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도란도란 글방 / 내 이웃의 친구가 되어 주는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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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21-01-02 | 조회수1,104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도란도란 글방, 2021. 1. 2. <공동번역성서> 내 이웃의 친구가 되어 주는것 (에페4,25-32) 25 그러므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26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27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 28 도둑질하던 사람은 이제부터 그런 짓을 그만두고 제 손으로 일하여 떳떳하게 살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29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 30 마지막 날에 여러분을 해방하여 하느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을 보증해 주신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여 드리지 마십시오. 31 모든 독설과 격정과 분노와 고함소리와 욕설 따위는 온갖 악의와 더불어 내어 버리십시오. 32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게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묵은 잎을 떨어내기 위해서는 새순이 돋아나야 하듯이, 우리의 옛 사람과 새 사람을 벗고 입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미 옛 사람을 벗었고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 속에서 가시적인 벗고 입음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신앙생활을 통해서 매일 매일 우리 마음의 영, 심령이 새롭게 되 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옛 사람을 벗었고 새 사람을 입었으며 이미 우리의 심령은 새롭게 되었지만 우리는 이 시간 속에서 우리의 의지를 발동해서 옛 사람을 벗어야 하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하며 심령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화는 100% 하느님이 하시는 것이고, 100% 우리가 하는 것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사도는 이제 25절부터 좀 더 구체적인 그리스도인의 실천 강령의 목록을 제시합니다.
➀그 첫 번째가 “거짓을 버려라”입니다. 우리가 24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 하느님의 백성들은 “진리”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반대말은 “거짓”이죠. 그러니까 진리에 속한 사람들에게, 경계의 목록으로 주시는 첫 번째 것이 “거짓을 버려라“인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죄가 무엇 때문에 기인한 것입니까? 거짓말의 결과입니다. “네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는 하느님처럼 될 거야” 라는 사탄의 거짓말 때문에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사탄의 세력을 “거짓말하는 자“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요한8:44) 44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서 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 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짓“이라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대표적인 속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거짓 속에서 살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느님의 보호하심에서 떨어져 나온 우리 인간들은 저마다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가면을 쓰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남들에게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점점 더 큰 거짓말을 해야 하고 결국에는 거짓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가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진짜 자기가 누구인지 본인은 압니다. 그렇지만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를 스스로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는 자신을 교묘하게 위장합니다. 그 위장은 교만으로도 표출이 되고 때로는 겸손으로도 표출이 됩니다. 때로는 수줍음으로도 표출이 되고 때로는 경건함으로도 표출이 됩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다른 인간들로부터 존경과 인정과 부러움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정의해 놓은 자기 스스로의 힘을 쌓아서 스스로를 보호합니다.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죄에 대한 욕구나 탐욕, 정욕 같은 것들을 다른 종교 행위들과 거짓 관용으로 그럴싸하게 위장을 하며 사는 것이 타락한 인간들입니다. 누가 발을 밟아도 “no problem"이라고 웃으며 지나가지만 그 마음속에는 ”many problem"이라는 분노를 숨기고 있는 것이 타락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교양 있고 매너있는 사람으로 보여야 하기 때문에 죄인들은 거짓 미소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인사하고 참아주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참아주고 웃어줘야지요. 그렇지만 세상은 그렇게 온통 거짓 속에서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어서 이런 예를 든 것입니다. 더 이상 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겸손을 떨고 다른 이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기 위해 종교적 열심을 부리고 하는 가면에서 벗어나서, 이제 진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서 진심으로 친절해 지고, 진심으로 용서를 하고, 진심으로 예의를 갖추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하면 단순히 거짓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거짓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보다 광범위한 죄의 형태입니다. 진리와 반대되는 모든 삶, 그 것을 우리는 거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성철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남기신 유언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수많은 선남선녀를 속인 것으로 나는 산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 있었다.” 산 속에서 속세의 사람들을 별로 만난 적도 없는 그 분이 뭘 그렇게 속였다고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성철 스님은 분명 진리를 알고 있고 진리를 몸으로 살아내고 있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진리가 뭔지를 모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보면서 그렇게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을 본인이 “속였다“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거짓입니다. 그럼 내가 거짓 속에서 사는 사람인지 진리 속에서 사는 사람인지를 어떻게 구별 할 수 있을까요?
(요일2:4-6) 4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는 거짓말장이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자입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은 진실로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6 자기가 하느님 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거짓을 버리는 사람들은 그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노력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르게살기 위해 노력하고 나의 자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내는 사람이 거짓을 버려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짓을 버려야 하는 이유가 25절 말미에 나옵니다. (에페4:25) 25 그러므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우리가 지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몸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듯이 그렇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몸에게 거짓말을 하는 병이 있지요? 아픈데도 안 아프다고 거짓말하는 병이 문둥병입니다. 우리가 우리 지체에게 거짓말을 하고 자신을 과장하고 하는 것은 자기 몸을 해롭게 만드는 일이니까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한 거짓말이 언젠가 커다란 흉기가 되어서 나를 치게 되는 것을 여러분, 많이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지체들에게 거짓과 과장으로 자기를 증명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복음 안에서 참된 것만을 말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진리를 나누세요. 예수 이야기를 하십시오. 쓸데없는 세상일들로 잡담하지 마세요. 항상 그러한 잡담은 자기 자랑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것, 진리를 나누십시오.
②두 번째로 지적하는 것이 “분노”입니다. 26절과 27절을 보겠습니다. (에페4:26-27) 26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27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 “올 기제스떼 카이 메 하마르타네테“ 이 구절을 좀 더 원어에 가깝게 번역을 하면 ”화을 내라, 그러나 그 화로 인해 죄를 짓지는 말라“라는 뜻입니다. 화를 내라?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화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악한 분노와 의로운 분노가 있습니다. 앞에 쓰인 “올기제스떼”는 의로는 분노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내려오셔서 분노하신 적이 있지요? (마르3:5)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그 손은 이전처럼 성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올게”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거룩한 분노“ (루가13:15) 15 주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 위선자들아, 너희 가운데 누가 안식일이라 하여 자기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이지 않느냐? (마태23:33) 33 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 (요한2:15) 15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며 그 상을 둘러 엎으셨다. 하느님도 분노하십니다. (로마1:18) 18 하느님의 진노가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인간의 온갖 불경과 불의를 치시려고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 (묵시6:17) 17 그들의 큰 진노의 날이 닥쳐 왔다. 누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도 진노하십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의 진노는 의로운 분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도 그 의로운 분노를 심어주셨습니다. (고후7:10-11) 10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겪는 상심은 회개할 마음을 일으켜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을 후회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속적인 상심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 11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겪는 바로 그 상심이 여러분에게 이루어 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은 열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게 되었고 의문이 생겼고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고 그리워하는 마음과 헌신하려는 마음이 생겼고 악을 징벌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그 사건에 있어서 조금도 잘못이 없었다는 것을 훌륭하게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어떨 때 분노해야 합니까? 우리는 진리에 반하는 것들을 대할 때 분노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위선을 볼 때 분노해야 합니다. 타락한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보면서 분노할 수 없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예레8:11-12) 11 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건성으로 치료해 주면서 '괜찮다, 괜찮다' 하지만 어디가 괜찮으냐! 12 그렇듯이 역겨운 짓을 하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얼굴에 쇠가죽을 쓴 것들, 창피한 줄이나 알면 괜찮지! 모두들 무더기로 쓰러져 죽으리라. 내가 혼내 주러 오는 날 모두들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죄인들은 자신들 이 죄를 짓고도 그게 죄인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버젓이 죄를 짓고 있는 자신들에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죄와 악 앞에서 의분을 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화를 내십시오.” (시편97:10) 10 악을 미워하는 자를 야훼께서 사랑하시고 당신을 믿는 자의 목숨을 지켜 주시어 악인들의 손에서 건져 주신다. (이게 화를 내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악에 대해서 전혀 저항감이 없는 세상이 만들어 낸 것들이 뭡니까? 살인과 간음과 전쟁과 사기와 폭력 이런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우리조차도 너무나 세상의 악에 대해 관대했습니다. 우리는 분노해야합니다. 그러나 그 분노가 죄로 연결되어서는 안 됩니다. 26절을 다시 보세요.
(에페4:26) 26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화를 내라’ ‘그러나 그 화(憤怒)로 인해 죄를 짓지는 말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의분(義憤) 말고 악한 분노(忿怒)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분노, 거룩한 분노는 악에 대해 의분과 수치를 느끼는 것이지만 ‘악한 분노, 죄가 되는 분노’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혈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알아주지 않고, 나를 무시하고, 나를 공격하는 무리에게 같은 힘으로 대항하는 것을 악한 분노라 합니다. (야고3:17-18) 17 그러나 위에서 내려 오는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다음은 평화롭고 점잖고 고분고분하고 자비와 착한 행실로 가득 차 있으며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8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거두어 들입니다. 우리는 악에 대해서는 분노해야하지만 그 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사랑해야 하는 아주 어려운 삶을 요구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26절을 보면 거기에는 두 가지 화(憤)이 나옵니다. (에페4:26) 26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26 절을 다시보면 첫 번째 “화”는 “올기제스떼”입니다. 두 번째로 나오는 “해가 지도록 화를 품지 말고”의 “화“는 ”파롤기스모 스”입니다. 이 “파롤기스모스”는 “격앙되고 이미 고정되어 버린 복수심“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한 유의 분노는 안 된다는 것 입니다. 사사로운 분노도 물론 안 되지만 자신이 의로운 분노를 내었다 할지라도 그게 그 상대방에 대한 복수심이나 미움이 되어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죄인은 용서를 해주고 사랑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악한 자리에서 용서와 사랑으로 이 자리까지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12:19-21) 19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20 그러니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 셈이 될 것입니다.' 21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 내십시오. (요일2:9-11) 9 자가가 빛 속에서 산다고 말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자입니다. 10 자기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며 그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11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으며 어둠 속에서 살아 가기 때문에 그 눈이 어둠에 가리워져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요일3:10-18) 10 옳은 일을 하지 않거나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식은 분명히 구별됩니다. 11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어 온 계명의 말씀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한다는 것입니다. 12 그리고 우리가 카인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카인은 악마의 자식으로서 자기 동생을 죽인 자입니다. 그가 동생을 죽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동생이 한 일은 옳은 일이었는데 자기가 한 일은 악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13 형제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더라도 이상히 여길 것 없습니다. 14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 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15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다 살인자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살인자는 결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16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7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18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마로나 혀 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우리는 죄, 악에 대해서는 의분을 내야 하지만 그 죄와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자비로운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과 용서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의분이라는 것은 사랑을 근거로 나오는 것입니다. 왜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이 저 죄, 악 때문에 저렇게 망가져야 하는가? 하고 죄와 악에 대해서는 분노하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화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마태5:22-24) 22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24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 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 와 예물을 드려라. 우리가 악을 미워하고 악에 의분을 내며 형제를 계도하고 충고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악에 빠진 형제까지 미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죄인이 그 죄를 버리고 하느님 앞으로 일어서도록 하는데 우리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화를 내십시오. 의로운 분노를 내십시오. 그러나 혈기는 안 됩니다. 복수심을 품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렇게 악하게 대한 분들을 사랑하고 용서해 주세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용서해야 합니다. 하루를 넘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미움과 분노가 지속이 되면 그게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되고 우리는 그 것을 “파롤 기스모스”“악한 분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분노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화(분노)가 치밀 때마다 우리 주님께서 비유로 들어주신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이야기를 떠올리세요. 일만 달란트는 인간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 빚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사람에게 주인이 그 빚을 탕 감해 줍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서 사정하는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그를 감옥에 쳐넣습니 다. 그 주인이 다시 그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을 부릅니다. “내가 너의 빚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는데 너는 고작 일백 데나리온 때문에 저 사람을 감옥에 넣었느냐? 이 악한 종아, 너도 감옥에서 썩어봐라” 우리가 어디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들인지를 늘 생각하세요. 그리고 아직까지 용서하지 못한 분들이 있으면 어서 용서하십시오. 혈기, 악한 분노, 복수심은 안 됩니다. 그러한 자기 지체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은 전부 자기 자신을 테러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분노와 복수심 때문에 일생을 망가뜨린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화(분노)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화를 내되 그게 죄가 되지 않게 하고 해지기 전에 풀어라“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8절을 보면 ③도둑질에 관한 경고가 나옵니다. (에페4:28) 28 도둑질하던 사람은 이제부터 그런 짓을 그만두고 제 손으로 일하여 떳떳하게 살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지금 사도는 교회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도둑질하던 자들은 도둑질하지 말라“ 라고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교회도 도둑질을 한다는 말이지요? 물론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구원받는 순간 거룩한 성자로 뒤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도둑질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둑질이라는 것의 정의가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처럼 사용하는 것을 도둑질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물건을 훔칠 수도 있고, 돈을 훔칠 수도 있고 남의 시간을 훔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생각도 훔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직장 동료들에게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 뭔가 달라”라는 신앙생활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냥 모여서 “신우회”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때우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삶 속에서 나와야 하는데 삶은 여전히 개판이고 “신우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자기는 괜찮은 신앙인인 것처럼 뻔뻔스럽게 산다는 것이죠. 그리고 직장에서의 시간은 자기 것이 아니라 이미 돈 받고 팔아버린 회사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돈 받고 판 회사의 시간을 도둑질해서 신우회 같은 거 하지 말고 그 시간에 열심히 부지런히 회사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일과시간에 하는 것이 아니라 점심시간에 하는 건데요? 점심시간에는 밥을 먹어라. 밥을 열심히 먹고 휴식을 취해서 오후 일과 시간에 열심히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때는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맞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종교행위로 때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삶 속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자기 직장과 직업에 대해서 상당히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직장은 너무 사람을 많이 부려먹는다. 우리 직장은 돈을 너무 적게 준다. 우리 직장 상사는 날 너무 들볶는다. 그럼 집에서 쉬세요. 왜 그런데 나가세요. 그 직장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불만이 많으세요? 그럼 당장 때려치우세요. 그럴 생각 없으시면 그 주어진 환경 속에서 열심히 일을 해주세요.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다른 사람들 다 야근 하는데 “난 레지오 회합 가야 돼.” 이러고 나오지 말란 말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는 여러분도 남들처럼 야근을 하세요.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내 종교 행위를 위해서 남의 시간을 도둑질하는 것이 정말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겠습니까? 세금, 정당하게 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로마서에서 국세를 바칠 자에게는 국세를 바치고 공세를 바칠 자에게는 공세를 바치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로또? 사지 마십시오. 자기가 열심히 부지런히 일해서 번 돈이 아닌 것은 도둑질입니다. 28절에 보세요. “제 손으로 수고하여 일을 하라”고 사도는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확천금 같은 것 바라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도둑놈 심보입니다. 왜 사람들이 도박을 합니까? 수고하지 않고 수확을 거두려는 도둑놈 심보입니다. 절대 그런 거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수고 해야 합니다. 절대 게으름 피우지 마세요. 부모님들은 아이들한테 돈 너무 쉽게 주지 마세요. 이 사회에 도둑놈 심보를 만연하게 키워주시는 것입니다. 수고해서 갖게 하셔야 합니다. 28절에 나오는 “수고하다”“코피아테”는 너무 열심히 일해서 “피곤하여 기력이 쇠약해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까지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열심히 수고하여야 합니다.
(사도20:34-35) 34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나의 이 두 손으로 일해서 장만하였습니다. 35 나는 여러분도 이렇게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고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명심하도록 언제나 본을 보여 왔습니다.' 여러분, 직업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 생계의 수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이 우주를 존속시키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존속되기 위해서는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 각자가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해 내야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속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완성시켜 가십니다. 이 강론대 위에서 강론(설교) 하는 것만이 성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당(교회)에 오셔서 기도하는 것만이 경건한 일이 아닙니다. 제가 열심히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종이가 필요합니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가 힘을 내기 위해서는 저는 먹어야 합니다. 제가 밥을 먹기 위해서는 우리 아내가 쌀로 밥을 해야 하고 설거지를 해야 하고 제 옷을 빨아 주어야 하고 옷을 다림질 해 주어야 비로소 여기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뭐가 성직이고 뭐가 상스러운 일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하시는 바로 그 일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성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장사를 하시는 분들은 최선을 다해서 장사를 하세요. 식당에서 써빙을 하시는 분들은 늘 밝게 웃는 모습으로 손님들을 맞이하시고, 직장인들은 최선을 다해 회사 일을 보십시오. 우리는 수고해야 합니다. 수고하는 그 길에서 하느님은 우리를 만져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28절에 우리가 일을 하는 목적이 나오지요 뭡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도록” 우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벌어서 자기 배를 불리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도울 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벌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돈을 버는 목적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 나의 야망을 위해 돈을 벌었고 직업을 가졌다면 이제 우리는 빈궁한 자들을 돕기 위해, 남을 돕기 위해 피곤하도록 수고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세요. 그리고 부자 되십시오. 그래서 그 돈으로 여러분의 이웃을 도와주세요. 하느님께서 가난하고 못 먹고 있는 내 백성들에게 전달해 달라고 여러분에게 맡기신 것들을 잘 관리하시고 전달해 주십시오. 자기 배만을 위해 쌓고 쌓아두는 하느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후8:9) 9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를 비워서 남을 배불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재물(財物)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또 한 가지 靈적인 도적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신앙생활 속에서 struggle(애쓰다)하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 가는 것입니다. 모두들 그렇게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안수 한번 받고 훌쩍 추월하려는 사람들 있지요? 무슨 기적 같은 것 체험해서 (하루하루를 쌓아 올려가야 할 신앙생활을) 단번에 지름길로 가려는 사람들, 도둑놈 심보입니다. 신앙은 수고하며, 노력하며 하루하루 쌓아 가는 것이지 기적이나 체험하고 안수나 받아서 단번에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둑질하지 마시고 수고하여 힘써 일하십시오.
29절에는 ④말에 대한 권면이 나옵니다. (에페4:29) 29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 사도가 25절에서 제일 먼저 던진 권면이 뭡니까?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입니다. 그리고 지금 29절에서도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고 말에 대한 권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31절에서도 떠드는 것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그리고 5장 3절에서 말에 대한 권면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에페5:3-4) 3 음행이나 온갖 추행이나 탐욕에 찬 말은 입에 담지도 마십시오. 그래야 성도로서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4 추잡한 말과 어리석은 이야기나 점잖지 못한 농담 따위도 하지 마십시오. 성도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도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말입니다. 왜 이렇게 우리의 말에 대한 권면을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까? 말이라는 것은 단순히 내 뱉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마태12:34-37) 34 이 독사의 족속들아! 그렇게 악하면서도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결국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입으로 나오는 법이다. 35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마음에 쌓아 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마음에 쌓아 두었다가 악한 것을 내놓는 것이 아니겠느냐. 36 잘 들어라. 심판 날이 오면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을 낱낱이 해명해야 될 것이다. 37 네가 한 말에 따라서 너는 옳은 사람으로 인정받게도 되고 죄인으로 판결 받게도 될 것이다.' 좋은 말, 선한 말을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게 여러분의 내면을 선한 것으로 채워 가십시오. 아울러 사도는 우리에게 말로 덕을 세우라고 권고합니다. 말로 남에게 상처 주지 말고 말로 남에게 유익함을 끼치라는 것입니다. (이사50:4) 4 주 야훼께서 나에게 말솜씨를 익혀 주시며 고달픈 자를 격려할 줄 알게 다정한 말을 가르쳐 주신다. 아침마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배우는 마음으로 듣게 하신다. 여러분 주변에 궁핍하고 고단한 삶을 사는 분들이 계십니까? 선한 말로 위로해 주십시오. 여러분 주위에 병들어 고통 받고 계신 분들이 계시지요? 그 분들에게 여러분의 격려의 말이 필요합니다. 선한 말로 덕을 세우세요.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 진심으로 그렇게 말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세워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30절을 보면 계속 권면의 내용이 나오다가 갑자기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근심) 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에페4:30) 30 마지막 날에 여러분을 해방하여 하느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을 보증해 주신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여 드리지 마십시오. 헬라어 원문에 더 충실하게 번역을 하면 “성령을, 하느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입니다. 성령이 두 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지금까지 사도가 나열한 그리스도인의 실천 강령들과 또 앞으로 나열 할 내용들 모두가 어떤 한 가지 목적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매일 아침 기상하면 부대원 전체가 연병장을 열 바퀴씩 뛰었습니다. 왜 뛰게 하는 것입니까? 강인한 체력을 키워서 훌륭한 전투병으로 키우기 위함입니다. 연병장 구보는 그 자체가 일이요 목적이 아니라 체력 단련이라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여러분이 거짓말을 안 하고 화를 안 내고 선한 말을 하고 하는 그 모든 것이 어떤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목적지가 "하느님과의 화목“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하느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이 하느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행위를 하는 것, 거짓말을 안 하는 것, 화를 안내는 것, 도둑질을 안 하는 것, 그것이 불변의 선은 아닙니다. 분명 성경에는 선한 거짓말도 있고 선한 살인도 있습니다. 선한 탈옥이 있는가 하면 선한 불륜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善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정의되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善은 하느님 한 분밖에 안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하는 모든 선한 것들, 새사람을 입는 것들과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악한 것들, 옛 사람을 벗는 일은 전부 우리 안에 와 계신 성령하느님과의 화목의 차원에서 실행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디처럼 슈바이처처럼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느님께서 요구하시기에 하느님의 선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목적과 이유와 근거가 다른 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거짓말하라” 하면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살인하라” 하면 살인을 하는 것입니다. “갓난아이까지 다 죽여라” 하면 다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선입니다. 바로 그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믿어지십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주인)이라 시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主라 시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는 성령 하느님이 분명히 계신 것입니다. 그 성령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게 믿겨지십니까? 정말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 와 계신 것이 믿겨 지세요?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처럼 단순히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과 화목 된 자로서 이제 더 이상 나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끊으신 그 하느님을 근심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우리는 새사람을 입고 옛 사람을 벗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가족들이 어떤 일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여러분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마치 여러분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해 버린다면 그보다 더 모욕적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여러분의 구역 모임이나 반 모임에서 어떤 일을 결정하기 위해 구역장님이나 반장이 죽 돌아가면서 한사람씩 의견을 묻다가 자기만 건너뛰고 일을 결정해 버렸다면 그 얼마나 모욕적인 일이겠습니까? 성령하느님은 분명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의 삶을 살면서 전혀 성령 하느님을 개의치 않고 산다면 이 어찌 불경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성령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데도 아무 때나 화를 내고, 아무 때나 거짓말을 하고, 아무 때나 더러운 말을 하고, 아무 때나 도적(盜賊)질을 한다면 그게 바로 그 분을 근심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말 안 하기로 하고, 화를 안 내기로 하고, 도적질을 안 하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31절과 32절에서 25절부터 29절까지의 권면을 보다 더 개인적이고 친밀하게 풀어서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에페4:31-32) 31 모든 독설과 격정과 분노와 고함소리와 욕설 따위는 온갖 악의와 더불어 내어 버리십시오. 32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게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여러분, 지금까지 사도가 우리에게 권고한 내용들이 전부 내 이웃과 관계된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거짓말을 하지 마라, 선한 말을 하라, 더러운 말을 피하라, 화를 내지 말라, 용서해라, 불쌍히 여겨라, 악독을 버려라. 전부 내 이웃과 관계된 권면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로하고 이웃의 궁핍함을 나누고,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고, 이웃을 따뜻하게 포용해주고 이웃을 사랑해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교회에서 올바른 가르침 아래 열심히 이웃과의 관계를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 보겠다고 했다가 실패한 것이 수도원 운동 아닙니까? 혼자 산에 올라가서 道 닦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훈련하고 성숙되어지는 것이 훨씬 힘들고 어려운 신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이웃과의 교제, 교회 안의 형제자매와의 교제를 깨는 모든 일은 그게 아무리 선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성 프란치스코가 제자들과 함께 40일 단식을 하기로 하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 어떤 사람이 “우리 이왕 단식할 거면 방 가운데에다가 죽을 끓여 놓고 단식을 합시다.“ 하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래서 방 가운데에다가 맛있는 죽을 보글보글 끓이면서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 중 한사람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죽 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고 합니다. 그 때 제자들이 모두 벌떼처럼 그 제자에게 달려들어서 그를 인내심도 없는 배신자로 몰아세웠다고 합니다. 그 때 성 프란치스코가 죽 사발을 들고 그 죽을 전부 마셔 버렸답니다. 그렇게 형제를 몰아세우는 것으로 자기의 경건함을 증명하려고 단식을 한다면 그건 아무 소용없는 단식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통일, 하나 됨, 한 지체, 한 몸“입니다. 여러분, 제발 부탁입니다. 여러분끼리 제발 다투지 마세요. 여러분끼리 제발 미워하지 마세요. 여러분끼리 제발 험담하지 마세요. 에페소서 내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하나 됨을 지키라는 것 아닙니까? “네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절대 형제자매 사이의 교제는 깨지 말라“ 그게 훈련 아닙니까? 나를 무시하고 나를 우습게 보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을 최선을 다해 섬겨 줌으로 해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 땅에 구현해 내는 것이 바로 교회 아닙니까? 왜 안 될 거라고 지레 겁을 먹으세요.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이미 주어져 있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다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시도도 안 해보고 미리 포기해 버립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유일하게 하고 가야 할 일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형제자매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절대 하나 됨을 깨지 마십시오,
새해에 생각해볼 묵상자료입니다.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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