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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누가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어낼 수 있겠는가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31 조회수846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 1. 31. 도란도란글방

(공동번역성서)

누가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어낼 수 있겠는가

(로마8:35~39)

35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36 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 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 라는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논리적 사유에서의 경제성을 내용으로 하는 서양식 고사 성어로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근본 원리는 꼭 필요한 것에 국한해야 한다는 것으로어떤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전제나 가정을 끌어들여선 안 되며, 꼭 필요한 것만으로 최대한 제한하고 억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오컴의 면도날은 조금이라도 신비스러운 기미가 있는 보편자 따위의 존재자들을 사정없이 베어버립니다. 그건 사람들이 붙인 이름에 불과한 것이라는 유명론입니다인간성보편적 이성심지어 보편적 인간이라는 말도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현실적 존재는 그 자체로 개별적인 것이지 인간 보편이라든지 보편적 인간성이라든지 인간 본성 등의 개념은 사람들이 이름 붙여 놓은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전제를 세울 때는 괜히 추상적이거나 불필요한 수식어로 그 뜻을 애매모호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은 베어버리고 필요한 부분으로 명확하게 단순화하자는 것이지요.

 이렇게 오컴의 면도날은 본질적으로 추상에 대한 비판인 것이며모든 현실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이고이론이란 가능한 한 단순해야 한다는 근본 법칙에서 나온 것입니다추상된 모든 인식은그 인식이 현실성을 서술해야 한다면하나의 개별자에 대한 직접적 파악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논리적이지 못한 것은 과감하게 다 잘라버려야 한다고 그는 주장을 했습니다논리라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니만큼 그 사유의 면도날을 잘 사용해서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생각되는 것이 있거든 가차 없이 베어버려야 한다고 그는 웅변을 했습니다.

오컴의 그러한 철학이 근대 경험주의의 토대가 되고 근대 물리학 발전에 기여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에는 아주 나쁜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소위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것이 그 오컴 철학에 큰 영향을 받은 신학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되어지고 논리로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만이 진실이며 진리인 것이므로 성경을 너무 신비한 책으로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도덕관과 윤리관 안에서 잘 이해하고 행하면 된다는 식의 신학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신비한 사건이나 기적 등은 교훈적 내용으로 이해를 하면 되는 것이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우리의 롤모델로 삼아 잘 본받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성경의 반 이상은 다 불필요한 추상의 내용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느님은 진리를 성경 안에 감추어 놓으셨습니다인간 보편이 그 보편적 이성으로 함께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게 진리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그래서 만약 인간들이 자신들의 사유의 면도날로 성경을 난도질하기 시작하면 감추어진 진리는 전부 절단이 되고 인간 욕망의 육화라 할 수 있는 도덕과 윤리만 덩그러니 남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라는 존재들은 다시 살아난(에게이로사람들입니다. 그들 안에는 육으로 죽으시고 영으로 살아나신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살아 계십니다그래서 그들에게는 새로운 눈과새로운 귀와새로운 입과새로운 호흡기관이새로운 기능으로 주어집니다. 한 마디로 육의 옛 머리가 날아가고 새로운 머리가 붙어 버리는 것입니다

진리를 듣고진리를 보며진리를 말하고진리를 숨으로 갖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 갇혀 있는 세상 논리 밖의 것을 보고세상 논리 밖의 것을 들으며세상 논리 밖의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한 마디로 ‘믿음이라고 부릅니다그럼에도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들을 논리로이성으로파악하고 이해하고 행하려 하는 이들은 그 성경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을 장황 하게 나열을 합니다. 그것은 거꾸로 성도 이외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러한 것들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 목록들이 두 묶음으로 나뉘어 나오는데 그 첫 번째 목록들이 환난곤고핍박굶주림헐벗음위험입니다.(두 번째 묶음은 다음에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다른 단어들로 표현이 되어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은 전부 율법을 가리키거나 율법에서 파생되는 현상들입니다.

환난(들립시스)은 율법 아래에서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코피 터지게 자기 가치 향상의 삶을 살아야 하는 아담들의 삶을 가리키는 것이고, 

역경, 곤고(스테노코리아좁음)는 자기 앞에 스스로 쌓아놓은 율법의 장애물로 인해 좁아져버린 진리의 문(좁은 문)을 가리키는 것이며

벅해, 핍박(디오그모스)  ‘데일로스(겁난두려운)’ ‘디아코노스(섬기는 자목사집사)’의 합성어로두려움을 가르치는 자로부터 얻은 두려움을 말합니다그건 가르침이 아니라 ‘핍박이라는 것입니다

굶주림, 기근 (리모스)은 식량이 아예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말씀을 율법으로 먹으면 이만 갈릴 뿐입니다그건 진짜 식량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헛된 양식을 먹고 굶주려 있는 상태를 ‘리모스라 합니다.

헐벗음, 적신 (귐노테스)은 진리의 겉옷을 입지 못해 벌거벗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위험(킨뒤노스)인 것이며그 사람을 멸망시키는 (마카이라)이라는 것입니다 ‘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헤레브인데 그 단어는 가뭄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진리의 비가 오지 않아 영적 가뭄의 상태가 되면 그것이 곧 그 사람에게 멸망의 ‘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성경 말씀을 표피적인 법으로만 이해하고사유의 논리로만 해석을 하려 할 때, 말씀은 환난을 주고역경으로 길을 막으며핍박의 말이 되며영의 양식이 되지 못해 영적 기근의 상태로 만들어 버리며무화과나무 잎사귀 띠로 엉성하게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린 벌거벗은 자가 되게 하고가뭄의 칼로 그 사람을 난도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것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멸망시켜가는 환난역경핍박굶주림헐벗음위험인 줄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반면에 하느님의 말씀이 진리가 되면 그 말씀이 우리를 자유하게 만들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 어깨에서 제거해 버립니다그 결과 환난과 역경과 핍박에서 놓여나게 되고진리의 참 양식을 마음껏 먹게 되며깨끗한 의의 겉옷을 입고 헐벗음을 가리며가뭄의 칼로 오히려 육의 머리를 잘라내는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는 자들은 이제 그러한 것들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자기 밖의 율법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로 스스로 그리스도와 자신 사이에 커다란 구렁을 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라고 번역이 된 ‘코리조라는 단어는 부자와 거지 나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구렁(카스마)과 한 맥 속에 있는 단어입니다그러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이해하고 행함으로 해서 자기 가치 상승과 자기 가치 향상을 꾀하는 이들은 하느님과 자기들 사이에 커다란 구렁을 파고 있는 것이라는 무서운 말입니다.


(루가16:23~26) 23 부자가 죽음의 세계(음부)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 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24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애원하자. 25 아브라함은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26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 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 오지도 못한다' 고 대답하였다.

이 비유는 주님께서 율법주의의 대명사인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던진 비유였습니다죄인들과 세리들이 주님께 말씀을 들으러 나왔습니다성경은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그들을 迎接하셨다고 기록을 합니다

그 말씀은 단순히 식사를 함께 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이 가진 양식을 그 죄인들과 세리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는 은유적 표현인 것입니그랬더니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분노했습니다어찌하여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그들을 영접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회개란 무엇인가에 관해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탕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해 주신 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핵심 내용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입니다. 불의의 재물은 하느님께서 하늘의 보물을 설명해 주시기 위해 땅에 모형으로 허락해 주신 아래의 것들을 총칭하는 개념입니다. 

그 아래의 것들을 내용으로 잘 이해를 하면 그것으로 상대의 빚을 탕감시켜(용서줄 수도 있고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하늘에서 자신을 영접해 줄 하늘의 친구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주님은 작은 것에 충성하면 큰 것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고불의한 것에 충성하지 못하면 참된 것(진리)도 너희에게 주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릇이며 모형이라는 말입니다그것을 내용으로 볼 수 있으면 너희들이 판단하고 단죄하는 죄인들과 세리들이 지금과는 다르게 보일 것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율법으로만 이해를 하여 그것으로 자신들의 가치 향상과 신분 상승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주님은 그러한 자들을 ‘부자라 부르시는 것입니다그래서 이 비유들 중간에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는 말이 삽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거기에서의 돈은 ‘을 가리키는데 그 ‘은 성경에서 늘 속전을 상징합니다속전은 속전인데 자기들이 마련한 속전즉 율법의 행위를 말합니다그들이 성경이 말하는 부자입니다그러한 부자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자기들의 선(너희 좋은 것)’을 살아생전에 챙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반대편 자리로 부름을 받은 거지 나자로는 어떻게 살게 될까요?

이 세상 부자들이 자기들이 스스로 합의하고 정의한 자기들의 선을 소유로 갖게 되는 동안은혜의 복음을 진리로 받아 사는 자들은 그들로부터 ‘하다 단죄를 받게 되겠지요그래서 주님이 나자로는 살아생전에 고난(카코스)을 받았다고 하신 것입니다자기들의 논리와 사유에 의해 정의된 자기들의 선을 풍성하게 소유하고 있는 세상 부자들은 그렇게 동의하지 않고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구원의 길로 붙들고 있는 성도들이 오히려 악하게 보입니다왜 인간들이 선이라 규정해 놓은 그러한 것들을 그렇게 가치 없게 여기느냐는 것입니다.

 어떠세요세상 부자와 거지 나자로 사이에 엄청난 구렁이 있지요율법주의자들과 은혜의 복음 아래의 성도는 그렇게 확연하게 구렁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그건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구렁이기도 합니다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잖아요그걸 오늘 본문이 ‘끊어짐이라 번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부자가 ‘죽은 나자로를 살려서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어 진리를 말해주라고 부탁을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부자의 형제가 ‘다섯입니다모세 오경열의 반율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그런데 어떤 다섯입니까모세와 예언자에게 듣지 못하는 다섯입니다모세와 예언자는 구약을 말합니다. 구약을 진리로 들으면 구원이지만 그 구약을 율법으로 들어 버리면 그 다섯은 멸망의 다섯이 되어 지옥의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루가16:27~31) 27 그래도 부자는 또 애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소원입니다.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 29 그러나 아브라함은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부자는 다시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 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호소하였다. 31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다섯(구약세상)에게 가는 그림은 예수 자신의 이야기를 모형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나 다섯인 세상에게로 간다고 해도 그 다섯의 율법을 진리로 들어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예수의 십자가도 무용지물이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그러니까 무조건 ‘예수님이 당신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라는 수준의 십자가 제시로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그런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약 성경 전체를 하나의 그림으로 집약하여 땅에 꽂아 버린 것이지 구약 전체를 부정해 버리는 사건이 아닌 것입니다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약이 이야기하는 바를 신약의 은혜로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은 기실 그 십자가와 아무 상관이 없는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그래서 주님은 십계명의 아래 다섯을 넷으로 다시 풀어 설명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모세 오경이 사 복음서가 되는 형국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받게 되면 하느님과 그 사람 사이에 커다란 구렁이 생깁니다오늘 본문의 말로 바꾸면 ‘끊어짐이 발생합니다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을 진리로 받은 아들들에게 있어서 어떻게 말씀이 끊어짐의 구렁을 만드는 율법으로 보일 수 있겠느냐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열의 계명을 다섯으로 주시고 주님은 그 다섯을 넷으로 넘겨주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즉 하느님의 언약이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 언약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쓰면 ‘싸바입니다그런데 그 ‘언약이라는 단어는 일곱 번 말하다실컷 먹이다라는 의미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그래서 성경이 ‘일곱개의 말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그렇죠창세기 1장을 보면 일곱 개의 약속이 나오는데 그 약속의 완성 지점이 ‘안식입니다

 그러니까 일곱(싸바)은 단순히 아라비아 숫자 ‘7’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언약즉 하느님의 계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언약은 ‘안식으로 끝이 납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 1장의 ‘일곱은 하느님의 ‘약속이 제시되는 곳이라면 그 성취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스타우로스)는 언약의 기둥이라는 뜻이라 했지요그 언약의 나무 위에서 일곱의 말(가상칠언)이 다시 떨어지는데 그 마지막이 다 이루었다입니다창세기의 언어로 그 완성을 표현하면 ‘안식입니다.  그런데 그 안식이 인간의 대표로 오신 예수의 육이 언약의 기둥에서 죽는 것으로 성취가 됩니다

  로마서 6장의 진술에 의하면 우리 성도 모두는 그 언약의 기둥에서 예수의 육과 함께 육을 도살당한 자들입니다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를 가리켜 도살할 양이라 부릅니다이상하지 않으세요? 성도의 육이 예수의 육 안에서 도살당하는 그 시점에 안식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의 ‘일곱의 언약은 십자가를 설명하는 그림이었던 것입니다그리고 그 안에는 내 백성의 육은 내가 반드시 죽인다.’는 하느님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어 율법 (선악과)으로 죽이고 그렇게 진리로 죽으면(무트거기에서 영생으로 살려 내겠다.’는 것입니다창세기에서의 실수를 골고다에서 회복하는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그건 처음부터 하느님의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예수라는 제물이 의미하는 바가 우리의 육을 제물 삼아 하느님께 나아오려 하는 시도를 멈추고 하느님의 선물인 하느님 자신즉 하느님의 생명을 영()으로 거저 받아 하느님의 아들로 살아나라는 은총의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의 ‘일곱의 이야기도 바로 그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여섯째 날에 그 제물의 진의가 분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육신의 두 마음으로 창세기의 일곱을 읽게 되면 그건 그냥 하느님께서 천지 만물을 없음에서 있음으로 만들어 내신 창조 記事로밖에 보이지 않아요그건 당연한 것입니다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의 조명 없이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읽어낼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그 일곱의 언약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기 위해 야곱의 열두 아들을 ‘하나로 묶어서 애굽으로 집어넣으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칠십이라고 부르십니다 칠십(쉬브임)이라는 단어는 쉐바(일곱)’ ‘싸바(일곱 번 말하다)’와 같은 말입니다. 일곱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시기 위해 ‘열둘(아들)’이 택해지고그 열둘이 ‘칠십으로 애굽 들어갑니다그들은 그 일곱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위해 ‘(아쉐르)’이라는 계명을 받아  ‘일곱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그래서 ‘칠십입니다.

(창세46:27) 27 에집트에서 요셉에게 생긴 두 아들까지 합쳐 에집트에 간 야곱 가문의 식구는 모두 칠십 명이 되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그런데 이 ‘칠십이 하느님의 ‘일곱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지 못합니다아직 ‘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하느님은 그 열을 주시기 위해 그들을 애굽에서 끌어내시는데 다시 ‘열둘로 끌어내십니다. ‘열두 지파입니다. 하느님의 당신 아들 만들기에 대한 집착은 이리도 대단합니다그리고는 드디어 그들에게 ‘이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인 하느님의 말씀이 드디어 이 세상에 문자로 던져지기 시작한 것입니다이제 그들은  ‘ ‘일곱을 깨달아 알면 되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일곱이나 열이나 그 개념은 같은 것입니다그래서 히브리 사람들도 그 일곱과 열을 완성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렇게 열로 일곱의 의미를 깨달아 알게 되면 그들을 ‘칠십 원로라 부르는 것입니다. ‘원로라는 것이 어린아이와 반대되는 성숙의 개념으로 쓰이는 것이니까요그런데 하느님은 그 ‘을 다섯으로 먼저 주십니다.

 

(출애20:3~17) 3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4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5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7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10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11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 12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하지 못한다. 14 간음하지 못한다. 15 도둑질하지 못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이 스스로의 사유나 논리로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앞의 다섯에 설명을 달아 주십니다그리고 뒤의 다섯에는 설명을 달아주시지 않으십니다구약 시대는 그 뒤의 다섯을 행하는 때가 아님을 암묵적으로 힌트 해 주신 것입니다뒤의 다섯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앉으셔서 산상수훈으로 풀어주시잖아요그러니까 뒤의 다섯은 신약 때에 이루어질 것을 나열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설명이 붙어 있지 않아요

하느님은 인간이 도저히 성취해 낼 수 없는 앞의 다섯을 설명과 함께 주시면서 인간들이 열심히 행해서 실패하기를 기다리십니다왜냐하면 그들이 실패를 해야 하느님이 은혜로 일을 시작하실 수 있거든요.

 

십계명의 첫 번째 내용을 보세요하느님께서 당신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세요그 문장은 나를 다른 신으로 섬기지 말라는 말이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피조물에게 친히 당신을 계시하시기 전에 피조물이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습니다그런 사람들에게 다른 신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얼토당토않은 말입니다하느님을 모르는데 다른 신은 어떻게 구별합니까?

그런 이들이 하느님은 ‘이런 분이야라고 이야기를 한다거나 그 하느님에 관한 어떤 표식을 문자나 형상으로 만들어 내면 그 모든 것이 전부 우상입니다그런데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는 이들이 어떻게 우상을 만들지 않을 수 있으며그 하느님이라는 우상을 어떻게 섬김의 대상으로 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그게 두 번째 계명입니다.

세 번째가 하느님의 이름(말씀)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입니다하느님의 이름은 당신이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반드시 망령된 율법으로 읽혀지고 들려지게 되어 있습니다이것도 인간들의 생래적 능력으로는 지켜낼 수 없는 계명입니다.

네 번째가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이지요? 안식은 열로 일곱을 깨달아 알면 안식입니다그런데 아직은 그런 때가 아닙니다그래서 안식일만 열심히 지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섯 번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아브하느님의 성전)(하느님의 말씀)를 공경해야 그것이 생명입니다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아버지라고도 하고 어머니라고도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말씀을자기를 낳는 부모로 갖는 것이 아니라 드림에 대한 법으로 곡해를 해 버리면 그게 바로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그게 고르반 이야기잖아요말씀을 ‘부모로 공경하지 못하고 ‘드림으로 그 부모 공경을 대신하면 그게 바로 저주받은 자라고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아무튼 이렇게 위의 다섯은 우리가 도저히 알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는 그런 것입니다. 물론 신약시대를 살고 있고 그 말씀을 진리로 이해하고 있는 우리는 이미 그 앞의 다섯을 행하고 있는 자들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진리이신 주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뒤의 다섯을 해석해 주십니다그 뒤의 다섯을 잘 이해하고 행하면 앞의 다섯이 자연스럽게 성취되는 것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다른 말로 이웃 사랑에 관한 부분을 잘 이해하고 행하면 앞의 다섯즉 하느님 사랑에 대한 것이 성취되는 그런 메커니즘인 것입니다똑같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뒤의 다섯을 ‘으로 설명해 주십니다다섯은 즉넷이라는 것입니다왜 넷일까요이 십계명의 이야기를 창세기와 연결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열은 일곱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한 것이니까요.  

창세기의 일곱 언약 중 마지막 일곱을 제외한 여섯 중에서 앞의 셋은 우리가 할 수 없는 하느님의 언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빛과 어두움,  창공 위의 물과 창공 아래의 물,  열매로 일을 하는 열매 맺는 나무로 씨 맺는 풀싹을 내시겠다는 말씀은 전부 하느님께서 행하실 새 창조의 언약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그리고 네 번째 날부터 여섯 번째 날까지를 그 앞의 셋과 연결을 시켜서아래에서 행해져 위의 것을 성취하게 되는 이 땅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작은 광명(성전세상)으로 큰 광명을 깨달아 알면 그게 바로 어두움을 빛으로 보게 되는 통일(에하드)의 이야기가 성취가 되는 것이고우글거리는 ‘네페쉬 하이들과  창공의 새 (성전) 큰 물고기 (아래의 말로 주시는 말씀큰 뱀들로 위의 물(진리)을 알게 되면 그것이 바로 ‘쉐니(둘째 날)’의 언약이 성취가 되는 것이고땅의 ‘네페쉬 하이가 땅에서 튕겨져 나와(야짜육축(베헤마제물)과 기는 것(레메쓰밖으로 나와 버리면 그것이 바로 열매를 가지고 일을 하는 열매나무(율법선악과)로 씨를 가진 풀싹이 되는 ‘쉐리쉬(완성)’가 되는 것입니다그러면 그것을 ‘자칼을 품은 네케바(사람)’라 하는 것입니다그렇게 완성이 되었을 때그 상태를 ‘일곱’, 안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이 앞의 다섯과 뒤의 다섯으로 나누어져, 뒤의 다섯으로 앞의 다섯을 성취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면, 창세기의 일곱은 앞의 셋과 뒤의 셋으로 나누어져 뒤의 셋을 통하여 앞의 셋이 성취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그리고 그 셋의 완성을 넷의 안식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계명의 다섯을 창세기의 그 셋의 언약과 연결을 시켜 넷으로 설명을 해 주신 것입니다.

*1(에하드)4(레비이)살인 *2(쉐니)5(하미쉬)간음 *3(쉐리쉬)6(쉬쉬)거짓증거 *7(쉐비이)사랑

열의 휘장이 다섯으로 찢어지고 그 아래의 다섯이 주님이 말씀하신 살인간음거짓증거사랑의 넷으로 이해되어지면 그게 구원입니다휘장으로 갈라진 둘이 휘장의 찢어짐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지성소와 세상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휘장이 다섯과 다섯으로 갈라지고 그 다섯이 넷으로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그 열이 다섯으로 그리고 그 다섯이 넷으로 완성이 되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고 그 자리를 안식의 자리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수고에서 벗어나 비로소 쉴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성경의 처음(베레시트아르케)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가리켜 알파요 오메가라 하신 것이고 처음이요 나중이라 하셨던 것입니다알파도 주님이시고 오메가도 주님이십니다처음도 주님이시고 나중도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둘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찢기는 휘장을 예수의 육체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 성도를 둘로 나누고 있는 구렁이 무엇이라는 말이 됩니까육신적 예수즉 율법의 예수를 말합니다.

 

(히브10:20) 20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새로운 살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그 휘장은 곧 그분의 육체입니다.

예수의 육이 언약의 기둥 위에서 찢어지자 지성소와 세상이 하나가 되었습니다육적인 예수는 내 밖의 예수를 말하지요그 육적 예수가 찢어지고 내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들어와야 나와 하느님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하느님과 사람의 연합이니까요하느님이 사람 밖에서 섬김의 대상으로 존재하면 그 하느님은 심판의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구렁이 끼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 계명(말씀)으로 아래의 다섯을 가지고 넷으로 완성하여 사랑으로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그 어느 것 하나 악한 것이 없고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주님이 주시는 양식으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 그 참 진리를 깨달아 알면 그 열이 아래의 다섯 안에서 보이게 되고, 그 아래의 다섯은 넷으로 완성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열둘이 부름을 받고그 열둘에게 ‘이 주어지고그들은 드디어 ‘칠십이 되어 그 ‘일곱을 전하는 자가 되는 것이고 그런 연유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셨던 세리(텔로네스텔로스+오네오마이완성을 사다)가 이렇게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루가15:1)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들었다.

세리가 완성을 향하여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주님 앞으로 나옵니다성경은 주님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고 기록을 합니다그렇게 주님의 양식을 제대로 받아먹으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보세요.

(루가18:10~13)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 갔는데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세리였다. 11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 하느님!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하고 기도하였다. 13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율법적 행위를 자랑스럽게 여기지요부자입니다그런데 세리는 가슴을 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합니다그리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자각하고 있습니다그러한 과정을 거친 세리가 완성의 단계로 접어듭니다.

 

(루가19:1~10) 1 예수께서 예리고에 이르러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거기에 *자캐오라는 돈 많은 세관장이 있었는데 3 예수가 어떤 분인지 보려고 애썼으나 키가 작아서 군중에 가리워볼 수가 없었다. 4 그래서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길을 앞질러 달려 가서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 갔다. 5 예수께서 그 곳을 지나시다가 그를 쳐다보시며 '자캐오야, 어서 내려 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6 자캐오는 이 말씀을 듣고 얼른 나무에서 내려 와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 7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 가 묵는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8 그러자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 주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9 예수께서 자캐오를 보시며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자케오라는 인물이 나오지요그 단어는 깨끗한순결한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자카이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입니다그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자칼과 네케바 ‘자칼입니다의미는 남성이 되다상세히 말하다기록하다’ 입니다.‘네케바 ‘자칼을 품으면 ‘아들이 됩니다그 상태를 ‘깨끗하다순결하다라고 합니다그게 ‘자케오의 이름이 가진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자케오의 집에 유하시겠다고 하시지요주님이 자케오의 집(성전)에 그리스도로 들어가시는 그림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깨끗한 자가 되었거든요그때 자케오가 이런 말을 합니다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프토코스)에게 주겠다고 합니다자케오 이야기의 서두에 나오는 것처럼 자케오는 부자였습니다열을 그냥 열로 가진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세리가 거쳐야 할 과정을 다 거쳐서 ‘온전한 깨끗함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부자였던 그의 소유가 무엇이었다고요?  ‘이었습니다그런데 그가 그 열의 절반을 ‘프토코스(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답니다

열의 절반은 다섯이지요그런데 만약 자기가 그 다섯으로 속인 일이 있으면 충만한 넷으로 넘겨 주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속이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쉬코판테오입니다그 의미는 ‘거짓으로 고소하다인데 그 단어는 ‘쉬콘(무화과)’ ‘화이토(보이다)’의 합성어입니다. ‘무화과로 보여주다라는 말입니다다섯을 이파리만 풍성한 율법(무화과)으로 전해주어 거짓으로 그 상대방을 고소한 일이 있으면 이제 충만한 넷(테트라플로오스)으로 넘겨 주겠다는 것입니다자케오가 넷으로 넘겨줄 수 있는 순결한 사랑의 사자가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자케오의 에피소드 말미에 이런 말을 하십니다. ‘나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그를 구원하러 왔다.’ 여기에서 ‘잃어버린이라고 번역이 된 ‘아폴뤼미 ‘완전히 파괴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완전히 육을 파괴당한 세리 같은 자들을 찾아서(제테오그들을 구원하시는(소조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에 이른 자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어떻게 환난과 기근과 핍박과 역경과 헐벗음과 위험과 칼로 작용을 하겠으며 어떻게 그것이 하느님과 그들 사이에 구렁을 만드는 일이 될 수 있겠느냐는 그런 말입니다그러니까 말씀을 어떻게 듣고 어떻게 읽느냐는 사활이 걸린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더욱더 진지해지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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