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聖女 손소벽, 聖女 이경이님의 순교 (순교일; 1월3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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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태욱 | 작성일2021-01-31 | 조회수85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Magdalena)는 1839년 12월 29일에 순교한 최창흡 베드로(Petrus)의 아내요, 최영이 바르바라(Barbara)의 어머니이며, 조신철 카롤루스(Carolus)의 장모이다. 그녀는 신앙 때문에 먼 곳으로 귀양을 간 어느 열심한 신자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녀는 오랫동안 신자가 없는 지방에서 살았고 또 견디기 힘든 박해를 당했기 때문에 감히 교우들과 상종하지 못하다가, 늦게야 성교회의 참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후 막달레나는 자녀 11명을 낳았으나, 대부분이 어려서 죽고 맏딸 바르바라와 두 살짜리 작은 딸만 남았다. 손 막달레나 가족은 콜레라가 창궐하던 1821년경에 세례를 받았고, 선교사들이 입국한 후부터는 더욱 신앙생활에 열심하여 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포교의 손을 피하기 위하여 여러 친척들과 같이 숨어 있었으나 결국 남편과 딸과 함께 잡혔다. 그런데 사위인 조 카롤루스가 중국에서 가져온 교회 물건들이 그녀의 집에서 압수되었기 때문에 포장은 7회에 걸쳐 엄한 심문과 형벌을 가하였다. 포장은 태장 260대를 때리고, 여러 번 주리를 틀어보았으나 그녀의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또다시 포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 목숨은 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제게 주신 천주의 것이니 그분만이 아무 때라도 그것을 도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주재하시는 천주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면 죽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가엾은 어린 것이 공기도 부족하고 햇볕도 먹을 것도 없는 곳에 있는 것이 어머니 된 마음에 언짢고 또 용기가 꺾일지 몰라 어린 딸을 품에서 떼어내어 읍내에 있는 친척집에 보냈다고 한다. 막달레나는 형조로 이송되어 또다시 심문과 고문을 받았으나, 그 전과 같이 변함없는 용기를 보여 바로 그날 사형이 언도되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남편이 순교한 지 1개월 정도 후인 1840년 1월 31일에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40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성녀 이경이 아가타는 원래 천주교를 믿는 시골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고, 장성한 후에는 궁녀를 감독하던 내시에게 속아서 출가하였지만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로부터 그 결혼은 교회법상 무효라는 선언을 받았다. 그래서 남편과 헤어졌지만 친정어머니가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한영이 막달레나(Magdalena)와 그녀의 딸인 권진이 아가타의 집에 의지해 함께 살았다. 이 아가타는 같은 처지이던 그들과 함께 항상 기도하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포장은 그들의 성명을 물은 다음 같이 잡힌 한 막달레나만 옥에 가두고 권 아가타와 이 아가타는 이웃집에 남겨두고 지키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들을 감옥에 가두지 않은 이유가 밝혀졌는데, 배교자 김여상이 찾아가서 권 아가타를 감언이설로 꾀어 함께 도망치려 했기 때문이었다. 포졸들은 이러한 사실을 막기 위하여 이 이가타를 풀어주었다. 여러 포졸들을 귀양 보내고, 그들을 다시 체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아가타와 권 아가타는 서울의 어느 초라한 신자 집에 숨어 있었는데, 함께 탈출했던 여종이 먼저 잡혀서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주어 다시 붙잡히게 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형조로 옮겨져서도 새로운 심문과 고문을 당하였지만 순교의 의지를 더욱 굳혔을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고, 1840년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27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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