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정은 처참한 지경에 이르고..福者 김계완 시몬 님 (순교일; 1월2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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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태욱 | 작성일2021-01-28 | 조회수74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약국을 운영하며 생활하였다. 그는 1791년에 최필공 토마스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본 뒤, 그 타당한 교리에 이끌려 입교하기로 결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창현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해에 일어난 신해박해로 체포되었다가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었다. 또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1794년 말 조선에 입국하자, 동료들과 함께 주 신부의 거처를 마련하는 데 힘썼고, 동료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연구하였다. 그는 종종 주 야고보 신부를 방문하여 성사를 받거나 그의 복사가 되어 교회 일을 도왔다. 이듬해 초에 본격적으로 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신자들의 문초 과정에서 우연히 그의 이름이 튀어나오게 되었다. 그러자 포졸들은 사방으로 그를 찾으러 다니기 시작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그는 김 율리아나의 집을 빠져나와 이곳저곳으로 피신해 다녔다. 또한 김 시몬도 가족들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여기저기로 다니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깊이 믿어 온 신앙을 버릴 수 없습니다.”고 하면서 “비록 늙으신 아버지가 계시지만, 아버지께 대한 효보다는 천주께 대한 효가 더욱 중요하므로 아버지를 돌보기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관장과 형리들은 ‘더욱 굳게 교리를 실천하기로 다짐하였다.’고 진술하는 그를 보면서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이후 그는 형조로 압송되었고,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문초와 형벌을 받은 후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 새남터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이었다. 사형 판결을 받기 전에 김계완 시몬은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하였다. 지금 비록 형벌을 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진실로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순교자 자료집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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