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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 성탄 대축일-낮 미사] 참빛이 세상에 왔다. (요한1,1-1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25 조회수1,174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2월 25일 금요일

[주님 성탄 대축일-낮 미사참빛이 세상에 왔다. (요한1,1-18)

 

1독서<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7-10)

얼마나 아름다운가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

들어 보아라너의 파수꾼들이 목소리를 높인다다 함께 환성을 올린다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심을 그들은 직접 눈으로 본다.

예루살렘의 폐허들아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

10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화답송 시편 98(97),1.2-3ㄱㄴ.3ㄷㄹ-4.5-6(◎ 3ㄷㄹ)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 주님께 노래하여라새로운 노래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그분의 오른손이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주님께 환성 올려라온 세상아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찬미 노래 불러라

○ 비파 타며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비파에 가락 맞춰 노래 불러라쇠 나팔 뿔 나팔 소리에 맞춰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환성 올려라

 

2독서<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하여>(히브1,1-6)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맏아드님을 저세상에 데리고 들어가실 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복음<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1-18)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성탄그림

 

예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제1독서 (이사52,7-10)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서 말하는구나." (7)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문자적으로 '그 산들 위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는 의미가 된다.

발은 신체의 지체 중에서 아름답지 못한 부분으로 간주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발이 아름답다고 표현되는 것 그 발을 통해서 아름다운 하느님의 구원의 소식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에서 '산'에 해당하는 '헤하림'(heharim; the mountains) 복수로서 '그 산들'이라는 의미이므로, 여기서 그 발은 여러 봉우리의 산들 위에 서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위에'로 번역된 '알'(al) 전치사로서, 본문은 발이 산을 넘는 동작을 강조하기보다 산 위에 굳게 서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How beautiful upon the mountains are the feet of him'의 뜻이다.

즉 원문은 복음 선포자가 높은 곳에 올라 거기에서 만방에 복음을 전하는 이미지를 전달한다.

 

이것은 이사야서 40장 9절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라고 한 표현과 유사하다.

그리고 본문은 궁극적으로 사탄의 세력에 포로된 자들에게 영적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복음 선포자들의 활동을 칭송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을 인용한 사도 바오로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로마10,15).

이사야서 52장 7절 주님의 승리를 전달하는 전령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앞선 이사야서 40장 9절과 41장 27절과 유사하게 되어 있다.

 

본절은 원문상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해당하는 구절이 맨 앞에 위치해 강조되고 있으며, 그 이하를 다섯 개의 분사 구문이 뒤따르는 형태로 되어 있다.

 다섯 개의 분사는 모두 남성 단수로서, '발'에 해당하는 '라글레'(laglle; are the feet of)라는 단어를 수식하고 있다.

즉 그 발은 첫째,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발이며, 둘째, 평화를 선포하는 발이며, 셋째,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발이며, 넷째, 구원을 선포하는 발이며, 다섯째, 시온에서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너의 하느님이 통치하신다)라는 사실을 전하는 발이다.

 

먼저 '기쁜 소식을 전하는'에 해당하는 '메밧세르'(mebasser; those who bring goods news) 원형 '빠사르'(basar)는  주로 전쟁과 관련하여 전령이 승전 소식을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2사무18,19.26.31).

여기에서는 일차적으로, 바빌론 압제하의 이스라엘 자손이 해방되어 곧 시온으로 귀환할 이라는 소식을 전하는 것을 의미하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된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때 천사는 베들레헴 근처의 목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라고 선언하였는데, 이것은 본문 내용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루카2,10).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소식 가운데서 그리스도 탄생보다 더 기쁜 소식도 없다.

그 사건은 인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와 영원한 죽음과 멸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확대하여 말하자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사업을 바탕으로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 놓여진 인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70인역(LXX)에서는 이 단어를 '복음을 전하다'는 의미를 갖는 희랍어 '유앙겔리조'(euangellizo)의 분사형으로 번역하여 이런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평화를 선포하고'에서 '평화'에 해당하는 '샬롬'(shallom)은 기본적으로  더 이상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할 뿐 아니라,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완전한 영육간의 복지(well-being)의 상태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본절의 세번째 분사 구문 '기쁜 소식을 전하며'에 해당하는 '메밧세르 토브'(mebasser tob) '기쁜 소식을 전하는'으로 번역된 첫번째 분사 '메밧세르'(mebasser)의 내용을 강화하는 문장이다.

 '기쁜', '좋은', '선한', '아름다운'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토브'(tob)란  표현을 첨가해서 동일한 표현을 다시 반복하여 매우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네번째 분사 구문 '구원을 선포하는구나'라는 표현은 '복된 기쁜 소식'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바빌론의 압제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한 죄와 죽음과 사탄에게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서 '구원을'에 해당하는 '예슈아'(yeshuah; salvation)가  주님의 이름 '예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마태1,21).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하고 시온에서 말하는구나'

여기서 '임금님이시다'에 해당하는 '말라크'(mallak; reigns) '통치하신다'는 뜻으로 왕의 지배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바빌론의 포로로서 잔혹한 바빌론의 군주에게 다스림을 받아왔는데, 이제 그 압제에서 벗어날 것이며,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의 왕이 되어 이들을 다스리신다는 뜻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바빌론 유배의 근본 원인은 하느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불신앙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하느님께서 통치하신다는 본문은 가장 근원적인 측면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회복하게 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은 보다 궁극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게 되는 비참한 인생을 해방시켜서(로마5,14; 8,2),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과 가족(자녀)이 되게 하심(에페2,19)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예수 성탄 대축일 낮미사 복음(요한1,1~18)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14ㄱㄴ)

 

요한 복음 1장 14절부터 18절까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강생(육화)의 신비를 통한 그리스도의 하느님 되심을 보여 준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교리 가운데 그리스도론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구절들은 요한 복음 1장 1절과 연결되어 사람이신 그리스도 안에 그분의 본질인 영원한 신성(神性)이 내재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요한 복음사가가 이처럼 강생(육화; incarnation)의 진리를 요한 복음 도입부에서부터 강조적으로 진술하는 방법을 택한 것 당시의 영지주의적 (Gnostic) 경향을 반대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희랍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의 육신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 사이에서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이 큰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실제로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행동하셨을 뿐 이라는 주장이다.

 

그리스의 현인들 중에는 초월적인 신을 현상 세계 가운데 포함시킨다는 것은 신성모독일 뿐 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주장은 아직 확립된 교리를 갖지 못했던 초대 교회에  위협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요한 복음사가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직설적으로 반박하는 내용을 본문과 같은 명제 형식을 통해 펼쳐나가고 있다.

 

한편 '사람'으로 번역된 '사륵스'(sarks; flesh)는 기본적으로 '살'을 뜻하지만, '몸', '육신', '혈육을 가진 인간', '인간성'(human nature), '혈통', '육체적 제한성', '이 세상 생활' 등 문맥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쓰인다.

'사륵스'(sarks)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빠샤르'(bashar)인데,  70인역(LXX)에서는 '빠샤르'의 절반 이상을 '사륵스'로 번역했다.

'빠샤르'의 기본적인 의미는 '사륵스'와 마찬가지로 살'(flesh),  짐승의 근육 조직을 가리키지만, 나중에는 그 의미가 확대되어 사람의 몸이라든지 혈연 관계, 생명 그 자체등을 나타내는 데 폭넓게 쓰였고, 신적(神的)인 생명과 대조되는 '창조된 생명'(Created life)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두 개의 단어들 속에 내포된 의미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혈육을 가진 인간이 되셨음과 그분에게도 육체적 제한성이 따랐음을 확인하게 된다.

피로를 느끼신 것(마르4,38), 시장함을 느끼신 것(마태21,18) 등은 그분에게도  우리와 같은 육체적 제한성이 따랐음을 보여 준다.

또한 라자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와 사람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사실을 통해(요한11,35) 그분도 우리와 똑같이 연민과 사랑, 슬픔과 기쁨 등의 감정을 느끼셨음을 알 수 있다.

그분께서는 완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죄에 약하고 악에 기울여지기 쉬운 인간의 육체와 본성을 입고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우리 인간과 구별되는 분명한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그분에게는 죄가 없고,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점이고(히브4,15),

둘째는 그분께서는 모든 일에 완전한 모범을 보이셨다는 점이다(요한13,15).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속하실 수 있으신 분이심과 동시에 그분을 통하여 새롭게 됨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 가운데 사셨다'


원문은 '에스케노센 엔 헤민'(eskenosen en hemin; dwelt among us)인데, 직역하면 '그는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가 된다.

'사셨다' 번역된 '에스케노센'(eskenosen) '천막을 세우다' 혹은 '천막에 살다'를 뜻하는 '스케노오'(skenoo)의 부정 과거이다.

요한 복음사가가 여기서 부정 과거형을 사용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 로고스가 육체를 취하여 사시는 것은 일회적이며 일시적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모양, 즉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머무신 기간은 짧았다.

시간적으로 보면 불과 33년 정도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성령을 통해 우리와 늘상 함께 계신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우리는 ~보았다'로 번역된 '에테아사메타'(etheasametha ; we have seen; we behold)의 원형 '테아오마이'(theaomai)는 언제나 실제적인 육안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즉 이 단어는 영이나 마음의 눈으로 보는 영적인 통찰에는 쓰이지 않는다.


요한 복음사가는 로고스가 현실적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서 세상에 오셨으므로, 육안으로 볼 수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바로 인간 예수님 안에 내재된 신적(神的) 영광이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이 세상에 육신을 입게 하여 보내신 것은 우매하고 무지한 백성들로 하여금 직접 눈으로 보고 믿게 하려는 사랑의 배려였다.

 

요한 복음 사가는 여기서 직접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눈으로 목격했다는 확고하고도 영속적인 증거를 하고 있으며,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적인 영광과 위엄이 예수님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예수님을 만나고도 이 영광을 깨닫지 못하거나 그분의 발 아래 승복하지 않는 이들은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요 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영광'으로 번역된 '독사'(doxa; the glory)란 무엇인가? 

이 단어는 '영광'이라는 말 이외에도 '광휘', '광채', '위엄' 등  여러 의미들을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 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카보드'(kabod)이다.

이것은 물건의 큰 무게 엄청난 양을 언급하고, 종종 부와 재물, 중요하고  긍적적인 명성 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하느님께 사용될 때에는 하느님께 합당한 영광스러운 속성을 나타낸다.

즉 히브리어 '카보드'(kabod)는 희랍어 '독사'(doxa)와 함께 하느님의 존재 양식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한편 하느님의 영광의 가시적 현상과 관련되어 유대인들이 귀중하게  쓰는 단어로는 '셰키나'(shekinah)가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 '샤칸'(shakan)에서 유래하여 '머물러 거주하는 것'을 의미하며, 사람들 가운데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때를 여러 번 볼 수 있다.

광야에서 굶주림으로 원망하는 이스라엘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약속하실 때(탈출16,10).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체결하러 갔을 때(탈출24,16), 모세가 만남의 천막을 세우는 일을 마쳤을 때에도 주님의 영광이 거기에 충만히 내렸으며(탈출40,34),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봉헌할 때에도 그러했다(1열왕8,11).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영광이란 말이 바로 그분의 현존과 임재를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바로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보았던 것이다.

그는 사람이 되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했던 것이다(요한10,30; 14,9).

 

 

성탄의 기쁨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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