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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 제3주간 화요일] 두 아들의 비유 (마태21,28-32)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15 조회수1,584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2월 15일 화요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두 아들의 비유 (마태21,28-32)

2015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1독서 <세주의 구원이 가난한 모든 사람에게 약속된다.> (스바3,1-2.9-13)

1 “불행하여라반항하는 도성더럽혀진 도성억압을 일삼는 도성!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구나.

그때에 나는 민족들의 입술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리라그들이 모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님을 섬기게 하리라.

10 에티오피아 강 너머에서 나의 숭배자들흩어진 이들이 선물을 가지고 나에게 오리라.

11 그날에는 네가 나를 거역하며 저지른 그 모든 행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리라그때에는 내가 네 가운데에서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을 치워 버리리라그러면 네가 나의 거룩한 산에서 다시는 교만을 부리지 않으리라.

12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 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

 

화답송 시편 34(33),2-3.6-7.17-18.19와 23(◎ 7)

◎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 주님을 바라보아라기쁨이 넘치고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 주님의 얼굴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맞서그들의 기억을 세상에서 지우려 하시네의인들이 울부짖자 주님이 들으시어그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주님이 당신 종들의 목숨 건져 주시니그분께 피신하는 이 모두 죗값을 벗으리라

 

복음 <요한이 왔을 때죄인들은 그를 믿었다.> (마태21,28-32)

28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맏아들에게 가서 얘야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그는 가겠습니다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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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림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스바3,1~2.9~13)

 

"불행하여라. 반항하는 도성, 더럽혀진 도성, 억압을 일삼는 도성!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하느님께 가지 않는구나." (1~2)

 

스바니야서는 히브리어 성경의 열두 소예언서에서 아홉 번째에 위치한다.

'주님께서 보호하셨다'는 이름 뜻을 지닌 '스바니야'의 생애에 대해서는 머리글에 나오는 족보 말고는 알려진 바 없다.

 

그리고 머리글은 스바니야서의 작중 연대 요시아 임금의 통치시절(B.C.640~609년)로 제시한다.

 

한 세기 이상 고대 근동 전체를 호령하던 아시리아 대제국이 서서히 몰락해 가는 것을 보면서, 유다 임금 요시아는 가나안의 바알 숭배와 아시리아의 천체 숭배를 근절하는 종교 개혁을 단행한다(2열왕23,4~14).

 

이런 상황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주님의 권능이 온전히 드러나게 될 '주님의 날'을 선포한다.

 

스바니야서는 니네베의 파괴를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임금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계시한다.

 

오늘 독서는 스바니야서의 셋째부분(3장)의 내용이다.

 

'불행하여라. 반항하는 도성, 더럽혀진 도성, 억압을 일삼는 도성!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하느님께 가지 않는구나.' (1~2)

 

먼저 예루살렘 주민을 대표하는 지도자, 통치자, 예언자, 사제들의 잘못을 고발함으로써 그곳을 단죄한다(1~4).

 

대신과 판관들은 백성을 착취하고,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으로 사람들을 속이며 사제들은 혼합주의로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짓밟는다.

 

그분은 당신의 도읍인 예루살렘만은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받들리라고 기대하였으나, 그들은 그분의 기대를 저버리고 빗나갔다(7).

 그래서 그분은 뭇 민족과 더불어 당신의 백성도 없애 버리기로 작정하셨다(8~9).

 

그러나 주님의 뜻을 받드는 적은 수의 겸손한 이들을 살아남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서 당신의 백성을 새롭게 일으키리라고 하신다.

 이들이 바로 '남은 자들'이다.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는 사기 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12~13)

 

스바니야서의 첫째 주제 '주님의 날'(1,4; 2,3)이며, 둘째 주제 '남은 자들'사상이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단죄하시고 징벌하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들을 다시 구원하신다.

 

그분은 당신 백성 한가운데에 가난한 이들 한 무리를 남겨 당신 이름에 피신 할수 있게 하신다.

 

 '남은 자들' 이스라엘 구원을 위한 희망의 불씨이다.

그들은 불의와 거짓을 저지르지 않고, 사기를 치지않는 의로운 이들이다.

 

이들 때문에 공동체 전체는 주님을 거역하며 저지른 그 모든 반역을 부끄러워 하지 않게 될 것이다(11).

 

이 시대에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말할 수 없는 죄악이 만연하고 창궐하고 있다.

하느님의 징계와 정화가 필연적으로 올 것 같다.

 

우리도 주님의 이름에 피신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되어 하느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끝까지 남게 되기를 바란다.

 

 

 

 대림 제3주간 화요일 복음(마태21,28~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31~32)

 

마태오 복음 21장 28~32절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하신 '두 아들의 비유'이다.

 

이 비유는 앞선 마태오 복음 21장 23~27절에서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의미를 가진다.

즉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지시에 순종할 것처럼 말하고는 실제로 순종하지 않는 불의한 아들을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비유하심으로써그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계시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 21장 30절에 '가겠습니다아버지!'로 번역된 '에고퀴리에' (Ego, kyrie; I go, sir; I will, sir)에서 '에고'(ego)는 1인칭 대명사로서 아버지의 명령에 바로 자신이 순종하겠다는 자발적인 의지가 나타난다.

그러나 원문에는 '카이'(kai; 여기서는 but의 의미)라는 접속사를 사용해서자신이 가겠다고 했지만 행동으로는 가지 않은 상태를 대조하여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대조를 통해 불순종의 아들로 상징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함을 강조했으나그들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순종이 없는 자들이었으며심지어 하느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에 적극적으로 동참함으로써 불순종의 극치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마태오 복음 21장 29절에서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대답했지만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간 것으로 비유에 나온다.

여기서 '나중에'로 번역된 '휘스테론'(hysteron; afterwards; later)은 시간의 결과를 나타내는 부사로서아버지의 명령에 대한 일차적 불순종 뒤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생각을 바꾸어'로 번역된 '메타멜레테이스'(metameletheis; he repented; he changed his mind)는 '메타멜로마이' (metamelomai)의 부정 과거 분사로서 감정적인 후회나 뉘우침을 뜻한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의지의 변화까지를 의미하는 '메타노에오'(metanoeo)와는 구분되게 사용되는데단지 마음을 바꾸어 먹는 후회 정도를 나타낸다(마태27,3).

 

하지만여기서는 합당한 행동이 뒤따랐으므로 진정한 회개로 볼 수 있다.

자신의 욕심에 따라 살던 '세리들과 창녀들'('호이 텔로나이 카이 하이 포르나이'; hoi telonai kai hai pornai; the tax collectors and the prostitutes; the publicans and the harlots) 같은 사람도 뉘우침으로 순종의 길을 갔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회개를 나타내는 데 주로 사용되는 '메타노에오'(metanoeo)보다 한 단계 정도 낮은 단어를 사용하여이러한 정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뉘우침이 없는 굳은 마음을 더 효과적으로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여기서 '먼저 ~들어간다'로 번역된 '프로아구신'(proagusin; go before; are entering ahead of)는 '프로아고'('proago')의 현재형으로서진리를 나타내는 현재형으로 쓰였다.

'프로아고'(proago)는 비교를 나타내는 동사로서 '~보다 먼저 들어간다'는 뜻이기에 순서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시간적 순서의 차이가 아니다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와 못들어갈 자이다.

마치 루카 복음 18장 9~14절의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에서처럼,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루카18,14)로 번역된 경우가 그것이다.

 

이것은 '이 세리가 저 바리사이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하는 비교급 표현인데문맥상 세리가 바리사이보다 더 의롭다는 표현이 아니라세리만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강조적인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실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세리와 창녀들뿐임을 강조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비교급이 사용된 것이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여기서 '의로운 길'로 번역된 '호도 디카이오쉬네스'(hodo dikaiosynes; the way of righteousness)에서 ''()로 번역된 '호도'(hodo)는 '호도스'(hodos)의 속격으로서비유적으로는 방법(수단)과 방편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의로움'에 이르는 방법즉 '()로움'의 방향성을 세례자 요한이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는 '의로움'으로 번역된 '디카이오쉬네스'(dikaiosynes)는 '의무를 이행한 상태또는 '하느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조건'이라는 뜻이다.

세례자 요한이 죄 때문에 하느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존재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풂으로써 하느님 대전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의로움의 길을 선포했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세리와 창녀들은 믿고 받았지만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의 정체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요한1,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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