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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13 조회수2,025 추천수11 반대(0)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알려진 마이클 셀던 교수가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을 새롭게 출간하였습니다. 저자와의 인터뷰를 듣고, 책에 대한 소개를 읽었습니다. 오늘은 책의 내용과 분석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아이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아이가 공정하게 자랄 수 있는지 의문을 갖습니다.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아이는 운이 좋은 것인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아이는 운이 나쁜 것인지 묻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본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은 정말 본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는지 묻습니다. 그런 사람은 성공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지 묻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열등감과 좌절감에 빠져서 살아야 되는지 묻습니다. 사회가 양극화 되면서 빈부의 격차가 커지는 상황,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흑인과 이민자에 대한 차별, 저학력자와 고학력자에 대한 임금의 차별이 있습니다. 지금의 코로나 확산은 교육을 많이 받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수선공, 식료품 가게 점원, 택배기사, 배달원 등과 같이 급여가 낮다고 무시하고, 존경하지 않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이 의존해 왔었는지를 자각하게 해줍니다.

 

미국의 엘리트 정치인들은 공정하지 못한 현실에 대해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46대 대통령은 분열과 갈등을 넘어서 통합과 치유의 정책을 제시하면 좋겠습니다. 환경미화원이 일을 하지 않으면 거리는 쓰레기로 넘쳐나고 전염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건강을 위한 측면에서 의료종사자의 일이나 환경미화원의 일이나 노동의 가치는 다르지 않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의 노동과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사람의 노동도 소중합니다. 노동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노동하는 사람의 헌신과 인격도 중요하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공부라는 기준으로 누구는 사무직으로, 누구는 청소부가 되는 능력주의는 공공의 선을 손상시키고, 직업에 열등의식을 심어주는 오류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하는 일의 중요성을 참작하여 급여나 사회적 인정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사회적인 안정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는 세계화(Globalization)보다는 로컬화(Localization)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등 삶의 방식과 태도를 바꾸고 있습니다. 외부 의존성을 줄이고 혼자서 해결하는 자급자족 라이프를 대세로 만들고 있습니다. 귀향 산업이 뜨고, 국내여행이나 로컬 푸드 같은 자생적 지역 산업을 재조명 받게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 지자체와 이웃 사람이라는 단어가 신뢰도 리스트에 올라왔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지역화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지역 공동체적인 유대는 소속과 안정 욕구를 충족시켜 심리적인 만족감을 줍니다. 세계화는 문화의 정체성과 다양성을 없애 단일문화화하고 경쟁을 부추겨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코로나 확산은 역설적이게도 그동안 외부로 돌려졌던 시선을 전 세계에서 지역으로, 파편화된 경제에서 지역 공동체로, 외부에서 자신에게도 돌리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말하는 주장은 이미 2,000년 전에 유대의 산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엘리사벳을 찾았던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습니다. 그 인자하심은 세세대대로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미치시리라. 당신 팔의 큰 힘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셨도다.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주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으로 높이 쌓인 기득권이라는 탑을 사랑과 희생으로 허무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능력, 학벌, 가문으로 제자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부, 세리, 소경, 중풍병자라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마치 투수가 심판에게 왜 이렇게 스트라이크 존을 좁게 주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타자가 심판에게 왜 이렇게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주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세례자 요한이 와서 단식을 하니, 좋은 날 단식을 한다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니 죄인들과 함께 지낸다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께서 무슨 권한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는지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누가 예수님께 그런 권한을 주셨는지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이라는 큰 선물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다가오는 성탄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오늘 올바른 일을 행하는 것이 가장 커다란 성탄의 준비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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