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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과연 교회를 버리고서도 신앙을 지킬 수가 있단 말인가?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29 조회수780 추천수0 반대(0) 신고

 

조금 전에 요즘 개신교의 이미지가 추락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기사를 보다가 그 기사에 나온 댓글을 보며 제 생각을 한번 공유하고 싶습니다. 개신교 내에서 집단 감염이 계속 산발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로부터 갈라져나간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같이 믿는 사람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음은 한 개신교 신자의 댓글 내용의 일부분입니다. "40년 넘게 교회를 다닌 사람으로 말하는데요, 코로나는 한국 목사들 침묵하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 대댓글에 55년 교회 다닌 사람이 “신앙은 지키되 교회는 버렸다”고 하는 걸 남겼습니다. 저는 이 대댓글을 보면서 순간 뭔가 묵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분의 의도는 충분히 무슨 뜻인지 알고 있습니다. 이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럼 저는 실제 이 말의 액면 그대로의 표현을 가지고 우리가 한번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개신교 천주교를 떠나서 말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은 지키되 교회는 버렸다는 이 말은 옳은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이분이 말을 하는 교회는 단순히 말해서 일반 교회 건물이라든지 외형을 두고 한 말일 겁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나오는 시장의 원리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가격이 형성이 되니 국가는 개입의 여지가 없다고 할 때의 시장과 요즘 시장에 가면 먹을 게 많다고 하는 말에 등장하는 시장이 같은 동일어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의 뜻입니다. 이 개신교 신자가 말하는 교회는 방금 예에서 후자의 의미로 쓰인 교회를 말할 겁니다.

 

그럼 전자의 의미로 해석되는 시장의 의미에 해당하는 교회의 뜻은 여러분들도 다 아실 것입니다. 신앙을 위해서 형성된 모임을 교회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존립하는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그런 교회에서 교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게 의미가 없고 그렇다고 지금까지 가진 신앙은 이런 걸로 포기를 할 수가 없으니 신앙은 지키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말하였을 거라고 봅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이걸 우리에게 한번 저는 적용해서 묵상을 하고 싶습니다. 과연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면 어떨까요? 만약 이 말이 성립되려면 이런 게 전제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과 나와 일대일 관계만으로 된 것이라는 조건입니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신앙은 절대 그렇지 않을 겁니다.

 

만약 그게 신앙이라면 요즘 복음에 자주 언급되는 하늘나라의 비유의 말씀처럼 굳이 그렇게 애써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 주실 필요가 없으셨을 겁니다. 하늘나라에 가는 조건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일대일 관계라면 말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하나의 단어로 응축한다면 ‘사랑’이라고 합니다. 근데 그 사랑을 둘로 나누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만을 놓고 보면 하느님과 우리는 일대일 관계로도 충분히 신앙을 유지할 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웃사랑의 관점에서는 일대일 관계만으로는 어림도 없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자기 혼자 성당 열심히 나오고 기도 열심히 하고 성당 미사도 충실히 참례하고 하는 게 아주 신실하고 거룩한 신앙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건 독실한 신앙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건 신앙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엄밀한 의미에선 종교생활이라고 봐야 될 겁니다. 신앙생활과 종교생활은 엄연히 다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흔히들 아주 착각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신앙생활과 종교생활의 의미를 혼동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생활은 단순히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과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천주교에서 명시적으로 이 부분에 공식적으로 법전의 형식으로 명문화한 곳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유권해석을 내린 부분은 있습니다. 이건 지금까지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많은 신부님들의 강론에서도 언급된 부분입니다.

 

고 차동엽 신부님의 어떤 책의 일부분에서도 이런 것을 재미있는 예화로써 언급된 것을 봤습니다. 저는 오늘 이 댓글을 보면서 순간 차동엽 신부님의 이 예화에서 묵상거리의 단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어떤 사람이 굳이 혼자서 개신교 신자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만 믿고 살면 되지 굳이 성당에 다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써 장작불을 예로 들며 나온 걸로 기억합니다.

 

난로에 지금 불이 붙고 있는 장작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꺼내어 따로 놔두고서 지켜보며 결과를 언급하는데 따로 나온 장작은 벌써 꺼져가고 있었지만 난로 속에 있는 장작은 잘 타고 있는 걸 보고 그 청년이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이 일화가 전체적으로 의미를 대변하는 건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은 바로 이것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도 하느님 사랑만을 요구하시지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말씀 중에 눈에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말씀을 자세히 묵상해보면 논리적으로 봐도 하느님 사랑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이웃사랑, 형제사랑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접 적으로 말씀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신앙은 그래서 독불장군 자기 혼자 그냥 성당만 왔다갔다 하는 외톨이 형식의 신앙은 건전한 신앙은 아니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공동체 속에서만 있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힘든 것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좌충우돌 하긴 하지만 그런 생활 속에서도 때로는 사랑도 배울 수 있고 남의 아픔도 같이 나눌 수 있고 같이 기뻐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형제애를 나눌 수가 있고 그럼으로써 하느님 사랑을 형제애로써 실천할 수가 있을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이런 걸 우리에게 원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애시당초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냥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로봇 같은 인간을 만들었으면 되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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