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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0회 마르 5,1-20 / 박기석 신부의 복음의 시작 마르코가 전한 예수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19 조회수1,510 추천수3 반대(0) 신고

제20회 마르 5,1-20 / 박기석 신부의 복음의 시작 마르코가 전한 예수


안녕하십니까? 복음의 시작 마르코가 전한 예수 박기석 신부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4장 호수의 거센 돌풍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구하신 뒤에 바로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땅으로 들어오시는 장면,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5장을 살펴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바람이라는 자연적 요소에 의해서 일으켜진 혼란이 아니라 마귀들이 사람에게 들어가서 일으킨 소란을 잠재우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마르 5,1) 예수님과 제자들이 호수를 건너 다가간 곳은 호수의 동쪽 지역인 게라사 지방이라고 5,1에 마르코가 설명하는데, 게라사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동남쪽으로 무려 55km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마르 5,14절에서 나오는 이 고을의 얘기는 사실 거리감이 있어요. 사실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마귀 들린 돼지들이 달리기에는 너무 먼 곳이에요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돼지는 원래 장거리를 달리는 동물이 아니에요. 그래서 마태오 자신의 복음 8장 28절에서 게라사라고 하지 않고 호수에서 약 10km 떨어진 가다라 지역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여하간 거리는 돼지가 장거리 마라톤을 하는 건 아니지만 뛰어서 호수로 뛰어 들어갔다고 하니까요. 지역의 정확성은 우리가 알 수 없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이 지역이 이방인 지역이다. 유다인 지역이 아니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마르 5,2) 이방인이 분명해요. 게라사 지방에 살았으니까. 더욱 신기한 것은 그를 가리키는 모든 지이어에 있습니다. 이방인이 더러운 영에 들렸는데 무덤에서 나온다.

예수님 시대에 주로 자연 동굴이나 바위를 파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해요. 그래서 이곳은 쉽게 피신처로도 이용이 되었는데요. 즉 시체를 두는 데에 머물러야 할 만큼 그만큼 아주 절박한 상황 속에 있는 사람만 무덤을 어떤 자기의 은신처로 사용한다는 거. 제정신인 사람이 무덤에서 살 이유가 없잖아요. 그만큼 다른 사람들로부터 피해야 된다는 절박한 사연이 있기 때문에 귀신들이 살 수 있는 그런 으슥한 곳, 무덤, 그런 곳에 산다는 거죠.

 

사실 유다인들은 무덤을 부정한 곳으로 여겼습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굴 무덤 속에 들어가 앉고 은밀한 곳에서 밤을 지내는 자들, 돼지고기를 먹으며 부정한 고기 국물을 제 그릇에 담는 자들이다."(이사 65,4) 이렇게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예수님도 마태 23장 불행 선언에서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온갖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마태 23,27) 그러니까 유다인들에게는 무덤이 굉장히 부정적인 요소입니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마르 5,3) 마르코는 어떻게 이 사람이 더러운 영의 지배를 철저하게 받게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설명하기 전에 우선 그의 만남에 대한 기술을 잠시 중단하고 있어요.그 설명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과의 만남을 잠시 중단합니다. 그가 속해 있던 사회에서 쫓겨났고, 물론 가족과도 관계가 끊어진 사람 그리고 이렇게 불결한 곳인 무덤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구곳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이 바로 이어지는 4절에 나와요.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로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마르 5,4) 그러니까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놓았는데 이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묶어놓은 것인데 이것도 소용이 없었을 정도로 그 사람 안에 들어간 더러운 영의 힘이 대단하였다는 거예요.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마르 5,5) 분명 짐승과 같은 모습입니다. 인간적 품위를 전혀 갖추지 못했다는 이야기죠. 또한 자학적인 모습도 드러나죠. '돌로 제 몸을 친다' 마르코는 이렇게 미친 사람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서술을 마치고 드디어 예수님과의 만남을 다시 이어갑니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마르 5,6-7)

 

1장에서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더려운 영을 쫓아내셨어요. 그때 그 더러운 영이 예수님께 뭐라고 하죠?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유다인들 지역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사는 게라사 지역인데 어? 새로 등장한 영이 아니라 한 번 이미 예수님과 만남이 있었던 영이 얘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저의 추측이에요. 게라사 지방의 지금 이 더러운 영은 이미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 한 번 쫓겨난 적이 있었던 영이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왜냐하면 같은 말을 반복하니까. 즉 그러면서 카파르나움에서는 처음 만나는 거니까 퉁명스럽게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에요?" 그랬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미 알고 있던 터라 사정을 하는 그런 투의 말을 한다는 거죠.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아주 분명하게 이 더러운 영은 예수님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7절) 1장에서도 더러운 영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마르 1,24) 이런 표현을 썼거든요. 3장에서도 더러운 영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3,11) 이런 표현을 썼거든요.

 

그런데 이 두 번의 이전에 나왔던 더러운 영들의 예수님에 대한 표현이 여기서는 합쳐지고 있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어? 이전에 한 번 만났던 적이 있었던 영이 아닐까 하는 그런 추측을 낳게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여기에 하나 새로운 표현을 하나 더 쓰고 있어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관련해서 사용되어지는 표현인데 구약 성경을 보면 멜키체덱이 아브라함을 만나면서 하느님에 대해서 얘기할 때,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아브람은 복을 받으리라. 적들을 그대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창세 14,19-20) 이방인이 이렇게 하느님을 표현해요.

 

또 민수기에도 발라암의 네 번째 신탁에서 보면 발람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의 말이다."(민수 24,16) 이방인 발람이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표현을 해요. 물론 이방인이 아닌 모세도 신명기의 모세의 노래에서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민족들에게 상속 재산을 나누어 주실 때"(민수 32,8)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는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는 표현을 루카복음에서 볼 수 있는데 예수님 탄생 때 하늘에서 천사가 어떻게 노래하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우리 주일 미사 때 대영광송 할 때 하는 노래 있잖아요. 맨 처음 사제의 선창과 신자들이 받을 때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 이 표현이 천사들의 노래에서도 '지극히 높으신 분'

 

그런데 루카는 요거를 한 번 더 쓰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한 번 더 씁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신.구약 성경에서 특히 구약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란 표현은 이방인이 쓰는 표현이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에서도 지금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지만 이 사람이 게라사 사람이니까 이방인이죠. 유다인이 아니라 이방인이 하느님을 얘기할 때 '지극히 높으신 분' 이렇게 쓰고 있다는 거예요. 비록 더러운 영이 들어가서 그렇게 하는 말이지만.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느님의 정체성을 분명히 고백하는 사람도 첫 만남에서 이방인이에요. 마르코복음에서. 게라사 지방 사람도 그렇고 마지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숨을 거두시자 누가 예수님을 이분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구나라고 합니까? 바로 백인대장이죠.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마르 15,39)

 

마르코복음에서는 이방인들은 하느님, 예수님의 정체를 분명히 바로 첫 만남에서 아는구나 이렇게 알 수가 있다는 거죠. 여하간 더러운 영은 이 미친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바람과 호수 즉 자연을 지배하심은 물론 악의 세계도 지배하시는 힘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요. 더러운 영이.

 

그래서 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가에서 나와서 예수님을 보자마자 뛰어나와서 어떻게 하죠? '엎드린다' 엎드린다는 것은 신을 만날 때 사람이 취하는 행동이거든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금 이 더러운 영이 하는 말이에요. 더러운 영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청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마르 5,7) 역설적이에요. 굉장히 역설적입니다. 이 말은 사실 유다이즘의 대표적인 구마자들이 사용하던 구마 행위 안에서의 관용어구입니다. 최근에 사제의 어떤 구마 영화가 있었어요. 그래서 이 부분이 더 우리 귀에 더 잘 들어올 수 있는데, 그렇다고 지금 예수님이 "하느님의 이름" 이렇게 할 필요가 없어요. "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마귀야 물러가라." 그럴 분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나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은 안 쓰죠.

 

예수님이 더러운 영을 카파르나움에서 쫓아내실 때도 그렇고, 4장에서 바람과 풍랑을 가라 앉히실 때도 "조용해라, 잠잠해져라." 단순히 이렇게 말씀하시지 "나의 이름으로 말하니, 호수야 잠잠해져라." 이렇게 얘기 안 하시잖아요. 예수님은 그런 신적 권능을 충분히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닌 베드로 사도나 아니면 사제나 아니면 영화에 나왔던 부제, 물론 영화 배우였지만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더러운 영아 물러가라."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야 돼요. 사도 3,6절에서도 베드로가 구마 행위, 자연 기적 사화는 아니지만 병자 치유에서 이렇게 얘기하죠.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오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사도 3,6)그러니까 저나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얘기를 해야 돼요.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니까 그런 표현을 안 쓰는 거고, 사도나 저는 그렇게 써야 되는데 정작 그렇게 쓰지 말아야 될 더러운 영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이렇게 얘기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역설적이라는 거죠. 엄청난 역설이죠. 자기의 안전을 위해서 하느님을 얘기하는 악마 또는 예수님께 대항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빌리는 악마. 이게 악마의 본연의 역할이잖아요.

 

악이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비틀어 놓습니다. 왜곡시키는 것이 악마의 작용이에요. 본래 하느님의 뜻대로 질서지어진 것. 이것을 바꿔 놓는 것이 악마의 역할입니다. 사람의 존재 이유도, 자연의 존재 이유도 하느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대로 있어야 하는데 이걸 바꿔 놓는 것, 비틀어 놓는 것이 악마의 활동이죠. 지금 더러운 영의 모습이 이것을 아주 적나라하게 잘 드러내 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르 5,8) 우리 영화에서도 이름을 물어보죠. 왜 이름을 물어 볼까요? 누군가에게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이름을 아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힘을 갖거나 그 사람의 힘을 가져가거나 빌릴 수 있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름은 어떤 외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해요.

하느님께서 태초에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신 다음에 사람에게 어떤 일을 부여하셨죠? 그 사람(아담)이 하느님이 만드신 온갖 동물, 식물에 이름을 붙여 주는 일이었잖아요. 그만큼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동물에 대한, 식물에 대한 식별력과 지배력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이름이 되었다.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창세 2,19-20)

 

그러기에 당시의 구마자들은 마귀의 이름을 알면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오늘 복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었다면 영화를 봐도 더 재밌게 불 수 있는 거예요. 영화가 갑자기 만들어 낸 게 아니라 복음서의 예수님의 구마 장면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예수님도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정말 악마의 이름을 몰라서 물어 본 건 아니라는 겁니다. 알고 계시는데 물어보시는 이유가 있다는 거죠. 즉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게 해서 그 이름대로 예수님이 어떤 명령을 내리시겠다는 그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름을 통해 그 존재의 내면을 들여다보시면서 더러운 영과 대결하신다는 거죠.

 

그런데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정식으로 대답을 한 게 아닙니다. 또 비뚤어지게, 자기 원래 목적대로 비틀어서 대답을 해요. 물론 솔직하게 얘기는 하지만 비틀어서 얘기합니다.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마르 5,9) 그리스 말로는 군대가 레기온, 라틴어로는 레지오입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마리아의 군대라는 표현이죠. 여기서 온 겁니다.

 

이 레지오는 로마 병력으로 나눠 보면 우리 육군도 사령부, 군단, 사단, 연대, 대대 이렇게 나누죠. 그런 식으로 하면 레지오는 6천 명의 부대인데 군단급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이 자신의 이름 대신 자신들의 숫자를 언급하고 있어요. 게라사 지방의 이방인 한 사람 안에 더러운 영들의 수가 6천이나 된다는 겁니다.

 

마르코복음외 다른 복음서에서 더러운 영이 사람 안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을 지배하는 경우 숫자를 언급하는 경우가 한 번 더 있는데 그때는 일곱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이 악한 세대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 12,45)

 

어떤 영이 왔다가 쫓겨나면 다음번에 다시 들어올 때 일곱을 더 데리고 들어온다는 거예요. 마태오복음에 더러운 영의 숫자가 일곱인 경우가 있고 그다음에 마르코복음에 6천이나 되는 거죠. 이렇게 엄청난 숫자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영들의 숫자에 예수님은 주눅 들지 않는 분이시라는 거. 오히려 그들을 한방에 제압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계심을 분명히 인식하였고, 그래서 어떡하든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항복 조건을 협상하면서 그렇게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 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마르 5,10-11) 돼지 떼의 출현은 예수님께서 이방인 땅에 들어왔다는 또 다른 표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서는 돼지가 부정한 동물이에요. 레위 11,1-8 절에 부정한 동물들에 대한 리스트가 잇는데, 유다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봐요.

그런데 돼지가 엄청나게 많다는 거, 돼지 떼가 있다는 것은 유다인의 땅이 아니라 이방인의 땅이라는 증거가 되는 거죠.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께 탄원을 드리면서 자신들을 그곳이 무덤이든, 동물이든 자신들을 보낼 수 있다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인지하면서 그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서 이 마을에서 만은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차라니 저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마르 5,12)

 

그러니까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인정하는 거예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도 이전과는 다릅니다. 그냥 조용히 떠나라가 아니라 허락을 하세요.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니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마르 5,13)

 

일반적으로 돼지 한 우리의 숫자는 이백 마리예요. 그런데 그 열 배에 해당하는 숫자 이천 마리를 제시하죠. 그만큼 예수님께서 격퇴시킨 악의 세력의 규모가 엄청나다는 걸 반영해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달리 생각하면 구약의 탈출기에서 모세기 이끈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고자 집결한 이집트 병사들이 떠올려지죠. * 이스라엘인들이 바다를 건너다 (탈출 14,15-31)

 

모세를 따라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파라오가 보낸 이집트 군대들이 쫓아오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갈대 바다가 쫙 갈라지며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을 밟고 통과하고 이집트 군사들이 들어갔을 때에는 갈대 바닷물이 제자리로 돌아와 수장되는 모습, 바로 그 모습이 지금 떠올려지는 거예요. 돼지 떼 이천 마리가 호수에 뛰어드니까요.

 

물론 제가 아까 실제 거리가 55km니까 무리다. 그래서 마태오는 지명을 바꿨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중요한 것은 물속에 빠져 죽었다. 익사죠. 숨을 못 쉬는 겁니다. 사람도 하느님이 숨결을 불어넣어 주셔서 생명체가 되었죠. 그런데 물속에 빠져 숨을 못 쉬었다는 얘기잖아요. 그만큼 그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졌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느닷없이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호수로 뛰어들어 빠져 죽는 모습을 보고 돼지를 치던 이들이 놀랄 수밖에 없죠. 이거는 당연한 일입니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마르 5,14) 사실 이 부분은 좀 바꿔야 돼요. 어떻게 바꿔야 돼냐 하면, "돼지를 치던 목동이 돼지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목격하고 너무나 어이가 없고 화가나서 예수님께 달려가 나의 경제적 손실을 보상해 달라고 청했다." 이래야 맞아요. 그런데 그렇게 언급을 안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대와 반대로 마르코는 돼지 치던 사람은 지금 벌어진 일을 목격한 자로서만 언급을 하고 있어요. 다른 이들에게. 그러기 때문에 자신이 본 거를 그대로 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거죠. 그게 더 자연스럽다는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마르 5,15)

 

마르코는 이 사람이 이전 모습과 지금 모습을 완전히 대비를 시키죠. 완벽하게 바꿔 놓는 분이 누구라는 거. 바로 예수님에 시선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겁이 나는 거예요. 앞선 4장의 거센 돌풍, 호수와 바람을 잠재우셨던 분이 이제는 악령까지 지배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제자들은 이전에도 놀랐지만 지금 또 다른 놀라움과 경외심을 갖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 이방인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게라사 지방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이 이방인인 거죠. 그 유다인인 이방인이 그런 능력을 보였다는 데에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설명을 자연스럽게 요구하게 되는 거예요.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16-17)

 

여러분들 아무리 이방인 사람들이라도 이건 좀 맞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런 힘을 가지신 분을 보면 어떻게 해야 되요? "대단한 힘을 가지셨으니 저희와 함께 머무르세요." 이래야 되는데 떠나달라고 그래요. 앞서 유다인들에게 기적을 베풀 때에도, 카파르나움에서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서로 예수님을 보시려고 그랬어요. 예수님이 음식조차 드실 수 없을 정도로.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이 너무 몰려서 그 마을에 못 들어가기도 하고, 또 소문이 나서 오히려 밖에만 머물러 계셔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서로 모시려고 했거든요.

 

지금 이방인 사람들은 떠나달라고, 여기 머물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아까 언급했던 금전적 손실이 더 벌어질까 봐 이방인 지역에서는 돼지가 부정한 짐승이 아니니까 재산이에요. 내 재산을 더 저 사람이 물에 빠져 죽게 하는 게 걱정이 돼서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드렸을까요? 아마도 여기서 원인을 찾으라면 물론 마르코에서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루카 5,8절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불렀을 때, 물고기 잡는 베드로가 밤새 아무것도 못 잡았잖아요. 그런데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해서 많은 고기를 낚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어떤 모습을 보이냐 하면, 웃옷을 벗고 물 속에 뛰어들어가서 예수님 앞에 엎드리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베드로의 이 말을 게라사 지방 사람들이 한 것이 아니냐? 즉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보고 두려워했다는 거예요. 신적 경외심 때문에 내가 죄인이라서 겸손된 마음으로 떠나주십사고 베드로가 한 것처럼, 지금 게라사 지방 사람들이 예수님께 떠나달라 한 것은, 금전적 손실, 돼지를 더 잃을까 봐가 아니라, "아, 대단하신 분입니다." 라고 생각을 했다는 거죠.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5,18)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는데 동의하십니다. 더 이상 피해 안 주시려고 했고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의 경제적 손실 때문에 우려가 돼서 떠나시는 건 아니고, 마르 1,38절에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신 바가 있기 때문에 또 다른 복음 선포의 여행을 하시기 위해서 떠나신다는 거죠. 다만 예수님의 말씀을 두고 또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바로 치유받은 사람이죠.

 

더러운 영이 나간 이 사람은 예수님께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함께 있다는 거, 마르 3,14절에 제자들의 조건, 사도의 조건이 뭐죠? 예수님 곁에 머무는 거예요. 즉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는 거예요. 이 더러운 영이 들렸던 이가 더러운 영이 나가고 나서 지금 예수님께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주님, 저 제자가 되면 안 되겠습니까? 하고 청했다는 거죠. 그런데 19절에서 예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마르 5,19) 즉, 우선 네 몸이 회복되었으니 너의 본래의 목적은 나를 따르는 것보다 네가 원래 속해 있는 가족들, 공동체 안으로 먼저 돌아가라. 이걸 먼저 숙제로 주시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하시는데,

 

주님이라는 표현은 신앙고백이죠. 주님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호칭이 사용되면서 주님이 하신 일이라고 그랬어요. 즉, 더러운 영을 쫓아내 주신 일, 다시 해방시켜 주신 일, 복구시켜 주셨다는 거. 이거를 알리라는 겁니다. 즉 주님의 자비를 알리라는 거예요. 유다인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알아요. 이방인들은 하느님조차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에게 먼저 해야 될 일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야 된다는 것. 그래서 예수님이 하느님은 어떤 분이냐 하면, 더러운 영을 쫓아내실 수 있는 분.

 

*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보여준 예수님의 기적은 하느님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계기.

 

즉 사람을 다시 본래의 자리로 갖다 놓으실 만큼 자비를 베푸시는 분, 하느님을 먼저 알아라. 그거를 너도 이웃 사람들에게 알리라는 이야기를 해 주신다는 거죠. 특히 유다인들을 그런 하느님의 힘을 왜곡할 수가 있었어요.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메시아 상, 힘으로 로마 제국을 압도할 수 잇는, 어떻게 보면 혁명이죠. 그래서 잘못된 메시아상을 그릴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여기서 함구령을 안 내리세요.

 

* 이방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에 대한 함구령을 명하지 않으심!

 

원래 유다인들이 그랬다면 함구령을 내리시는데, 유다인들이라면 잘못된 메시아 상을 그리니까. 그런데 이방인들은 그런 힘이 필요한 건 아니예요. 이방인들이 로마 제국에 항거할 이유가 없는 거죠. 그래서 이방인들에게는 함구령을 내리지 않습니다. 대신 하느님을 알려라. 즉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널리 알리라고 하는 겁니다.

 

* 이방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하시는 분의 놀랍고 풍성한 하느님의 자비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마르 5,20) 데카폴리스, 히랍어로 10개의 도시라는 말인데, 즉,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은 도시들이예요. 요르단강 동편에 남으로는 필라델피아 북으로는 다마스쿠스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으로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이방인의 도시에 널리 알려라. 무엇을 하느님의 자비를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마르코가 이건 덧붙여 쓴 말이죠. 데카폴리스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선포, 복음 선포. 선포라는 동사를 마르코가 여기 붙여주고 있습니다. 즉 이제 이 더러운 영이 들렸던 이가 하느님의 일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일을,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제자가 비록 못 되었지만.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 선포 활동을 하시기 전에 누가 먼저 그 일을 준비했죠? 세례자 요한.

 

* 예수님께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그 길을 준비(하느님의 자비 체험)

 

그렇다면 이방인 지역에서도 예수님이 복음 선포를 하시기 전에 이런 일을 미리 준비하는 사람이 바로 이 더러운 영이 치유된 사람, 이 사람이 그 역할, 세례자 요한 같은 역할을 이방인 지역에서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마르코는 이교도의 어떤 복음화의 서막으로 지금 5장 게라사 지방에서 더러운 영을 치유해 주시는, 쫓아내는 구마 기적을 행하셨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결론은 이방인 사람들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았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처음 이방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과정에 구마 치유, 똑같은 카파르나움에서 유다인들에게 행하셨던 거를 여기서도 행하셨는데요. 그 반응들, 결과를 여러분들과 함께 살펴봤습니다. 다음 주에는 이어지는 5장의 또 다른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의 정리 (마르 5,1-20)

주제

- 하느님의 구원이 이방인과 세상에 주어짐

특징

- 예수님께서 당신 신원에 대한 함구령을 명하지 않으심

- 이방인에 대한 본젹적인 복음의 선포와 하느님의 아드임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한 선포

- 이교도 복음화의 서막

예수님의 가르침

-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새로운 믿음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야 함

-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바탕이 되어야 그분이 보내신 아드님에 대한 인식도 자리 잡음

- 하느님의 구원이 이방인과 온 세상에 주어졌음을 제대로 인식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도록

그 분의 뜻을 따라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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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박기석신부님, 마르코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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