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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 모든 것이 선물인 이유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01 조회수1,038 추천수0 반대(0) 신고

 

 

도란도란 글방. 2021. 1. 1. 

(공동번역성서)

모든 것이 선물인 이유

(로마8:31-32)

31 그러니 이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32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께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聖徒의 존재의 목적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지요. 독사조는 하느님이 나를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그 말은 하느님의 영광을 내가 나타낸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영화롭게 함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하지 못하면 엉뚱하게 내가 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는 그런 엉터리 영광을 나타내게 되어 있어요.

성도의 출발점은 하느님이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카라),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했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시작은 미리 정하심이라 말입니다.

미리 정하심이란 단어 자체가 성전이라는 어떤 울타리 안으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이미 넣어 놓으셨어요. 결정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미리 정하이라는 건 맨 마지막이 영화롭게 함이니까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미리 정해짐이죠. 창조의 목적은 이미 거기서 나온 거죠.

왜 성도라는 구별된 무리가 미리 정해져서 이 역사 속에 존재해야 하는가,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에요. 그런데 그 영화롭게 함, 독사조의 주도권도 성도가 아닌 하느님에게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성도를 영화롭게 하는 거에요. 우리가 우리의 기능이나 재주로, 또 우리의 됨됨이로 우리의 성숙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그려 내는 것이 아니라, !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살면 되겠니? 적어도 네가 이정도는 살아줘야 아버지인 그분이 영광스럽지, 이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 육신과 역사라는 도화지에 당신의 영광을 그려 내시는 거에요, 성경이 말하는 독사라는 것은.

그래서 성경은 항상 영광의 발원지를 하느님 아버지라 기록하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도 그러지요. 내가 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내가 내안에 있는 것으로 이렇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내가 내 영광을 돌리는 거에요? 그게 아니라 아버지가 나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그래요. 그게 시작이다 라고 주님도 말씀하셨다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먼저 영광을 돌리면, 그려내면 그 영광을 육신에 그려내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가 영광을 받는다 그렇게 하는 거에요.

그건 창세전에 미리 택함을 받은 성도들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의 존재목적이에요. 심지어 스님들이나 저 이슬람사원의 선생들이나 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거에요. 선택 밖의 존재들도 역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라는 그런 말입니다.

 

(로마서 9:10-21) 10 뿐만 아니라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사악과의 사이에서 한번에 두 아들을 잉태했을 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1 그 아들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불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 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13 그것은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는 미워하였다' 라고 기록된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14 그렇다고 하느님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15 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자비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하고 싶은 사람에게 동정한다' 고 말씀하셨듯이 16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17 성서에는 하느님께서 파라오에게 '내가 너를 왕으로 내세운 것은 너를 시켜서 내 힘을 드러내고 내 이름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하려는 것이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8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또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도 하십니다. 19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느님께서 사람을 책망하십니까? 누가 능히 하느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20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느님께 따지고 드는 것입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한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1 옹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낼 권리가 없겠습니까?

아직 나지도 않고 악한 일이나 선한 일을 행하지도 않은 그때에 이미 미리 정하신 거래요.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안했는데 이 역사 속에서 아직 탄생도 안했는데 이미 미움으로 유기된 자와 사랑으로 선택된 자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누가 능히 하느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불공평한 거야라고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거에요.

그 하느님의 그 자비(엘레모수네), 그 사랑, 그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 나타내기 위해서 미리 정해진 어떤 존재들이 있다라는 거에요, 그들이 뭘 해서, 안해서가 아니라.

옹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한이 없느냐. 15절에 '나는 자비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하고 싶은 사람에게 동정한다' 이 말의 당위성. 이걸 인정하고 증거하는 그 삶이겠지요. 그거는 하느님 마음이야, 하느님이 주인이고 그분만이 신이니까를, 내가 인정하고 그걸 증거하는 것이 영화로운 삶이어요.

이렇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적지는 하느님 앞에서의 나라는 존재의 주체성과 독립성을 오히려 부정당하는 거에요. 부정당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자리, 거기가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의 목적지인 거에요. 어떤 이들은 지옥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고 어떤 이들은 하느님나라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지어졌다라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고 하느님 그게 선입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고백하는 그 자리가 우리가 끌려가고 있는 목적지라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영광이 아닌 피조물의 영광 즉, 그 사람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자들은, 그게 율법주의자라는 거에요. 인본주의라고도 하지요. 그런 자들은 열심히 자기들의 영광을 드러내다가 사람의 잘남, 보편적인 사람의 자존심을 높이 향상하는 데에 올인 하다가, 자기들의 시간들을 올인 하다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그려내는 영광이 아닌 건,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아버지가 원하시는 영광이 아니거든요. 그게 그리스도교 이외의 모든 종교들의 현실이며 추구점이며 지향성이에요. 성경은 아버지의 영광과 대조되는 사람의 영광을 율법이라고 명확하게 기술합니다. 그건 사람들의 눈에 감지가 되는 영광이에요.

모든 보편적 인간들이 그렇지 저게 가치지, 저게 영광이지 하면 그걸 율법이라고 해요, 사람들 눈에 나타나는 것으로 감지가 되면. 그 자리에서는 반드시 사람에 의한 칭찬이 수반되게 되어 있어요. 그게 구약이요 인간들이 중심이 된 종교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경전을 깊이 뿌리까지 잘 읽어보면, 이해해서 공부해 보면 전부 구약이에요, 신약으로 연결이 안 되는 구약.

반면에 아버지의 영광은 사람들의 가치기준에 근거할 때 절대 영광으로 보이지 않아요. 내가 부정되고 부인 되는게 어떻게 영광으로 보입니까? 그건 실패지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 영광은 홀대를 받아요. 인정도 못 받습니다. 그건 아담으로서의 나의 죽음이에요. 사람들의 가치를 인정 못 받는 다는 것은, 그런데 그게 아버지의 영광이라고 그런다니까요? 그래 그렇게 네가 죽는 것이 영광이야. 나의 영광을 나타내는 거라 이야기한다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대표가 되어 죽으신 예수의 인생이었어요. 성경은 하느님께서 그 아들을 영화롭게 했다고 분명히 이야기를 해요.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바로 전에 하신 그 기도 있지요? 거기에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독사에요, 영광. 무슨 놈의 영광이 아들을 죽이는 영광이 있냐고요? 이게 영광이에요.

 

(사도행전3:12-16) 12 베드로는 그 사람들을 보고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왜 이 사람을 보고 놀랍니까? 왜 우리를 유심히 쳐다봅니까? 우리 자신이 무슨 능력이 있거나 경건해서 걷게 하여 준 줄로 생각합니까? 13 여러분이 하느님의 종 예수를 잡아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을 때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 주려고 작정하였는데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를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시며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그 하느님께서 바로 그 종 예수를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14 여러분은 거룩하고 죄 없으신 그분을 배척하고 그분 대신에 살인자를 놓아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여 15 마침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다 그 목격자들입니다. 16 보시는 바와 같이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은 바로 그 예수의 이름으로 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이름을 믿는 우리의 믿음으로 된 것이며 예수를 믿는 그 믿음이 여러분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한 것입니다.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 이 단어가 독사조에요. 그런데 우리의 대표이신 그 아들이 아버지에 의해 영화롭게 됐네요. ‘여러분은 거룩하고 죄 없으신 그분을 배척하고 그분 대신에 살인자를 놓아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여 마침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했더니 사람들이 그를 살인자와 바꿔서 저거 저놈이 제일 나쁜 놈이다 하고 죽여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아서.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다 그 목격자들입니다’. 육으로 죽였더니 영으로 살아나셔서 당신의 형제들에게 들어가 버리셨네. 그걸 살았다라고 그러는 거에요.

그 이름이 말씀이라고 그랬어요. “이라는 단어 자체가 말씀입니다. 이 사람은 바로 그 예수의 이름으로 낫게 된 것입니다 성전 美門에 앉았던 그 앉은뱅이 이야기 하는 거에요.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은 진리의 말씀을 받은 거죠. 예수가 내용으로 갖고 있던 그 믿음이 내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믿음이 낫게 했다고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美門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고쳤어요.

사람들이 그들이 행한 그 일을 보고, ‘헤매라 쑤스라하여 이게 신의 이름들이거든요. 그들을 추앙하고 그들에게 영광을 돌려 버려요 사람들이... 제자들이 일을 해도, 그랬더니, 베드로와 요한이 일을 하는 거에요. 왜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냐는 거에요. 그건 영광 아니라는 거에요. 그러면서 아들의 이야기를 하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했더니 그 아들은 죽었다는 거에요. 육신으로 죽었다는 거에요.

그리고 그가 이 세상에서 한 일과 그 육신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영, 진리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지 그걸 그냥 기념하고 추앙하고 그걸 신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건 영광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영광은 자기들이 부각되고 자기들이 칭찬받는 그런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처럼 자신이 부정되고 하느님의 약속이, 믿음이 부각돼야 한다라는 거에요. 마찬가지라는 거에요. 바로 이 미문 앞에 앉아있던 이 앉은뱅이가 바록 그러한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지금 그 앉은뱅이의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거지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자였어요. 앉은뱅이라고 번역을 해 놨지만 콜로스이것은 절름발이라는 뜻이에요.

저는 자들아 내게 오라 할 때 그 저는 자 있지요? 그런 말이에요. 다리가 아예 없는게 아니라. 그 저는 자 그는 자기가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자에요.

당시에는 불구자나 몸에 흠이 있는 자는 절대 성전에 못들어 갔어요 율법의 시대, 구약시대였으니까요. 그래서 성전 문 앞에 앉아서 그것도 가장 아름다운, 아름다울 , 美門에 앉아서 자비(엘레모수네)을 구하고 있었어요. 거기 들어가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거기에 들어갈 수 있어요? 이거에요.

그럼 뭐에요? 우리는 산상수훈에서 구제할 때에 너희들은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 그랬단 말이에요. 그거는 오른편이 하는 것들은 당연히 왼편에 있는 자들이 모른다라는 뜻이라 했습니다. 거긴 손이라는 단어도 없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 구제, 오른 편에 있는 하늘의 존재들이 흘려주는 그 사랑, 그 진리를 이야기하는 거라 말입니다. 그걸 흘려줬을 때 진짜 구제라고 그래요, 살려내는 거니까, 진짜 배고픔에서 살려내는 거니까. 그 구제를 구하고 있어요. 엘레모수네 그 자비(矜恤)을 구하고 있다 말입니다. 자기는 누구의 구제행위가 없으면 절대 로 거기에 못들어 간다라는 것을 아는 자의 모형이라 말입니다. 그때 그 자비(긍휼), 그 엘레모수네를 가진 이가 나타나는 거에요.

 

(사도행전3:1-8) 1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세시(9)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 성전으로 올라 가고 있었는데

9(오후3)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시간, 육신으로 죽은 시간, 일부러 그 시간을 쓰는 거에요 루가가 여기에다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건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뜻이에요.

2 '아름다운 문' 이라는 성전 문 곁에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가된 사람 하나가 있었다. 날마다 사람들이 거기에 들어다 놓으면 그는 앉아서 성전으로 들어 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는 것이었다. 3 그는 성전으로 들어 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구걸을 하였다. 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눈여겨 보며 '우리를 좀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5 그 앉은뱅이는 무엇을 주려니 하고 두 사도를 쳐다보았다. 6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돈(은과 금)이 없습니다.

돈 이라고 번역했는데 은과 금이에요. 단순히 금은 재물 이런 걸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은과 금이라는 것은 성전의 기명이나 기구를 만드는 재료 였어요.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그 성전을 이루고 있는 그 율법이었지요. 그걸 열심히 행하면, 그게 나에게 있으면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거에요. 그걸 비유해서 보여주는 거에요.

너 지금 은과 금을, 그 율법을 네가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으로 도구로 지금 우리에게 구하고 있는거 아냐,

구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그러나 그건 우리에게 없어. 그건 내가 줄 수 없어. 왜 그걸 갖고 있는 이들을 성경이 뭐라고 해요? 부자라고 하지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천국에 들어가기가 더 힘든 부자가 그 부자에요.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그러는 거에요. 그건 우리에게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걸 줄게. 근데 뭘 줬다는 말도 없어요.

6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 하며 7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 앉은뱅이는 당장에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8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름으로, 말씀으로 걸으라. 그게 내가 네게 줄거야.’ 믿음이라는 거에요. 은혜라는 거에요. 그래서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어디로 들어가요? 성전으로 들어가는 거에요. 그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그 금과 은, 그 율법, 그 율법을 행하는 나, 그걸 의지하여 성전으로 들어갈려고 하던 어떤 이가 이 성전 문 앞에서 부정되는 거에요. 베드로와 요한처럼, 그리고 그 말씀에 의해 순전히 은혜로 성전에 들어가네요 성한자가 되어서, 이게 구원이라는 거에요. 이게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라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 내가 영광을 나타내는 자로서 나타내었더니 니들이 왜 우리를 보고 신이라고 그래, 그러는 거에요. 그러면 내가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내가 영광을 받는 거 아니냐?

그러면서 예수의 이야기를 끌어내면서 그 예수가 영광을 받아 영화롭게 되자 그렇게 죽었잖아. 아무도 못 알아 봤잖아. 근데 너희들이 내가 한 일을 보고 칭송을 하고 나를 칭찬하면 너희들은 엉뚱한 거를 본 거라는 거에요. 왜요? 못봐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근데 너희들이 뭘 보고 그걸로 나를 칭찬하면 그건 영화롭게 된 게 아니라는 거에요. 그건 영광이 아니라는 거에요.

근데 보세요 우리가 오늘날 하느님께 영광이 된다라는 건 내가 어떻게 사람에게 칭찬받는 존재가 되고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세상을 호령하는 어떤 이가 되어서 내가 하느님 믿는 자로서 이렇게 잘 됐다를 보여 하느님께 영광이 되자 그러잖아요. 그러니 무슨 상만 받으면 전부 나와서 하느님께 영광이래. 그건 아니라고 그러잖아요 성경이.

그렇게 나타난 것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게 아니라니까요. 오히려 사람들이 못 알아 봐야 된다 말이에요. 그 사람에게 맞아 죽는다니까요 오히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사람은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박수 받는게 아니라 는 거에요.

 

율법에 의하면 너는 부정한 자라 절대 성전에 못 들어가, 그러나 말씀이 네 안에 들어가면 네가 진리의 세계,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면 네 겉모습과 상관없이 네 외모와 상관없이 너는 은혜의 사람으로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 거야라는 걸 보여주는 거에요. 구원이 뭔지, 생명이 뭔지를 보여주는 거라 말이에요. 그러니 영화롭게 된 아들들은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의 육신과 행위를 부정당하고 그 하느님의 은혜와 능력과 그 사랑 그 말씀, 그 약속을 부각시키는, 영광을 그려내는 도화지들이라 말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에 동의가 되는 이들에게 도대체 뭐가 너들을 절망시키고 실망시키는 일이겠느냐? 라는 거에요, 다 선물이지. 그게 오늘 본문이 강세를 두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그걸 너희들이 진짜 인정한다면 뭐가실패냐?

도대체 뭐가 너희를 대적하여 준거라는 거야 이런 말이에요. 자 그게 미리 정해져 있다라는 말이에요. 그걸 내가 나타내는 자로 사는 건데, 도대체 누가 자기를 들어 공치사를 하는 거냐라는 거에요. 누가 자랑을해요. 미리 정해진 것을 그려내는 것 뿐인데.

근데 어떻게 우리는 내가 어떤 존재가 되면 하느님이 영광을 받을 거고, 아니면 못 받는다, 왜 자꾸 선악과 패러다임 안으로 들어가냐는 거에요. 그리스도교 신앙은 나(인간,세상)를 바라보던 그 시선을 그 하느님의 은혜 쪽으로 돌려내는 거라 말입니다. 불가능한 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자가 되는게 그리스도교가 신앙의 목적지인 것이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내가 바뀌어가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이 세상에서 두 눈을 감을 때 하느님 저 이 정도면 잘 살아낸 거죠라는 고백이 아니라, 그리고 후대들에게 애들아 너희도 나같이 살아 그러면 만족과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단다, 이런 비결을 전해주는 게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목적지가 아니라, 는데 지금 본다는 거 이건 만큼 분명한 건 없어요 그러고 말아요.

수많은 소경 중에 제일 착한 소경이었습니까? 그렇게 우리는 자꾸 나의 능력과 재주와 자원과 자격을 재료로 해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려고해요. 그리고 그 기적에는 두려움과 공포가 있다니까요. 성경은 그걸 거짓 믿음이라고 그래요. 아니 진짜 야! 진리를 가진 성도로서 이 율법 도덕과 윤리 이걸 이제 내가 다스려야지 하는 그런 상태에서 하는 것과, 온갖 두렵고 공포스러워서 그걸 하는 건 다른 거에요.

내가 ! 이 사람들아  술 한잔 하는 거 뭐 그거 진리를 아는 자로서 뭐가 대단히 잘못된 거야?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 맞는 거, 다 진리네 뭐 가사가. 그러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떤 이들이 그런 나의 이 모습을 보고 혹시 내가 전하는 그 진리를 홀대하고 가치 없게 여길까 봐 그까짓 거 안하면, 내가 그 도덕과 윤리를 지배하는 거라니까요. 그걸 자유라고 해요. 그러든가 말든가 제 하고 싶은대로 하는게 아니라. 근데 사람들은 그걸 자유라고 한다니까요. 성도의 자유는 그 위에 올라서는 거에요.

 

(요한복음 12:28) 28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그 때에 하늘에서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

아주 영광으로 도배를 해 버리겠다고 하는 거지요.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이제 그 영광을 내가 그려내야 돼요. 예수님의 이야기에요.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다. 이 세상이 뭐냐면 세상의 대표로 온 예수를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그래요. 그리고 바로 밑에 뭐라고 받나면, 내가 땅에서 쫓겨나면 받는다고 그래요. 그러면 이 세상은,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세상의 대표로 오셨어요 세상으로. 그래서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아들이다그러는 거죠. 그러면 그가 세상의 대표면 세상임금(아르콘)이라니까요.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냐면 내가 너희들 세상의 대표로, 마귀새끼 사탄 이거 말고요. 예수님이 세상의 대표로 세상 임금으로 이 땅에서 죽으면, 들리면, 육신으로 죽어버리면 하느님이 미리 정하신 모든 사람을 내게 이끌게 된다라는 거에요. 이게 성도들의 삶이라니까요.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떤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라. 보세요 세상임금의 심판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어떻게 죽을 걸 얘기한거야 라고 이야기 한다니까요. 예수께서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래요.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이게, 빛이 있을 동안에 믿으라면 계속 비춰줘야지 왜 숨냐고요.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않으니. 이거는 예수님이 많은 표적을 행했는데 사람들이 저를 안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믿어? 이런 말이 아니에요. ? 성경에는 그 표적을 보고 믿었다는 사람이 무수히 많이 나오거든요.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원문으로 보면 많은 표적을 행했는데 원리적으로 형용부사가 여기 있어요. ‘원리적으로 그걸 보고는 믿는 게 되는 게 아니야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빛으로 왔다고 하면서 니들은 이 빛을 못봐, 하느님의 은혜 그 도움이 없으면 니들을 못봐, 그래서 빛이 있을 때 그 빛을 믿으라고 해 놓고 본인이 숨었다라고 하는 거에요. 많은 표적을 행해도 그 표적을 보고는 절대 못믿는다는 거에요. 나타난 것을 보고는 절대 우리가 믿을 수 없다라는 거에요. 그 안에 나타난 것 많은 표적 안에는 예수라는 육체도 들어있다니까요. 이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 아무도 안믿었다는 거지요 이사야 시대 때에도. 모든 예언자의 시대 때에 그 나타난 것을 아무도 그것을 믿음으로 못 가져가더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37-38) 37 예수께서 그렇게도 많은 기적을 사람들 앞에서 행하셨건만 그들은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38 그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주여, 우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으며 주께서 보여 주신 능력을 누가 깨달았습니까?' 한 말이 이루어졌다.

하느님이 그걸 원리로 정해 놓았다니까요, 보고는 못 믿게. 그럼 어떻게, 믿음으로 내가 네 안에 쑤셔 넣어 주겠다는 거에요.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 주의 영광을 보고 말한 거래요. 근데 뭐라고 그러냐면 그걸 보고는 그분의 인생이나 그분의 십자가를 그냥 보고는 아무도 못믿도록 하느님이 원리로 정해 놓았다는 것을 이사야가 미리 적어 놓았다라는 거에요 성경책이

그러나 유다 지도자들 중에도 저희를 믿는 자가 많았다라고 나와 있어요. 그럼 그 위에 원리로 이미 많은 표적을 행하였으나 그 표적을 보고 믿는 건 원리적으로 안된다 라고 써 놓은 그것과 이것이 충돌이 되지요. 그럼 무슨 말이에요? 이 유다 지도자들이 아르콘, 세상 임금이라는 그 단어에요. 예수님이 세상임금의 대표로 죽었는데 그 세상임금이라고 하는 어떤 이들이 그걸 보고 믿어라는 거에요. 그럼 그건 진짜 믿는 거겠어요? 아니라 말입니다. 보세요 바로 밑에. 믿는 자가 많은데 안되는데도, 믿는다고 하는 놈들이 나타났대요. 그런데 그들의 이름이 세상임금이래요. 그런데 뭐라고 그러냐면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바리새인들 때문에 무서워서 말도 못하는, 그 말을 못하는 자들이라 그 말이에요. 그리고 그 율법주의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그래요. 그런데 믿는 다고 하더라는 거에요.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냐면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느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한 자다라고 그래요. 자 하느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해도 믿을 수 있다? 천만의 말씀이지요. 그런데 사람의 영광을 하느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한 그 세상임금 아르콘이라는 자들이 믿었다라는 건 뭐에요? 이 세상의 교회라는 곳에 믿는다고 하는 놈들의 대부분이 전부 그렇게 믿고 있다는 거에요. 그 인간 세상에서 홀대받고 가치없는 자로 그렇게 평가받는게 두려워서, 그 진리 그 말도 못하는 자들, 사람의 영광 이게 율법이에요. 그게 좋아 하느님의 영광 그 진리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 그러면서도 나는 믿어요 라고 하는 그놈들은 가짜다 라는 거에요. 거짓 믿음 그래요. 러니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창세기 1장에 보면 땅이, 에레쯔가 어떻다고 그러냐면 토후그리고 보후그리고 호세크라고 그래요. 자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이 땅은 하느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왜 창조하셨어요? 그 땅의 것으로 그 하늘을 알면 너희들이 하늘이 되는거야. 그리고 그 하늘이 뭐냐면 엘로힘, 하느님이란다 했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땅을, 아랫 것들을 나타내어 우리에게 준 것들을 뭐라고 부르냐면 토후=혼돈이라고 그러고 보후=공허라고 그러고 그걸 뭉뚱거려 호세크=흑암, 어두움이래요.

조금 아까 본문에서 요한복음에서 너희들 어둠속을 다니지 말아라 그랬단 말이에요. 여기에 붙잡히지마 그랬어요. 붙잡힌다 라는 것이 뭔지 잘 보세요. 하느님께서 땅에, 이 땅이 뭐냐면 하느님께서 잡기 시작하시는 거에요. 하느님의 백성들을 낚아 올리시는 이것이 낚시바늘, 낚시대를 이렇게 형상화해서 만든 글자란 말이에요. 그럼 땅이 뭐냐면 성전이라 해도 되고 성경이라 해도 돼요.

이게 뭐냐하면 하느님이 여러분을 잡기 시작하는 어떤 것이 나타난 것으로 주는 거라 말입니다 아랫 걸로. 근데 그게 뭐냐면 토후, 이게 완성을 소리로 주는 거고, 보후 성전을 소리로 주는 거에요. 그러면 완성을 그 소리로, 그 하늘 참 성전을 소리로 말씀으로 우리에게 줘요. 주는데 그냥 그 내용 그 진리로 하늘의 그것으로 그 진리로 못 알아먹으면, 그 마임, 그 물로 못알아 먹으면 그게 혼돈, 황폐한 거고 그게 공허라고 그래요, 텅 비었다고 그러는 거에요. 뭐가 없어서가 아니라니까요.

아니 혼돈과 공허 그러니까 그럼 하느님이 태초에 창조할 때는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틀도 없고 내용도 없다고 그러지, 이런말이 아니라. 하느님이 말씀으로 뭘 창조했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자꾸 소나무야 있어라, 참나무야 있어라, 그러면 하느님이 지금까지도 하나하나 불러보고 있어야 돼요. 나무의 종류가 미생물의 종류가 얼마나 많아요. 땅을 요렇게 내가 흙을 퍼서 손에 들고있잖아요? 거기에 들어 있는 미생물의 수가 전 지구상에 있는 존재들의 수 보가 더 많대요.

그럼 그걸 하느님이 다 불르고 있어야 돼요? 어디 말로. 방언으로? 그게 아니라 모든 건 하느님의 말씀을 담아 창조했다라는 거지 소나무야 있어라 참나무야 있어라 이게 아니라 말입니다. 그건 아담이 나중에 이름을 붙였다니까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만들어 놓았는데 거기에는 내용을 담았다 말이에요. 그런데 내용으로 그걸 못 알아 먹으면 그게 토후고 보후야, 혼돈이고 공허야, 아무것도 없는 거야 그런 거에요.

예레미야에 가면 이스라엘을 보고 하느님이 너희들이 혼돈과 공허고 흑암이다그런다니까요. 그게 아무 것도 없는 거에요. 너희들은 그 내용 그 진리 그 진의로 못사네 그럼 넌 없는 거야 이런 말이에요. 그럼 이 혼돈과 공허를 뭐라고 그러나면 호세크라 그래요. 호세크가 뭐냐면 하느님이, 갇혀있다 라는 거거든요 이 단어가. 그러면 그걸 죄라고 그래요. 그 갇혀 있는 그 죄를 분석하여 아랫 것으로 주면 그걸 갖다가 그대로, 율법을, 그리고 그 성전을 그예수를 그대로 표피적으로 섬기고 그걸 그대로 율법으로 행해버리면 그걸 어두움이라고 불러요. 나쁜게 아니라니까요.

그러면 그걸 아 그게 그거였어요 하느님! 하느님의 그 사랑, 그 아가페, 그능력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군요 라고 알면 그걸 뭐라고 그러나면 오르, 성전을 여러분이 그 성전 그대로 보고 거기에 가서 열심히 비나이다 비나이다 행해버리면, 그리고 희생제사만 열심히 드려버리면 그걸 어둠이라고 해요. 그리고 그 진리를 담은 그것, 이 그릇이 뭐에요? 성전이? 원래 그 진리를 담은 그 참인 것, 참 진리를 담은 거니까 그 성전은 그릇이란 말이에요. 근데 이 진리를 담은 그것, 그러나 모형으로 나타난 것으로 준 그것을 거짓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이 거짓으로 나타난 것으로 그 내용을 알면 그게 진리가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거짓이라는 것도 나쁜 게 아니라니까요.

그 성전을 그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보여주고 제사지내, 율법지켜, 옷은 어떤 걸 입어야 되고 이렇게 가르쳐 버리면 그걸 거짓예언자, 거짓말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이 내가 빛으로 왔다이 어둠 가운데 빛으로 왔으니까 이 빛을 알아 먹으라는 거에요. 그런데 너희들은 너희의 능력으로 절대 이 어둠을 이 빛으로 못 알아먹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 진리, 그 말씀, 그 사랑, 그 은혜를 무상으로 은혜로 뚫고 들어와 그냥 선물해 주시는 거에요. 깨닫게 해 주신다니까요. 그러니까 그 성전 그 율법 그 성경 그 예수에 그냥 표피적으로 묶여버리면 그걸 어두움에 붙들린자라고 그래요. 붙들리면 안돼라고 그러는 거에요.

그런데 어떻게 너희들은 그 표적을 보고 아직 죽지도 않은 이 예수를 보고 믿는다 그러니? 너희들이 세상임금이야 아르콘 그런다니까요. 너희들이 세상 임금이고 너희들의 사람의 영광을 하느님의 영광보다 더 좋아하는 자야 가짜야. 그런데 오늘 날은 대부분 그렇게 믿어요. 라틴어로 인간을 호모메미쿠스라고 하는데 흉내내는 존재라는 뜻이에요. 인간은 하느님을 흉내내는 존재에요. 그래서 하느님처럼 살고 싶어해요. 인간들의 그 죄의 본질 그것을 아주 제대로 설명해주는 단어에요 호모메미쿠스. 그렇게 어두움에 붙들린 채로 나는 예수를 믿는다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이들의 예수를 성경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묵시록19:6-8) 6 또 나는 큰 군중의 소리와도 같고 큰 물소리와도 같고 요란한 천둥소리와도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느님 전능하신 분께서 다스리신다. 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 양의 혼인 날이 되었다. 그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고, 8 하느님의 허락으로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게 되었다. 이 고운 모시옷은 성도들의 올바른 행위이다.'

行爲라는 단어가 없어요 다에요. 이게 성도들의 의다. 그 의를 신부의 옷 아마포(모시옷)로 입고 있습니다. 신부들이 나타났어요 남편도 있어요. 이들은 하느님의 참되신 말씀이다 그래요. “호 로고스 알레띠노스이들이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이라는 자들이야 이런 말이에요. 진리의 말씀이라는 게 하느님의 그 말씀과 연합된 자들이라는 뜻이죠. 그 말씀을, 역사 속에서 그 말씀을 그냥 살아낸 자들을 말씀이라고 그래요. 이들이 진리의 말씀이야 이야기 합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묵시19,11)가 있으니, 뭐가 또 나타났네, 이제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성사가 됐습니다. 신부들도 나타났어요. 아마포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마와 탄자가 나타났는데요 그 이름이 '신의' '진실'이래요 이게 피스토스 알레띠노스에요. 그의 이름은 믿음이고 그 이름은 진리야 이러게 말해요. 예수그리스도에요. 그런데 조금 아까는 어린양, 신랑으로 나타났는데 여기는 백마를 탄자로 왔어요. '신의' '진실'이에요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워요 그는 공의로 싸워버려요. 율법으로 싸운다니까요.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자 보세요.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래요. 당연히 예수그리스도지요.

그분이 하느님의 말씀인데 그 이름을 자기밖에 모른다고 해요.(19,12) 그럼 지금 이분이 대적하여 싸우는 그들은 이분의 이름을 모르는 거네요. 이 말씀이 뭔지를 모르는거네요. 그러면 어떻게 되나 보세요.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 이다 (19,13)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아마포를 입고, 조금 앞에 나왔던 그 신부들이죠. 그 신부들이 그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백마를 타고 그를 따라요. 이 백마는 나중에 赤馬가 되고, 黑馬가 되고, 적마는 죄에요. 흑마는 기근입니다, 말씀이 없는 기근. 그리고 靑黃色 , 청황색이 청색 황색 섞어 놓으면 靑黃色? 시체가 푸르게 되면 그걸 청황색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멸망의 말이에요.

성경에서 말이라는 건 육체잖아요. 그의 입에서 이한 칼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이거 시편2편에서 나오는 예수그리스도 아닙니까? 친히 하느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모든 왕의 왕, 모든 군주의 군주' 라는 칭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또 태양 안에 한 천사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늘 높이 날고 있는 모든 새에게 큰 소리로 '자, 다 같이 하느님의 큰 잔치에 오너라. (공중의 나는 모든 새는 율법, 성전이에요.)  왕들과 장성들과 장사들과 말들과 그 위에 탄 사람들과 모든 자유인과 노예와 낮은 자와 높은 자의 살코기를 먹어라.(19,18) 율법아 성전아 그 예수를 진리로 남편으로 받지 못한 그들의 고기는 너희들거라라는 거지요.

 

(묵시19,20) 20 그런데 그 짐승은 잡혔습니다. 그리고 그의 앞잡이로서 기적을 행하여 짐승의 낙인이 찍힌 자들과 짐승의 우상에게 절을 하는 자들을 현혹시킨 그 거짓 예언자도 함께 잡혔습니다.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는 산 채로 유황이 타오르는 불못에 던져졌습니다.

자 보세요. 사람들이요 성전이 예수고 예수가 말씀이고 그 말씀이 율법입니다. 다 똑같은 거에요. 똑같은 건데 그걸 문자로 표피로만 그냥 보게 되면 그 예수가 심판의 예수 육체의 예수 말탄 예수가 돼요. 그러면 그 말탄 예수는 나에게 뭐가 되냐면 거짓 선생, 거짓 예언자가 돼요. 거짓말을 전해주는 자가 된다니까요. 그리고 그걸 짐승이라고 불러요. 그 짐승이라는 뜻 자체가 “, 덫에 걸리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그런데 그 하느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그 덫그 짐승, 그 거짓예언자, 거짓 말에는 절대 안속는다는 거에요. 그거는 멸망 받을 거라는 거에요

그건 멸망 받을 예수라 말입니다오해된 예수, 곡해되어진 말씀이라 말입니다.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칼, 이건 말씀이라는 거에요. 성경에서 설명해 줍니다. 그 말씀에 의해 죽으매 모든 새가, 율법, 성전이 그들의 고기를 먹고 배를 불리더라는 거지요. 여러분 이게 굉장히 심각한 겁니다.

언젠가 일어날 뭐 미래의 아마겟돈 전쟁 이런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생각도 하지 마시고 지금 여러분의 인생 여러분과 관계없는 성경은 아무 가치 없어요. 이건 여러분 안에서 일어난 일이고 일어나고 있는 일이고 일어날 일이라니까요. 여러분의 육신과 시간 안에서.

 

(이사야31:3) 3 에집트인들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그들이 타는 말은 고깃덩이요, 정신이 아니다. 야훼께서 팔을 휘두르시면, 돕던 자도 비틀거리고 도움을 받던 자도 쓰러지리라. 모두 함께 멸망하리라.

그 말()이라는 건, 그 말을 탄 예수가 나오잖아요 지금 철장을 들고. 그런데 그 말이 뭐냐면 육체라고 그래요. 그걸 영이 아닌 육체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 예수를 나타난 모양대로 믿고 그걸 그냥 소문으로 듣고 섬겨버리면 그게 우상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하느님이 십계명 1번 내 앞에서 나를 다른 신으로 섬기지 마 그러는 거에요. 그 말은 너희들은 대부분 나를 다른 신으로 섬길거야 이런 말이에요. 무슨 다른 신이 어디 있어요 하느님 말고? 그런데 하느님이 그런다니까요? 1번 너는 나를 다른 신으로 섬길거야 너희들은, 그건 안된다 라고 하는 거에요.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에 관한 구체적인 요한묵시록 13장에 나와요.

(묵시록13: 1) 1 또 나는 짐승 하나가 바다에서 올라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짐승은 뿔이 열 개이고 머리는 일곱이었습니다. 그 뿔에는 각각 관이 하나씩 씌워져 있었으며 그 머리마다 하느님께 모독이 되는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제 바다하면 생각이 나야해요. 창세기 셋째 날이지요. 아랫물을 모아 이걸 "" 바다라고 한다 그랬어요. 거기에서 짐승이 나옵니다. 짐승은 오해되어진 예수라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거짓 말.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이름이 있기는 있는데 신성모독(참람)된 이름이에요. 오해된 말씀이에요 오해된 이름.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수준으로 설명해 드릴게요. 여러분은 성부 성자 성령을 알고 계시죠? 그럼 이게 오해되면 묵시록에서 용, 바다짐승. 땅짐승, 성령은 이 성자를 설명해 주시는 분이니까 그죠? 지금 이거를 여러분이 대조하여 한번 이해를 해보란 말이죠. 알지도 못하는 짐승 용 이것 찾아서 삼만리 찾아서 다니지 마시고, 그리고 괜히 있지도 않은 걸 두려워 벌벌 떨지들 말고요. 그건 여러분이 머리로 만들어 낸 거라니까요. 만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래요 그건.

이걸 이렇게 한번 진짜 무서운게 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느님과 아들과 그 말씀을 잘못 알아들어 멸망에 빠지면 그거 보다 무서운게 어디있어요? 그게 지옥인데. 그 존재, 오해되어진 그걸 용, 짐승 이렇게 이야기 한다 말입니다. 어디 딴데, 거기서 준비하고 무저갱에 쇠사슬로 묶여 있는 그런 영화에 나오는 그런게 아니라 진짜 무서운 건, 여러분을 진짜 죽이는 건 다른 말이라니까요 가짜말.

보세요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하느님이 아들에게 준 그 목록이 여기 나오는데 이름만 바뀌었어요. 용 짐승 이렇게.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았으며, 안죽었네. 진짜 아들은 죽었는데 여기는 죽게 된 것 같다가 살아났어요. 그러니까 손에 못자국도 있고 옆구리에 창 자국도 있어야 되는거야, 죽은 것 같았다가 살아났으니까,

그러니까 여전히 그 사람들에게 그 분이 살아서 섬김의 대상이 되어. 오른 손과 옆구리를 주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잖아요. 네 보여주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보여줬냐면, 당시에 여자들만 부활한 예수를 봤습니다. 그런데 못알아봤어요. 그래서 랍비여 라고 불렀다니까요. 그렇게 살아났으면 알아봤어야 된다니까요. 그런데 여자들이 와서 주님이 부활했대요. 당시에 여자들의 말은 거짓말보다 더 안믿었어요. 그런데 여자들이 감히 남자들에게 와서 내 말을 믿으라는 거에요. 그러니가 제자들이 뭐라고 그랬냐면 그래 그 손과 옆구리를 보면 그분인줄 알겠지 했단 말이에요. 보고 믿겠다 라는 그 마음이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왔는데 아무도 못알아 봐 그래서 뭘 했냐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했어요. 그말이 무슨 말이냐면 예수님이 여태 전했던 복음을 다시 설명해 줬단 뜻이에요. 그런데 거기다가 사복음서의 내용을 다 쓸 수 없으니까 평화, 에이레네라는 단어 자체가 그 진리 그 언약 안에서 하나가 됨이라는 뜻이거든요. 설명해 줬더니, 그래 놓고 성경이 뭐라고 그러나면 예수님이 손과 옆구리를 보여줬다 그래요. 하느님의 말씀, 그 손과 옆구리 십자가라는 건 바로 이 평화라는 말씀이다 라고 이야기를 한 거에요.

그래서 말씀을 전해주고 그걸 손과 옆구리를 보여줬다 그러는 거에요. 그랬더니 제자들이 깨달아 알았다 그래요. 그걸 봤다 그러지 않고. 그게 손과 발이 옆구리가 뭔지를 깨달아 알아 그 십자가 언약의 의미가 뭔지를 깨달아 알아 그분이 주님인 줄 알았다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주님이 그래 이게 원리야. 그러니까 성령을 받아라. 그러면 너희들이 그 죄를 용서하는 자가 되는 거다로 이어지는 거에요. 그리고 이 이야기가 뭔지를 설명해 주기 위해 도마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에요.

부활(8)의 날에 완성된 자들은 어떤 자들이냐면, 토마도 똑같이 그러죠. 옆구리하고 손보면 내가 믿을게 라고 했는데, 주님이 오더니 똑같이 말씀을 하세요.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하고는 토마에게 그래요. 옆구리와 손을 봐라. 그러니까 토마가 뭐라고 그러냐면 바로 거기서 주가 하느님의 아들이고 주님이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고백해 버린다니까요 봤다는 말이 없고. 그랬더니 주님이 뭐라고 그러냐면 너희들이 보고야 믿느냐?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그게 아니고 너는 믿었다그래요어떻게 너는 호라오 했구나로 완료로 쓴다니까요. 내 말을 듣고 네가 나를 보네. 깨닫네 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서 결론을 뭐라고 그러냐면 보고로 믿는 자보다 보지 않고 믿는 그가 복 있는 자야 라고 결론이 맺어진다고요. 

근데 앞에서 제자들이 봤으면 어떻게 되느냐고요앞뒤가 달라지는 거죠. 보여줬어요, 그런데 어떻게 봤나면 그 옆구리와 손을 진리로 봤다니까요. 깨달아 알았다니까요. 바꾸어 말하면 그래 손과 옆구리에 못자국 있니? 그걸로 나를 믿을려고 했어? 나를 찾으려고 했어? 그런 자들은 지옥에 가면 많아 날 흉내낼려고 했던 자들, 요즘도 필리핀에서 한명씩 매년 매달아 박지요? 지옥에 있다니까요 그분은? 천국에 가서 못 찾아요.

 

(묵시록13: 4-6) 4 그리고 그 짐승에게 권세를 준 용을 경배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짐승에게도 절을 하며 '이 짐승처럼 힘센 자가 어디 있는가? 누가 이 짐승을 당해 낼 수 있겠는가?' 하고 외쳤습니다. 5 그 짐승은 큰 소리를 치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지껄일 입을 받았고 마흔 두 달 동안 세도를 부릴 권세를 받았습니다. 6 그래서 그 짐승은 하느님을 모독하기 시작했고 하느님의 이름과 하느님의 집을 모독했으며 하늘에서 사는 자들에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보세요 이 경배라는 단어가 프로스큐네오에요. 예배에요. 누가 주님과 더불어 싸우겠습니까? 똑 같은 말이에요. 또 짐승이 큰 말(horse)이 아닙니다 위대한 말씀. 참람(모독)된 말 하는 입을 받는데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받아요. 마흔두달은 삼년 반,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인데 이게 큰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신성모독된 말, 그들을 죽이는 말씀이 될 수 있단 뜻이에요. 그 말 율법으로 곡해되어진 말씀은 할 수만 있으면 하느님의 택하신 자들까지도 미혹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이게. 모독, 말을 깨더라는 거에요 율법이. 우리도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수시로 선악구조 아래로 내려가 그 말씀을 또 다시 곡해한다니까요.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반드시 이겨야 돼요. 말씀이 우리를 이겨야 우리가 살아요.

 

(묵시록13: 7-18) 7 그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 이길 힘을 받았고 모든 종족과 백성과 언어와 민족을 다스릴 권세를 받았습니다. 8 그러므로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생명책에 천지창조 때부터 이름이 올라 있지 않은 자들은 모두 그에게 절을 할 것입니다아무도 못알아 듣는다는 이야기에요 9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으십시오. 내가 들려주지 않으면 이 땅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하나도 없다는 말이에요. 10 '잡혀 갈 사람은 잡혀 갈 것이며 칼을 맞아 죽을 사람은 칼을 맞아 죽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필요합니다사로잡히는 자가 있어요 말씀에. 그리고 그게 칼이 되어 죽는 자가 있다는 거지요. 그걸 그대로 같이 살아야되니 그걸 인내라고 그래요

11 이번에는 또 다른 짐승 하나가 땅에서 올라 오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그 짐승은 어린 양처럼 두 뿔이 있었으며 용처럼 말을 했습니다. 생긴 건 어린양인데 나오는 말은 용의 말이에요. 아래의 물로 빠트려 죽이는 말 그죠? 여자를 빠트려 죽이는 그 용이 입에서 물을 뿜죠? 12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이 가진 모든 권세를 그 첫째 짐승을 대신하여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땅과 땅 위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치명상에서 회복된 그 첫째 짐승에게 절하게 하였습니다. 13 또 그 짐승은 여러 가지 큰 기적을 행하며 사람들 앞에서 하늘로부터 땅에 불을 내리게도 하였습니다. 그 이천년 전의 십자가에서 죽은 그 예수, 예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다가 상처가 나은 자니라. 안죽은 자래요.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 있어요? 요즈음에도 있어요. 불같은 성령임하옵소서 그죠? 그 이야기 하는 거에요.   14 그리고 그 첫째 짐승을 대신해서 행하도록 허락받은 기적을 가지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땅 위에 사는 사람들더러 칼을 맞고도 살아난 그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매달아 놓으라는 거에요. 그리고 그거 섬기게 하라는 거에요. 안 죽었다니까요. 15 그리고 둘째 짐승이 권한을 받아서 첫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그 우상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도 하고 또 그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죽이게도 하였습니다. 16 또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오른손이나 이마에 낙인을 받게 하였습니다. 오른 손과 그 이마에 표를 받게 하는 것은 뭐죠? 신명기 64절이하의 쉐마그러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도 절기 때마다 외우는 것이 신명기 64절 이하에요. 쉐마 뭐에요? 너희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너희 이마와 손에 새겨라 그러지요. 근데 전제가 뭐냐고 하면 마음에 새기는게 이마와 손에 새기는 거야. 요즘도 유대인들은 어디에 경문이라고 그러죠, 지갑같은거 만들어서 이마와 손에 붙이고 다녀요. 차는 경문을 크게 만들어서 나는 말씀을 더 많이 갖고 있다라고 하고 다녔어요 예수님 시대에도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거에요. 너희들은 차는 경문과 옷술만 크게 하는구나. 언제 하느님이 그거 차고 다니라고 그랬냐? 이게 율법주의죠. 그 표를 그대로 받고 있는게 이사람들인 거에요. 이마와 손에 표를 받았는데 율법으로 그 말씀을 받아 여기에다가 붙이고 다니는 거에요 율법으로요. 17 그리고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표시하는 숫자의 낙인이 찍힌 사람 외에는 아무도 물건을 사거나 팔거나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장사를 못한다는게 아니라 그들끼리만 소통한다는 거에요. 진리를 아는 자와는 소통이 안된다는 뜻이에요. 베리칩 이런 개뼈다귀 같은 소리는 믿지도 마세요. 그 안에 정보를 다 넣고 크레딧카드까지 넣어서 이거 없으면 매매도 못하고, 그런 것 준다고 하면 제일 먼저 가서 받으세요 편하게. 누가 그걸 조정하냐고요. 말도 안되는 소리들을 하고 있어요. 지가 마귀인데 누가 누구를 조정하고 있냐고요. 내가 그 진리 이해 못하면 내가 다이모니온, 마귀라니까요 18 바로 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영리한 사람은 그 짐승을 가리키는 숫자를 풀이해 보십시오. 그 숫자는 사람의 이름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그 수는 육백 육십 육입니다.

짐승의 말씀이라는 거에요. 오해 되어진 예수의 말, 성경 말씀. 숫자라는 건, 여러분 예전에 고대시대 때에는 원래 아라비아 숫자가 생기고 나서도 1부터 9까지밖에 없었습니다. 숫자라는 건 항상 뭔가를 말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성경이 쓰여지던 시대에 수 그러면 말이라고 바꿔서 읽으면 돼요.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 하느님이 7이라는 안식을 설명해 주기 위해 7이라는 숫자가 아닙니다. 안식을 설명해주기 위해 10이라는 계명을 주시죠. 근데 이게 인간이 못하는 위에 것들 다섯과 다섯을 나눠서, 나 외에 나 말고 나를 다른 신으로 섬기지 마라고 했지만, 다른 신은 누구고 나는 누구냐고요? 이건 우리가 모르는 얘기에요. 나를 다른 신으로 섬기지 마 했는데 그 나가 누구냐고요? 모른다니까요 우리가.

그러니까 아래의 다섯으로 살인하지 마, 간음하지 마 이걸로 설명해 준 거에요. 이거 하면 그게 위에 것을 하는 거야 그렇게. 근데 주님이 이걸 4로 설명해 주세요 왜? 하늘의 3을 이 땅의 사람이 완성해 내야 할 거니까. 그럼 주님은 이걸 또 둘로 나눠서 설명해 주고 이게 바로 하나가 되는 거야로 설명해 주네요. 그리고는 요 7은 완성이 되면 이게 8이라고 해요. 그래서 87은 같은 이름인데 이게 완성이 되면 그게 8이에요. 그래서 87안에 들어가 있어요. 9는 이 단어 자체가 완성을 향하는 마지막 단계라고 그래요 이 9. 그러면 이게 1 2 3 4 5 6 7 8 9 10 이게 다 있네요. 그런데 각자가 다 이야기를 담고 있네요. 이걸 말이라고 해요 말. 그러면 짐승의 말, 짐승의 수, 사람의 수가 뭐겠어요? 사람과 짐승의 수준의 말, 그게, 666이라고 그래요.

 

원어로 이게 어떻게 쓰여 있나면 키 크시 스티그마라는 문자로 기록되어 있어요. 그냥 이렇게 써 놓았어요. 그리고 이것을 666으로 읽는데 원문에는 덜렁 이렇게만 써 놓았다니까요. 그리고 사람의 말 짐승의 말 그 수를 세어보라 라는 말이 만져보라는 말이에요. 근데 그래 놓고 이 단어는, 요 이 문자들은 히브리사람들이 뱀, 뱀의 형상을 본따서 만든 글자들이에요. 뭐라는 거에요? 너희들의 그 예수를 그 율법 그 육체로 알아버리면 한번 만져봐라. 그게 뱀이야 이런 말이에요.

그것이 바로 하느님 777의 흉내는 비슷하게 내지만 거기에 절대 그 완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가짜 말인거야 이런 말이에요. 666도 생긴게 다 뱀이네. 이 문자들이 그래요. 원래 뱀이라는 단어가 애굽의 상형문자에서 나온 것이니까 이렇게 썼다니까요. 울타리 안에 갖혀 있는 완성 그래서 이게 밖으로 나오면 이게 크리스토스가 되는 거에요 그리스도. 그래서 어디 강론대에 가면 이렇게 () 써놓은 거 있지요. 그런데 이게 올바르게 진리로 이해되어지지 않으면 뱀인 거에요 뱀. 다 꼬랑지를 풀고 있잖아요. 이 단어(히브리어 알파벳 테트)가 요단어()에서 온 거에요. 그러니까 어디에다가 무슨 바코드니 이딴 소리들 좀 하지 마세요. 다 진리와 비진리에 관한 이야기에요 성경의 내용은. 그러니까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것, 그건 얼마나 하느님 앞에서 무력한 존재이며 그 분은 우리에게 왜 당신의 생명만을 충만히 부어 우리를 살릴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제대로 알아 그분을 찬송하는 거에요. 그게 말씀의 목적이에요. 인간들은 항상 그 선악의 두 마음이 있어요 인간들은. 그건 마음도 아니에요 성경은 마음이라고 하지 않는데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두 마음이라고 그래요. 그래놓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이렇게 부르면 그들은 심판의 대상이에요. 두 마음이 뭐냐면 선악이에요. 그래서 모든 걸 보면은 선악, 어두움 밝음, 빛 어두움 이렇게 나눠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진리는 그거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거라니까요.

빛이 어둠이고 어둠이 빛이네 그렇게 죄가 악이고, 의가 선이네를 볼 수 있으면 그를 진리의 사람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모든 걸 둘로 딱 나누어 버리면 그걸 노미조한다고 그래요. 율법이라는 뜻이에요. 그럼 이 인간의 그냥 그 마음 그 원래의 인간들의 마음 그것이 노미조하는 마음이라면 두 마음이에요 그게. 그걸 또 에피뒤미아라고도 해요. 貪心이라고도 하거든요. 그러면 그 마음 그게 그렇게 하는게 바로 율법이야를 보여주는게 노미조니까, 율법, 말씀은 뭘 그려 놓은 거냐고요? 너희들의 마음이 도대체 어떤 건지 그게 바로 죄라는 걸 설명해 주는게 율법, 그래서 바오로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다이렇게 이야기하는 거라 말이에요. 근데 그걸로 죄를 깨달으라고 줬더니 그걸 열심히 행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고요. 그럼 죽는 거에요. 그게 그 말씀을 뱀으로 곡해하는 거라니까요.

그 마지막 절에서 지혜가 여기 있으니 영리한, 총명(聰明)한 자는 그러죠 그게 깨달은 자는 그러는 거에요. 깨달은 자는 그들의 말을 한번 만져봐 그게 뱀이야. 그래서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느님께서 다섯 번째 날에 뱀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거에요.

창세기120절 보세요. ‘하느님께서 '바다()에는 고기가 생겨 우글거리고~’ 물은 물론 아랫물이지요. 다섯째 날이니까 둘째 날과 짝이지요? 그러니까 둘째 날에는 위엣물 아랫물이 나눠졌으니까 여기서 아랫물의 이야기를 하겠지요. 물들은 생물로 우글거리게하라. 생물은 네페쉬입니다. 사람들이, 아직 진리가 뭔지 모르는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모습이다는 뜻이에요. 땅위 하늘의 창공 라키아에는 성전이 있으라 그래요. 하느님이 큰 물고기와, 이 큰 물고기가 탄닌이에요. 이게 묵시록에 나오는 용, 옛뱀 이런 뜻이죠. 그 아래의 물에 탄닌, 용 뱀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그 네페쉬 그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라고 하는데 그 종류대로가 이라는 단어인데 그 앞에 전치사가 붙어 있어요. 그건 항상 ~을 위하여 라는 뜻이거든요.

가르치기 위하여, 민은 뭐냐면 그것이 무엇인지, 민이 분리하다 분배하다 라는 뜻이 있어요. 분배하고 분리하고 하는 에피두미아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하여 라는 뜻이에요. 그 나눈다는 것 분배라는 게 뭔지를 가르치기 위해 뭘 만들었나면 그 용이라는거, 오해 되어진 율법이라는 걸 만들고 그 우글거리는 인간들을 그 안에다가 물에다가 놓아두더라는 거에요. 분배하고 나누는 두 마음이, 그 죄가 뭔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여기 있는 큰 뱀 큰 물고기 앞에, 큰 이라는 단어가 가돌이라는 단어이거든요. 그 때 큰, 위대한 이 단어가 가돌이에요. 만약에 이게 나쁜 뱀이라면 카탄이라는 단어를 써야 돼요. 그럼 위대한 뱀이 뭐에요? 그러니까 아래의 위대한 큰 고래? 고래랑 아무 상관없어요. 뱀이라고 쓰여 있어요 이 단어가 예언서에  짐승이라고도 쓰이고 들개라고도 쓰이고

그러니까 하느님은 위에 물을 가르치기 위해 창공을 만드시고 아래의 물과 위의 물의 교집합으로 창공을 주셨단 말에요. 그런데 그 창공에 성전, 나는 새를 두시고 그 아래의 물속에 뱀을 두신 거에요. 그러나 그 창공, 그 나는 새, 그 성전과 아래의 그 뱀 그것으로 위엣 물을 진리를 알아 버리면 괜찮은 거에요 뱀이면 뭐. 나에겐 뱀이 아닌데 더 이상 그죠?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의 그 뱀은 구리뱀이 되어 죽은 거에요. 그래야 되는 거라니까요. 성전을 통하여 진리를 알게 되면 그 성전이 하느님의 은혜의 선물이 되지만 그 성전을 曲解해서 그 안에서 제사의 행위와 율법의 행위만을 쏟아내게 되면 그게 그냥 뱀이 되는 거에요.

마찬가지에요 예수를 통해서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내 마음으로 갖지 못하면 그 예수의 하신 일과 그 말을 율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면 그 예수가 뱀이 되는 거에요. 살아있는 뱀, 구리뱀이 되어 죽어 언약의 기둥에 못박힌 뱀이 아니라 살아 있는 뱀이 되어 여러분을 죽이는 뱀이 된다 말입니다. 그래서 묵시록까지 그 뱀이 살아 있는거에요. 우리에게는 죽었잖아요. 우리는 그 뱀이 품고 있는 내용을 알아 버렸으니까. 그래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그 뱀 안에 넣어서 언약의 기둥에 매달아 다 죽였다고 라고 그렇게 얘기 하는 것입니다.

 

(마르코복음 1321) 21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해도 믿지 말아라. 22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어떻게 해서라도 뽑힌 사람들을 속이려고 여러 가지 기적과 이상한 일들을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디 있습니까? 내 안에 말씀으로. 요즘 여러분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인간들이 부쩍 많아졌죠. 이만희를 비롯해 문선명, 박태선~ 굉장히 많아졌어요. 그런데 우리는 알죠 그 그리스도가 내 밖에 있으면 죽여야 할 뱀입니다. 그것들은 빨리 잡아다가 죽여야 한다니까요. 섬겨야 되는게 아니라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다 거기가서 섬기고 있는 거에요. 우리는 알잖아요. 그건 죽어야 되는 건데 왜 살아있어요 여태? 그러니까 그 진리를 알면 이단에 빠지라고 고사를 지내도 못 빠지게 되어 있어요.

여기있다 저기있다고 아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그건 내 마음으로 갖고 있어야 되는 거에요. 근데 어떤 이들에게는 이천년전 골고다에 아직도 거기에 박혀 있어. 그러면 그분의 말이 전부 용의 말이, 뱀의 말이 되어서 나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우는 말이 되는 거에요. 그 짐에 깔려 죽는다니까요. 그 하느님의 진리를 올바로 깨달아 안 이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을 자유케 만들어 주는 생명의 말씀이 되는 거에요.

사람들은 두렵고 공포스럽게 만들어 주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말을 잘 듣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진리를 말하면 이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니까 말 더럽게 안들어요. 그런데 그게 맞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공포정치를 하는 거에요. 난 이렇게 말을 안들어도 행복해. 그렇게 되면 그 죄에서도 자유롭게 되고 악에서도 자유롭게 되고 심판과 저주와 무거운 짐에서도 자유롭게 되고 그리고 그들은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사건들과 현상들을 나타난 모습 그대로 보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잖아요 이제

! 그 안에 내용이 있는 거구나 그렇게. 근데 그걸 내용으로 보지 못하고 나를 절망케 하는 그 사건으로 봐버리면 그 사람은 그 사건이 날 죽이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그 모든 내용들은 전부 합력되어 선을 이루는 재료니까 凡事가 감사해지는 거에요. 물론 역사 속에서 우리가 감정적으로 그렇게 마냥 그게 기쁘기만 하고 평화롭기만 하고 그렇지는 않아요. 그러나 원리를 안다니까요 우리는. 그렇지 이게 그런 거지라고 깨달아 안단 말이에요 우리는. 그걸 자유라고 그래요.

 

(1디모 41-4) 1 훗날에 사람들이 거짓된 영들의 말을 듣고 악마의 교설에 미혹되어 믿음을 버릴 때가 올 것이라고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2 이런 교설은 거짓말장이들의 위선에서 오는 것이고 이런 자들의 양심에는 사탄의 노예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3 이런 자들은 결혼을 금하고 어떤 음식을 못 먹게 합니다. 그러나 음식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으로서 진리를 깨닫고 신도가 된 사람들이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4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은 모두 다 좋은 것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이게 율법 지켜라 이런 말입니다. 하느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 “파스 알레떼이아다 선해,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거에요. 그 모든 것 안에는 여러분이 겪고 있는 사건이나 현실들이 다 들어 있어요. 버릴게 없는 거에요. 나에게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아니라 버릴 게 없는 일이 되는 거에요.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 그 말씀을 가진이는 그것이 깨끗해진다라는 거에요. 악과 더러움과 어두움이 아닌. 있어서는 안될 일이 아니라 말씀이 있는 자들은 깨끗하다라는 거에요.

그래서 하느님이 베드로보고 부정한 것을 전부 모아서, 율법에서 부정하다 한 거에요. 그걸 모아서 하느님이 그거 부정하다 라고 모세에게 가르친 겁니다. 근데 그거를 보자기에 싸서 베드로에게 주더니 다 먹으라고 그랬어요. 베드로가 어떻게 먹습니까? 진리를 전하는 사도도 율법주의에서 금방 못 빠져 나온다니까요

하느님이 뭐라고 그래요? 내가 그거 정하다고 하는 거야. 내가 부정한 거라고 너에게 줬지 그런데 그 부정한 나타난 것을 통해 그 안에 깨끗한 정한 것이 무엇인지를 내용으로 알라고 줬잖아. 그럼 넌 지금 진리를 전하는 자가 아니냐? 그러면 그걸 정한 걸로 봐야지. 너는 어떻게 여태 부정한 거 정한 거 선악으로 그걸 나눠어서 나는 이거 부정한 거니까 못먹어요 이러고 있냐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요즘 어떤 사람들은 돼지고기도 안먹고 갑각류도 안먹고 그걸 지킬려고 아주 애들을 써요. 그리고 또 그것들을 가르치러 다니는 박사 있잖아요 왜? 그 사람 모이는데는 아주 벌떼처럼 모여요, 그래야 건강하대 또, 그렇게 먹어야. 아니 아무거나 마음 편하게 잘 드세요. 소화 잘하시고 운동 잘하시면 돼요.

 

(고후43-5) 3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가리워졌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나 가리워졌을 것입니다. 4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5 우리가 선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고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일하는 여러분의 종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도 또 신이 있나요? 신은 하느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세상 신은 뭐에요? 세상에 내려오신 오해되어진 , 그건 반드시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느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라 이 말이 사실은 이게 스코토스 포스 람포라는 말인데 이게 어두움이라는 이 단어가 소유격이고요. 포스, 빛이라는 단어가 목적격이거든요. 그러니까 어두움이라는 빛 이런 말이에요. 그걸 비추래요. 그럼 무슨 말이에요. 그 어둠은 빛을 설명하기 위해 있는 거라는 거에요. 근데 그걸 비춰주면 그게 뭐에요? 예수라는 얼굴이라고 되어 있네요. 프로소폰은 나타난 예수라는 뜻이에요. 나타난 예수의 그 영광을 진짜로 보게 만드는 그게 바로 어두움의 그 빛이 빛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이런 말이에요.

그럼 어두움은 뭐고 빛은 뭐에요? 진리를 안 자들에게 있어서. 같은 거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비롯한 이 아랫 세상의 모든 건 그 안의 내용으로 보고 이해하게 되면 선의 도구가 되는 거지만 그 표피적인 것에 묶여 버리면 그것으로 멸망에 이르게 되는 거에요. 그 모든 것 안에는 여러분이 몸으로 겪어 내야 하는 여러분의 시간들도 다 포함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을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그 모든 것, 그것을 그냥 껍데기로 받아 버리면 여러분은 그것에 의해 슬퍼하고 고통하고 애통(哀慟) 스러워 하다가 죽어요. 그것이 여러분을 죽인다니까요. 그런데 그걸 내용으로 알아버리면 그게 빛이네요. 그게 선이라 말입니다.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나쁜 게 어디 있냐는 거에요 우리에게.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되겠지요. 내가 그걸 그렇게 받아 버리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합력되어 선이 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비록 그것이 나를 세상이 나를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리고 나를 향해서 비난의 화살을 날리는 그런 상황일지라도 그 속에서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런 자가 될 수 있는 거에요. 이 상황이 나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나를 도화지로 쓰고 있는 하느님의 행하시는 하느님의 일의 결과라면 그것이 바로 그가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라말이에요. 뭘 대단하게 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은 난 너희들을 그렇게 쓰기로 결정했어, 영화롭게 했다고. 그러니까 세상이 여러분을 향해 손가락질 하고 수군거리고 비난을 하고 그러거든 오히려 기뻐하세요. 진리는 절대 세상이 못본다, 못알아 본다고 그랬으니까. 그런 이들이 있어야 내가 진짜꾸나 라고 확인할 수 있는 거에요. 오히려 감사하세요. 어느 날 하느님이 은혜를 주셔서 귀를 열어 주시니까 듣는 것 뿐이에요. 그러니 거기에 대해 뭐라고 할 필요도 없어요. 당연한 거에요 모르는 것이. 그러니까 그렇다면 환난이나 고통이나 칼이나 그 무엇이 여러분을 그 하느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없는 거죠. 잊지 마십시오. 성도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선물입니다. 어둠도 실수도 실패도 심지어 죄와 악까지도 여러분이 그걸 선물로 받아 버리면, 그 즉시 그건 나에게 부정되는 거에요. 내가 선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그 진리의 능력이 있다면. 그걸 용서라 그래요.

그게 뱀의 머리가 깨어지는 거에요, 뱀으로서의 내 머리가. 하느님이 약속하셨잖아요? 네가 그 여인의 후손의 뒤꿈치를 물어 그 피를 빨아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알면 네 뱀의 머리가 깨어지는 거야. 이게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원시복음의 이야기인거에요. ‘어떻게 해서든 저 뱀의 대가리를 밟아서 부숴야 되는데가 아니라 그게 여러분의 머리라니까요. 그럼 뱀의 머리가 깨어지면 예수그리스도라는 머리가 나에게 붙죠. 그래서 묵시록에 모든 성도의 현실을 목베임을 받은 자라고 하는 거에요. 밟아서 깨버렸거든요 그 진리가. 하느님의 은혜로만 나는 그 생명의 피니까 내가 살 수 있다라는 것을 깨달으면 내 머리가 깨어지는 거에요 뱀인 내 머리. 그리고 곡해되어진 뱀으로서의 그 말씀, 율법으로의 말씀이 깨져 버려요.


오늘이 202111일 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을 지내고 있지요. 오늘 복음에서 아기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지요. 촛점이 예수 에게 있어야 하는데 사제님들의 글에는 온통 성모마리아에 초점이 있네요. 마리아(쓴 물)인데 말입니다. 단물이 되는 그 십자가를  바라보자구요.

 모쪼록 올 한해를 보내면서 진정 우리가 성경을 모태로 하는 신앙인이라면 예수그리스도를 참(진짜) 아는 것이지요그걸 확실히 아는 한해이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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