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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20.12.31.(도란도란글방). 예수는 나를 먹는다. (에페4,15-2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31 조회수996 추천수0 반대(0) 신고

 

도란도란글방  2020.12.31.

<공동번역성서>

 

 나는 예수를 먹고 예수는 나를 먹는다. 

(에페4,15-20)

15 도리어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16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함으로써 각 마디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도 이와 같이 하여 사랑으로 자체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17 그러므로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간곡히 권고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인들처럼 살지 마십시오. 그들은 헛된 생각을 하고 18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지 못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무지하고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19 그들은 도덕적인 감각을 잃고 제멋대로 방탕에 빠져서 온갖 더러운 짓을 하고 있습니다. 20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본문을 통해 모든 신자들은 거듭나게 되면 영적 어린아이에서부터 출발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자라나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린아이로 있게 되면, 우리는 사람의 궤술(퀴베이아, 속임수) 퀴베이아에 쉽게 빠질 수 있고, 또 간사한 유혹 (파눌기아, 짐승이 먹이를 잡기 위해 살금살금 쫓아오면서 기회를 노리는 것)파눌기아에 언제든지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자랄 수 있습니까? 지난주에 공부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역시 우리의 영적 성장의 비결이 나옵니다. 그게 오늘 본문 15절입니다.


(에페4:15) 15 도리어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으로 시작되지요. 방법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지난번의 본문과 연결해보면 그 비결은 바른 예수를 알고 믿어,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좀 더 원문에 맞게 번역을 하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는다.”라는 뜻입니다.

15 절은 우리가 지난번에 공부한 14절과 대조해서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 모든 엉터리 교훈의 풍조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 안에서 진리만을 붙잡아야 한다.”라고 그 14절의 해결 방법을 다른 표현으로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진리가 뭡니까?

진리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진리의 내용이 어디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성경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구약 성경을 풀어 주시면서 나에 대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성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에 관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너희가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을 수 있는 영적 성인이 되기 위해서 오직 진리를 붙잡으라.”는 말씀은 오직 성경대로만 믿고 고백하고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날 에큐메니컬운동이다 뭐다 해서 그리스도교를 빙자한 얼마나 많은 엉터리 교훈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까? 거기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잘 배우고 익히고 그 대로만 믿고 그대로 고백하고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합니다. 기적을 부인합니다. 창조설을 부인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은 단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책이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 놓은 책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솝이야기처럼 우리에게 어떤 교훈 을 주기 위해, 설화나 우화 등을 도입해 놓은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좋은 교훈만 받아 챙기면 된다는 주장입니다.

하긴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저 팔레스타인 땅에 어떤 목수의 아들이 처녀에게서 났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수긍하기는 정말 힘이 듭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해결했다는 이야기는 설화 중에서도 3류 설화 쯤 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이면 우리나라 경주에서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서 신라를 건국했던 그 때입니다. 태백산 자락에서 하늘나라 헤모수의 아들 주몽이 알에서 태어나서 고구려를 세웠던 때입니다. 우리가 박혁거세나 주몽의 이야기를 설화나 신화로 믿는 것처럼 동정녀에게서 난 예수님의 이야기도 그렇게 취급될 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박혁거세나 주몽은 안 믿어도 예수님의 이야기는 믿습니다. 그게 신비입니다. 어떻게 그게 믿어지지요? 그게 하느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 그대로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행하기를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찔리죠? 그러한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과 여러 기적들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헛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15:12-15)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다는 것을 우리가 전파하고 있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13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셨을 리가 없고 14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5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는 우리는 결국 하느님을 거스르는 거짓 증인이 되는 셈입니다.

성경대로 믿지 않는 것은 다 헛것입니다. 유다서는 그렇게 헛것, 엉터리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을 몰래 들어온 자라고 표현합니다.


(유다1:3-4) 3 사랑하는 여러분, 본래 나는 우리가 함께 받은 구원에 관해서 여러분에게 편지를 써 보내려고 여러 가지로 애쓰던 참에 이제 여러분에게 간곡한 권고의 편지를 쓸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한번 결정적으로 전해진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여러분이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4 하느님을 배반한 몇 사람이 몰래 여러분 가운데 끼어 들어 왔습니다. 그자들은 우리 하느님의 은총을 남용해서 방종한 생활을 하고 또 우리의 오직 한 분이신 지배자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로서 이미 오래 전에 단죄를 받았습니다.

교회 안에 몰래 들어온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강론대나 성경공부 자리에서 가르쳐 지는 것을 무조건 옳다고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항상 성경을 토대로 말씀을 옳게 분별해야 합니다.

 

(2디모2:15) 15 그대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서 하느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시오.

우리는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모든 진리를 확고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사람의 괴술(詭術)에 속지 않고 간사한 유혹에 빠져 낭패를 당하지 않을 수 있으며 엉터리 교훈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몰래 들어온 자들에게 배운 엉터리 같은 교리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만을 말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인정하다라고 번역이된 알레뜌오어떤 것을 꽉 붙들어 전혀 흔들리지 않게 되어 그 붙들고 있는 것을 자신 있게 고백하고 가르치고 행하는 것까지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정말 진리로 믿고 있는 바는 반드시 행함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도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는 부탁과 아울러 자신을 하느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6:17-18) 17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진실한 가르침을 전해 받고 그것에 성심껏 복종하게 되었으니 하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18 그리고 여러분은 죄의 권세를 벗어나서 이제는 정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배운바 그 진리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린아이에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2디모1:13-14) 13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얻은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나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생활원칙으로 삼으시오. 14 또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그대가 맡은 훌륭한 보화를 잘 간직하시오.

이렇게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우리가 배우고 분별한 바를 열심히 행동으로 옮기는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하라고 합니다. 내가 참된 진리를 붙들고 말하고 행하는데 있어서 사랑이 빠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나의 존재를 확장하는 것이지요. 러니까 우리는 그 진리를 고백하고 가르치고 행하는데 있어서 친절함과 따뜻함과 포용력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정말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단호하게 회초리도 들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하느님이 사랑하는 자는 그가 바른 길을 가게 만드시기 위해 반드시 징계를 한다는 대목이 나오죠? 우리도 때로는 상대방이 오해를 한다할지라도 바른 진리를 가르치고 수호하기 위해 회초리를 들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 참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자기가 세운 교회 교인들과 원수가 된 적도 있습니다.


(갈라4:16-19) 16 그런데 이제 내가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나를 원수로 여기는 것입니까? 17 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열성을 보이는 것은 결코 선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나에게서 떼어 내어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열성을 품게 하려는 술책입니다. 18 그들이 좋은 동기로 여러분에게 열성을 보인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19 나의 자녀인 여러분,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나는 또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습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그가 세운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로부터 원수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포기하지 않고 자기를 원수 취급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해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합니다. 이게 바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는다.“는 말의 진의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음으로 자라가게 된다.” 15절입니다. 이렇게까지 한절 절, 한단어 한단어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는데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전부 우리 하느님의 손아래에서 진행되어져 갑니다. 15절 후반부와 16절을 연결해서 한번 볼까요?

 

(에페4:15-16) 15 도리어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16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함으로써 각 마디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도 이와 같이 하여 사랑으로 자체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음으로 자랍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자라야 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16절에 보면 바로 그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몸이 도움을 입어 연락하고 상합하여 자란답니다. 생명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과 에너지와 양분과 힘이 어떻게 공급이 되는가 하면 마디를 통하여공급이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마디“”헵헤라는 말은 , 힘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연결하고 얽혀서라는 말은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져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그림을 그려보세요. 우리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과 힘과 에너지 와 모든 것을 공급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어떤 끈을 통하여 공급을 받습니다. 이제 그 생명의 젖줄이 다시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그리스도와 생명을 공급받는 끈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또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에 의해 서로 연결이 되고 결합이 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과 동시 에 서로 간에도 결합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각 지체가 자기의 역량대로 자기의 자리에서 열심히 그 에너지와 생명력을 발휘해 야 전체가 조화 있게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서로 헐뜯고 시기하고 그러지 마시고 제발 좀 서로 도와주세요, 그게 얼마나 중요하면 지금 그 이야기가 또 나옵니까?

잘 보면 그렇게 분명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생명력과 에너지와 힘을 공급하시는데 16절 말미는 우리가 스스로선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이중적인 성장의 논리를 갖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분명 하느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그런데 또 우리가 서로 연락하고 얽혀서 스스로 자라야 합니다. 이 말은 자칫 모순되는 표현인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 말은 하느님께서 끝을 통해 자라게 하셔서 천국으로 데리고 갈 성숙한 하느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그의 삶 속에서 그 자라남의 몸부림이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자체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하느님이 다 해 주시는 것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17절부터 24절까지에서 우리 신자들이 일상에서 매일 매일 행해야 하는 구체적인 행함 의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먼저 옛 사람의 행위들을 나열하고 그렇게 살지 말라로 결론을 짓습니다. 17절을 먼저 보면 우리가 행해서는 안 될 것들, 옛 사람이 하는 일들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에페4:17-18) 17 그러므로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간곡히 권고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인들처럼 살지 마십시오. 그들은 헛된 생각을 하고 18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지 못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무지하고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살다, 행함이라고 번역이 된 페리파테오전체 적인 삶의 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전체적인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든 삶의 방식은, 허망한 것을 쫓는 삶이라는 것이고 우리는 목표지점을 분명하게 잡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헛된 것“ “마타이오테스텅빈것, 초점이 없는 것, 목적이 없는 것, 방향감각이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의 삶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뭔가 열심히 하는 것 같지만 그들이 하는 것 은 텅빈것이라는 것입니다.

정확히 뭘 해야 하고 뭘 가지고 가야 하는지를 모르니까 우왕좌왕 좌충우돌 하다가 다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초점도 없고 목적도 없이 막무가내로 삶을 살다가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과 상관없이 인간이 행하는 모든 열심, 그게 허망한 것으로 행함“”마타이오테스입니다.


(로마8:20) 20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타락한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했다그러죠? 여기서의 허무한데가 바로 마타이오테스입니다. 하느님 없이 살게 된 우리 인간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 선행체계, 지식체계를 아우르는 모든 것들이 다 헛된 시도들이라는 것이죠. “너희들은 그렇게 살지 말라 이것이 사도 바오로가 외치는 내용입니다. 솔로몬이 모든 부귀영화를 경험하고 난 뒤에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구구절절이 토해 낸 그 전도서의 고백을 사도 바오로가 지금 다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옛 사람의 특징을 19절에서 방탕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에페4:19) 19 그들은 도덕적인 감각을 잃고 제멋대로 방탕에 빠져서 온갖 더러운 짓을 하고 있습니다.

방탕이라는 단어를 원어로 보면 아셀게이아입니다. 아셀게이아라는 단어는 허비하다, 필요 없이 소모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정신없이 나오다가 부엌에 수돗물을 켜 놓고 왔다거나 가스 불을 켜 놓고 나왔을 때 그건 이유 없이 소비되는 것이지요. 그럴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옛 사람,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라 이게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입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의 시간을 정말 의미 있는 곳에 쓰고 계신지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예전에 제가 김도향씨가 부른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곡을 참 즐겨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제 야망과 꿈을 쫓아 살았던 그 모든 삶을 한마디로 잘 표현해 주는 노래여서 그렇게 즐겨 불렀나 봅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했던 저의 지난 시절은 정말 허비하는 삶이었습니다. 바보 같은 삶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이루어 냈다고 자부했지만 참 허무하고 허망했습니다. 결과가 허무하고 허망하다면 그 것을 이루는데 쓰인 시간은 허비된 것입니다. 그래서 감각을 잃고와 방탕이 함께 등장하는 것입니다.

벤 허의 주인공 찰톤 헤스톤을 기억하십니까? 정말 탄탄하고 건강한 청년이었던 헐리웃 최고의 스타 찰톤 헤스톤이 마지막 인터뷰를 했습니다. 벌써 알츠하이머병, 치매에 걸려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찰톤 헤스톤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지요. “40이 넘으면서부터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황금 같은 나의 시간이 너무나 빨리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후로 이렇게 40년이 지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언제 다시 정신을 놓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 정신이 돌아왔을 때 여러분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나온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마음이 허한지 모르겠네요.” 그 모습을 TV로 보는데 그 주다 벤허가 얼마나 초라한 노인으로 변했는지 모릅니다.

예전에 이집트의 바로 투탄가멘 왕의 미라를 직접 본적이 있습니다. 그의 생존 당시 세계 최고 의 권력을 누렸던 잘 생긴 청년이었습니다. 얼마나 시체를 잘 간수했는지 1,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시체가 거의 썩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화려한 황금 왕관 아래의 투탄카멘 왕은 그냥 마른 쥐포와 별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지 않았으니까 아마 지옥에 갔겠지요. 그렇다면 그 화려한 왕관과 그 황금 의자가 지금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는 세계 최고의 권력을 가졌었지만 그는 인생을 아셀게이아”“방탕하게 살다 간 사람입니다.

 

제가 예전에 독일 영화 “falling"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히틀러의 이야기를 영화화 한 것입니다. 거의 이길 뻔한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이후에 점점 소련군이 그가 머물고 있는 베를린으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을 때 그 히틀러의 심경을 참 잘 그려 놓은 영화입니다. 결국 그가 숨어있는 벙커의 800m 전방까지 소련군이 밀고 들어오자 그의 아내 에바 브라운과 가로 세로 4M의 벙커에서 자살을 합니다. 그리고 그의 부하들이 그 둘의 시체를 급히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웅덩이에서 태워 버립니다. 나치 총통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습니다. ”아셀 게이아“”방탕한 삶입니다. 그들은 뭔가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전 생명을 허비한 사람들입니다. 바오로가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라그리고 세 번째로 옛 사람의 특징이 18절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에페4:18) 18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지 못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무지하고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옛 사람은 총명이 어두워진 상태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미련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은 미련합니다.”

 

(로마1:18-23) 18 하느님의 진노가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인간의 온갖 불경과 불의를 치시려고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 19 사람들이 하느님께 관해서 알 만한 것은 하느님께서 밝히 보여 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20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무슨 핑계를 대겠습니까? 21 인간은 하느님을 알면서도 하느님으로 받들어 섬기거나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황해져서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둠 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22 인간은 스스로 똑똑한 체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습니다. 23 그래서 불멸의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에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기들이 참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해온 짓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킹콩 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 킹콩을 달래기 위해 그 마을 원주민들이 어떤 의식을 행합니까? 처녀를 제물로 바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늘상 있어 온 실제입니다. 우리가 인류 역사를 되짚어보면 실제로 귀신들을 달래기 위해 산 사람을 바친 종교가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몰렉에게 하느님을 섬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아이를 죽여서 바쳤습니다.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산 사람을 죽여서 바칩니다. 얼마나 미련합니까? 그런데 그게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랍니다.

 

왜 사람들이 비즈니스를 시작할 때면 돼지머리를 갖다놓고 절을 합니까? 그 돼지머리가 정말 인간들의 일을 도와 줄 수 있나요? 첨단의 항공 산업을 하는 사람들도 여객기가 하나 들어오면 바로 그 자리에서 기장들과 임원들을 모아 놓고 돼지 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냅니다. 그 돼지는 꼭 웃고 있지요? 예전에 저희 시골에서 참 돼지머리 많이 봤습니다. 마을에 무당이 몇 명 있었거든요. 근데 그 돼지들은 전부 웃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정육점 아저씨한테 왜 돼지머리는 전부 웃고 있냐고 물었더니 돼지를 죽일 때 간지럼을 태워서 죽인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전 진짜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돼지머리 파는 사람이 그 죽은 돼지 입을 웃는 입으로 만들기 위해서 막 잡아당기더라고요. 왜 그런지 아세요? 이왕이면 웃는 돼지가 복을 더 줄 것 같으니까 그러는 것입 니다. 얼마나 미련합니까? 왜 가게 안에 꼭 북어 말린 것을 걸어 놓습니까? 왜 집집마다 복조리를 걸어 놓습니까? 그게 똑똑하고 지혜 있다는 인간들이 하고 있는 짓입니다. 참 미련하지요? 혹시, 나도 집에 북어 걸어놨는데하시는 분들 오늘 집에 가 서 다 갖다 버리세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를 미련하다고 손가락 질 합니다. , 그렇게 힘들여서 돈 벌어다가 교회다 갖다 바치니? 이 미련한 놈아.’ 그런 소리 들어 보셨죠? ‘일주일 내내 그렇게 힘들게 일 하고서 하루 쉬 는 일요일에 교회에 하루 종일 가서 앉아 있으면 넌 언제 쉬니? 이 미련한 놈아.’ ‘, 저쪽에서 너한테 되로 주었으면 너는 말 로 갚아 줘야지, 왜 멍하니 히죽히죽 웃고 있어, 이 미련한 놈아그 똑똑한 세상은 우리를 보고 혀를 찹니다. 미련하다고. 그러나 두고 보자고요. 누가 정말 미련한 사람들인지,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고전2:14) 14 그러나 영적이 아닌 사람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주신 것을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런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가리켜 끊임없이 미련하다고 놀릴 겁니다.


(고전1:18-21) 18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 19 성서에도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 버리고 똑똑하다 는 자들의 식견을 물리치리라' 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20 그러니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이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21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가 뭡니까? 나를 죽여서 원수를 살리는 도입니다. 당연히 세상은 그 십자가를 미련하다 합니다. 보세요. 세상에 지혜가 없습니다.

 

(고전2:8) 8 이 세상 통치자들은 아무도 이 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진짜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였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볼 때 그 예수와 예수의 삶은 미련한 것이었으니까 미련한 것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 예수와 예수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을 지혜 있다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예수와 예수를 따라 사는 십자가의 길을 섬기고, 져 주고, 순종하는 그 삶을 미련하다고 놀려댑니다.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라이것이 바로 사도 바오로의 외침입니다.

네 번째 옛 사람의 특징이 18절 후반부에 나와 있습니다.


(에페4:18) 18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지 못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무지하고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마음이 굳어져서 하느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라고 옛 사람의 특징을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느님을 부정하려고 애를 씁니다.

지금 서구에서는 진화론이 한풀 꺾여있는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과학자들 중에 창조론을 언급하는 사람들은 아주 드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창조론도 하나의 가설이고 진화론도 하나의 가설입니다. 그러면 교과서에 인류의 기원에는 창조설과 진화설 두 가지의 가설이 있다고 가르쳐야 하는데 전부 진화론 일색입니다. 아예 진화론만이 유일한 논리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을 떠나 하느님의 생명으로부터 단절이된 자들은 마음이 굳어져서 하느님에 관한 것에는 극도의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치고, 교회 안에도 이런 굳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태13:3-9,19-23) 1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더니 2 사람들이 또 많이 모여 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군중은 그대로 모두 호숫가에 서 있었다.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6 해가 뜨자 타 버려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랐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9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간다.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20 또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곧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21 그 마음 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 가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오면 곧 넘어지고 만다. 22 또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23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

교회 안에도 세상 사람들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그런데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열심히 듣습니다. 성경공부도 합니다. 그런데 목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고 어떤 삶을 요구하는지를 모릅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그냥 성당 출입만 하는 것입니다. 그냥 연애나 하고 밥이나 먹고 장사에 도움이나 얻으려고 예배당 출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길가 밭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동안은 신앙생활을 참 잘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삶에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금방 교회를 떠납니다. 그 사람들을 돌 짝 밭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이익과 재물의 유혹이 오면 언제든지 교회를 안 나올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빼먹고 골프를 몇 번 쳤는데 교회 가서 따분하게 목자 강론 듣는 것보다 백 배 좋아요, 그러면 성당(교회) 안갑니다. 어느 날 교회 안 가고 장사를 했는데 훨씬 이익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러면 그거 생각나서 교회 못 앉아 있습니다.

전부 진짜 같은데 마음이 굳어서 하느님의 말씀이 결실을 맺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혀 그 삶에 열매가 없습니다.

여전히 부부싸움 하고, 여전히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일가친척 다 필요 없고, 말씀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고 이런 사람들은 100% 가짜입니다. 진짜는 어떻습니까? 말씀을 듣고 깨달아 결실을 맺는 사람입니다.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진짜들의 삶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굳은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옥토가 되었습니까?


(예제11:19-20) 19 나는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새 마음이 일도록 해 주리라. 그들의 몸에 박혔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피가 통하는 마음을 주리라. 20 그래서 나의 규정을 따르고 나의 법을 지켜 그대로 실행하도록 만들겠다. 그제야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21 그러나 구역질나는 우상, 보기에도 역겨운 신상만을 마음에 두고 사는 자에게는 그 소행대로 벌을 내리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예제36:24-27) 24 내가 너희를 뭇 민족 가운데서 데려 내 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 고국으로 데려다가 25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리라.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 주고 26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 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27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 그리 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

하느님께서 그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시편에서 어떻게 노래합니까? 정결한 마음 주소서 “create me a clean heart" "하느님 정결한 마음을 창조해 주십시오.”그럽니다. 우리의 마음을 조금 고친다고 부드러운 마음, 정결한 마음이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창조해 주셔야 합니다. 그 사람이 말씀을 깨닫게 되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열매가 안 맺힙니까? 정결한 마음, 옥토는 하느님이 창조해 주신다면서요? 그 사람은 가짜 아니면, 여전히 게으른 영적 어린아이입니다. 여러분, 옥토에서는 씨도 안 뿌렸는데 무조건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나요? 아무리 부드러운 옥토라도 씨가 뿌려져야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죠?

여기서 씨가 뭡니까?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지요? 하느님의 말씀이 옥토에 뿌려져야 부드러운 옥토가 그 씨를 받아먹고 그 다음부터는 씨가 옥토를 먹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소홀히 대하는데 어떻게 열매가 맺힙니까? 씨도 없는 곳에서 열매를 찾는다면 그건 미친 사람입니다. 옥토가 되셨습니까? 그럼 이제 씨를 심으셔야 지요. 그렇게 마음이 무딘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느님을 대적해서 살게 됩니다. 디모테오서에서는 그 마음이 굳어진 자들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볼까요?


(1디모4:1-2) 1 훗날에 사람들이 거짓된 영들의 말을 듣고 악마의 교설에 미혹되어 믿음을 버릴 때가 올 것이라고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2 이런 교설은 거짓말장이들의 위선에서 오는 것이고 이런 자들의 양심에는 사탄의 노예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낙인이 찍혔다는 것은 인두로 지진 화상 자국을 말합니다. 그 자리는 감각이 없습니다. 마음이 무딘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 자들은 믿음에서 떠나서,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며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굳어있는 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지 보지요.


(2디모3:1-5) 1 마지막 때에 어려운 시기가 닥쳐 오리라는 것을 알아 두시오. 2 그 때에 사람들은 이기주의에 흐르고 돈을 사랑하고 뽐내고 교만해지고 악담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감사할 줄 모르고 경건하지 않고 3 무정하고 무자비하고 남을 비방하고 무절제하고 난폭하고 선을 좋아하지 않고 4 배신하고 앞뒤를 가리지 않고 자만으로 부풀어 있고 하느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할 것이며 5 겉으로는 종교생활을 하는 듯이 보이겠지만 종교의 힘을 부인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멀리하시오.

그렇게 마음이 굳은자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무정한 자들이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느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자기 사랑에서 나온 종교입니다. 아니, 교리는 그럴듯하게 교양 있게 잘 꾸며 놓았다 할지라도 결국 그 교주나 그 종교를 신봉하는 자들이 따랐던 것은 전부 자기 사랑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그 자기 사랑앞에 무너집니다. “자기 否認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이 얼마나 열심히 코란을 외우고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하는지 아시죠? 이슬람 국가에서는 택시를 타고 가다가도 기도 시간이 되면 택시 운전기사가 기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합니다. 그들은 도둑질을 하면 팔목을 잘라버립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라크를 폭격했을 때 회교국가인 이라크에서 엄청난 약탈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라크 군인들이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입원치료중인 이라크 국립 병원까지 약탈을 해갔습니다. 아마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부상을 당한 군인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도둑질 해간 놈들은 그 놈들이 처음일 겁니다. 그게 매일 알라의 코란대로 살겠다고 하는 자들이 저지른 일입니다. 폭격으로 치안이 부재상태가 되니까 전부 도둑놈으로 변해서 알라고 뭐고, 기도시간이고 뭐고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라마교 중들과 신도들은 라마교 경전을 읽어야 하는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마니테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라마교 경전이 적혀있는 원통을 사원 앞에 죽 달아놓고 그걸 한 바퀴 돌리면 한번 읽은 것으로 간주해 줍니다. 경전 읽는 것은 그렇게 해결하고 그들은 전부 어떻게 하면 국가로부터 이 라마교 승려로서의 권익을 다 보장받을 수 있을까 그것만 걱정합니다.

힌두교 사원에 가도 가관입니다. 힌두교 사원 앞에서 늘 제물 장수들이 줄을 지어 서 있습니다. 힌두교 신자들은 고기, , 꽃 같은 제물이나 돈을 가지고 사원 안으로 들어가서 그걸 사제들에게 바치고 사제가 찍어주는 빨간 물감을 이마에 받아 가지고 나옵니다. 그게 그들의 하루치 거룩 인증입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전부 자기들의 복을 위해서만 매진합니다.

불교는 어떻습니까? 불교의 가장 핵심 교리는 몰아(沒我)“무아(無我)“의 교리입니다. 그래서 고승들이 죽으면 다비식이라 해서 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몰아(沒我)”를 외치며 제자들에게 화장을 명하고 죽은 석가모니의 제자들은 그 몰아의 외침을 무색하게 젓가락을 들고 스승의 시체를 휘저었습니다. 사리를 찾은 것입니다. 그 뒤 몰아의 지경에서 열반했다고 하는 고승들의 시체는 여지없이 부젓가락에 의해 헤침을 당했고 몰아가 아닌 유아를 상징하는 사리들이 예쁜 보석이 박혀있는 사리함에 총총히 쌓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자기 사랑과 자기 자랑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하느님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가 그렇게 사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압니다. 나의 쾌락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예배를 빼먹습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소비해도 아깝지 않은데 하느님을 배우고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배우는데 쓰는 시간은 너무 아깝지요?

 

여러분, 성경에서 하느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교제에서 끊겨 비참하게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밀려 4,000명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엘리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예리고가 무너질 때, 그리고 요르단을 건널 때 그들을 앞장섰던 하느님이 법궤였습니다. 그들은 그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법궤를 앞세우고 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30,000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패배소식을 들은 엘리가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엘리의 아들 홈니와 비느하스도 그 전쟁에서 죽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그 소식을 듣고 죽습니다.

왜 그런 결과가 온 것입니까? 그들은 하느님의 법궤를 부적처럼 사용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궤를 그들의 유익을 위한 하나의 부적이상 취급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노하셨고 그들이 대패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블레셋에게 법궤까지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그 법궤로 말미암아 블레셋의 다곤 신전에서 그들의 신상 다곤 신상의 목이 부러집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시 아스돗에 큰 재앙 이 닥칩니다. 블레셋은 얼른 그 법궤를 가두로 옳깁니다. 거기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재앙이 임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진짜 이 법궤 때문에 그런 것인가? 하여 시험을 해 봅니다. 아직 멍에를 한 번도 매어보지 않은 방금 새끼를 낳은 암소를 두 마리 차출합니다. 그렇게 새끼에게 젖을 물려야 하는 암소는 절대 새끼를 떨어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멍에를 매어 보지 않은 암소는 절대 멍에를 매고 먼 길을 가지 않습니다. 그 암소에 멍에를 매게 하고 법궤를 실은 수레를 연결합니다. 그 수레는 잘 끌리지 않는 새 수레입니다. 그런데도 그 소가 이스라엘로 두말없이 가면 그 법궤 때문에 블레셋에 재앙이 온 것이고 안 가면 그냥 우연으로 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법궤를 실은 소는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곧장 가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법궤를 찾고 아주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 법궤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들여다보고 무려 오만 70명이 죽었습니다. 왜 하느님이 그들을 죽이셨을까요? 호기심이라는 것이 뭡니까? 왜 관음증이라는 것이 커다란 이슈가 됩니까? 몰래카메라, 남의 사생활을 엿보는 것, 그 호기심은 바로 우리 욕망과 내적 욕구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나의 욕구 충족의 수단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역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법궤를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깁니다. 그리고는 그의 아들 엘리아살에게 그 법궤를 관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70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다윗이 왕이 되고 모두 잊고 있었던 그 법궤를 모셔오기로 했습니다. 다윗이 그 법궤를 가지로 30,000명의군사 와 함께 기럇여아림으로 갑니다.


(2사무6:1-7) 1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장병 삼만 명을 소집했다. 2 다윗은 이 전군을 거느리고 유다 바알라에서 가서 하느님의 궤를(메어) 옮겨 오려는 것이었다. 그 궤는 거룹을 타고 계시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으로 불리는 궤였다. 3 그들이 언덕 위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느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나올 때, 아비나답의 아들 우짜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몰았다. 4 우짜는 궤 옆에서 따르고, 아효는 궤 앞에서 인도했다. 5 다윗과 온 이스라엘 백성은 수금과 거문고를 뜯고 소구와 땡땡이와 바라를 치면서 마음껏 노래부르며 춤을 추었다. 6 그들이 나곤이라는 사람의 타작마당을 지날 때였다. 소가 뛰는 바람에 하느님의 궤가 떨어지려고 하자 우짜가 손을 대어 붙들었는데 7 야훼 하느님께서 우짜의 잘못을 보시고 진노하여 그를 치셨다. 우짜는 하느님의 궤 옆에서 죽었다.

우짜가 왜 죽었을까요? 소가 뛰어서 그 법궤를 잡은 것뿐인데 왜 하느님은 손수 그를 치셨을까요? 민수기 4장에 보면 하느님의 법궤는 항상 레위 인들이 어깨에 메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위의 2절에도 다윗이 그 법궤를 메어오려고 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동안 그 법궤를 관리하던 우짜와 아효가 그 법궤를 소가 끄는 수레에다 싣고 나옵니다. 그 법궤는 레위 인들의 어깨에 메어 운반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궤를 관리하던 그 우짜와 아효가 마치 자기들의 법궤의 주인인 것처럼, 이 법궤를 다루는데 있어서는 내가 전문가라고 나선 것입니다. 이렇게 옮겨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소가 뛰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경고였습니다.

그런데 우짜가 그 법궤를 잡았습니다. 당시 수레의 높이가 60cm정도 되었고 법궤의 높이가 68cm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평범한 남자의 가슴 정도 높이에 법궤의 윗부분이 놓여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붙잡았습니다. 거기서 붙들었다는 말(아하즈)는 소유 개념으로의 단어입니다. 우짜는 이 건 내 것이다라고 거들먹거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궤를 가지고 자기가 거들먹거린 것입니다. 성경 가르치는 분들 조심하세요. 하느님은 그 우짜를 죽여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도 나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그렇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를 사랑하기를 하느님보다도 더 사랑하지 않나요?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마음이 굳어진 자, 마음에 낙인 맞은 자“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느님 보다 더 사랑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그런 자들은 모든 것을 자기 욕심대로 행한다라고 기술합니다.


(에페4:19) 19 그들은 도덕적인 감각을 잃고 제멋대로 방탕에 빠져서 온갖 더러운 짓을 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모든 더러운 짓을 자기 욕심을 따라 행한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행하는 종교행위들이 여러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욕심에서 나온 것이며 그건 모두 더러운 것입니다. 잘 분별하세요. 20절 보면


(에페4:20) 20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를 배웠습니까? 우리는 나의 유익과 나의 배(욕망)를 위해 존재하는 예수가 아닌 십자가의 를 쫓아 자기를 否認하고 겸손하게 섬기는 예수를 배웠습니다.

제가 여태 일년 내내 동안 여러분에게 가르친 예수는 바로 그 예수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도 안 바뀝니까? 어떻게 여전히 자기에게 유익이 안 되고 자기가 드러나지 않으면 투정부리고 삐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럽니까? 여러분, 우리는 허망하고 방탕하고 총명이 어두워진 자들처럼 미련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혹시 마음에 낙인 맞은 사람처럼 죄를 짓고도 아무 두려움 없이 그렇게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욕심을 따라 하느님을 이용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열심히 여러분의 옥토에 말씀의 씨를 심으십시오. 그러면 그 씨앗이 우리의 옛 몸뚱이를 조금씩, 조금씩 먹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내 풍성한 열매를 맺어 낼 것입니다

2020년 마지막날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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