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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마르1,29-3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13 조회수932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1월 13일 수요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마르1,29-39)

 

    

 

1독서<자비로우신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히브2,14-18)

14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화답송 시편 105(104),1-2.3-4.6-7.8-9(◎ 8ㄴ 참조)

◎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

○ 주님을 찬송하여라그 이름 높이 불러라그분 업적 민족들에게 알려라그분께 노래하여라찬미 노래 불러라그 모든 기적 이야기하여라

○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 그분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그분이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그분은 주 우리 하느님그분의 판결이 온 세상에 미치네

○ 명령하신 말씀 천대에 이르도록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시니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이며이사악에게 내리신 맹세라네

 

복음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마르1,29-39)

그 무렵 예수님께서 29 회당에서 나오시어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제1독서 (히브2,14-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18)

 

본절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심으로써 인간이 당하는 모든 유혹을 경험하였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매우 유명한 구절이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이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셨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히브4,15)

 

히브리서 2장 18절의 본문 '아우토스 페이라스테이스'(autos peirastheis) 좀 더 정확히 번역하면, '그분 자신이 유혹을 받아'가 된다.

'아우토스'(autos; himself)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재귀적 용법으로 쓰였다. 또한 '유혹을 받아'로 번역된 '페이라스테이스'(peirastheis; being tempted) '유혹하다', '시험하다' 등을 뜻하는 '페이라조'(peirazo)의 과거분사 수동태이다.

 

예수님께서는 일생동안 사탄의 유혹의 대상이었고,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서 2장 18절, 4장 15절, 그리고 루카복음 4장 13절, 22장 28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당신의 제자들이 유혹을 당할 때에 친히 도와주실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가 인성적 차원에서 하나의 유혹이었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동일하다. 단지 다른 것은 그러한 유혹 가운데서도 그분께서는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그분께서는 여러가지 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는 짓지 않으셨다. 따라서 본절에서 유혹은 유혹(was tempted)이었지, 시험(test)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인간들과 동일하게 하느님의 뜻에 불순종하라는 유혹, 사탄에게 굴복하라는 유혹, 육체의 고통을 피하라는 유혹 등이 끈질기게 따랐지만, 이것들과 싸워 이기셨으므로 그러한 유혹에 직면한 성도들을 도우실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여 기도하셨는데, 공관 복음서 저자들은 한결같이 그때에 그분이 '호 페이라존'(ho peirazon),  즉 '유혹하는 자'인 사탄과 만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마태4,1; 마르1,13; 루카4,2).

사탄은 '계속해서 유혹하는 자' 이다. 사탄은 유혹의 손길을 그리스도에게까지 뻗치고 있다.

 

광야에서 그는 세 가지로 그분을 유혹하고자 시도했는데,

첫번째 유혹은 예수님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 이외의 목적으로 능력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돌을 빵이 되게 하는 극적인 기적을 행하라는 것만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유혹은 주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위해 양식을 제공하시리라는 구약의 약속의 배경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사탄은 그분의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했으며,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이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불신앙과 욕심, 불만족과 의심 등에 사로잡혀서 하느님께 범죄했던 그 전철을 그분도 따르기를 원하였음이 분명하다.

 

두번째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며 그때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라는 것이다. 이 유혹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유랑할 때에 하느님께서 보호를 약속하신 사실로 보인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앞에 축복과 저주를 제시하셨는데(신명기11,26; 27,10~30,20), 축복에는 모든 종류의 위험으로부터의 보호가 포함되어 있었다.

 

세번째 유혹은 하느님 대전에 사탄 자신을 따르면 세상을 지배하는 권세를 줄 것이라는 유혹이었다. 이런 유혹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차원에서 매우 빈번하게 당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혹자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의 예수님께서 개인적으로 당한 유혹들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이스라엘이 민족 공동체의 생활에서 당한 유혹들을 되풀이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한 사탄의 유혹은 이처럼 그분이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 시작되어 겟세마니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겟세마니 기도에서 할 수만 있다면 그 고난의 잔이 자신에게서 비켜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이다(히브5,7; 마태26,39).

 

한편 유혹과는 성격이 다소 다르지만, 그분께서 최고의 시험을 받으신 순간은 십자가상에서 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마르15,34;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십자가 위에서의 외침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시험과 고통의 크기를 잘 표현해 주며,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의 궁극적 결과에 직면하신 것도 바로 이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받아 고난을 많이 겪으셨다. 인간중에 예수님보다 더 큰 유혹과 시험을 당한 자가 어디 있는가?

이렇듯이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유혹과 시험을 이겨내셨기 때문에 성도들이 어떤 유혹과 시험을 당하더라고 능히 도와주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시험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유혹은 마귀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두 경우를 모두 인성으로 극복하셨다.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로 번역된 '뒤나타이 토이스 페이라크메노이스 보에테사이'(dynatai tois peirazomenois boethesai) '그는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우러 도실 수 있다'는 뜻이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그것을 모두 이기신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유혹에 직면한 당신 백성들을 언제든지 도우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로 번역된 '보에테사이'(boethesai)는 '도우러 오다', '돕다'를 뜻하는 '보에테오'(boetheo)의 부정사이다.

'보에테오'는 본래 위험에 빠진 자의 울음 소리를 듣고 도우러 급히 달려가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마귀들린 딸을 둔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달려가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했을 때 사용되었으며(마태15,25;'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아시아로 선교 여행을 계속하고자 미시아를 지나 트로아스로 내려간 바오로에게, 환시 중 나타난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했을 때도 사용되었다(사도16,9).

 

이러한 의미과 용례를 가지는 이 단어를 통해서, 우리는 심각한 유혹에 직면하여 도움을 청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지체하지 않으시고 달려오셔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유혹과 시련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야고보는 성도들이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라고 말했으며(야고1,2). 베드로는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1베드4,12) 라고 말했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유혹과 시련 가운데서도 우리가 낙담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동일한 유혹을 당하신 바 있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히 도와주신다는 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유혹과 시련을 당할 때에 낙심하여, 심지어 하느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그러지 말고, 솔직히 잘 극복하기 힘을 때에는,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은 유혹을 겪으신 예수 그리스도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라고 겸손하게 도움을 구할 것이다.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복음(마르1,29~39)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5)

 

'새벽 아직 캄캄할 때'에 해당하는 '프로이 엔뉘카 리안'(proi ennycha lian; very early in the morning)은 마르코 복음에 나타나는 시간에 대한 전형적인 이중 표현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르코 복음 1장 21절에서 38절까지에서 '낮'(21~31절), '해질녘'(32~34절), '새벽녘'(35~38절)에 이르는 하루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담고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러한 예수님의 하루 일과 시간표를 통해서 예수님의 활동이 잠시도 쉴 틈도 없이 매우 바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새벽'으로 번역된 '프로이'(proi; in the morning)는 유대인의 시간 기준으로 계산하면, 네번째 밤인 새벽 3시부터 새벽 6시 사이의 시간을 말한다.

또한 '아직 캄캄할 때' 혹은 '미명(未明)에'로 번역될 수 있는 '엔뉘카'(ennycha; before day)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시간을 말한다.

이렇게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중적 표현을 사용해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편히 쉬는 시간에 깨어서 제일 먼저 기도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 이곳을 포함해서 세 번 등장한다.

시간에 있어서 마르코 복음 1장 35절은 밤이 거의 끝나가는 새벽 무렵이고, 마르코 복음 6장 46절에서는 해가 진 이후인 저녁이었고, 마르코 복음  10장 32~42절에서는 한밤중이었다.

 

또한 모두 혼자 기도하셨거나, 제자들을 데리고 있었어도 따로 떨어져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그리고 공생활 활동 초기의 갈릴래아 선교활동 중간시기, 또는 활동 말기의 수난 이전 등 큰 사건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기도한 것으로 묘사되며, 큰 일을 앞두고 있을 때일수록 더욱 성부 하느님 대전에 열심으로 기도하셨음을 보여준다.

 

또한 위의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의 기도는 바리사이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건함이나 신심있음을 과시하기 위해서 (루카18,11.12)나 교훈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성부 하느님과의 은밀한 친교를 통해 자신의 활동의 힘을 얻기 위해서 하는 기도였다(마태6,6).

 

그리고 '기도하셨다'에 해당하는 '프로세위케토'(proseycheto; prayed) 원형 '프로슈코마이'(proseuchomai)의 미완료 과거형이다. 

희랍어에서 미완료 과거형은 과거 사실의 반복과 계속을 나타내므로, 예수님의 기도가 장시간 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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