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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30 조회수1,072 추천수0 반대(0) 신고

 

오늘 독서와 복음은 믿음에 대한 주옥 같은 말씀입니다. 복음에서는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묵상하고자 합니다. 오늘 상황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스토리가 잘 알려진 내용이고 다들 아시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배에 물이 가득 차니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는 게 걱정이 됐습니다. 생사의 문제 앞에서는 깨어 있어라고 하지 않아도 깨어 있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이 말씀의 뉘앙스는 어떤 뉘앙스인가요? 지금까지 나와 함께 있었고 여러 현상을 봤으면 그 현상도 그냥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현상을 그토록 두 눈으로 보고 했으면 지금쯤이면 이런 상황이 되어도 나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수준까지는 가야 하지 않겠냐? 하는 그런 뉘앙스이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도 예수님의 말씀을 하시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씀일 것입니다. 만약, 그들도 그런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 발생했더라면 그들도 마치 예수님처럼 말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만약 그랬으리고 가정하고 이 상황을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만약 그랬다고 한다면 그들은 타인의 그런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정작 본인들이 그런 상황에 닥쳤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바로 남의 집에 불나는 경우 구경하는 꼴과 같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기적으로 그것도 우연의 일치로 아니면 그 순간만 재수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들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들일 겁니다. 확률적으로 수확적으로 생각한다면 경우의 수가 한두 번 일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정말 천문학적인 수의 확률로 일어난 기적이라고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런 산술적인 생각은 그들의 생각에는 있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비근하게 생각했을 때 그들이 그 상황에서 누군가 인간적인 머리로 이런 산술적인 생각을 했다고 한다면 전혀 두려움에 떨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였는데도 그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면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바로 그 순간은 그런 확률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그들이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인간의 생각으로 산술적인 계산 따위가 적용되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일만 가지고 봐도 이 말은 지극히 맞는 말이 됩니다. 사라와 아브라함의 몸에서 이삭을 얻을 수 있는 건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이미 사라의 몸은 경수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조건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고서도 말입니다. 사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아들이 있을 거라고 약속을 했을 때 사라가 웃었잖습니까? 사라가 왜 웃었겠습니까? 너무나 황당했을 겁니다. 자기의 몸에서 이미 경수가 끊어진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게 있는 나이였다면 사라가 웃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몸좀 하가르에게 맡기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두 눈을 가졌습니다. 두 눈은 다 육적인 눈입니다. 하지만 한 눈은 실제 현실을 봐야 합니다. 또 한 눈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되어야 합니다. 그냥 단순히 시야를 넓게 하려고 두 눈을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았을 겁니다. 하느님께서 전지전능하신데 단순히 그런 목적으로 두 눈을 주셨다면 조금은 능력이 떨어진 하느님이실 겁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두 눈을 허락하신 건 이런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짐작을 한번 해봅니다.

 

바로 우리 인간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면을 볼 수 있는 면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사라처럼 임신을 할 수가 없는 몸일지라고 하느님의 그런 약속의 말씀을 믿음의 눈으로 보면 신뢰할 수가 있을 겁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은 실제 그들에게도 두 눈을 가졌지만 그들에게는 믿음으로 봐야 할 한 눈이 멀었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눈도 이런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눈은 다 가지고 있지만 그냥 단순히 수정체에 맺히는 상만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절대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수정체에 상이 맺히지 않을 겁니다. 이처럼 남들이 볼 수 없는 면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마음의 눈 수정체에 바로 수수께끼 같은 하느님 나라의 말씀이 고스란히 수정체에 상이 맺힐 것입니다.

 

그런 상이 맺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 겁니다. 그런 사람은 혼탁해져 있는 자신의 마음을 씻고 씻어 맑은 영혼으로 만들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기 때문에 그런 영혼을 가지면 역으로 말해서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면을 보게 되어 결국 선순환이 되어 어제 복음처럼 어쩌면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진다는 게 마치 자본주의 이론 같지만 자본주의 이론이 아닌 것이 됩니다. 바로 이게 하느님 나라의 또 다른 법칙이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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