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마태2,13-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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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20-12-28 | 조회수1,087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0년 12월 28일 월요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마태2,13-18)
제1독서<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1요한1,5―2,2) 5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듣고 이제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6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7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9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2,1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화답송 시편 124(123),2-3.4-5.7ㄷㄹ-8(◎ 7ㄱㄴ) ◎ 사냥꾼의 그물에서 우리는 새처럼 벗어났네. ○ 사람들이 우리에게 맞서 일어났을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셨던들, 우리를 거슬러 저들의 분노가 타올랐을 때, 우리를 산 채로 삼켜 버렸으리라. ◎ ○ 물살이 우리를 덮치고, 급류가 우리를 휩쓸었으리라. 거품을 뿜어내는 물살이 우리를 휩쓸었으리라. ◎ ○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 ◎
복음<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2,13-18)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6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제1독서 (1요한1,5-2,2)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6)
앞선 요한1서 1장 5절에서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티끌만한 어둠도 없으신 완전한 빛이시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전혀'로 번역된 '우데미아'(udemia)는 '어떤 종류의 ~도 없다'는 부정의 뜻으로서, 빛이신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종류의 어둠도 없다는 뜻이다.
특히 사도 요한은 '우크'(uk)와 '우데미아'(udemia)라는 부정어를 같이 사용함으로서 부정의 의미를 보다 강조하고 있다. 즉 빛이신 하느님 안에는 빛이신 하느님의 속성에 어떤 손상이나 흠집을 낼 만한 어떠한 종류의 어둠도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어둠'으로 번역된 '스코티아'(scotia)는 사도 요한의 전용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저서에 절대적으로 많이 쓰였다. 즉 신약의16회 용례 중에서 요한의 저서에 14회가 쓰였다. 그중의 12회가 모두 자연적 어둠이 아닌 죄와 불의 등 상징적 의미로 쓰였으며 (요한1,5; 8,12; 12,35.46; 1요한2,9.11), 요한1서 1장 5절에서도 같은 의미로 쓰였다.
이것을 통해 사도 요한은 하느님과 친교하는 모든 사람은 친교의 대상이신 하느님의 속성을 바로 알아야 됨을 보여주고 있다.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신 하느님과 친교하려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그 자신도 철저히 거룩함에 머물러야 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A.D.1세기 말 교회에는 빛이신 하느님과 친교한다고 하면서도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살아간다면'으로 번역된 '페리파토멘'(peripatomen)은 '둘레', '근처','주위'를 의미하는 전치사 '페리'(pari)와 '밟다'(루카10,19)란 뜻의 동사 '파테오'(pateo)의 합성어로서 '이리저리 거닐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페리파테오'(peripateo)의 현재 가정법이다.
현재 가정법은 현재의 반대적이고 계속적인 행동을 나타내므로 본문에서 이것은 빛보다도 어둠을 사랑하는 습관적인 방식을 가리킨다. 특히 요한의 편지에서 이 단어는 윤리적인 의미를 포함하며, 한 인간의 개인적인 삶의 스타일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었다(1요한2,6.11; 2요한1,9.6; 3요한1,3.4).
한편,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1요한2,22)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하느님과의 친교는 영적 진리를 깨닫는 지적인 측면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하느님과 친교는 단순히 지적인 깨달음과 동의가 아니라 행위를 동반한 윤리적인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거룩한 영을 소유한 자들은 어떠한 죄로부터도 자유롭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거룩한 영적 지식을 선물받은 사람은 육체의 죄가 자신을 더럽히지 못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직접 주시는 놀라운 영지(靈知)를 가진 자에게는 더 이상 죄의 원리가 지배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인간의 본성과 경험은 죄가 하느님과의 영적 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음을 가르쳐준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을 수 없고,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 있을 수 없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요한3,20-21)
빛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의 구세주로 모신 자는 진리를 실천하는 실질적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구속 성혈의 공로가 모든 허물을 깨끗하게 하므로 인간으로 하여금 더 이상 어둠 가운데 머물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과 친교한다고 고백하는 이가 계속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모순인 것이다.
참된 회심과 죄의 보속은 인간을 더 이상 어둠 속에 살아가도록 놔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안에 머무시는 거룩한 성령께서 속성상 어둠을 싫어하고 어둠과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시는 하느님의 자녀는 진리의 영의 속성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빛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마태 2,13-18)
예수님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죠? 그리고는 헤로데의 칼을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을 하세요. 성경은 그 사건이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라는 구약의 예언 성취라고 합니다. 그 사건은 예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의 삶을 그대로 사실 것임을 암시하는 사건임과 동시에 율법주의와 유대주의로 자신들의 힘과 가치를 숭앙하는 이스라엘 자체를 힘의 세상인 이집트로 선언해 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스라엘에서 이집트로 가셨는데 성경은 하느님의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고 그런단 말예요. 졸지에 유대주의의 이스라엘이 이집트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하느님이 그걸 부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베들레헴 지역의 두 살 미만의 남자아이들이 모두 도륙을 당하는 일이 발생해요.
(마태복음 2:15~18)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내가 내 아들을 에집트에서 불러내었다' 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6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박사들에게 알아 본 때를 대중하여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 18 '라마 에서 들려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하는 소리, 자식 잃고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는 구나!'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으세요? 하느님이 분명 요셉에게 그 자리를 피하라고 말씀 하셨죠? 그러면 그때에 다른 어미들에게도 전갈을 보내서 그 자리를 피하게 할 수는 없었을까요? 왜 다른 얘들은 다 죽게 놔두세요? 예수님만 살짝 들어서 이집트로 보내신단 말입니까. 하느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하느님은 성경의 독자들에게 뭔가를 교훈하시기 위해서 어린아이들을 다 죽여 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 하늘에 뜬 별이 동방박사들을 일부러 헤로데에게 데리고 간 거예요. 죽이라고요. 아니 그 별이 미쳤지, 바로 그냥 예수님 태어나신 구유로 갔으면 될걸, 왜 헤로데에게 동방박사들을 데리고 가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게 하냐구요? 죽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라는 호세아의 예언이 인용된 곳에 ‘라헬의 통곡’ 이라는 예레미아의 예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을 주의하여 보셔야 해요. 지금 성경은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그 율법주의 자체를, 힘의 원리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그 이집트로 규정을 해 버리시고 그래서 예수님을 거기서 빼내는 거예요. 예수님이 첫 번째 엑소더스를 하고 그 뒤를 따라 하느님의 백성들이 엑소더스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정작 뭐였냐면, 이스라엘의 유대주의, 율법주의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거기 와서 죽으시는 거예요. 이집트는 바로 교회 안에 그러한 율법주의, 유대주의의 모형으로 등장했던 거지, 이집트가 쳐 죽일 놈들이 아니라니까요. 그게 우리 안에 있는 바로 그 ‘옛 자아’ 그 모습이란 말예요. 그렇게 성경은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율법주의 자체를 힘의 원리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이집트로 규정해 버리고 그곳에서 사는 모든 자들은 모두 다 죽어야 할 자들임을 어린아이들의 죽음으로 주지시키는 거예요. 다 죽어야 되는 거라는 거예요. 이집트니까.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은 어떤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자의에 의해서 내어 놓기도 전에 죽어야 할 자로 분류가 되는 거예요. 이걸 원죄라고 해요.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으면 다 죽어야 할 존재예요. 나면서부터 죽어야 할 자로 분류가 되는 자들이 자라면서는 오죽하겠어요? 그러니까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다 죽었다는 건...... 거기에 사는 모든 자들은 다 죽어야 할 자들이라는 선언이란 말입니다. 마태오는 그걸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통곡하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어요. 이 예레미야의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대의 멸망과 관계있는 예언이죠? 라마라는 곳은 남유다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때 집결된 곳이에요.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죠? 여호수아 18장에 보면 나오죠. 그 라마는 라헬의 무덤이 있는 샐사 부근이에요. 예라미야 예언자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북이스라엘은 이미 망했고, 남 유대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마치 라헬이 그 무덤 속에서 자기 자식들이 끌려가는 걸 보고 통곡하는 것으로 묘사를 한 거예요. 라헬의 두 아들이 누구죠? 요셉과 베냐민, 요셉의 큰 아들은 에브라임, 북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에브라임이죠? 망했잖아요? 남유다는 베냐민. 라마가 또 베냐민의 땅이고, 요셉과 베냐민, 두 아들을 다 잃은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라헬을 이스라엘의 어미라고 하는 거죠. 그렇게 이스라엘 전체가 다 멸망했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모든 인간은 다 죽어야 된다는 뜻이에요. 하느님의 백성으로 택해진 그자들도 원래 다 죽어야 된다는 그런 뜻이에요. 그렇게 다 죽어야 되는데, 그래서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이 다 죽었는데, 라헬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죠? 왜?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밖에 없어요. 죽은 자식이 돌아오는 것 이외에 다른 건 절대 위로가 안돼요.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예수가 바로 그 죽은 아들을 살리러 왔다 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거란 말입니다. 한 아기가 와서 죽음에 던져져야 할 하느님의 아이들을 선택하여 살려 내는 거예요. 그걸 구원이라고 해요. 그렇게 예수는 죽어야 할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것이지, 이 죄악의 세상에서 그들의 일상을 풍요롭게 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그런 복을 주어서 인간들의 역사 속에서의 일상을 풍요롭게 해 주러 오신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태복음 1: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
자기 백성, 모든 백성이 아니에요. 자기 백성만. 어디에서? 죄에서. 그게 메시아란 말예요. 그렇게 구약적 이스라엘의 율법주의를 폭로한 성경은 역사적 이집트에서 예수님을 다시 불러 내시죠? 예수님께서 출애굽 이스라엘의 여정을 그대로 밟고 계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집트에서 나오셔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게 지금 마태복음의 흐름이에요. 세례라는 건, 애굽의 이스라엘이 죽고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새롭게 창조되는 구원의 모형이에요. 그래서 물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의식을 행하는 거죠. 그것도 하느님의 주권과 능력에 의해 성취될 새 창조의 모형이에요. 첫 창조 때 무대 배경이 어땠죠? 수면 위에 하느님의 영이 운행을 하시고 '빛이 있으라'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창조가 시작됐잖아요? 예수님의 세례 현장은요? 저주 받을 구약이 빠져 죽을 물이 있고,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 자신이 계시고 직접 하늘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또 떨어져요. 그리고 그 위에 하느님의 영,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한단 말입니다. 이게 새 창조라는 거예요. 새 창조, 첫 창조에서 모형 되었던, 그리고는 광야로 나가셔서 40일 시험을 받으세요. 그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이제 12제자를 모으시죠. 그건 교회입니다.12제자, 하느님의 교회를 대표하는 12제자를 모아서 그들을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의 도를 전하는 어떤 산으로 끌고 올라가시는 거예요. 그게 산상수훈의 산이란 말입니다. 이건 정확하게 출애굽 이스라엘의 삶을 회복시키고 완성시키며 가는 모습이에요. 어린 양의 피의 공로로 살아난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여 홍해를 건너죠? 그걸 사도 바오로가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는다고 그래요. 고린도전서 10장 2절에서, 그 홍해에서 이집트군대가 다 빠져 죽죠? 그 이집트 군대는 뭐라고 그랬어요?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건져내면서 이스라엘을 자주 군대라고 부르시죠? 이집트 군대가 빠져 죽었다라는 건, 애굽화된 이스라엘의 육적 자아의 죽음을 상징하는 거예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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