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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1.01.29)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29 조회수1,003 추천수6 반대(0) 신고

(청주교구 성지, 연풍 순교 성지 성당)

2021년 1월 29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

복음 마르 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독립생활을 하는 일부 생명체를 제외하고,

동물 대다수는 본능적으로 사회적 관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뇌가 본능적으로 원한다고 하네요.

특히 사람의 체취와 체온은 정서적

안정감을 가져다주고, 장기적으로

심혈관 질환과 면역 기능에 변화를 줘서

수명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Harry Harlow)

가짜 원숭이 실험을 했습니다.

새끼 원숭이의 우리 안에 먹이를 주는

철사 엄마와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헝겊 엄마를 넣었습니다.

, 생존을 위한 먹이에 집착하는지

아니면 부드러운 감촉에 집착하는지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허기질 때만 철사 엄마에게

가서 우유를 먹을 뿐, 그 외의 시간은

헝겊 엄마에게 붙어 있었습니다.

본능적 욕구보다는 포근하고 따뜻한 품에

애착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더 하다고 합니다.

관계를 맺지 못하면 세상 안에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거리두기를

하면서 힘들어합니다. 코로나 블루 라는

신종 우울증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거리두기, 자가격리 등이 서로의 건강을

위해서 필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관계 맺기가 필요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뿐만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이 관계를 맺지 않으면,

세상 삶이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고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데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매 순간

관계를 맺으십니다. 평범하고

아무런 특징이 없는 일상 같지만,

그 안에서도 당신의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런데 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만을 바라봅니다.

세상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욕심과 이기심을 채울 수 있는 것만 바라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긍정적인 관계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뿌린 씨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가 채 느끼기도 전에 하느님 나라가

다가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겨자씨가 아주 작고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아주 작고 사소한 우리의 일상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날이 올 때까지 막연하게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가면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해야 합니다. ‘나중에라는

뒤로 미루는 말을 통해서는 커다란

후회만 남기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지독히 화가 날 때에는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생각해보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죽음에 대한 묵상

그리스 신화에는 비극적인

인간이 종종 등장하는데,

그중 한 명이 생각납니다.

바로 트로이의 왕자 티토누스입니다.

그를 사랑한 새벽의 여신 에오스는

티토누스에게 영생을 달라고 다른 신들에게

간청했고, 신들은 에오스 여신의 청을

기꺼이 들어줍니다. 그렇다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데, 왜 비극의 주인공일까요?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 먹고, 자고,

또 운동도 하고, 아프면 병원을 찾아갑니다.

어르신에게 오래 사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을 보면, 오래 장수를

누리는 것은 분명히 축복입니다.

그런데도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말합니다.

에오스는 깜빡하고 영원한 젊음도 함께

달라는 청을 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점점 늙고 쇠약해져서 꼼짝도 하지 못하지만,

영원히 사는 것, 이것이 티토누스에게

주어진 비극적인 삶이었던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자비로운 위안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 세상 삶을 마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죽음, 이 죽음을 위해 이 세상 삶을

잘 마치기 위한 노력이 왜 필요한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청주교구 성지, 연풍 순교 성지 십자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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