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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12.13)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13 조회수1,489 추천수3 반대(0) 신고

(수원교구 성지, 천진암 성지)

20201213

대림 제3주일

복음 요한 1,6-8.19-28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연히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그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참 많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예비 신자들이 이렇게

답변하는 것은 모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세례받은 지 꽤 오래된 사람들

역시 이 마음의 평화를 말합니다.

구원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서

자연스럽게 얻는 것이 마음의

평화인데, 마음의 평화가

일순 위에 있다 보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면 신앙을 버리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본당 신부님의 강론으로

마음의 평화를 잃어서,

교우의 잘못된 모습을 본 뒤에

마음의 평화를 잃어서,

세상 것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마음의 평화를 잃었기 때문에. 등의

이유로 마음의 평화를 잃게 하는

교회에 다닐 수 없다고 합니다.

신앙은 단순히 세상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느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얻기 위한 것, 즉 나의 구원을

위해서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위해

주님과 함께 하는 길을 걸어가게 될 때,

자연스럽게 평화도 얻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그리스도냐, 엘리야냐,

예언자냐면서 끈질기게 답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요한은 단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소리는 사람들이

길을 제대로 갈 수 있도록 알려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원의

길을 향해 외치고 싶지만,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단순히 그의 신원에

대해서만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제들과 레위인들뿐 아니라

바리사이들도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어 묻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사제들과 레위인들처럼

순수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누구인지 알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데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베푸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지요.

요한은 자신이 베푸는 세례에 관해

겸손하게 말하면서 자기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합당치 않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가장 큰 겸손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주님을 세상에

외치는 소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위해 주님을 준비하는

멋진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를 다시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부차적인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처럼 착각해서는 주님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씨 뿌릴 시기는 끝났고

지금은 수확을 할 시기이다.

도움닫기는 이미 했고

이제는 뛰어오를 때이다.

준비는 끝났고

이제는 실천할 때이다.

(칼 바르트).

일 중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여유는 점점 더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물질문명이 자전거

페달 밟기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멈추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불안하고 초조하지요.

, 물질문명을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우리는 점점

더 빨리 달려야 하고, 자연스레

바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아무리 일을 해도

끝없이 주어집니다. 일에 치여서

산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쉬고 있으면서도

일에 대한 걱정과 초조감으로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 중독에 빠지게 됩니다.

어쩌다 일이 없으면 오히려

불안하지 않습니까?

물론 일이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며 행복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일을 내려놓을 수 있는 여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삶을

정리하면서 그 안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의 삶을 위해 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을 위해 내 삶이

희생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성지, 천진암 성지 성모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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