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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마르 6,1-13 / 박기석 신부의 복음의 시작 마르코가 전한 예수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21 조회수1,147 추천수0 반대(0) 신고


제22회 마르 6,1-13



박기석 신부의 복음의 시작 마르코가 전한 예수


우리는 4장 자연에 대한 다스림에 이어서 5장에서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과 대면하시어 이것을 이겨내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이제 고향 나자렛으로 향하시는 장면, 6장을 여러분과 함께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가시지요. 조그마한 고향 동네에서 동네 사람들의 불신에 부딪친다는 이야기.

 

당신의 감추어진 신비의 일면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4장과 5장을 넘어서서 우리가 그 전에 공부했던 3장이 베엘제불 논쟁과 예수님의 참가족의 의미가 있었죠. 바로 3,20-25절, 그 부분과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4장, 5장의 이야기와 함께 더불어서 3장까지도 소급한다면 오늘 6장이 시작하는 고향 방문기, 고향 사람들의 불신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6,4절에 이미 결론이 나와 있어요. 예수님이 스스로 말씀하시죠.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다시 말해서 마르코복음의 문맥에 따라 이 고향 방문기를 정의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굉장히 맹활약을 하셨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보다는 불신당하셨다는 겁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고, 심지어 가족들조차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을 했었고 또 제자들조차 4장 풍랑을 잠재우신 기적에서 도저히 이분을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제자들조차도 이해하지 못하였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마르 6,1)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을 떠나서 이제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고향 방문에 혼자 가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가시는데, 가족들을 사적으로 만나시려고 고향을 찾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은 1,14-15절에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셨죠.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 복음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서 고향 나자렛을 가신 겁니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마르 6,2)

 

나자렛 사람들은 지금 그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온갖 질병의 치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구마 행위를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어떤 과거의 모습에만 집착을 했던 그들, 그들이 오랫동안 지켜보고 간직해 온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 어린 시절과 그 성장 과정만을 떠올리고 있는 거죠.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던 이들의 모습은 그 말씀과 비교하면 굉장히 다르죠.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자신들이 알고 있던 바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의 직업이에요. 바로 목수라는 거죠. 목수라는 것을 제일 먼저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직업에 해당되는 성경의 '목수'는 희랍어로는 테크톤이라는 표현인데,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것을 단순하게 목수로 번역을 하고 있지만, 이 테크톤은 우리 표현으로 하면 '장인' 그러니까 전반적은 건축 기술을 두루 갖춘 기술자로 전문적인 장인급에 해당되는 그런 표현입니다. 하지만 이거는 헬라 세계에서 그렇다는 거죠. 그리스 세계에서.

 

예수님 시대 당시의 유다 사람들에게 목수란 그저 흔한 일꾼이었습니다. 단순 노동자로 평범한 삶을 사셨다는 거죠. 가난하고 순종적인 그런 보통의 노동자셨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기 전까지 이렇게 고향 나자렛에서 목수의 일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고향 사람들에게는 그들 기억 속에 예수님이 목수로서 자리를 잡고 있는데,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지금 더 명확한 것이 있습니다.

 

과거의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의 예수님이 더 중요한 거죠. 지금의 예수님의 모습 명확하게 무엇이죠? 바로 탁월한 하느님 말씀의 해설자요, 하느님 힘을 드러내시는 분,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잖아요. 악령이 복종할 정도로 권의 있고, 바람과 호수, 자연이 복족할 정도로 권위 있는 분이라는 겁니다. 병든 자를 치유해 주시는 분, 심지어 죽음의 세력까지. 지난 번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다시 소생시키셨잖아요. 그분의 지금 모습이 중요한 것인데 자꾸 과거에만 얽매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두 번째로 지적하고 있는 게 바로 그분의 가족입니다. 나자렛이라는 마을은 굉장히 작은 마을이에요. 몇 백명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런 정도면 그 마을의 회당에서, 회당은 우리네 마을 회관과 같은 역할을 하지요. 종교적인 예식도 하지만 마을의 어떤 행정적인 일도 같이 하는 곳입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으니까 누구네 집에 젓가락이 몇 개, 숟가락이 몇 개, 누구는 누구의 딸이고, 어떻게 혼인을 치뤘고, 이런 거 다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것 만큼은 내가 분명히 알어. 그 사람 가족 내가 다 아는데.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여기서 형제 자매는 친동기를 뜻하기도 하고, 그냥 친척을 뜻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근동 지역도 마찬가지이지만 성경에서 형제라는 말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기간일 수도 있고, 가까은 친척 간의 사총 형제끼리도 동기간이라고 할 수 있죠. 물론 야고보와 요세는 마리아의 아들로서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지금 6,3절 외에 한 번 더 언급이 됩니다. 마르 15,40-41절.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그분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마르 15,40-41)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정확하게 얘기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가톨릭 유명한 성경 교부인 희랍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신 예로니모 성인은 요셉 역시 평생 동정이었음을 강조하면서 여기서 얘기하는 예수님의 형제들은 사촌 형제들로 이해해야 된다고, 즉 히브리어에서 형제라는 말의 의미는 사촌도 포함한다는 걸 강조하세요.

 

사실 마르코는 그분의 사촌들, 친척들의 관계 정도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어찌됐던 간에 마르코가 여기서 중요시하게 강조하고 싶은 거는, 마르코의 정말 관심사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의 형제들이 친형제냐, 사촌형제냐? 즉 성모님의 동정성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다, 무시했다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 말을 쓴 것이지, 가족 관계를 호구조사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 거기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겁니다.

 

* 예수님의 가족에 대한 언급 : - 예수님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

- 성모님의 동정성을 밝히려 한 것이 아님.

 

그것은 이제 마르코가 최초의 복음서, 기원후 70년에 쓰여졌고, 첫 복음서의 관심은 예수님의 형제, 가족들 안에 있지는 않았다는 거죠. 마르코가 거기에 관심이 있었다면 마태오나 루카처럼 예수님 탄생 이야기가 있어야 되는데, 우리 살펴 보았지만 에수님 탄생 이야기가 마르코에는 없었습니다. 최초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가족에 관심이 없어요.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의 걸림돌이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물의를 일으킨다고. 그래서 자신들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지금 자신들 앞에 충만한 지혜와 신적 행위를 선보이며 당당하게 서 있는 저 예수, 저 청년 예수는 우리가 아는 그런 청년 예수였는데,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인데. 그런데 우리가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그것을 일치시킬 수 없다는 거죠.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이 말은 사실 예수님 고유의 말씀이 아니라 당시 지중해권에서 널리 유행하던 속담이에요. 이를테면 "예언자는 고향에서 알아보지 못하고, 의사는 친척들이 믿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또 "피리 연주자는 고향에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주는) 친구가 없다."는 격언이 있었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냥 말씀하신 것, 예수님이 같은 말씀인데 다른 장면에서도 이런 말씀을 하세요. 요한 4,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다." 예수님이 카나에서 두 번째 기적을 행하실 때 왕실 관리 아들을 치유해 주실 때 이런 표현을 하십니다. 카나라는 곳이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첫 번째 기적을 행하셨던 곳이고, 같은 곳에서 두 번째 기적이 바로 왕실 관리 아들을 치유해 주시는 건데, 여기에서 같은 표현이 한 번 더 나옵니다.

 

여하간 예수님이 그냥 일반적인 평범한 나름의 의견, 전망을 드러내신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이런 당대의 속담을 당신의 특별한 상황, 놓여진 처지에 적용시킨 거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표현은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예언자로 언급하시거나 그렇게 묘사하시는 첫 번째 장면이기도 하다는 거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언자는 종종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특히 구약 성경에 보면, 예레미야 예언자가 그랬거든요.

 

예수님은 당신이 나자렛에서 다시 오랫만에 조우한 동네 사람들에게 받은 그 거부에 대한 서글픔, 안타까움 차원에서 이 말씀을 사용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이 속담의 사용이 당신이 거부당한 것에 대한 정당화를 위해서 말씀하신 것은 결코 아니라는 거예요.

 

사실 마르코복음의 첫 독자들, 마르코 공동체의 경우 기원후 70년경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있었던 신자들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배척을 받았던 경우들이 있었다는 거죠. 독자들의 상황도 반영해 주는 것이 아니냐? 즉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족들이, 친지들이 집안에서조차 그들을 따롤림 했을 경우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반영해 주었고, 그런 의미로서 예수님도 가족들에게 반대를 받은 적이 있다. 즉 초기 교회 신자들에게는 큰 격려와 위로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마르 6,5) 나자렛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그중 일부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은 분으로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결과 예수님이 그들에게는 몇몇이지만 치유해 주셨다. 비록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믿음이 이렇게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손을 얹어 치유해 주시죠.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6)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을 깨닫는 것을 거부한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시고 매우 놀라셨다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당신 고향을 방문하시면서 지니셨던 기대감하고는 너무나 다른 정반대의 모습이에요.

 

예수님은 역시 그들 못지 않게, 동네 사람들도 예수님께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뿐만이 아니라, 예수님도 놀라셨다. 실망과 놀라움에 안타까워 하셨다는 거죠. 이런 부분에서 사실 마르코가 예수님의 인성을 굉장히 잘 드러내 줍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 온전한 인성을 굉장히 잘 드러내 준다는 거죠.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모습을 마르코는 다양하게 전해주면서 생동감 있게 신성으로서의 예수님만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6,1-6절 예수님이 좌절을 맛보셨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것이 이제 6,7-13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마르 6,7) 파견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당신의 권능, 그 힘에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한다는 것. 또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그래서 친히 이끌어 주신다는 하느님의 섭리에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합니다.

 

반대로 내가 잘나서 자기 능력이나 어떤 인간적인 다른 것에 의지하는. 그러니까 권력이나 물질에 의지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장면,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파견되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는 여정에 대해서 필요한 지침을 주십니다. 마르 6,8-9. 이걸 학문적인 용어로 '여장 규범'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일반적으로 또 습관적으로 치러지던 당대 여장 규범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 여장 규범: 나그네들의몸차림, 여행할 때의 차림

 

먹을 빵도 심지어 이 빵을 담을 보따리도 휴대하지 말아라. 빈 보따리 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바로 여행 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지원받는 것, 이것조차도 안 된다는 거예요. 굉장히 철저하죠. 선의의 뜻을 가진 제3자가 주는 음식조차도 보따리에 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당연히 돈도 가져갈 수 없는 거죠. 지금 예수님에 의해서 파견된 사람들은 사명을 부여받은 사도들입니다.

 

먹을 빵도 심지어 이 빵을 담을 보따리도 휴대하지 말아라. 빈 보따리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바로 여행 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지원받는 것, 이것조차도 안 된다는 거예요. 굉장히 철저하죠. 선의의 뜻을 가진 제3자가 주는 음식조차도 보따리에 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당연히 돈도 가져갈 수 없는 거죠. 지금 예수님에 의해서 파견된 사람들은 사명을 부여받은 사도들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가벼이 여기고 그래서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안일하게 임한다면 결코 그 사도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 제자 되는 것도 어렵지만 사도 되는 것은 더 어렵다는 것. 주어진 막중한 임무 수행과 정작 본인들에 대한 느슨한 변화는 사도로서 주어진 임무를 올바로 수행할 수 없다는 겁니다. 물질적 욕심, 권력에 대한 추구,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명예욕, 그리고 자만이란 예수님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데에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얘기예요.

 

그런 가운데에서 예수님이 딱 두 가지 만은 허용을 하세요. 지팡이는 갖고 다녀도 된다. 이스라엘 토지, 땅은 지형이 산악지역과 사막 지대로 이뤄졌기 때문에 길이 고르지 못해서 치안이 불안했습니다. 루카복음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마리아를 가다 강도를 만나잖아요. 그래서 스스로 몸을 지켜야 돼요. 맹수도 많았습니다.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그래서 지팡이가 필요했던 거죠. 자기 보호를 위해서 필요한 거예요. 그리고 땅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신발이 신발이 필요했던 겁니다. 샌들.

 

여기에 옷을 두 벌 껴 입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데요. 속옷을 두 벌 껴입지 말라는 겁니다. 속옷을 두 벌 껴입는다는 것은 당시에 부자를 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자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죠. 이렇게 예수님의 모습, 말씀은 철저한 모습은 자기 엄격한 수행이죠. 과격한 그런 모습이 엿보이는 그런 명령인데, 필수불가결한 것 외에 모든 것을 떨쳐 버리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 까닭에 오직 복음 선포에만 충실해라. 단 둘씩 짝지어 파견했고, 안전을 위해서 여성 제자들은 파견하고 있지 않아요.

 

* 예수님의 명령⇒ 가벼운 몸가짐,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직 복음 선포 사명에만 헌신활 것.

 

빵이나 전대나 여벌의 옷을 준비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그만큼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시급한 과제라는 것을 볼 수가 있겠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하세요. 여행에서 간소한 차림은 필수적인데 두 벌의 외투를 껴입는 것은 부자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만,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두 마음, 하느님을 따른는데 두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사도직은 화려한 일상을 떠나 하느님께 온전히 충실하는 그런 청빈함을 수행하는 은총 속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부분을 우리가 다시 한 번 볼 수 있고요. 은총은 은총을 충만히 받을 준비가 된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장 규범은 세상으로 파견되어지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맞이할 사람 또 사회 그밖의 모든 것을 신중하게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즉, 하느님의 섭리에 철저히 의지하면서 거기에 믿음을 갖고 기도하라는 것인데요. 사실 현실적으로 본다면 이런 복음 선포 수행 과정에 여러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공해 주는 음식과 숙소를 잘 구별하라는 얘기에요. 사실 이스라엘은 환대 예절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잘 대접해서 이사악을 얻잖아요.

 

사막 지역에서 장사를 하는 대상들, 소위 말하면 순례자들 또는 대상들을 위한 숙소나 휴식할 수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지 않았겠죠. 그러다 보니 낯선 사람들, 여행자들을 대접하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었어요. 그런 오랜 전통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당신 공생활 여정 중에서 다른 이들의 환대에 물론 의지하셨습니다. 단 그 환대를 잘 구별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이 '전도 규범'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죠.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마르 6,10) 구약 성경에 요나 예언자가 니네베 마을에 들어가서 회개하라고 외치지 않습니까? 요나 3,4. 그런데 그 니네베 사람들이 싫어서 마을 전체를, 도시 전체를 도는데 한 2-3일 걸릴 수 있는 곳을 단 하루만에 돌죠. 짧게 짧게 외치고 도망치는 겁니다. 성의 없이 하는 거죠.


바로 예수님은 단 며칠이라도 같은 곳에 머물면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라는 거예요. 이것이 전도 규범이예요. 그리고 제자들이 혹시나 학자들이 이것을 더 우려하셨던 것이 아니냐는 주석을 합니다. 제자들이 아, 오늘은 이 동네에는 누구누구가 잘 산다는데 그 집에 머물까? 아, 김 회장 집이 더 좋아. 그 김 회장 부인이 음식을 더 잘해. 이렇게 고를까 봐. 그래서 더 나은 환대, 숙박시설 등 더 나은 데를 찾기 위해서 고르는 그런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당신의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이 권위가 사람들의 따스한 환대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또 한 번 말해 주는 거죠. 왜냐하면 이미 제자들이 예수님이 배척받는 것을 앞서 봤어요. 예수님이 고향에서조차 배척을 받으셨잖아요. 이 배척은 예수님만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하는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전하는 말이 모두 좋은 말로만 들려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배척의 체험을 우리도 받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또한 어느 곳으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는다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르 6,11) 먼지를 털라는 건 그야말로 절교를 의미하는 거예요. 이와 비슷한 행위가 손을 씻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옷의 먼지를 터는 행위라는 거죠. 털어버린 먼지는 제자들이 그곳을 다녀갔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배척했다는 표시로 남아 결국 종말 심판 때 사도들을 배척한 이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얘기합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라고 선언하셨고, 그 완성을 위해서 제자들을 지금 파견하시는 것인데, 그 말씀은 제자들을 무시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했다는 거예요. 그들에게 나중에 어떤 불리한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냐? 마태 25장 최후의 심판 설교 (마태 25,45-46)에서 그들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라는 말씀을 최후 심판 때 듣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죠. 바로 이런 식으로 불리한 증언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마르 6,12) 세례자 요한도 회개하라고 얘기했었고, 예수님께서도 마르 1,15절에서 회개의 말씀을 해 주셨죠. 제자들이 하는 일도, 파견되어서 하는 일도 결국 회개입니다. 단 제자들의 회개는 어떤 면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것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즉,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라고 하면서 주님의 길을 준비했던 거죠.

 

마찬가지로 제자들의 지금 회개 선포는 오실 예수님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초기 공동체의 모습, 마르코 교회 공동체에서 다시 오실,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하는 길로써 회개를 강조하는 것의 의미를 둔다고 하겠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해서 주시는 외침은 그분의 사명과 권위를 통해서 선포되는 것이죠. 그러기에 더욱 성취도가 세례자 요한의 것보다 제자들의 회개의 선포가 더 높은 것입니다. 그만큼 그 이야기를 듣는 우리들은 '곧바로' 실행해야 된다는 거. 이런 시급성을 강조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3) 예수님의 권위와 힘이 제자들을 통해서 본 목적대로 행동되어 짐을, 이루어짐을 13절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고, 제자들은 그것을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이 구마행위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에요. 단 그들도 이제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회복시켜 주셨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또 하나의 체험이 되겠지요.

 

단 이런 체험과 마찬가지로 병자의 치유도 지금 언급이 되고 있죠. 그런데 병자의 치유의 경우에는 제자들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 되겠죠. 이것은 첫 번째 체험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차원에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 그렇게 활동하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는. 그래서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이렇게 이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 병자의 치유 : -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 활동하신 더 높은 차원의 체험

- 구체적인 방법을 통해 명백하게 드러나는 큰 체험

 

그런데 여기서 차이가 있어요. 예수님은 병자를 치유하실 때 도구를 쓰지 않았습니다. 손을 얹어 주시거나, 내미시거나 또는 일어나라 하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제자들은 기름을 사용한다는 거죠. 도구를 사용한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병자를 치유하는 능력을 받았지만 도구(기름)를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도구의 사용이 차이점이에요.

 

사실 복음서에서 신적인 치유를 위해서 어떤 기름을 언급하는 것은 오직 여기서만 언급이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한 번도 기름을 사용하신 적이 없어요. 병자에게 기름으로 치유하는 것은 루카복음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이 유다인이 강도를 만나서 구타를 당하고 쓰러져 있을 때, 기름으로 치유하 준다는 거는 있지만, 예수님이 기름을 썼다는 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의 병자 치유에는 예수님처럼 병자를 치유하지만 기름을 쓴다는 거죠.

 

사실 올리브 기름은 구약 성경에서 임금이나 대사제를 축성하기 위해서 쓰는 도구였습니다. 물론 신약 시대에 와서 이렇게 올리브 기름을 통해서 병자의 치유로도 사용이 되고 있는데요. 아마도 열두 제자들이 병자를 치유하면서 기름을 발랐다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면과 함께 의학적인 면도 함께 고려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것은 초기 교회에서 그대로 이어져요. 치료 습관으로 이어지면서 또한 야고보서를 보면, 병자성사의 근원이 되는, 초기 교회의 관습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야고 5,13-15 참조)

 

오늘날 신부님들이 병자성사를 주러 가면, 병자성사를 이마와 양 손바닥에 긋지요. 이것의 기원이 여기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병자 치유는 예수님과 달리 기름을 썼다는 거. 오늘 6,1-13절까지 살펴 보면서 고향 나자렛에서 예수님이 무시당하는 것과 함께 이에 대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 더욱 강력한 복음 선포 사명을 수행해야겠다는 의미로 제자들을 파견하는 모습까지 보았습니다. 이어지는 6장의 내용들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정리

주제

- 나자렛 사람들의 예수님 당신에 대한 불신 체험과 구원의 보편성을 위한 열두 제자의 파견

 

특징

-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당신 자신을 예언자로 언급하고 묘사함

- 예수님에 대한 모습을 다양하게 (당신 권능에 대한 불신을 보고 실망과 놀라움을 경험하심) 그려냄

- 유다인을 넘어 이방인으로 구원의 보편성을 향하고자 열두 제자들 파견하기 시작한 에수님 모습에 집중함

- 제자들의 기름 도유는 병자성사의 근원이 됨

 

예수님의 가르침

- 나자렛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불신으로 인한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을 깨닫게 함

- 예수님에 의해서 파견된 자들은 그들에게 부여하신 당신의 권능과 그 힘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느님의 섭리에 참으로 의지해야 함

- 하느님께서 곧 하실 일,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완성을 이루는데 있어 우리는 회개하여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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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박기석신부, 복음의시작, 마르코가 전한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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