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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1회 마르 5,21-43 박기석 신부님 마르코복음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28 조회수1,223 추천수2 반대(0) 신고

제21회 마르 5,21-43 박기석 신부님 마르코복음

 

 

복음의 시작 마르코가 전한 예수 박기석 신부님입니다. 지난 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이방인 지역입니다. 구마 치유를 보여주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오늘은 두 여인을 구해 주시는 장면이에요. 그런데 오늘 장면은 마치 연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1막 3장의 연극처럼 제시되는 데요.

 

* 1막 3장의 연극 형태 (샌드위치 기법)

1장 :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신 기적 사화 (마르 5,22-24)

2장 : 혈우병 여인을 고치신 기적 사화 (마르 5,24-34)

3장 :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신 기적 사화 (마르 5,35-43)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신 기적 이야기와 혈우병을 앓고 있는 여인을 고치신 기적 이야기가 섞여서 즉, 소위 말하면 마르코가 자주 사용하는 샌드위치 기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연결 고리는 믿음입니다. 야이로의 믿음과 하혈병을 앓고 있던 여인의 믿음, 그리고 이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뤄지는데 바로 하느님의 능력, 힘을 듀나미스라고 하는데 바로 하느님의 힘, 능력, 기적이 드러나는 겁니다.

 

우선 1막 1장의 제목을 '깊은 근심에 빠져 있는 아버지'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회당장은 회당 건물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감독하기 위해서 선출된 평신도예요. 물론 한 명이 되기도 하고 여러 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앞서 마르코복음에서 나왔던 회당장은 예수님에게 적대적 태도를 취했는데, 지금 5장에 나오는 이 회당장은 이름이 있습니다. 야이로라고. 그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바로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렸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엎드린다는 것은 신을 만나는 인간의 자세라고 그랬어요.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마르 5,23) 지금 '어린 딸'로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사실 마르코는 5장 42절에서 이 어린 딸의 나이를 알려줍니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마르 5,42)

 

예수님 시대의 전통과 문화 안에서 열두 살 소녀는 아이가 아니에요. 루카복음에도 예수님이 열두 살 소년 때 예수님의 부모님이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의 남자 열두 살, 남자 성인식은 미츠바라고 해서 열세 살이거든요. 어렸을 때는 몸이 여자가 더 빨리 성숙되잖아요. 그래서 이스라엘 여인들의 성인식은 열두 살입니다. 그러기에 이 소녀는 이스라엘 기준으로 하면 어른이에요. 그런데 왜 어린 딸이라고 했을까? 그만큼 아버지의 애정이 깊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정말 사랑하는 딸이었다는 거죠.

 

* 율법에 따른 성인이 되는 나이 ⇒ 남자 13살, 여자 12살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회당장으로서 당시의 사회적 신분으로 높은 신분이고 지역에서는 유지 같은 사람인데 그런데도 그는 체면도, 회당장이라는 지위도 다 버리고 예수님께, 방랑 예언자에게 엎드렸다는 거예요. 그만큼 딸에 대한 사랑이 깊었고 또 다른 하나는 그렇게 자기 신분을 잊을 만큼 예수님께 엎드린 이유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정말로 자기 딸을 고쳐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마르 5,24) 예수님께서는 바로 야이로의 요구에 응하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마르 5,24) 이방인 지역인 게라사에 있던 예수님이 다시 호수 건너편 유다인 지역으로 돌아오신 거거든요. 게라사에서는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자, 구마 치유를 하니까 떠나 달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다시 유다인 지역으로 다시 돌아오시지 막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환자들과 그 가족들이 예수님에게 매달리는 거예요. 그런 와중에 지금 야이로가 엎드려서 자기 딸을 먼저 고쳐달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도 너도 나도 우리 딸도, 우리 아들도, 우리 아버지도, 어머니도 고쳐 달라고 몰려들었다는 거죠. 그다음 1막 2장입니다. 5,25-34절인데 여기서는 제목을 '용기 있는 믿음을 가진 여인'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갑작스럽게 한 여인이 등장해요. 야이로의 딸이 아니라 뜻밖의 여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밀쳐대는 군중들 가운데서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는 것. 만성 하혈병으로 심한 병고를 겪고 있었다는 것인데요. 이것은 레위 11ㅡ15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정결법에 위반이 됩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인이 피를 흘린다고 그러면 부정한 상태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 여인의 증상으로 봤을 때 혈우병에 걸렸다. 우리 복음은 하혈병이라고 하지만 의학적 소견을 붙인다면 이 여인은 혈우병입니다. 혈우병은 월경이 아닌 때에도 하혈을 하는 경우를 우리가 혈우병이라고 하죠. 그래서 여인의 월경, 생리 기간 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정한 사람으로 쥐급을 하거든요. 그런데 계속적으로 하혈하니까 이 여인은 영구적으로 계속해서 부정한 사람인 거예요.

 

그녀는 예배를 위해서 성전 경내에도 들어갈 수 없고, 공동체 일원으로 들어올 수도 없고, 성전에 들어올 수 있는 속죄 예식도 가질 수 없을 만큼 아주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열두 해 동안 앓고 있다고 마르코는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어요. 여기서 숫자 12는 굉장히 상징적인 숫자요. 아까 야이로의 딸이 열두 살. 두 여인은 12라고 하는 공통적인 숫자를 갖고 있어요. 한 사람은 열두 살, 한 사람은 열두 해를 앓고 있었다는 거죠.

 

구약성경이 의학 전문 서적은 아니지만 일단 모세 율법 정결법 안에서 본다면 생물의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그래서 피는 생명이죠. 따라서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고 있던 여인은 열두 해 동안 생명을 흘려보낸 거예요. 즉 아무 관계도 맺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 죽은 사람이나 다름 없었다는 것입니다.

 

* 생물의 생명은 그 피에 있기에(레위 17,11) 피는 생명 (신명 12,23)

 

그런데 공교롭게도 야이로의 딸도 나이가 열두 살입니다. 지금 하혈병을 앓고 있는 여인도 이 병을 앓고 있는 기간이 열두 해고, 두 여인 모두 사람들과의 관계가 없을 만큼 죽음의 상태에 있는 거의 그런 상황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거죠.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이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마르 5,26)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갔을 겁니다. 그런데 아무 효과가 없어요. 그러면 또 다른 어려움이 붙죠. 돈이 없어집니다. 병고도 있지만 생활의 궁핍함까지 오는 이중의 삶의 어려움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마르 5,27)

 

이 여인은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갔어요. 소문만 듣고. 그렇다면 예수님 소문은 안 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정보력 하나는 끝내주는 여인이예요. 다 찾아갔을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얘기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온 거예요. 하지만 정결법에 의해서 사람들의 대열에 들어가서는 안 되지만, 또 사람들과 마주 서서 봐서도 안 됩니다. 그 여인과 접촉만 해도 접촉한 이는 부정한 이가 되기 때문에 그렇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나병 환자가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가지고 사람들을 밀쳐내고 예수님께 고쳐 달라고 매달렸던 것처럼(마르 1,40)이 여인도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 속에 군중 속에 들어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부정적인 의도로 접촉한 건 아니에요. 그 여인과 접촉만 해도 부정한 자가 되는 거잖아요. 예수님을 부정한 자 되게 하기 위해서 여인이 예수님을 만진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고, 예수님이 내 병을 낫게 해 주실 거라고 굳은 믿음 속에 절대적 신뢰 속에. 그러면서 약간의 접촉만이라도, 옷깃만 스쳐도 내가 낫겠지라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졌고 또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뒤로 갔다고 표현하고 있죠.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5,28)

 

3장 10절에 마르코는 일찌기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몰려서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마르 3,10) 많은 사람들이 정말 예수님께 간절히 자신이 낫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져라도 보고 싶어했던 이들이 이미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예수님께 손을 댄다는 것, 부정한 여인이 손을 댄다는 것은 당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결법 규정 때문에.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나을 수 있다는 믿음, 저분이 나를 고쳐 주실 수 있다는 믿음, 절대적 신뢰. 이렇게 용기를 낸 대단한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즉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구원의 힘을 지니고 계심을 알아보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접촉이라고 하겠습니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마르 5,29) 마르코가 즐겨 사용하는 '곧바로, 즉시'. 곧바로가 여기서도 사용되죠. 예수님 옷에 손을 대자마자 그 여인이 곧바로 나았다. 감쪽같이 자신의 병이 사라졌다는 것을 여인이 느낀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같이 느끼셨어요.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마르 5,30)

 

여인이 손을 대었을 때 여인도 자기가 나은 걸 알았지만 예수님도 당신에게서 힘, 듀나미스라는 희랍어는 '하느님의 힘, 기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힘이 빠져나갔음을 예수님도 인지하셨다는 거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아셨는지를 마르코는 설명을 안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가 아니라, 예수님이 인지하셨다는 게 중요해요.

 

그래서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둘러 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마르 5,31)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합니다."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마르 5,31) 여인도 알고 예수님도 아는데 누구만 몰라요? 제자들.

 

지난 시간부터 제자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본다고 그랬습니다. 4장 풍랑을 가라 앉히시는 기적부터 이 제자들이 여기서도 빈정대는 말로 하는 거예요. "아니!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예수님 왜 그런 걸 저희한테 물어보세요?" 이렇게. 여러분들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 타시면 내가 원치 않아도 부딪끼고 같이 차 안에 들어가야 돼요. 그런 거예요. "아니, 이렇게 옷이 스칠 수도 있지, 왜 그런 걸 저희한테 물어 보세요? 이게 제자들의 태도예요. 빈정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주관대로 판단을 해 버리는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마르 5,32) 예수님께서는 당신 뒤에서 움직였던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십니다. 제자들과 달리 여인은 어떻습니까? 용기를 다시 한 번 내죠. 이실직고 해요. 사실 여인이 나설 수 없습니다. 자기 병이 나아서 나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이 사실은 오해 살 수 있죠. 부정한 자가 다른 사람을 만지면 그 사람도 부정한 자가 되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런데 이 여인이 이실직고 그대로 합니다. 왜? 내가 나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믿었고 그분이 정말 그렇게 해 주셨기 때문에 용기를 내요. 그녀가 두려움을 갖고 나서지만 앞서 제자들이 풍랑을 가라 앉혔을 때의 기적, 두려움이라든지 또 지난 주에 게라사 지방 사람들이 가졌던 두려움과는 또 다른 두려움입니다.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제자들이나 게라사 지방 사람들의 부정적 두려움이 아니라, 하느님을 정말로 느꼈다는 신적 경외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그 여인이 저예요 하고 나와서 장면이 어때요? 엎드렸다죠.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마르 5,33) 야이로도 자기의 딸을 낫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엎드렸습니다. 이 여인도 지금 병이 낫고 예수님이 찾으시니까 엎드리잖아요. 지난 시간에도 게라사 지방의 더러운 영이 들린 이도 예수님을 보자마자 엎드리죠. 예수님과 만나서 반응하는 이들이 다 예수님께 엎드린다는 거.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인식을 한다는 게 공통점이예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마르 5,24)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뭐라고 그러시죠? '딸아!' 아까 야이로는 '어린 딸'이라는 표현을 썼죠. 열두 살이면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그만큼 애정이 깊었다는 얘기인데, 이 분위기를 그대로 예수님이 하혈병을 열두 해나 앓고 있던 여인에게 씁니다. '딸아!' 당신의 깊은 자비와 애정을 드러내십니다.

 

즉 야이로가 자기 딸을 사랑한 것처럼 지금 예수님과 이 하혈병을 앓고 잇던 여인이 마치 아버지와 딸과 같은 관계다. 그만큼 애정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애정을 갖게 한 예수님이 사랑을 갖게 된 여인에게 그 제공을 누가 해 준 거예요. 여인의 믿음이 대단했기 때문에. 그래서 '평안히 가거라.' 하고 인사하시죠. 전통적인 파견의 축복입니다.

 

히브리 말로 평화는 샬롬인데, 단순히 분쟁이 없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온전함의 의미는 갖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평화와 건강에 대한 말씀, 그녀에 대한 그 말씀은 신체적인 치유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온전하게 되었으니 그대로 잘 유지하라는 얘기입니다. '건강해라.' 육체적으로 마음으로도 다 건강해야 된다는 얘기죠. 거룩한 분과 접촉했으니 너 거룩하게 살아야 되라는 얘기예요.

 

* 거룩한 분, 세상에서 제일 신성하고 깨끗한 분을 접했으니 이제는 더러운 것, 죄와의 접촉 없이 살아가야만 함

 

예수님이 요한복음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뭐라고 그러시죠?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똑같습니다. 이 여인에게도 '평안히 가거라.' 이 말에는 건강해졌으니 마음으로도 깨끗해지도록 노력하라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를 지켜 본 이들 중에 누구보다도 회당장 야이로가 있음을 기억하셔야 돼요.

 

왜냐하면 하혈병을 알고 있는 여인이 뜻밖에 갑자기 불쑥 등장했지만 그 여인이 나았잖아요. 하지만 야이로는 분명히 처음에 자기 체면 다 버리고 예수님께 엎드려서 고쳐 달라고 하고 예수님을 하느님 대하듯이 했는데, 이 여인 때문에 지체되었어요. 지체되었기 때문에 자기 딸이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요. 그렇다면 자기가 처음 예수님께 지녔던 믿음을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야이로는 그 사건을 보고 지체하면서 어, 이거 어떡해야 되지? 우리 딸 어떻게? 이것이 아니라 치제될 수록 이 여인의 사건을 통해서, 하혈병을 앓고 있던 여인이 낫는 거를 보고 아, 더 걱정하지 말자. 내 딸 나을 거야! 이래야 되거든요. 과연 그런지 한 번 봅시다. 이게 이제 1막 3장, 5,35-43절 마지막입니다. 대화를 나누시는 과정에 집에서 하인들이 쫓아와요.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마르 5,35) 야이로가 우려했던 바가 이루어진 거죠. 그런데 그 다음 말이 더 안타깝고 어이가 없습니다. 좀 기분이 상하는 말로 들려요.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로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르 5,35) 회당장 야이로 측 사람들의 제안이죠. 그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지금 하실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들이 착각하는 거예요.

 

하느님의 권능은 죽음 너머, 죽음을 이기시는 분, 다스리시는 분인데 그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을 해 버리는 거죠.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사람들이 야이로에게 제안한 말을 동시에 들으시면서 그 제시된 의견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즉, 예수님은 소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무시하라고 얘기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이로의 입장에서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죠. 물론 그 하인의 말을 듣고 절망의 순간에 빠졌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즉 희망의 끈을 놓지 마라. 너 봤잖아. 하혈병을 앓고 있는 여자도 낫는데 왜 그래. 포기하지마. 그러면서 "믿기만 하여라."라는 말을 덧붙이십니다. 여인에게도 '건강해졌으니 평안히 가거라."

 

몸도 마음도 이제 건강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라 하는 것처럼 '믿기만 하여라.' 네가 처음 나에게 와서 엎드렸던 그 믿음처럼, 확신처럼 절대적 신뢰를 계속 유지하라고 예수님이 당부하십니다. 그리고 드디어 지체되었던 발걸음을 옮기시어 야이로의 집으로 가십니다.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마르 5,38)

 

자, 슬퍼하는 이들, 사람이 죽어서 곡을 해 주던 이들이죠. 그들이 시신이 있는 방 바로 앞에 나와 모여 있습니다. 시신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은 정결법 때문에 그래요. (이스라엘의 정결법 : 민수 19,11-22) 그런데 고대 중동 문화에서 그리고 오늘 날에도 여전히 중동 문화 사고관 안에서 죽음은 우리가 꿋꿋하게 그 아픔과 슬픔을 견디어 내는 식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는 무조건 슬픔을 토로해 내야 되는 게 중동의 문화예요. 그래서 인간이 낼 수 있는 비통함과 고뇌 ,모든 슬픔 이런 감정을 다 쏟아냅니다.

 

우리고 초상 나면 천주교 가정 같은 경우에는 다른 교우들이 와서 연도도 많이 하고 또 유교 전총에서는 곡소리 하고 그러잖아요. 이스라엘에는 전문적으로 곡소리 하는 직업군도 있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렇게 소리내어 울며 슬퍼하던 이들 사이로 예수님이 지나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마르 5,39)

 

지금까지 곡소리 하던 사람들이 특히 이 사람들이 직업 곡소리 하던 사람들이라면 피식했을 겁니다. "뭔 소리여, 아니 지금 우리가 봤는데 죽었는데. 자기가 의사야? 의사도 아닌데 죽은 걸 어떻게 해. 확인했어? 냄새도 날텐데. 그리고 이제까지 우리 곡소리 한 거는 뭐가 되고. 우리 쇼한 거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고 있다'는 말로 대신하고 있어요. 여기 외에도 예수님이 죽음을 잠들었다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지요. 요한복음 11장 친구 라자로의 죽음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세요?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한 11,11)

 

* 죽음 = 잠들었다. ⇒ 라자로의 소생 기적 사화 (요한 11,1-44)

 

또 복음사가들도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무덤에 묻혀 계실 때에 뭐라고 그러세요? 사흘 동안 잠드셨다고 표현하죠. 성경에서 죽음을 잠들었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마르 5,40) 자기가 아무리 훌륭하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다 하더라도 죽음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을 거야라고 비웃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마르 5,40)

 

중요 사건 때마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들어가시죠. 그런데 오늘 아이의 부모님을 데리고 들어가세요. 야이로와 그의 아내죠. 그것은 그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배려입니다. 물론 어린 딸에 대한 일이기도 하지만 이제 벌어질 일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이들을 데리고 들어가는 거예요. 배려입니다. 얼마나 큰 일이냐 하면, 죽었던 이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거든요.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마르 5,41) 예수님이 병자의 손을 잡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장모도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셨다. 손을 잡아 주시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던 일이었고 야이로가 처음에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했던 거죠. "탈리타 쿰!" (마르 5,41) ⇒ "소녀야,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마르코는 자기 복음서 안에서 그리스 독자들을 위해서 아람어를 번역해 주거든요. 지금 외에도 "코르반"(마르 7,11) 히브리어 : 서약문이라든지 또는 우리가 잘 아는 "에파타" 마르 7,32 ⇒ "열려라" 그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곳 "골고타" 마르 15,22.34 ⇒ "해골터" 또는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이런 식으로 아람어를 쓰고 번역을 해 주는 게 마르코의 특징이에요. 아람어를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서.

 

여기서도 "탈리타 쿰!" ⇒ "소녀야, 일어나라!" 탈리타는 어린양, 또는 어린 소녀를 뜻하고, 쿰은 일어서다입니다. 그러니까 깊은 잠에서 깨우는 거예요. 여러분들 잠에서 아이 깨우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 야이로나 그의 아내에게 행복했던 옛 생활을 떠올려지게 하는 거예요. 많은 분들 아이들 학교 가기 전에 깨우신 적 있으시죠? 아무튼 아이는 죽은 게 아니고 잠들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잠든 애를 깨우듯이, 야이로의 부모에게 너희가 전에 했듯이 그렇게 깨우신다. 이 얘기죠. 내가 그렇게 깨워줄게. 이 아이가 잠자다 깬 것처럼 일어선다는 거예요. 그런 것을 연상케 해 준다. 그뿐만 아니라 '일어서다'라는 말은 부활을 얘기하는 거조. 이미 중풍 병자에게도 예수님이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자 즉시 걸어갔던 기억. 2장에서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마르 5,42) 이스라엘에서는 여성이 12.5세부터 결혼합니다. 왜냐하면 열두 살이 성인식이니까 즉, 어른이라는 얘기인데 그 어른에게 아이 취급을 한다는 건, 애정이 담김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둘이라는 숫자가 하혈병을 앓고 있던 여인과 연관성이 있다고 그랬죠. 마르코의 의도예요.

 

즉 두 여인에게서 일어난 사건들이 각각의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라 분명한 연결성이 있다는 거. 그래서 그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두 사람 다 거의 죽음 직전에 삶의 관계가 단절되었지만, 예수님에 의해서 회복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겁니다 .소녀가 곧바로 일어나서 침상 주변을 걸었을 때 그녀가 처음 본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그리고 예수님입니다.

 

중풍 병자가 일어나서 들것을 들고 곧바로 집 밖으로 나갔을 때 봤던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마르 2,12) 그런데 지금은 살아 있는 중풍 병자(앉은뱅이)가 일어난 것보다 죽었던 이가 일어나서 걸으니까 더 놀랄 수박에 없는 겁니다.

 

특히 제자들은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던 예수님을 봤기 때문에 "어! 다음에 또 무슨 일을 벌이실까? 이분." 이렇게 반응을 보인다면 이건 더 문제죠. 오히려 제자들이 보여 줘야 될 반응은 놀람이 아니라, "아!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구나!" 하고 신앙고백을 해야 돼요. 그런데 여기서 지금 제자들은 여전히 넋을 잃고 놀라기만 하죠. 예수님은 여기서 두 가지를 제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마르 5,43) 함구령을 내리시는데 이게 지켜질까요? 열두 살 소녀가 함구령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무리 열두 살 소녀가 이스라엘 기준으로 어른이 되지만 자기 얘기 다 떠들고 다닐 겁니다. 아니 더 큰 문제는 곡소리 하던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의 입은 막을 수가 없지요. 정말로 예수님이 안 지켜 질 것을 명령한 것이냐? 아마 알고 계셨을 거예요. 그럼에도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행적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즉, 십자가를 통해서만 해석되어 져야 함을 강조한 겁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공론화시키지 말라는 겁니다.

 

오늘날로 하면 토크쇼, 예능 프로그램 이런 데에 나와서 "누구누구 소녀 죽음에서 깨어나다" 이런 쇼가 되지 말라는 얘기예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번째 제안은 "먹을 것을 주라."는 거예요. 병석에서 일어난 이, 건강이 회복된 이가 제일 먼저 보이는 반응이 배고픔입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주리는 얘기죠. 그리고 배고픈 자녀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부모에게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배고픈 자녀에게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은 그저 멍하니 그렇게 지켜만 보고 있지만 말고 그 기쁨 속에서 어린 딸이 다시 보통의 인간 조건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제껏 마르코복음 1장에서 4장까지 마르코 자신이 제시했던 것들 그 이상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5장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이 죽음의 힘을 맞상대하셨다는 거죠.

 

그래서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셨다는 건대. 앞서 호숫가에서 거의 죽을 뻔했던 제자들, 죽은 건 아니지만 거의 죽음까지 도달했던 것, 그리고 게라사 이방인 같은 경우에는 무덤가에 살았죠. 죽음과 연관이 있고, 거의 죽음이나 다름없던 상태였고, 하혈병을 앓고 있던 여인도 열두 해나 앓고 있었기 때문에 영구적인 부정적인 사람, 죄인으로서 거의 죽음 직전, 사회와 단절됐던 사람이에요. 완벽한 죽음은 아니지만 죽음 직전에 있던 상황을 바꿔 놓으시는 예수님이셨죠.

 

그런데 이제는 이 야이로의 딸을 통해서 정말 죽음을 다스리시는 분, 죽음을 이기시는 분, 죽음을 넘어 더 뛰어난 높은 권능을 지니신 분으로 우리에게 마르코가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녀에게 일어서라는 말을 두 번, 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일어서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을 연관시키는 단어예요. 죽음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시다.

 

즉 부활시키다라는 표현으로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앞서 세 번 당신에 대한 예고 때, 또 베드로에게 얘기하셨던 말씀,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마르 14,31)라는 제안. 또 부활하신 다음 천사가 여인들에게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6) 여기에 같은 동사 '일으켜 세우다'라는 동사가 쓰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이 당신 죽음 특히 부활에 대해서 죽음을 다스리는 분으로 제시되면서 우리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당신이 부활하실 것임을 서서히 보여주시는 그런 장면이 5장 야이로 회당장의 딸을 죽음에서 일으키시는 장면에서 보여진다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주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 속에서 그분께 온전히 의지하며 우리 믿음을 키워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유지해 나가는 믿음, 이런 것들을 우리가 5장에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다름 시간에는 6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정리 (마르 5,21-43)

 

주제

ㅡ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 맺게 되는 생명의 열매

 

특징

ㅡ 두 기적사화를 한데 섞어낸 샌드위치 기법의 사용

ㅡ "일어나라!"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마르 5,42) 같은 동사 반복 사용

예수님께서 죽음의 힘을 마주 대하셨고 이를 확실히 이겨내셨음을 명확하게 제시

ㅡ 야이로의 딸의 부활 사건은 우리들의 부활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죽음에서 일이켜질 것임을 예시함

 

예수님의 가르침

ㅡ 예수님을 진정한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구원을 보여주심

ㅡ 죽음을 지배하는 예수님의 권능을 깨닫고 예수님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

 

수고하셨습니다. https://cafe.naver.com/withbiblestudy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마르코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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