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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토닥 토닥 (로마8,7-1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30 조회수1,107 추천수0 반대(0) 신고

 

도란도란글방 2020.12. 30.

(공동번역성서)

 토닥토닥

(로마8,7- 11)

7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원수가 되고 맙니다. 8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9 사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령을 보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10 비록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은 이미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을 살아있습니다. 11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은 몸까지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역사를 경험하게 하시면서 바로 그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그것에 감사함과 찬송함으로 반응하는 아들들과의 그 관계를 가르치기 원하세요. 진짜 너희들을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경험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생명이 잉태되고 거기에서 행복과 기쁨과 안식이 발출된다는 걸 알려주시기 원하시는 거예요 우리에게

중요한 건 외부적인 현상이나 환경이나 상황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간의 올바른 사랑의 관계라는 거예요. 진짜 행복, 진짜 기쁨은 그 한마음그 참 마음에서 주어지는 영적 생명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이 모형인 세상 속에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그런데 여러분이 그 하느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그 하느님의 사랑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세상에서 너무 행복하면 안 된다니까요

 이 세상의 보편적 현실은 그 다큐멘터리 동행이라는 프로그램 속에 등장하는 하위 1%의 그 극빈자들의 생활과 사실은 별반 다르지 않아요. 이 세상은 하늘의 풍요를 담을 그릇이 못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의 현실을 눈멀고 귀먹고 가난하고 병들고 어둡고 황량하고 고통과 슬픔과 눈물이 가득한 곳이라고 묘사를 해요. 나중에 하느님 나라가 오면 그것이 없어진다고 그러는 거 보면 그것으로 꽉 찬 곳이 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심지어 이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차있다. 그래요. 죽음으로 가득 차있다.

인간들의 스스로의 열심과 노력으로 아무리 번영과 성숙과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고 성취한다고 해도 그것이 진짜 풍요가 아니라고 해요. 너희가 부요하다고 하나 실상은 벌거벗었고 가난한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는 하느님의 일갈을 보면 이 세상이 부요라고 풍요라고 자랑하는 그건, 사실은 그게 가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그 하늘의 행복과 기쁨을 그 안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못 된다니까요. 너희들 착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거 진짜 행복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하느님은 그걸 알려주고 싶으신 거예요진짜 행복, 진짜 기쁨, 진짜 안식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알아, 그 사랑을 알아 그것을 자기 마음으로 갖게 되었을 때, 비로소 가질 수 있는 것이에요

그게 하늘의 행복이고 하늘의 기쁨이란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런 나타난 현상계의 그런 상황이나 현실이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휘둘리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리고 진짜 불행, 진짜 고통, 진짜 절망은 그런 가난, 그런 질병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그 아버지의 사랑이 없는 곳에서 영원을 살아야 하는 영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아담들은 육적 환경과 육적 성숙, 육적 실패와 육적 성취가 주는 그런 감정 따위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는 거예요.

율법도 성전도 죄도 악도 예수도 하느님의 손에 들려서 하늘의 묵시를 계시하는데 사용되면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거예요. 그 죄가 아니고 그 율법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어떻게 진리를 압니까? 그러면 그건 나에게 가치 있는 거잖아요. 그랬을 때, 그게 나와 상관없는 죄가 되어 나는 용서의 상태가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무조건 착해지라 그러고 되지도 않는 거. 지나 먼저 그렇게 살아보라 그래요. 되나? 아니, 겉으로 드러나는 삶은 그렇다 쳐. 자기 마누라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그걸 그리스도교의 목적지 아니에요

그냥 종교의 목적지라고요. 인간들의 목적이라니까요. 그거는. 인간 보편의 자존심 챙기기. 그것을 진리 안에서 볼 줄 아는 사람이 그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읽어낼 때 그건 비로소 가치를 갖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거스틴이 오! 거룩한 죄여! 한 거라니까요. 내가 그거 없이 어떻게 이 하느님의 의와 생명을 알게 됐겠는가?

 

예를 들어서 하느님이 진리에 순서를 담아 이스라엘에게 주신 그 성전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고 깨닫는 이에게 있어서 그 성전은? 가치 있는 선물이죠? 예언자들이 그랬잖아요. 그래서 꼭 성전 마당에 가서 설교한 거예요. 예언자들이 딴 데 안 가고. ? 이거 아니야. 언제 하느님이 이런 제사드리라고 했니? 그들은 그 성전을 통하여 하느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들었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율법에도 분명히 거기서 그 제사드리라고 그랬는데 예언자들은 가서 아니야, 하느님이 그 말 한 거 아니야, 사실 하느님의 진의는 그거 아니었단다,’ 라고 얘기 했죠? 그러면 그에게 있어서 그 성전은 진리인 겁니다.

그런데 그걸 그 성전으로, 진리로, 그 성전을 진리로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 옛 성전은 그게 죄라니까요. 거기서 안 나오면 죽는 거예요. 하느님은 그들이 그 성전에서 행하는 일을 갖고 악이라 그래버렸어요. 그걸 찔레요, 가시라 그랬다니까요. 그리고 거기서 나오라고 그랬어요. 내 말을 듣고 나오라고.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 속에 들어가서 그 진리를 거기서 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 성전 안에서

그러니까 마치 예수가 어떤 이들에게는 살려주는 돌, 산돌이 되는 반면에 어떤 이들에게는 거치는 돌, 멸망시키는 돌이에요. 진짜 그걸 직역을 하면.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예수가 멸망시키는 돌이 되는 거예요. 그 예수는 곧 성경이라며요? 그러니까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이 사는 생명의 책이 되는데,(묵시록20)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심판의 책이 된다니까요. 성경이. 딴 책 아니고. 묵시록에서 이야기하는 그 책들은 성경이라니까요.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이거 뭐 다 그 얘기네? 단어도 다 그 이야기이고, 아니 심지어 문자 하나가 다 그 복음만, 그 진리만 얘기하고 있네? 라고 하면 그 책은 단수이고 생명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면서 그러한 세상 속 부유함이 진짜 부유함이 아니라는 것을 안, 그걸 통하여, 자주 장사 루디아나, 마가나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재물이 복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 인양 그것만으로 자기를, 그것에 자기를 의존하려고 했던 어리석은 부자에게 그 재물은 악입니다. 그것 자체가 저주라니까요. 가난하고 부유하고 이런 게 문제가 아니에요. 이왕이면 열심히 일해서 부자로 사세요. 제발. 누가 그런 게 가난이래요? 청빈? 무슨 놈의 청빈이요? 이왕이면 능력 되면 잘 벌어서 사세요. 그거는 신앙과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 여러분은 진리를 배워야 된다고요.

 

마찬가지로 70년간의 그 포로생활을 통하여 , 우리가 하느님의 은혜를 떠나면 이렇게 죄의 종, 세상의 종, 세상 풍속의 포로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거구나,’ 라고 배우면 그 70년 포로생활이 복이에요. 그러나 , 하느님은 왜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날 돕지 않아? 이건 도대체 뭐야? 왜 내가 겪지 않아도 될 것을 이렇게 겪어야 돼?’ 라고 그걸 그대로 표피적으로 받아들여버리면 그게 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육의 눈으로 인식하는 그 Fact(,사건,사실) 속에서 진짜 내용인 진리의 Fact를 읽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죄 속에 살다가 죄 속에 죽는 게 되는 거예요. 가난과 부요, 성공과 실패, 잘 나고 못남, 그런 거에 상관없이 이 현상계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가면 그게 곧 저주요,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 살다가 간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그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가면 그게 복이에요. 그렇게 이 세상 모든 것이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죄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대로 인식하고 행동해버리면 그 모든 것이 죄요, 악이 되는 거고. 그 속에 있는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읽어내면 모든 것이 복이요, 선물이요, 사랑인 거예요.

성경에 보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죠? 그런데 가장 중요한 거는 사랑이라 그럽니다. 믿음이라는 거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믿음의 대상은, 내용은 보이는 게 되면 안 되는 거네요? 그런데 성경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하느님은 믿음이다, 그래요. ‘호 떼오스’, ‘호 피스또스’. 그러니까 하느님의 이름이 믿음이네요. 그러니까 믿음의 내용이 하느님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하느님은 안 보이니까.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 내 안에 믿음이 있다, 라고 하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어떤 것 들 속에서 그 하느님을 알았다는 뜻이에요. 내 안에 믿음이 있다, 라는 말은.

그러면 희망은 뭐겠어요? 희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마음으로 바라고 바라는 어떤 것, 알지 못하는 어떤 추상적인, 형이상학 적인 어떤 것이 아니에요. 성경에 나오는 희망은 이 역사 속에 던져진 하느님의 백성들이 믿음이라는 것을 그 마음으로 갖게 하기 위해 하느님이 동원한 눈에 보이는 것을 성경이 희망이라 그래요.

희망이라는 건 아직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내가 바라는 어떤 것! 그런 추상적인 감정이나 기대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음으로 갖게 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동원한 어떤 것을 희망이라 그래요.

창세기에 보면 희망이란 단어가 첫 번째 거기서 나오는데 거기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온다니까요. 그래서 사도바오로가 그래서 눈에 보이는 희망이 그 희망이 맞니?’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바오로는 창세기를 명확히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 희망은 하느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한 모형이잖아. 그러면 보이지 않는 희망이 진짜 희망이지 그 보이는 것을 너희들이 그대로 받아들여버리면 그건 희망 아니라니까,’ 하고 바오로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로마8: 24- 25) 24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

, 보세요. 그걸 희망이라 그래요. 그러면 그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호 피스토스를 내 안에 이제 믿음으로 갖기 위해 하느님이 동원한 어떤 것으로 우리는 공부를 하고 배워야 돼요. 예수, 성경, 십자가, 성전, 세상, 인간, 이런 것들. 자 믿음을 갖기 위해 우리는 보이는 희망이라는 것으로 공부를 하는데, 배우는데 그것에서 , 이거! 라고 알게 됐어요. 그래! 그거구나, 이 눈에 보이는 그 희망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희망이구나. 라고 알게 되면 그걸 믿음이라 그러고 그걸 하느님에게 이게 그거죠? 라고 고백하고 다른 이들에게 흘리면 그걸 사랑이라고 해요. 이 정의들을 똑바로 알라고요. 아무데나 가서 믿음 희망 사랑 이런 얘기하지 말고. 그걸 사랑이라고 해요. 성경이. 그래서 믿음, 희망, 사랑은 이 천지가 있을 동안에 영원히 있어야 돼요. 그러나 하느님 나라가 완료되면 믿음 희망은 없어지죠? 사랑만 남는 거예요. 마찬가지예요..

믿음, 희망, 사랑이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 건 그 믿음과 희망으로 이 사랑이 되라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믿음, 희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다 같은 거잖아요.

(1고린13: 13) 13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바로 이러한 관점으로 죄의 모양으로 오셨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실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그 모양대로만 인식하고 그분이 이 세상 속에서 일으키신 기적이나 표적, 십자가, 부활 이런 걸 나타난 현상 인식 수준의 내 밖의 것으로 인식해버리면,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그건 내 거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와 무관하게 내 밖에서 행하신 어떤 것이라고 여겨요. 그리고 그걸 믿는다, 그래요. 자기가. 그걸 자기가 믿는다고 그래요. 그러면 그건 내 밖에 있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진리는 그 여러분 밖에서 대상이 되면 여러분을 못 살립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 십자가 그리고 그분이 하신 일, 그분이 일으키신 표적, 기적 이 모든 것들을 그냥 현상 인식 수준으로 보게 되면 그것으로 죄를 짓는다고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거예요. 죽은 자를 살리고, 풍랑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고 문둥병자를 낫게 하고, 하면서 너희들 나가서 절대 이야기하지마. 절대 이야기하지 마.

? 우리가 지금 원하는 것도 그런 거 아닌가요? 죽은 자가 살기 위해, 구원받기 위해, 병 낫기 위해, 부자 되기 위해 교회 오는 사람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너희들 그따위를,, 그따위 인식을 복음이라고 누구에게 가서 함부로 얘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절대 얘기하지 마. 그건 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내용이 있는 것이었는데 사람들이 그냥 눈으로 봐버리면 그리고 그걸 와, 하고 놀래버리면. 하느님은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대. 그 피가 우리를 대속했대. 이렇게 그냥 놀라버리는 수준에서 끝내버리면, 그리고 그걸 믿는다고 그래요. .~

하느님은 얘기하지 마, 얘기하지 마. 죽은 자가 살아나고, 풍랑이 잠잠 해지고, 문둥병자가 일어나는 건 다 진리를, 복음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야. 하느님의 그 사랑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야. 너희들의 그 원래 자리, 처음 자리, 그리고 너희들의 실체 그거 보여주는 거야. 그리고 그걸 비로소 존재로 완성할 수 있는 건 하느님의 능력밖에 없어! 를 보여주는 건데, 그래서 너희들 안에 네가 누구이며 하느님이 누구인지를 마음으로 갖게 하기 위한, 그리고 그것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그 능력의 실체인 사랑이라는 게 뭔지를 가르쳐주기 위한 그런 거였는데 너희들이 그것까지 모르고 그냥 나타난 것으로 나를 소개하면 그게 죄야. 예수님이 풍랑을 잠잠케 하고도 얘기하지 마, 그랬어요.

예수님이 그랬죠? 요나의 표적, 내가 보일 건 요나의 표적밖에 없어 그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왜 배에서 잤겠어요? 요나가 잤으니까. 똑같이 주무시는 거예요. 졸려서 잔 게 아니라. 이게 요나의 표적이야, 라고 가르쳐주기 위해 요나처럼 배에서 주무신 거라니까요. 깨웠습니다. ‘너희들이 믿음이 없어라고 했어요. 믿음이 없으면 세상은, 풍랑은 늘 바다는 너희들을 덮치게 되어있다.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래놓고 이 풍랑을 잠잠케 할 수 있는 건 하느님의 말씀 밖에 없어. 라고 하시고 을 하시는 거예요. 풍랑아 잠잠해라. 바다야 잠잠해라! 그 진리의 말씀이 된 이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그들을 더 이상 범접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태풍은 항상 어디서 일어나요? 바다에서 일어나요.

왜 성경이 이 세상을 저주의 바다라고 할까요? 그리고 왜 구원이라는 것을 낚시라고 그래요? 사람을 낚는다고 그러죠? 바다에서 뽑아낸다는 뜻이에요. 바다에 사는 존재를 뽑아낸다, 라는 건 죽여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거. 아니, 고기들이 아 이 바다가 너무 지루해라고 해변에 나와서 일광욕하면 굴비 되는 거예요. 바로. 죽음이라니까요. 그거. 그런데 그걸 구원이라고 해요. 하느님이. 그 저주의 바다를 딛고 서는 건 하느님의 말씀 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으로 오신 그분이 그걸 딛고 서시는 거예요. 그리고 심지어 바다를 밟고 오셨다, 걸어 오셨다, 라고 할 때 쓰인 그 단어는 바다를 짓밟다는 단어에요. 진리는 그 저주의 바다를 짓밟아버리는 힘이 있다니까요.

 

그렇게 여러분이 그냥 성경, 예수, 십자가 이런 걸 그냥 표피적으로만 봐버리게 되면 그것이 여러분을 죽이는 사탄, 뱀이 되는 거예요. 뱀의 말, 그러나 그 죄의 모양 속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진리로 읽어내어서 내 마음으로 받게 되면 그에게 있어서 그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 그건 살리는 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죄의 모양으로 왔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 모양을 그냥 봐버리면 예수가 죄란 뜻이에요. 성경을 있는 모양 그대로 봐버리면 성경이 죄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을 죽이는 책이 된다고 한다니까요. 그리고 그걸 그 말씀을, 그 살려주는 영을 내 안에 갖게 되면 내가 또 그걸 흘릴 수 있잖아요. 그럼 내가 살려주는 영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돼요. 육으로 죽고 영으로 산다는 얘기가 그 이야기라니까요. 그러나 쉬운 얘기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자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된다. 그랬죠? 그 말은 예수의 십자가가 자기 십자가, 십자가는 하나 밖에 없어요. 우리가 그 십자가에 매달려야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그 예수의 십자가가 자기의 죽음으로, , 예수님이, 하느님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절대로 산 존재일 수가 없는 거구나, 하고 거기서 그 십자가로, 그 다나토스의 그 십자가의 죽음, 예수의 죽음이잖아요. 그 죽음으로 내가 그 다나투스로 갖게 됐을 때, 그걸 생명이라 그래요. 그게 내 십자가라니까요. 그게 자기 십자가란 말입니다. 반드시 나에게 있어서 그 자각과 그 인식과 그 경험이 있어야 돼요. 상관없이 무슨 십자가 보혈, 이야기는 다 하는데 막 네 맘대로 막 살아, 괜찮아! 그게 다 한 거야. 이거는 아니라니까요.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는 자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아야 된다고 말씀하신 건 그렇게 내 십자가가 자기 십자가가 되지 않으면 너희들이 말하는 십자가는 그냥 예수인 내 십자가야’. 그런데 그게 네 십자가가 아니잖아. 넌 죽는 거야. 이런 뜻이에요.

그 십자가를 예수의 십자가로만 갖고 있으면 넌 죽는 거야. 이런 뜻이요. 넌 나 쫓는 거 아니야. , 나는 그렇게 내 존재를 주장할 수 없는 자구나 , 자기 부인이에요. 그걸 아는 게. 허벅지를 찔러가며 부인해야 돼, 부인해야 돼. 부인 돼요? 그게 자기주장이지 자기 부인입니까? 그래서 보이는 세상의 대표, 옛 성전의 대표로 죄의 모양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언약의 기둥 위에서 육을 삭제 당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성전이고, 성경이며, 율법이라면서요? 그럼 이건 껍질이잖아요? 모형이잖아요. 그럼 내용이 진짜야 라는 걸 증거하기 위해서는 이 모형은 사라져야 되네요? 당연히 그러니까 예수가 죽어야죠. , 내가 살아있었으면, 그때 당시에 내가 살아있었으면 예수를 안 죽이게 할 수 있었을 텐데. 고놈을 마귀라고 했어요. 하느님이  반드시 죽어야 된다니까요. 아니, 안 죽으면 내가 끌고 가서 죽여야 되는 게 예수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십자가 사건은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과 성경과 예수는 절대 껍데기로, 표피적으로 문자적으로만 안 된다는 강력한 웅변이 십자가였던 거예요. 언약의 기둥 위에서 이 은 삭제되었다. ! 라고 죽여 버린 거예요. 거기서. 거기서 율법이 죽고, 성전이 죽고 예수가 죽었어요. 성경이 죽었다니까요. 우리 눈에 보이는, 인간이 눈으로 보는 그 포피적인 성경, 그게 율법이잖아요. 그게 죽었단 말에요. 거기서. 그래서 이 세상과 인간과 성경의 대표로 오신 주님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도륙당한 거예요. 성전도 그 이야기이고 성경도 그 이야기이고 예수도 그 이야기하는 거고 이 세상도 그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여기에 묶이지 마, 그런데 그 여기에는 나도 들어가 있다고요. 이 뭄뚱아리도. 그러니까 이게 진짜 아니라고요. 이게 진리 아니라니까요. 이거. 그 내 안에 있는 그 말, 그 말씀, 그 복음, 그 하느님, 그 사랑 그게 내 생명이란 말이에요. 진짜 생명.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과 당신 백성들을 우리로 묶어버리죠. 구약성경에 보면 자주 나와요. 신약성경에서는 사도들이 또 우리라는 말을 잘 쓰죠.  우리라는 거는요, 문자에서 보면 히브리사람들의 개념에서 보면 우리라는 개념은 나와 너, 우리가 아니에요. 나 들이에요. 다 나, , , 나가 모이면 그걸 우리라고 그래요. 나의 복수를 우리.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이렇게 함몰되어 들어와서 아, 하느님 나 아니네요. 하느님이 나를 살려야 나는 비로소, 그 하느님의 생명력으로 산 존재되는 거네요, 라고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그렇게 함몰되어 들어와 그것과 연합되면 그 고백이 나의 죽음이잖아요. 그죠?

보세요. 선악과를 따 먹고 인간은 항상 선악의 주체가 되어서 자기가 하느님처럼 살아요. 그래서 피곤한 거예요. 내가 선악의 주체가 되어서 이거는 선한 거야, 악한 거야 늘 결정하고 선택해야 되기 때문에. 그게 지옥이라니까요. 그렇게 되면 하느님의 상대편에서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탄핵을 해요. , 하느님 공평하기 못해요. 그렇게 일하면 안 돼요. 내가 어떻게까지 정성을 들였는데 나한테 이렇게 대해? 이렇게 된다니까요. 인간이. 신앙을 가진다고 하면서도.

 

그러면 하느님 측면에서 나는 너예요. 나와 너로 갈리는 거라니까요. 그게 아브라함의 이야기, 창세기 15장에서의 케리투투예요. 제물을 사이에 두고 인간과 하느님이 이혼증서를 가운데 두고 이렇게 케리투투갈라지는 거라고요. 분리에요. 그거는요. 그런데 그 상태에서 인간이, 아니네요, 하느님. 저는 이렇게 하느님과의 대척점에서 나의 수고와 노력이 그 제물이니까, 이 제물로 말미암아 이렇게 갈라지면 안 되는 거네요, 라고 내가 죽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과 내가 한쪽에서 바라보게 돼요. 사랑은 뭐, 마주보는 게 아니라 한쪽을 바라보는 거라며 요? 하여튼 그런 거예요. 이렇게. 하느님과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때에, 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도 그러는 거예요. 병풍이 항상 열 폭이라고 그랬죠? 그 병풍 뒤는 항상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가려놓는, 그 병풍의 역할이 그거고, 그 뒤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항상 죽으면 그 뒤로 들어가는 거예요. 죽지 않고 들어가면 거기서 뭐, 싸우러 들어가거나 쥐어 터지러 들어가거나 그거지, 죽어야 그 비밀 속으로 들어가는 거라니까요. 그리고 열 폭은 뭐냐 하면 휘장이 열 폭이었어요. 그래서 병풍을 열 폭으로 만든 거거든요. 여러분이 죽지 않으면 그 하느님의 묵시, 그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편으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그렇게 넘어가면 하느님과 내가 가 돼요. 그때 그걸 성경이 우리라고 한다니까요.

 

사도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라는 개념을 써요. 그들은. 하느님이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면서 하느님, 내가, 누가 보냈느냐고 너, 물어보면, 너 누가 보냈어? 라고 물어보면 누가 보냈다고 얘기해야 돼요?’ 그랬을 때, 하느님이 준 단어가 뭐냐 하면 예요. 영어로는 뭐 I am Who I am 이라고 써 놨지만 그 단어가 그냥 라니까요. 그 당시의 문헌들을 다 뒤져 봐도 그 라는 단어가 없어요. 그건 사람들이 쓰는 단어가 아니었어요. 그 제왕들의 비석 같은 걸 봐도 그냥 이 사람이라고 써요. ‘. 그런데 그때 처음으로 하느님이 라는 단어를 준 거예요. ‘’.

그럼 모세가 가서 뭐라 그래요? ‘너 누가 보냈어?’ 그랬을 때, ‘’, 그러면 사람들이 네가 너를 보냈냐? 그럴 거 아니에요? 하느님이 거기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하면 내가 너에게 내 말을 주면 너는 그 즉시 네 육을 삭제 당하게 되고 네가 내 말이 되는 거야. 그게 . 네가 내 역할을 하는 거야. 이게 라고요. ‘’. 하느님 이름이 라는 말이 아니라. ’.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는 전부 그 예요. 예수 가 아니라.

따라서 우리는 예수와 십자가를 섬기는 수준에서 진일보해서 그 예수의 생애와 그 십자가의 죽음을 내 것으로 하여 살아야 되는 거예요. 아니, 절대 하느님의 백성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자기 십자가를 진 우리가 되는 거예요. 절대로 하느님 앞에서 너로 존재하면서 그분을 두려움으로 섬기는 자리, 그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안 돼요. 그게 죽음이란 말입니다

성도는 부요함 속에서도 이것이 진짜 부요가 아니구나, 하고 그 부요에 대해서도 죽고,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이런 가난함 속에서도 아버지의 사랑만 있으면 그게 진짜 풍요네! 라고 그 가난도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 가난에 대해서 내가 죽는 거고. 그것이. 그게 현상계를 벗어나는 거라니까요. 그걸 안식이라 그래요. 그걸 평안이라고 한다고요. 여러분의 환경이 변하는 게 아니라. 그런데 성당에 와서 그 환경 얘기만 하고 있다니까, 하느님한테. 그걸 바꿔달라고. 거래도 하고.

그렇게 보이는 세상에 휘둘리면 그것이 육의 생각으로 사는 거고. 그것을 오늘 본문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하느님의 원수라고 해요. 원수라는 단어, 에크드라는 단어는 에크드로스의 여성 형이거든 요. 그러니까 같은 단어에요. 성만 다른데. 에크드로스라는 단어는 히브리 사람들이 사탄이란 단어하고 혼용하던 단어에요. 사탄이란 말이에요. 그게. 그거 사탄이야. 그게 대적 자. 육신의 생각? 육신?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현상계에 머무는 거? 그게 사탄이야. 그래요. 하느님의 대적 자야! 라고 하는 거예요. 대적 자면 뭐예요? ‘네요? 그게. 하느님의 반대편에 제물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거니까 그게 잖아요. 그걸 사탄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저기에다가 두고 열심히 나의 유익을 위해 섬기는 그들을 사탄이라 그래요. 그러면 우리의 육신은 절대로 하느님 앞에 반드시 버리고 가야 하는 거예요. 어떻게 버릴 수 있어요? 그게 본문 9절과 10절에 나오는 거예요. 답이 거기에 있어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 즉 하느님의 영이 있으면 너희의 몸은 죽은 거다, 그러잖아요. 너희의 몸은 죽은 거야. 그때부터 하느님은 그거 안 봐, 그러는 거죠? 그런데 그거를 빛나고 성숙하게 만드는 게 그리스도교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요?

네 안에 진리, 내 말이 있으면 너희들의 몸은 이제 죽은 거야. 그런데 우리는 그 몸으로 뭔가를 자꾸 만들어 내자, 업적을 쌓자, 성취하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니까요. 하느님이 보는 건 영이래요. 하느님 거니까. 그것만. 난 내 것만 봐, 내 것만 찾아. 그것만 가치 있는 거니까. 그래서 내 것이 네 안에 있으면 그 몸은 이제 안 봐. 이게 몸이 죽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몸을 롤모델 삼아, 그리고 어떤 이의 롤 모델이 되기 위해 열심을 부리는 걸 신앙생활이라고 합니까?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건 그리스도교의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건 그냥 당연히 하는 거라고 생각하시고 그것 말고 진짜 해야 할 걸 왜 그걸 강조하느라 놓치느냐는 말이에요, 저는.

그러니까 세상도 그렇고 인간도 그렇고 세상과 인간과 하느님에 대한 기록인 그 성경도 그렇고 그 성경의, 그 말씀의 화육으로 오신 예수님도 그렇고 모두 죽어야 하는 게 맞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가 죽은 거예요. 대표로. 그래야 세상 안에 담긴, 그 인간 안에 담긴, 물론 성도이지만 또 성경 안에 담긴 예수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마음, 그 아가페의 사랑 그 진리만이 남는 우리가 될 수 있단 말에요. 그걸 연합이라 그래요.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죽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사는 거. 거기에 참된 안식이 있고 참된 행복이 있고 참된 기쁨이 있는 거예요.

 

마치 극한의 가난 속에서도 아비의 그 훈훈한 사랑에 의해서 그 멋진 인생의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그 어떤 이들처럼. 나는 엄마만 있으면 돼. 엄마, 나 하루에 달걀 하나만 먹어도 돼. 대신에 나 보육원에만 보내지 마. 그 애에게 양식은 그 어미의 사랑이라니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거 배우는 거예요. ,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온 천하라고 번역이 된 그 단어가 호 코스모스거든요. 온 세상, 뭐예요? 성전, 율법, 호 코스모스, 그래, 율법적으로 너희들이 완벽하게 됐다고 치자. 사람들이 평가할 때. 그리고 지 목숨을 잃으면 그게 뭔 유익이니? 그랬다고요. 하느님이.

온 천하가 그게 성전이란 단어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너희들이 완전히 마스터했다고 치자. 그리고 목숨을 잃으면 뭔 유익이냐?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나 고난 등을 그 나타난 현상으로만 보고 그것으로 절망해버리거나, 좌절해버리거나, 고통을 당해버리면 여러분은 힘들게 그 상황을 겪으면서 돼지는 거예요. 아니야, 안 그럴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거에 지지는 말라는 말이에요. 이 육신을 갖고 있고 통점이 살아있는 이 몸뚱어리를 내가 입고 있는데 어떻게 멀쩡하겠느냐고요? 그렇지 않아요, 아파요. 그렇지만 여러분의 마음속의 그 진리로 그것에 져버리면 안 된다니까요. 살아있어야 된다니까.

우리는 그러한 상황이나 현상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으로 끌어안으시고 우리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시면서 그래, 이제 조금 남았어. 금방이야. 이 아빠가 너에게 네가 꼭 배워야 할 걸 가르치기 위해서 이 과정을 그냥 통과시키는 거야. 조금만 참으라고 토닥토닥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쫓아오시는 그 하느님을 잊으시면 안 된단 말에요. 그래서 오늘 제목이 토닥토닥 이에요. 하느님의 말씀은 전부 토닥토닥.  아가, 조금만 참아. 그거에 그 조그만 아기들도 힘을 얻어서 그럼요, 그 맛없는 거 먹으면서도 다 맛있대..... 거짓말인 거 뻔히 알아요.  그런데 그 조그만 애들이 그 엄마, 그 아빠 그게 더 소중하니까 다 맛있대. 간장에다가 밥만 비벼주는데 다 맛있대.

하물며 영적인 세계를 살아간다고 하는 우리 성도가 이 현상계의 그 현상들에게 지면 안 되잖아요. 여러분 정말 그렇게 힘드시면 자존심 상해하지 마시고 저한테 얘기하시라니까요. 드디어 내가 한국에 왔잖아요. 난 이제 미사리도 갈 수 있고, , 미국에선 안 됐어. 그게. 어디든 가능하다니까. ㅎㅎ 그게 우리끼리 서로 가족이라는 의미 아니겠어요? 그것으로 혼자 우울증 걸려가지고,,, 그럼 교회가 뭐냐고요? 도대체가. 그렇게 그 아버지의 뜻. 그 아버지의 사랑을 여러분의 현실 속에서 읽어내지 못하면 바오로의 말대로 우리가 가장 불행한 자예요. 우리가 가장 불행한 자. 그것을 여러분의 부활이라는 생명의 에너지로 쓰지 못하면 우리가 가장 불행한 자예요.

교회는 눈에 보이는 성숙이나 눈에 보이는 업적이나 눈에 보이는 번영이나 눈에 보이는 행복과 기쁨과 감동들을 만들어내는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걸 추구하는 곳도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것들의 위험성을 올바로 깨닫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나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진짜 아버지의 일이 일어나는 곳이어야 하는 거예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간 나, 그 하느님의 은혜나 능력이 아니면 존재도 될 수 없는 나, 그렇게 내가 하느님과 연합이 되어 버리면 의 자리에서 그 사탄 노릇했던 가 거기서 죽어요. 그러면 하느님이 말씀하신 우리 안으로 내가 그 즉시 쫙 빨려 들어가는 거요.

<하느님과 우리>. 우리 편, 그런다니까요. 하느님이. 우리 편, 천지 창조주가 우리 편,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의 자리에서 자꾸 그분을 사탄으로 몰아세우느냐고요. 그러면 그분이 우리를 사탄! 그런다니까요. 그래서 바오로가 그러는 거예요. 그 그리스도의 영이 네 안에 제대로 들어가면 그 가 죽은 거야. 그 몸이, 쏘마가 죽은 거야. 그러는 거예요. 중요한 건 그리스도의 영이야. 하느님의 영이야.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마태복음 1621-25) 21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려 주셨다. 22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리었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 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으셨다. 24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25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여기서 나를 위하여가 나 때문에 예요. ’나 때문에가 뭐라 그랬어요? ’, 내가, 내 몸이 죽고 그러한 내 육신의 생각들, 지금 베드로처럼 이렇게 나의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서의 이 육의 어떤 안위와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그 하느님, 이거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는, 그렇게 추구하는 그 아담, 그 몸이 죽고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 안으로 함몰된 그 나 때문에네페쉬가 죽으면, 푸쉬케가 죽으면 그게 복이라는 거예요. 그게 생명이라는 거예요. 그게 사는 거야. 그러나 지금 이 베드로처럼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서 네 목숨을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면, 네 구원을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면 넌 반드시 잃을 거야. 그런 말이에요. ’. 그걸 여러분이 이해를 하셔야 된단 말입니다.

복음은 아주 심플해요. 육으로 죽어야 영으로 사는 거예요. 육으로 심어야 영으로 거둡니다. 율법으로 죽고 진리로 사는 거예요. 행위로 죽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거예요. 선악과 패러다임의 인간으로 죽고 하느님의 은혜 안에서 영으로 사는 겁니다. 복음이에요. 그것이. 그래야 비로소 복음이 Good News, ‘유앙겔리온‘, 복된 소식이 돼요.

(요한복음 6: 63) 63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내 로고스가, 그 말씀이 영이고 생명이야 그러잖아요. 그럼 그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으면 여러분은 산 거고 여러분의 몸, 이 육은 이미 하느님 앞에 삭제된 거예요. 그럼 너무 그걸로 하느님 앞에 뭐, 이래야 우리 아버지가 기뻐하시겠지? 거기에 너무 그렇게 묶이지 마세요.

(요한복음 5 : 24- 25) 24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 섰다. 25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때가 오면 죽은 이들이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것이며 그 음성을 들은 이들은 살아날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영생을 얻었대요. 그리고 심판을 받지 않고 생명으로 옮겼다.’ 이 말이 뭐냐 하면 그게 죽는 거고 그게 사는 거란다. 이런 말이에요. 그 말을 들은 자는, 제대로 들은 자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때가 오면 죽은 이들이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것이며 그 음성을 들은 이들은 살아날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여기서 죽은 이들은 네크로스. 그 죽은 자들은 말씀으로만 살아난대요. 말씀으로만. 아들의 말씀. 아들의 음성. 히브리서를 보면 천사와 아들을 이렇게 대조하죠? 그건 뭐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 천사가 아니라 안겔로스라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전하는 자들 뜻인데, 그들이 다 하느님의 말씀, 성경을 갖고 전하는데 아들이 아닌 자들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그 아들, 그 천사를 그렇게 갈라서 설명해주는 거거든요. 마찬가지예요.. 여기서도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 그 아들이 된 자의 입에서 나오는 그 진리가 살리는 거지 무조건 성경 말씀을 뇌까린다고 살아나는 거 아닙니다.

(묵시20: 4-6) 4 나는 또 많은 높은 좌석과 그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심판할 권한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예수께서 계시하신 진리와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했다고 해서 목을 잘리운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의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낙인을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노릇을 하였습니다. 5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 년이 끝나기까지 살아나지 못할 것입니다.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거룩합니다. 그들에게는 둘째 죽음이 아무런 세력도 부리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제가 되고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을 할 것입니다.

그 진리가 있으면 그들이 왕이래요. 그 목이 잘려, ‘내가 머리 둘 곳이 없다’, 라고 답답하여 그렇게 외치셨던 그 예수님이 머리로 드디어 붙을 어떤 이들이 생겨난 거예요. 그래서 그 하늘의 왕이신 그분이 머리니 이들도 왕이네요? 그런데 현실은 이래요. 그러니까 이 현실이 현실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이 현실이 현실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그 진리의 현실이 현실이잖아요.

여러분의 현실은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모형이라니까요. 그러면 여기에 묶이면 안 된다는 거잖아요. 거기에 묶이는 걸 죄라고 하고. 그러니까 이 땅에서의 하느님의 백성들의 상황이나 환경이나 그 처한 현실, 그 전체는 그냥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허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건 여러분을 건드릴 수도 없는 거예요. 진리인 여러분은 건드릴 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성숙이나 변화나 번영이나 발전, 이런 걸로 사람을 부유하다, 가난하다 성숙했다, 그리스도인답다. 악마 같다. 못 됐다. 잘 났네? 이런 평가하면 안 된단 말에요. 적어도 성도는. 아울러 그런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아서도 안 되는 거예요.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러한 변화나 성숙을 도모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어 마땅한 자라는 올바른 자인식을 갖게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이라는 건 다른 이들보다 훨씬 착하고 성숙하고 훌륭한 존재가 된 이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 그래요. 성경은 그들을 의인이라고 그래요.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머리를 삭제 당해야 돼요. 참수 당해야 돼요. 그래서 말씀을 쌍날 선 칼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들의 삶의 주체가 되어버린 하느님처럼의 자리에 올라가버린 우리의 머리를 자르러 오신 거예요. 그 진리의 말씀이. 다나토스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진짜 머리가 붙어요. 그러면 그들을 머리라 그래요. 진짜 머리’. 그렇지 않은 자들은? 머리가 되지 않으면 뭐가 돼요? 두 개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는. 꼬리 밖에 없어요. 성경이 이 세상을 저주의 바다라고 그러죠? 아랫물이라 그래요. 그 아랫물에서는 이 인간들이 진리, 그 머리로 살지 않고 자기들의 몸, 꼬리를 동력으로 하여 사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이 그 꼬리를 반드시 잘라버려야 되는데, 그래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그 꼬리를 자르기 위해서는 그 바다에서 낚아 올려야 된다니까요. 그럼 잠시 퍼덕이다가 죽어요. 그럼 하느님이 그걸 살았다! 그래요. 그러니 쉬워요? 이 삶이? 그러니까 말씀은 한 마디로 토닥토닥 이라니까요.

, 아니잖아. 그게 현실 아니잖아. 내가 지금 의도하는 목적이 있잖아. 그건 모형이잖아. 그걸로 네가 가야 할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있잖아? 거기서 머물지 마. 본문 말씀도 다 토닥토닥. 죽은 거야. 너희 몸은 죽은 거야. 그런데 왜 거기에 묶여? 네 몸에 장애가 있어? 그건 너에게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너를 보는 다른 이들에게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내가 준 거야. 네 실수로 너에게 그거 간 거 아니야. 질병? 가난? 마찬가지야. 재물? 그것도 마찬가지야. 토닥토닥.

(이사야 914-15) 14 그 머리란 장로와 잘난 체하는 자들이요 그 꼬리란 거짓을 가르치는 예언자라. 15 이 백성의 지도자가 잘못 인도하니 그 인도를 받는 자들이 망하는구나.

꼬리가 되세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자존심을 지킵시다. 이거 다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거짓말, 거기에 속지 말라고 합니다.

(신명기 2812-17) 12 야훼께서는 당신의 풍성한 보물창고인 하늘을 여시어 너희 밭에 철따라 비를 내려 주시고 너희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많은 민족에게 꾸어 주기는 해도 남에게 꾸어 쓰는 일은 없을 것이다. 13 내가 오늘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느님 야훼의 명령을 들어 성심껏 실천하기만 하면, 야훼께서는 너희를 머리로 삼으면 삼으셨지, 꼬리가 되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다만 치솟을 뿐 내리밀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14 그러니 너희는 내가 오늘 지시하는 이 모든 말을 어기지 말라. 한 걸음도 빗나가는 일 없이, 다른 신들을 따라 그 신들을 섬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15 그러나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지시하는 그의 모든 계명과 규정을 성심껏 실천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온갖 저주가 너희를 사로잡을 것이다. 16 너희는 도시에서도 저주를 받고 시골에서도 저주를 받으리라. 17 너희 광주리와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으리라.

네 양식은 그거 진짜 양식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는다. 그러는 거예요. 그 복, 그 저주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이 말하는 복, 저주는. 냉장고에다가 그거 알고 써 붙이시라고. 복과 저주 이런 거그렇게 여러분은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여러분의 목을 참수 당해야 돼요. 그런데 그게 맞는 거예요. 말씀은 바로 여러분의 그 현실을 똑바로 보게 하여 위로하는 거예요. 토닥토닥, 이렇게. 사는 거 별거 없어. 그거야, 그거 하고 가는 거야. 예수를 네 머리로 앉히는 거야. 그리스도를 네 머리로 앉히는 거야. 그거 배우고 가라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을 주시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꼭 어물전에 가면 죽은 고기가 가치 없고 홀대 받죠. 살아서 펄펄 뛰는 게 비싸요. 우리 애들이 지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생선을 그렇게 좋아해요. 그래 갖고 어물전 같은 데를 이제 가요. 가락시장 같은 데나 아니면, 부산에도 한번 가봤는데 자갈치. , 실망했어요. 난 굉장히 기대하고 갔는데 너무 지저분하더라고요. 제주도의 거기도 가보고, 또 하여튼 많이 가봤어요. 그런데 거기 보면 죽은 고기는 반값이에요. 돌아가신 광어, 반값. 이렇게 써놨더라고. 거기에다가. 그 돌아가신 광어? ㅎㅎ 한참 생각했는데 죽은 거는 반값이에요. 항상.

그게 세상의 가치관이라니까요.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서는 안 그래요. 그렇게 죽어야 이게 진짜 보배야. 그래요. 이게 진짜 생명이야. 그런다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 그러한 세상의 평가나 판단이나 이런 거에 절대 주눅 들지 마세요. 세상은 이 세상에서 죽으면 쓰레기 취급해요. 그런데 하느님은 안 그래요. 그래 그렇게 죽는 게 맞아. 그런데 그거 아닌 진짜 기쁨, 그거 아닌 진짜 선, 그거 아닌 진짜 안식, 그거 아닌 진짜 행복. 내가 너희들 위해 준비해 놨다. 너희들은 이미 거기 사람이야. 그거 가르쳐 주는 게 우리 신앙생활이에요. 딴 거 없어요. 성경 통해서 우린 그거 하나 배웠으면 오늘부터 찢어발겨도 돼요. 그거는. 뭐 필요 있어요? 성경이. 산천초목이 다 성경인데.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그렇게 많이 써서 줘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다 뭐냐 하면 그거 하나하나 증명해주는 거예요.

그러니 나는 매주 똑같은 걸 같이 이렇게 증명해줘야 되니 뭔 팔자냐고요. 이게? 그거 밖에 없어요. 그거 아셨으면 된 거예요. 여러분. 너무 그냥 지적 호기심, 지적 허영심의 충족, 이런 거로 성경을 보려고 하지들 마세요. 글 쓰는 것들 보면 딱 알아. 어떻게 사람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지. 그런 거 하지 마세요. 그거 하나 가졌으면 그냥 자유하게 그 진리로 잘 사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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