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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 제4주간 화요일]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루카1,46-5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22 조회수1,311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2월 22일 화요일

[대림 제4주간 화요일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루카1,46-56)

   

 

1독서<한나가 사무엘의 탄생을 감사드리다.>(1사무1,24-28)

24 사무엘이 젖을 떼자 한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올라갔다그는 삼 년 된 황소 한 마리에 밀가루 한 에파와 포도주를 채운 가죽 부대 하나를 싣고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으로 아이를 데려갔다아이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25 사람들은 황소를 잡은 뒤 아이를 엘리에게 데리고 갔다26 한나가 엘리에게 말하였다. “나리나리께서 살아 계시는 것이 틀림없듯이제가 여기 나리 앞에 서서 주님께 기도하던 바로 그 여자입니다27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이 아이는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그곳에서 주님께 예배를 드렸다.

 

화답송 1사무 2,1.4-5.6-7.8ㄱㄴㄷㄹ(◎ 1ㄱ 참조)

◎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 주님 안에서 제 마음이 기뻐 뛰고주님 안에서 제 얼굴을 높이 드나이다당신의 구원을 기뻐하기에제 입은 원수들을 비웃나이다

○ 힘센 용사들의 활은 부러지고비틀거리던 이들은 힘차게 일어선다배부른 자들은 양식을 얻으려 품을 팔고배고픈 이들은 더는 굶주리지 않는다아이 못낳던 여자는 일곱을 낳고아들 많은 여자는 홀로 시들어 간다

○ 주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며저승으로 내리기도 저승에서 올리기도 하신다주님은 가난하게도 가멸게도 하시며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신다

○ 주님은 비천한 이를 땅바닥에서 일으켜 세우시고가난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높이시어존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복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루카1,46-56)

46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대림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 (1사무 1,24-28)

 

사무엘 상권의 첫째 부분인 1-7장은, 이스라엘에 닥친 위기가 무엇이고 그 위기를 사무엘이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다룬다. 이스라엘에 닥친 위기는 두 가지, 곧 지도자의 부재라는 내적 위기와 필리스티아인들의 침략이라는 외적 위기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도자는 실로의 사제 엘리였는데, 나이가 너무 많아 필리스티아인들의 침공을 막아내기는 고사하고, 집안 단속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무능하였다. 

 

이스라엘은 에벤에제르의 전투에서, 실로에 모셔 두었던 주님의 궤(계약의 궤)를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뺏기고 엘리의 집안은 몰락하였다. 이스라엘 안에 주님의 현존을 확인해 줄 사제직과 계약의 궤가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위기를 극복할 우선적 대안으로 주변 민족들이 이미 오래 전에 받아들인 왕정의 도입 절실하게 요청하였다. 

 

땅을 확보한 이스라엘은 그 땅을 지켜줄 현실적 제도 찾고 있었다. 임금과 더불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줄 예언직도 중요한 직책으로 떠올랐다. 하느님의 말씀과 현존이 약해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언자들이, 외적의 침입과 정치, 경제,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임금들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충족시켜 준 인물이 바로 사무엘이다.

 

오늘 독서는 자식이 없던 한나가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한 아이 즉 사무엘을 낳게 되었는데, 사무엘을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에 데리고 가서, 주님께 봉헌의 서약을 하는 내용이다.

 

"한나가 엘리에게 말하였다.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가 드린 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 ~  그런 다음 그들은 그곳에서 주님께 예배를 드렸다." (1사무1,26-28참조) 한나가 기도의 응답으로 주신 아들을 주님의 것으로 되돌려 드리는 이야기이다. 

 

봉헌(dedication)은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거룩한 목적으로 쓰임받도록, 사람, 물건, 장소를 속된 것에서 분리시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성별(聖別)이란 말로 쓴다. 하느님 편에서 그러한 목적으로 간택하여 쓰실 때에는 축성(consecration)이란 말을 쓴다. 어쨌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께 되돌려 드린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의 절대권 즉 주권을 인정해 드린다는 것이다. 

 

기도해서 얻은 아이인 사무엘의 존재, 생명, 성품, 탈렌트, 신앙, 시간등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것으로 돌려 드림으로써, 하느님의 축복과 놀라우신 간섭과 역사로 하느님의 뜻에 맞갖게 쓰임받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사무엘은 충실한 하느님의 도구요, 나지르인으로써 예언자적 역할을 종신토록 잘 수행한 것으로 나온다. 이 뒤에는 어머니의 봉헌과 신심이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외적 재화(물질, 돈, 토지), 내적 재화(신망애 삼덕과 성령의 은사등 초자연적 은혜) 우리 영혼, 육신, 심령, 가정과 사업체, 본당 공동체, 조국, 환경 등  하느님께 되돌려 드릴 것이 많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 부채, 마음의 상처, 병고,원수등도 봉헌의 대상이 된다. 이런 것을 예수 성심 혹은 성모 성심께 봉헌 했을 때, 우리 구원과 성화를 위해,주님과 어머니께서 그것을 책임져 주시는 것이다. 

 

오늘 아기를 낳지 못하는 한나가 기도하여 얻은 자식인 사무엘을 봉헌하는 것은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즈카리야, 엘리사벳의 성소와 더불어 구세주의 모친이신 성모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동정 수태를 예고하는 사건인 것이다.

 

"Nothing is impossible with God." 

 

하느님과 함께 하면, 아니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면 불가능이 없다는 교훈이 구세사 안에서 하나 하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우리 존재와 생명의 절대권(주권)을 가지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있는지~~~ 

 

그래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되돌려 드려서, 다시 하느님께로부터 우리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하느님 뜻에 맞게 모든 것이 새롭게 재편성 혹은 개편되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봉헌은 그러기에 세례성사때 한 서약의 갱신이요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이 성탄 시기에 봉헌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자.

 


 

 

대림 제4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 1,46-56)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어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1~53)

 

루카 복음 1장 51절에서 53절까지는 하느님의 공평하신 속성에 대한 찬양이 이어진다.

 

루카 복음 1장 51절 '팔'로 번역된 '브라키오니'(brachioni; arm)는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야드'(yad)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구약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신명26,8; 시편29,14). 

 

이 단어가 '권능'으로 번역된 '크라토스'(kratos; strength; mighty deeds) 함께 사용되어 하느님의 크고 무한하신 힘과 능력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교만한 자들'에 해당하는 '휘페레파누스'(hyperephanus; the proud) '~위에','~을 넘어서', '~이상의' 등의 뜻을 가진 전치사 '휘페르'(hyper) '나타나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다'등의 의미를 가진 '파이노'(phaino) 합성어에서 파생한 단어로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내보이는 자들',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이것은 루카 복음 1장 50절의 '경외하는 이들'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 결과 또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그분의 자비가 미치지만, 반면에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흩어지는'심판이 따른다는 것이다.

 

루카 복음 1장 51절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1사무2,10)는 한나의 노래를 연상시키는데, 여기서 마리아는 교만한 자들을 치시는 하느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깨닫고, 자신의 모습을 비천한 종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높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이제 루카 복음 1장 52절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1사무2,8)라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 떠올리게 하는 부분으로서,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통치자들' '비천한 이들','끌어내리시고' '들어 높이셨으며'라는 단어들이다.

 

권세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하느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다루고 있는 루카 복음 1장 52절은   단어들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먼저 '통치자들'로 번역된 '뒤나스타스'(dynastas; the mighty; rulers) '주권자','통치자' 등을 의미하는 '뒤나스테스'(dynastes)의 복수이므로, '권세있는 자들','통치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왕좌'로 번역된 '트로논'(thronon; thier thrones)은 그 통치자들이 앉는

 

'권좌들', '보좌들'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끌어내리신다'는 것은 비록 세상 가운데서 권세있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합당치 않는 자들을 얼마든지 그 권좌에서 내리칠 수 있는 능력의 하느님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한편, '비천한 이들'로 번역된 '타페이누스'(tapeinus; the humble) '낮은 지위의', '천한', '겸손한'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타페이노스'(tapeinos)의 복수형이므로, '비천한 이들' 번역하는 것이 옳다.

 

이 단어는 앞의 '통치자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직접적으로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는 낮고 천한 자들일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겸손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높이시는 분임이 드러난다. 

 

세상 사람들은 좀 더 높은 지위와 권세를 위해 목숨을 걸지만, 그 모든 것들이 느님 앞에서는 무의미한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대전에 우리가 먼저 겸손한 모습으로 바로 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카 복음 1장 53절에서도 52절과 마찬가지로, '굶주린 이들' '부유한 자들', '좋은 것' '빈손', '배불리시고' '내치셨습니다'라는 단어들의 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굶주린 이들' '부유한 자들'은 복수형으로 일차적으로 경제적 의미에서의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렇게 보면 부자들은 그들의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가 가난하게 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5,3),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5,6)등과 같은 산상설교의 표현처럼, 자신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자들 교만하여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좋은 것'으로 번역된 '아가톤'(agathon) '선한', '적합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형용사로서, 하느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주시는 '좋은 것'은 바로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임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로 번역된 '에네플레센'(eneplesen; He has filled) '채우다', '만족하다' 의미를 가진 '엠피플레미'(empiplemi)가 원형인데, 이 단어는 단순한 만족이 아니라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는, 가득차고 넘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전에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고 주리는 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로서 부족함이 없이 가득 채워 배부르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빈손으로'라고 번역된 '케누스'(kenus; empty away) '빈', '헛된', '내용이 없는'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로서, '좋은 것으로'라는 표현과 대조를 이루는 단어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의미하는 '케누스'(kenus) 부족할 것이 없는 부자들이 받게 될 심판의 엄중함을 부각시켜 주며, 두 단어의 대구를 통해 심판을 행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부자라고 할지라도, 하느님 대전에 교만한 자라면 얼마든지 '텅 빈' 가난뱅이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와 대조를 이루는 '내치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엑사페르테일 '(eksapesteilen; he has sent) '밖으로'란 뜻의 '에크'(ek) '내보내다'란 의미를 가진 '아포스텔로'(apostello)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밖으로 멀리 내보내어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부자라고 하는 자들을 빈 손으로 멀리 내보내시어 가까이하지 않는, 공의로우신 하느님을 드러낸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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