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겨자씨와 하늘나라 비유.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29 조회수749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의 내용은 씨 뿌리는 사람이 씨는 뿌려놓았는데 그 씨에서 싹이 어떻게 터서 자라는지는 모른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 씨가 땅으로 인해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수확을 할 때가 되어서는 수확을 한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여러 가지로 그당시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를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도 복음을 전하면 어려움이 많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정신적인 수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야기하니 믿음의 눈으로 이해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지금 시대도 그런데 2000년 전 그당시 사람들의 지적 수준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과는 감히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지 않겠습니까? 문맹인 사람도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일반 수준으로 하늘나라를 알려준다면 쇠귀에 경읽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워낙 수준이 낮으니 농부에게는 씨 뿌리는 비유로 어부에겐 그물과 고기를 잡는 것처럼 그들의 생활 수준에 맞는 눈높이로 설명을 하셔야만이 겨우 그것도 이해를 할 수가 있었을 정도의 수준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귀 있는 사람은 들을 거라고 하셨으니 귀가 있어 들어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반증이 될 겁니다. 아무리 무식해도 씨를 뿌리고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잘 가꾸고 하면 열매를 맺는다는 건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에 먼저 이런 걸 예로 드시면서 여기에 그들의 시야를 좀 더 확장을 해서 하느님 나라가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오늘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 내용은 당시 당대 지금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향해 하실 때 그 군중들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을 거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다른 복음도 복음이지만 이 복음의 비유는 특히나 그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세상 종말까지 전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비단 겨자씨를 통한 하느님 나라의 비유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씨를 뿌린 후에 뿌린 사람이 자는 사이에도 저절로 자란다고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도 모른다고 나옵니다. 실제 복음은 아주 간결하게 표현을 했지만 액면 그대로 해석한다면 조금은 무리가 있을 듯합니다.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밭에 나는 잡초도 뽑고 여러 가지 관리를 해야 될 것입니다. 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아무리 씨를 뿌리고 관리를 한다고 해도 햇빛과 비가 없으면 천하에 비옥한 토양이라고 해도 자랄 수가 없을 겁니다. 복음 속에 나타난 행간의 숨은 의미를 보게 되면 절대 저절로 자랄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겁니다. 해와 비를 배제하고 생각하면 저절로라는 말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저절로라는 말로 표현을 했을까? 그건 무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그 가치의 중요성을 배제했다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마치 우리는 산소가 없으면 살 수가 없지만 산소를 무상으로 얼마든지 공급이 되니 그 고마움을 모르는 것과 흡사합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우리가 사전에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그냥 저절로 되는 게 없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게 다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걸 우리는 먼저 이 복음을 통해서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게 전제가 됐을 때 겨자씨 비유가 더 잘 이해할 수가 있을 거라고 보여집니다.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를 하시면서 아주 작은 미비한 존재가 하늘의 새들도 깃들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자랄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단순히 크기만 놓고 판단을 하면 좀 어색할 것 같습니다. 이것도 처음에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그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 나오는 땅을 우리가 말하는 땅도 해당하지만 좀 다르게 묵상을 해보면 이 세상을 상징하는 걸로 묵상했습니다. 그렇다면 땅에 뿌린다는 것은 말씀이 이 세상에 왔다는 것 즉, 하느님이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의미로 이해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 오실 때는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마구간으로 오셨습니다.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정말 창조주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가장 작은 모습으로 오신 것을 오늘 복음에서 언급된 표현과도 아주 흡사한 모습입니다. 그렇게 오셔서 실제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건 고작 3년이라는 짧은 세월의 공생애 기간밖에 없었습니다. 한 인물이 인간 육신의 모습을 지니신 채 이 땅에 오셔서 숱한 고난과 가난 속에서 사시다가 이 땅에서 활동하신 그 시간이 하나의 밀알이 되어 오늘날 200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이렇게 복음이 전세계적으로 전해질 거라고 만약 당시의 사람들이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불가능했을 겁니다.

 

아마 이처럼 우리의 지금 모습도 그럴 겁니다. 당시의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모습이 현실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 우리가 가게 될 하늘나라의 모습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모습이 될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묵상하면 이 작은 겨자씨가 우리의 믿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중엔 그렇게 자라 새들도 깃들 수가 있다고 해도 크기가 작다고는 하나 일단 심겨져야 싹이 자라든 말든 할 것입니다. 같은 씨가 같은 땅에 뿌려져도 잘 자라는 것도 있고 잘 자라지 않는 것도 있듯이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을 생각하는 말씀의 씨앗도 우리가 가진 믿음의 분량에 따라 잘 자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향방에 대해선 누구도 판단을 할 수가 없을 거라고 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씨앗이 자란 크기가 어쩌면 믿음의 크기와도 같은 의미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른 건 몰라도 다른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는 더더욱 우리의 눈으로 판단을 하면 안 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저절로 그냥은 자라지 않는 것처럼 비나 해가 있어야 하듯이 하느님의 도움이 있어야 하고 그런 하느님의 도움이 어떤 사람에게 어떻게 작용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더더욱 남의 믿음을 판단하는 건 금물이어야 한다는 걸 오늘 복음을 통해 다시 한 번 더 제 자신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