신이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고친 다음에 천국 갈 겁니까?

하느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안의 내용을 알면 그 그릇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진짜 내용을 알면그 표면적 모형은 그 즉시 부정되는 것이죠. 피조물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창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능력을 벗어나 우발적으로 생겨날 수 있는 건이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악도 그렇습니다.


(이사45,5-7) 5 내가 야훼다. 누가 또 있느냐? 나밖에 다른 신은 없다. 너는 비록 나를 몰랐지만 너를 무장시킨 것은 나다

이게 구원입니다. “나는 진리의 띠로 너를 동여서 반드시 내 아들을 만들 거야, 네가 나를 몰랐다 해도" 네가 나를 알아서 구원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서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살아났더니 그들이 하느님을 알기 시작하지,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서 살리지 않습니다

6 이는 나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에까지 알리려는 것이다. 내가 야훼다. 누가 또 있느냐? 7 빛을 만든 것도 나요, 어둠을 지은 것도 나다. 행복을 주는 것도 나요, 불행을 조장하는 것도 나다. 이 모든 일을 나 야훼가 하였다.

하느님만이 신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게 이 역사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환난은 라하라는 단어로 악이란 뜻입니다. 을 누가 창조했다고 합니까? 하느님이 내가 창조했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도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 도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 善惡果도 하느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 그것으로 생명이 뭔지 알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동성애라는 건, 하느님이 의도하지도 않을 걸 인 간이 그냥 만들어낸 것입니까? 그렇다면 한 번 묻겠습니다. 하느님은 왜 우리 인간에게 同性愛라는 것을 모형으로 던져 준 것입니까?


성경에서 남자는 항상 남편이신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여자는 항상 땅의 존재인 우리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땅의 이름들이 전부 여성형인 것입니다 아시아아메리카오세아니아전부 다 말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존재들, 여성들이, 여자가, 신부가 하느님인 그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 땅의 것들, 심지어 그 하느님, 남자를 이 땅의 존재인 율법, 여자로 받아들여 사랑해 버리면 그걸 동성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왜 우리에게 그걸 주셨는지 알면, 그 동성애라는 현상은 우리에게 이제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지저분하게 어떻게 같은 성끼리 그럴 수 있어?’ 이성끼리의 사랑은 그렇게 거룩하고 순결합니까?

어차피 인간은 자기를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내 만족의 상대가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면 단번에 쳐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뭐가 깨끗합니까? 물론 그게 옳다는 게 아닙니다. 성도는 그러한 것들로 아파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나를 죽이고 싶어야죠.

그런데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살인이라고 했습니다. “살인으로 간주할 거야가 아닙니다. “그거 살인이다입니다. 이웃에게 생명의 말씀을 흘려보내는 것이 사랑, 아가페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살려내지 못하면 그를 죽이는 거니까 살인인 것입니다.

그러면 동성애가 살인보다 더 더러운 죄입니까? 우리는 매일 살인을 하면서 몇 가지 죄를 죄라고 규정해 놓고 이 세상에 악하고 더러운 걸 전부 집어던집니다. 그래야 자신이 깨끗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육이라는 건 지독하게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그걸 죄라고 하고 동성애도 그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냥 자기들이 합의한 더럽고 추악한 죄라고 하는 그것만 안 지으면 그냥 정정당당하게 사람답게 사는 건 줄 알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영적 한센병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구하려고 모세를 보낼 때, 왜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걸리게 하고 그걸 고쳐 줬는지 아십니까? 그렇게 그분의 백성을 건져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 백성이 그 세상에 살면서 그게 고통인 줄 모르니 그분이 고쳐 내겠다는 의미였습니다.

한센병이 痛點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코가 없어지는데 아프지 않고 손가락이 떨어지는데 아프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은혜로 그 한센병을 고치셨습니다. 영적 한센병 말입니다. 그러면 가장 먼저 감지되는 게 무엇입니까? 고통이요 아픔입니다.

당연히 아파야 할 그 자리를 아파하지 않고, 몇 명의 죄인을 향해 손가락질하느라고 자신에게 어떤 고통이 있는 줄 모르는 그들에게 정작 아픈 건 나구나라는 걸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자기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며 사람들이 죄라고 히는 것을 짓고 살아가는 그가 하느님 앞에 더 성숙한 자입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우리는 깨끗해하는 우리가 성숙한 자입니까? 그러니까 함부로 다른 이들의 나타난 현상으로 그들을 단죄하지 마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건 그것입니다.

말씀은 도대체 무엇으로 너희 자신과 네 이웃을 단죄하고 송사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말도 안 됩니다. 하느님이 괜찮다고 하시는데, 그분이 고쳐 주시겠다는데, 무엇이 송사할 거리가 됩니까. 성도의 육이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리스도, 영 안에서 부활했다는 것이 성경에 괜히 쓰여 있는 게 아닙니다. , 그 진리의 말씀으로 살아 난지들에게 그 육의 자격이라는 건, 하느님의 관심 밖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그걸 보십니다. 다만 진리를 깨달은 성도에게는 다른 삶이 있는데 그게 바로 누리는 삶입니다. 그런 자격이나 조건 등과 무관한 삶입니다. 세상과 성도의 차별된 삶은 세상도 충분히 분별해 낼 수 있는그 들도 흉내 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차별된 삶이 아니라, 묶여 있었던 그 세상과 법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난 자의 자유와 성숙인 것입니다.


(로마8:34) 34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 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구절은 누가 단죄를 하겠는가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죽인 그리스도 예수가?"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누가 단죄를 하겠니? 그래 다른 건 아니라고 치자. 그러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죽였다. 그러면 그분은 너희를 단죄하겠니?"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분은 죽으셨다아포드네스코입니다. 그리고 드네스코의 명사형은 다나토스입니다. 그 분은 말씀을 완성하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에게이로다시 영으로 살아나셨다. 그리고 텍시오스하느님의 우편이라고 하는데, 텍시오스영접하다, 받다에서 나온 말로 하느님을 영접한 자, 그분을 받은 자를 오른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편은 다 오른편입니다. 그리고 오른편은 텍시오스 우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오른편에 있는 양이라고 하고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을 왼편의 염소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른편이라는 것, right side 이게 우리가 가진 정 의니까 그냥 반대편을 왼편이라고 히는 것뿐입니다. 하느님의 편, 하느님 쪽이 오른편이고 그게 바로 우리입니다.

성경이 계속해서 너희가 하느님 보좌 우편에 앉았다라고 하는 건, 너희가 그 하느님 편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리스도 예수가 편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이죠. 죽었다가 다시 에게이로살아나서 너희도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살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으로 죽는 너희의 육이 그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존재라는 것이 증명되는 그것이 어떻게 단죄거리가 되겠느냐는 것이죠.

그리스도 예수, 그분은 그렇게 말씀의 완성으로 죽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 신의 자기 계시는 피조물에게 자기 계시는 신의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 피조물이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신의 자기 계시, 낮아짐 인카네이션죽음밖에 없다는 걸 가르쳐 주고자 그 하느님이 죽고 영으로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안으로 오신 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그걸 인정하는 순간 우리의 도 부정됩니다. 진짜 산다는 건, 바로 하느님의 은혜로 사는 거구나라고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 안의 그리스도가 간구(懇求)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죽는데, 육이 부정되는데, 그게 왜 송사거리며 단죄거리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그것으로 너희의 육이 장렬히 전사하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죽기 싫으니까, 그 육을 어떻게 해서든지 계발해서 하느님 앞에 그분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고 싶으니까 그게 단죄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너는 왜 아직도 이 모양이야?


하느님도 육으로 죽고 그리스도 영으로 살아서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의 남편이 되셨는데, 너희가 뭔데 그 육을 계발해서 하느님 앞에 가겠다고 하는 거야?" 이런 말입니다. 그 말은 죽기 싫타는 그러니까 너희 스스로도 송사, 단죄하고 남들도 그렇게 쉽게 정죄하고 송사하는 거 아니냐? 너희를 의롭게 하신 건 하느님이지, 세상의 그런 시선과 판단 기준이 너희를 의롭게 한 거 아니잖아. 너희가 여전히 그렇게 송사와 단죄 안에 있으면 너희는 진리와 복음을 모르는 자야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에게이로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글성경은 그 단어를 그냥 다시 살아나심이라고 번역해 놓았는데정확하게 말해서 그 단어는 죽어있던 기능이 조합되어 존재가 되다라는 말입니다.

에제키엘서에 보면뼈다귀들이 골짜기 위에 막 흩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죽여서 그냥 실온에 이렇게 놔두잖아요. 그러면 그냥 뼈가 그대로 남아 있을 거 같죠? 아닙니다. 힘줄이 끊어지고 관절이 썩으면서 탕탕 팅겨져 나가서 다 흩어집니다. 그러면 산 자들의 그 기능은 전부 없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기능이 상실되는 걸 죽음이라고 합니다. 바로 네크로스라고 하죠.

성경에서 네크로스라는 건 그냥 죽음, 육의 죽음이라고 뜻하는 데 살아 있는 네페쉬’, 살아 있는 존재들이 진짜 들어야 할 그 소리를 못 듣고 진짜 호라호하여 봐야 할 그것을 못 보면 그 존재를 죽었다고 히는 것입니다. 끝까지 그걸 못 보고 못 듣고 그냥 죽습니다. 그리고 먹어야 할 거 못 먹고 죽으면 그들을 그냥 죽은 자라고 합니다. 그들은 살아서 숨 쉬고 있을 때도 죽은 자고, 숨이 멈 춘 후에도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내가 진짜 들어야 할 건 이게 아니구나. 내가 진짜 봐야 할 건 이게 아니었구나라고 알게 되어서 어떤 걸 보고 들을 수 있는 상태가 되면, 그것을 에게이로라고 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기능들이 조합이 되어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것 을 부활이라고도 번역하고 다시 살아났다라고도 번역하는데 이 상태를 다나토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말씀의 완성으로 죽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으면 내가죽은 자 맞구나라는 걸 알게 되어 진짜 들어야 할 것을 듣고 보아야 할 것을 보게 된 단 말입니다. 이 상태가 된 이 사람들을 아나스타시스라고 합니다. 아나스타시스가 부활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서 열심히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하다가 나중에 언젠가 살아나는 걸 성경은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반면 산 자의 부활은 지금 이 땅에서 먼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진리를 가진 사람을 성경은 에게이로살았다고 하고 그런 사람을 아나스타시스라고 합니다. 아나스타시스는 아나(위로)와 이스테미(똑바로 서다)의 조합으로 위로 똑바로 서다라는 뜻입니다. 쿨이란 단어와 똑같습니다. 위로 똑바로 서면 그것을 부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묵시록에 첫 번째 부활과 두 번째 부활이 나오는 게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어떠한 이들에게 나타난 현상과 현실이라는 것, 그 안에 있는 내용을 진짜 보고 듣게 되면 그들은 거기서 해방이 되고 풀려나는 것입니다. 더는 그것이 그들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죠. 바로 그들을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현실들이 감사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그들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했던 것이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세상 것이 들리고 보이는 게 아니라, 그 안의 내용이 들리고 보이기 시작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고통, 기쁨, 수치, 자랑, 겸손, 교만, 이러한 것들이 그냥 하나로 들리고 보이면 됩니다. ‘그렇지 그걸 이야기하려는 거지라고 깨달으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현 상과 현실과 사건과 감정, 그 모든 것이 한 목적을 위해 하느님이 허락하신 것, ‘파스, 그 모든 것으로 보이고 들리면 그들에게 죄가 무슨 의미이며 악이 무슨 의미이며 의가 무슨 의미이며 선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다음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게 무슨 의미야? 심지어 생명은 뭐냐?"라고까지 합니다. “그래 내가 너희들이 갖고 있고 알고 있는 그 생명으로 진리를 설명해 주려고 내가 생명, 생명했는데 그걸 안 자들에게 그 생명이 그 생명이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좌파는 무엇이고 우파는 무엇이며, 진보는 무엇이고 보수는 무엇입니까? 진리를 깨달으면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워도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과 상관이 없으므로 세상은 나에 대해 침묵합니다. 그 들은 내 이야기를 못 듣습니다.

듣는다는 건 그릇이 되는 만큼 듣는 것입니다.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는 우리가 들을 능력, 그릇이 안 되기 때문에 안 들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큰 소리인데 그릇에 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소리는 우리 그릇에 담기지 않습니다.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입니까? 내가 육으로 실패해야 그것을 성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듣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 안 들려야 합니다.

그렇게 에게이로한 이들을 아래에서 위로 똑바로 선 자아나스타시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부활입니다.

즉 부활이라는 건,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세상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어서 그 세상에 묶이지 않고 휘둘리지 않는 상태가 되어 좌우도 없고 명암과도 무관하게 그냥 똑바로 선 존재들의 상태, ‘아나스타시스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테미에서 스타우로스십자가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둥이 그렇게 선 것이죠.

따라서 성도는 반드시 이 어두움의 세 상 속에서 빛으로 그 어두움의 내용을 볼 줄 아는 에게이로의 그 부활을 해야 합니다. 바로 그들이 산 자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자신의 그 죽은 육신을 열심히 채찍질하면서 그 육신의 열매를 근거로 먼 훗날의 부활을 기대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걸 산 자라고 합니까? 주님은 그러한 자들을 향해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는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자들이구나. 성경책을 이마와 손에 경문으로 차고 다니면 뭐하니?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그것만 크게 만들면 뭐해?" 이렇게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마태22:24-32) 24 '선생님, 모세가 정해 준 법에는 '어떤 사람이 자녀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25 그런데 우리 이웃에 칠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결혼을 하고 살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그 동생이 형수와 살게 되었는데 26 둘째도,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째까지 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27 그들이 다 죽은 뒤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28 칠 형제가 모두 그 여자와 살았으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아내가 되겠습니까?' 29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성서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까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 30 부활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 31 죽은 사람의 부활에 관하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 본 일이 없느냐?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부활은 그런 식의 시집, 장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네 안에 남편으로 받아들여 그 남편과 하나 되는 것이라는 내용을 설명합니다. 유대인에게는 형사취수제라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 법으로는 형이 후사 없이 죽으면 형수가 그 동생에게 시집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에서는 그 동생이 죽고 또 밑에 동생이 죽고 그렇게 죽어서 일곱 형제가 다 죽고 결국엔 형수도 죽어서 나중에 부활하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묻습니다.

하느님이 이 땅에 혼인이라는 걸 준 건, 하느님이라는 남편과 신부인 교회의 연합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서 네 남편 데려와 봐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다섯 남편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다섯 남편은 당연히 율법으로서의 그 남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남편은 네 남편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내 남편이면 안 되는 거지, 어떻게 그 율법이 내 밖의 법인데 내 안에 들어옵니까? 그러면서 주님은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다라며 그분 자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남편을 소개하러 왔지만, 육으로 그 안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 남편은 어떻게 와야 합니까? 죽고 일곱 번째 그리스도의 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게 칠로 완성된 일 곱 번째 남편인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그것을 이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칠 형제를 예로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 “그래 진짜 남편이 뭔지를 진리로 설명해 줄 게하시면서 그 일곱, 완성으로 올 그 남편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그를 살았다고 한다고, 나중에 너희들이 부활해서 첫째둘째셋째넷째 이렇게 결혼하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을 예로 들어 설명하시며 그들을 산 자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이미 이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인데 주님이 그들을 산 자라고 합니다. 육은 죽었지만 그 들의 인생이 하느님과 연합이 되어 그 생명력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구원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는 삶이었기 때문에,

성경은 향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면 요셉의 삶이 됩니다. 그래서 요셉이 섭섭하겠지만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고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아브람은 위대한 아버지, 아브라함은 列國의 아버지란 뜻입니다. 위대한 아버지는 무엇입니까? 위대한 하느님은 내 밖에, 나의 섬김의 대상인 그 하느님인 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 인생 자체가 열국의 아버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려면 그 아버지가 내 안에 들어와야 된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사악은 바로 하느님의 영, 하느님과 이들은 약속으로 탄생하는 거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하느님 없이, 그 은혜와 사랑 없이는 절대로 홀로 설 수도 없는 존재, 하느님의 사랑을 지팡이로 짚고 그것과 한 몸이 되어 걸어가야 하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그가 곧 이스라엘이니까. 그걸 다 알면 바로 그것을 살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산 자라고 하는 거란 말입니다.


말씀은 너희가 성경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그런데 외모나 됨됨이 자격이나 행위 동을 그들의 아들 됨이나 성도 됨의 잣대로 사용해서 그들을 함부로 단죄하거나 송사하는 게 어찌 가당한 일이냐?"라는 내용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진짜 죽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이러한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

(마태8:23-27) 23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따라 올랐다. 24 그 때 마침 바다에 거센 풍랑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뒤덮이게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곁에 가서 예수를 깨우며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부르짖었다. 26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하시며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사방이 아주 고요해졌다. 27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하는가?' 하며 수군거렸다.

아포쿠듣네’, ‘자연이 이 사람의 말을 듣네이런 말인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림네호수를 건너가십니다. 그 단어는 불과 유황 불 못 그런 데에 쓰는 말입니다.

실로암 못, 거긴 쓰인 단어는 달라요. 그러니까 거기에 빠지면 죽는 겁니다. 거기를 건너려면 반드시 예수와 함께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잠들어 있는 상태, ‘네크로스, ’죽어 있는 상태로는 못 건 넌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예수님이 그 배에서 주무시는 것입니다. 이게 너희들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잠이라는 건 항상 죽음을 메타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루가복음에는 아핌노라고 써있는데, 그 단어는 영적 무감각, 영적 무능력을 의미합니다. 단어가 다른 것이죠. 마태복음, 마르코복음에는 카뒤도라는 단어를 썼고, 그건 진짜 잔 것을 의미합니다. 그건 죽음을 메타포하는 거고, ‘아핌노는 영적 무능력, 그게 죽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조합이 된 게 죽음이고 바로 이것이 그들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 죽음의 상태에서 일어나야, 그 내용을 진짜 듣고 봅니다. 그래야 그 림네, 죽음의 림네를 건너간 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이스라엘’, ‘히브리’, 건너간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진짜 이스라엘인 것이죠

제자들이 바다를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광풍이 일었습니다· 아네모스라는 단어는 미친 바람으로 이것은 세상의 풍조를 뜻합니다. 풍조,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합의하여 끌려가는 풍조, 사조를 아네모스라고히는 것입니다. 그 미친 바람이 불면 모든 인간은 두려워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 기대에 미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기대에 못 미치면 다 실패자야 그래서 전부 대기업 들어가고, 판사, 변호사 되어야 해" 바로 이런 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전부 이렇게 찍어내는 벽돌. 하느님은 그런 벽돌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하나가 그분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죽어 있는 자들은 에게이로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지들이 주님을 에게이로하라고 합니다. “일어나세요" 그런데 성경이 일부러 그 단어를 주님에게 쓴다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세상의 풍조와 그 바다를 무서워합니다.

바다는 무엇입니까? 창세기 1장에서 아랫물을 바다라 하며 이라고 씁니다. 이리는 단어 자체가 진리를 주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진리를 받으면 됩니다. 그 바다, 그 광풍, ‘아네 모스,세상의 풍조, 사조, 세상의 기대, 잣대, 그것이 우리에게 두려움과 무서움의 상대가 되면 안 됩니다. 그게 죽은 거라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이 없는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게이로일어나야 합니다. 그 기능이 조합이 되어 진짜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주님은 무서워하는 그들 앞에 에게이로일어났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아포드네스코’ ‘다나토스로 죽고 에게이로하셔서 너희 안에 계신데, 그리고 너희도 그렇게 되기를 간구하는데, 무엇으로 너희가 자신과 이웃을 단죄하고 송사하겠느냐는 게 말씀의 중심 내용 아닙니까?

이 이야기에서도 주님이 에게이로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게 믿음 없는 거야. 잘들어~ 진리는 이 세상 풍조를 진리로 오히려 누르는 거란다. 세상이 그 진리 앞에서 진리를 들어야지 너희들이 그 말을 들으면 안 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일어나시더니, 그 세상의 풍조와 그 바다를 향해 잠잠해져라라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그것이 진짜 가치인 줄 알고 그것에 못 미치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무서워하고 두려워합니다. 바다는 당연히 풍랑이 일어야 합니다. 바람이 일어나야 타고 있는배를 밀 수 있습니다. 바다에 풍랑이 없고 파도가 치지 않으면 그 배는 그대로 서있게 되는데, 바로 그 게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면 바다에 속하여 죽게 됩니다.

 

 이 세상은 풍랑이 일고 무시무시한 곳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걸 육의 세상은 바로 이런 곳이기 때문에 난 여기서 나가야 되는 거지라고 알게 되면, 그 바다는 여전히 풍랑이 일지만, 나를 밀어 가나안으로 밀어 줄 것입니다. 그 바다가 내 말을 듣고 잔잔해지는 것이죠. 삶에 풍랑은 언제나 일지만 그걸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그래 이것으로 내가 약속의 땅으로 기는 거지라고 깨달으면그건 이제 내게 풍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때 내 안에 있는 내 말로 바다를 밟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똑같은 그 바다를 딛고 서서 걸어오신 것입니다. “이게 믿음 이 있는 자들의 삶이다라는 것이죠.

몇 가지 정해 놓고 그것으로 단죄하고 송사하면서 나는 안 그렇다라는 것을 꼭 그렇게 자랑해야 됩니까? 그 바람과 바다는 여러분에게 위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걸 딛고 그냥 일어서야 합니다. 어떤 말씀을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서 평생 단죄와 송사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죽음의 삶을 살 수도 있고 반면, 단죄와 송사와 무관한 자로 산 자의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듣는 걸 말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듣는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말로 네가 심판받게 될 거야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말을 듣고 계십니까? 여러분을 단죄하고 송사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자유롭게 해방시켜주는 말입니까? 한 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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