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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수확할 일꾼이 적다 (루카10,1-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26 조회수892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1월 26일 화요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수확할 일꾼이 적다 (루카10,1-9)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1독서<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2티모1,1-8)

하느님의 뜻에 따라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그대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그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그렇게 된다면 내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그 믿음이이제는 그대에게도 깃들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또는>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티토1,1-5)

나 바오로는 하느님의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입니다내가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으로,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합니다이 영원한 생명은 거짓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창조 이전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제때에 복음 선포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셨습니다나는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이 선포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러한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까닭은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화답송 시편 96(95),1-2.2-3.7-8.10(◎ 참조)

◎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적을 전하여라.

○ 주님께 노래하여라새로운 노래주님께 노래하여라온 세상아주님께 노래하여라그 이름 찬미하여라

○ 나날이 선포하여라그분의 구원을전하여라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

○ 주님께 드려라뭇 민족의 가문들아주님께 드려라영광과 권능을주님께 드려라그 이름의 영광을

○ 겨레들에게 말하여라. “주님은 임금이시다누리는 정녕 굳게 세워져 흔들리지 않고그분은 민족들을 올바르게 심판하신다.” 

 

복음<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10,1-9)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제1독서(2티모1,1~8)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6~7)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의 은사를 다시 불타오르게 하기 위하여, 과거 자신이 안수했을 때 하느님께서 티모테오에게 주셨던 은사를 상기시키고 있다.

이 구절은 티모테오 1서 4장 14절 '그대가 지닌 은사, 곧 원로단의 안수와 예언을 통하여 그대가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라는 말씀과 상통한다.


물론 표현의 차이는 다소 드러나지만, 이 둘은 거의 동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그런데 티모테오 1서 4장 14절에서는 티모테오에 대한 안수가 원로단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언급된 반면, 여기서는 '내 안수로' 언급되어 있다.

 

이에 해당하는 '디아 테스 에피테세오스 톤 케이론 무'(dia tes epitheseos ton cheiron mu; through the laying on of my hands; by the putting on of my hands)에서 전치사 '디아'(dia)는 '~에 의해서'( by), '~을 통하여' (through)라는 의미로서, 이것은 곧 '나의 안수를 통하여'가 된다.

그렇다면, 티모테오는 사도 바오로의 개인 안수를 받은 것인가? 아니면 원로단의 안수를 받은 것인가?

당시 초대 교회의 관례를 보면, 티모테오는 원로단의 안수를 받았을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오로가 자신이 개인적으로 안수를 한 것처럼 언급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티모테오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자신(2티모1,1)의 계승자요, 대리자요, 영적인 아들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느님의 은사' 번역된 '토 카리스마 투 테우' (to charisma tu theu; the gift of God)에서 '카리스마'(charisma)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카리스마'는 본래 '거저 주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카리죠마이'(charizomai)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코린토 1서 1장 7절, 코린토 2서 1장 11절, 로마서 1장 11절 등에서 나타나는 바오로 사도의 특유한 용어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성령께서 자신의 의지대로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교회의 건설과 선익을 위해 베푸시는 은혜와 능력(특은)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가 성령으로부터 부여받은 은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교회를 세우고', '가르치며 교회를 다스리고', '참된 자들과 거짓된 자들을 식별해서 그들을 권면하고 가르치고 인도하는' 은사일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로 하여금 이러한 은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한편, '안수'로 번역된 '에피테세오스 톤 케이론'(epitheseos ton cheiron)에서, '에피테세오스'는 본래 '얹어 놓다'라는 뜻을 지닌 '에피티테미'(epitithemi)에서 파생된 표현으로 70인역(LXX)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손'에 해당하는 '타스 케이라스'(tas cheiras)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어(사도6,6; 8,19; 13,3; 1티모5,22) 안수 행위의 특징적인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 행위는 안수하는 자를 통하여 안수받는 자에게 하느님의 능력이나 축복, 그리고 권위 등이 전달되는 것을 상징한다.

티모테오 역시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은사를 부여 받았다.

 

그런데 티모테오 1서 4장 14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 은사가 '예언을 통하여' 부과되었다고 첨언하고 있는데, '예언에 의해 부과된 것'이라기 보다는 '예언과 함께 동반된 것'임을 드러낸다.

아마 이 예언은 티모테오가 안수를 받을 때, 안수에 동참한 원로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베푼 교훈을 가리킬 것이다.

결국 이 예언은 테모테오가 스스로 자신을 하느님께서 부르신 사람으로 확증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여기서 티모테오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는 사목적 직책과 소임과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가 받은 은사가 외적이거나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적인 은혜라는 점을 '그대가 받은'(호 에스틴 엔 소이; ho estin en soi; which is in you)이란 표현을 통해 드러낸다.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네 속에 있는' 이다.

곧 티모테오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목적 소임을 감당하기에 필요한 은사를 이미 부여받았으므로, 그 받은 은사를 다시 불일듯 일으키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불태우십시오'라고 번역된 '아나죠퓌레인'(anazopyrein)은 본래 '계속해서 새롭게 불타오르도록 하다','계속해서 극렬하게 타오르도록 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나죠퓌레오'(anazopyreo)의 현재 부정사로서, '티모테오 안에 있는 은사가 새롭게 불타오르도록'이라는 의미이다(to kindle of fresh; to fan into flame).

사도 바오로가 보기에, 티모테오에게는 거룩한 하느님의 사목을 위임받던 당시의 은사들이 식지않고 계속 뜨겁게 타오를 필요가 있었다.

 

아마도 당시 나이가 어렸던 티모테오는 내적으로는 교회 내에서 활동하던 거짓 교사들로 인해, 그리고 외적으로느 점차 가중되는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탄압으로 인하여 크게 위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시 로마 감옥에 있었던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영적인 아들 티모테오에게 에페소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사목을 잘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안수받을 때의 일을 회상시키는 것이다.


무릇 모든 그리스도교 봉사자들은 그들 자신이 받은 일들이 아무리 보잘것 없고 작은 일일 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만한 특별한 은사를 주시어 그 일을 맡긴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신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원문에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 for)가 포함되어 있어서, 티모테오에게 그의 안수식을 상기시켜 그가 부여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워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 이유를 밝힘에 있어, 사도 바오로는 영어의 'not ~ but' 용법처럼, 전자를 부정함으로 후자를 보다 강조하는 '우 ~ 알라'(u ~alla)란 표현을 사용한다.

 

사도 바오로가 먼저 부정하는 것은 '비겁함의 영'이다.

'비겁함의'로 번역된 '데일리아스'(deilias)는 본래 '의기소침함' 이나 '비겁함', '두려워함'을 뜻한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비겁함의 영' 곧 '의기소침한 마음'이나 '비겁한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번역되고 이해됨이 타당하다.

사도 바오로가 이 부분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당시 티모테오로 하여금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티모테오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영'(마음 혹은 정신; 프뉴마; pneuma)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힘의 영'이다.

여기서 '힘'(능력)으로 번역된 '뒤나메오스'(dynameos)는 사도 바오로 특유의 표현으로, 로마서 1장 16절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라는 어구에서 강력하게 표명된 바로 그 힘(능력)이다.

 

나아가 티모테오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사랑의 영'이다.

여기서 '사랑'으로 번역된 '아가페스'(agapes)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표명된 대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로서 두려움을 물리치는 힘이다(1요한4,18).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부여하는 것은 '절제의 영'이다.

여기서 '절제의 영'으로 번역된 '소프로니무스'(sophronimus)의 원형 '소프로니스모스'(sophronismos)는 '보존하다'(루카17,33)라는 의미의 동사 '소죠'(sozo)와 '생각'이란 뜻의 명사 '프렌'(phren)의 합성어로서, '근신하다', '통제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소프로니죠'(sophronizo)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 '자기 통제'(self-control)을 말한다.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복음(루카10,1~9)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1~3)

 

시나이 사본과 알렉산드리아 사본 등에는 제자들의 수가 70인으로 되어 있지만, 바티칸 사본과 베자 사본 등에는 72인으로 되어 있어 파견받은 사람의 수효를 확정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70이나 72라는 숫자는 문자적 의미 외에도 상징적이며 신학적 의미를 갖고 있다.

70은 유대인들이 거룩한 수로 여기는 7 충만한 수의 의미를 갖는 10이 곱하여진 숫자이다. 그리고 72는 12의 6배, 즉 12사도의 6배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당시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의 실제적인 수효임과 동시에 앞으로 모든 믿는 이들에 의해 온 세상에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임을 상징하는 의미도 지닌다(창세10장; 창세46,27; 민수11,16~25참고).

 

또한 루카 복음 10장 1절에 72인을 수식하고 있는 '다른'이라고 번역된 '헤테루스'  (heterous) 형용사로서 명백히 12명의 사도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둘씩 보내시며'에 해당하는 '아페스테일렌 아우투스 아나 뒤오'(apesteilen autous ana dyo; sent them two by two)에서 '보내시며'로 번역된 '아페스테일렌'(apesteilen)는 '파견하다'는 뜻을 지닌 '아포스텔로'(apostello) 부정과거형으로써 12사도의 파견 때에도 사용된 같은 단어이다(루카9,2).

 

이것은 보냄을 받는 72인의 제자들이 12사도와는 확실히 다른 별개의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띠고 파견되는 '이유'나 '목적', '권한'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둘씩'에 해당하는 '아나 뒤오'(ana dyo; two by two)의 의미는 아마도 서로 돕고 격려하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마르6,7; 코헬렛4,9), 그들의 사명이 바로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기에,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는 율법의 요구를(신명19,15; 민수35,30) 만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갑작스런 도래와 함께 그때 올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의 준엄함에 대해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루카12,12)고 말씀하셨다.

 복음을 직접 전해 듣고 회개할 시간을 충분히 가진 고을들이 그렇지 못한 소돔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심판의 엄정섬을 전제하고 급격하게 온다면, 시급하게 선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추수하는 행동은 그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모으는 종말론적인 과업을 뜻한다.

 

여기서 '수확'에 해당하는 '테리스모스'(therismos; harvest)는 '수확'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수확의 대상인 거두어 들여야 할 곡식 및 수확의 과정을 의미할 때도 사용된다.

무르익은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수확은 농경 사회의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주제이다.

하지만 '수확'이란 예수님께 있어서 하느님의 나라의 여러 국면들을 설명하는 좋은 소재였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이미 복음을 받아들일 소지를 미리 마련해 놓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확을 기다리는 완전한 무르익은 곡식과도 같다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

 여기서의 예수님의 명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나라로 빨리 들어오게 하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루카 복음 10장 2절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 시급한 데 비해서, 이 일을 몸소 행할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안타까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내용이다.

 

또한 지금 파견을 받고 있는 일흔두 제자들의 책임이 중대하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일꾼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다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주인에게 또 다른 일꾼들을 더 보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로 번역된 '데에테테'(deethete; ask; pray)는 단순히 '요청하다'는 의미 이상의 '기도하다', '간구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테오마이'(deomai)의 부정 과거 명령법으로서, '너희들은 간구하라'는 매우 간절하면서도 강력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천국의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할 당시의 그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시는 주님의 안타까움이 묻어있는 말씀이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사실은 루카 복음 10장 3절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마태오 복음 10장 16절에는 제자들을 상징하는 단어가 '양'('프로바타'; probata)이라고 되어 있는 반면에, 여기서는 '어린 양'('아렌'; aren; lamb)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 복음사가보다 이 단어를 통해 제자들의 '연약함'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양은 목자의 보호가 없으면 이리에게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짐승이다.

또한 '양'이 착한 것의 상징이라면, '이리'는 악한 것의 상징이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양과 같은 제자들이 이리 떼와 같은 세상의 악한 세력들과 영적 싸움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특히 '가운데로'에 해당하는 '엔 메소'(en meso; among)라는 전치사구는 이미 그 자체로 '가운데'라는 뜻이 있는 '메소'(meso)와 '~안에'라는 뜻의 전치사 '엔'(en; in)이 결합되어 '한가운데 속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어린 양과 같이 연약하고 착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교하기 위해 험악하고 공격적인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복음 전파자들은 험하고 공격적인 세상 속에서 마땅히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마태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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