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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4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2-03 조회수1,082 추천수1 반대(0) 신고

 

 

세상에는 지식은 풍부하지만 지혜는 부족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지혜는 풍부하지만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있습니다. 둘 다 풍부하면 좋겠지만 만약 굳이 하나만을 선택하자면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라지겠지만 저는 지혜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지식은 단순한 노력만으로도 얼마든지 얻을 수가 있습니다. 지식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얻을 수가 있지만 지혜는 그런 노력으로 인해 얻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지식도 있으면 좋겠지만 지식이 없어도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는 지식과 영역이 조금 다른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지식도 필요하지만 지식보다 활용도가 높은 게 지혜입니다. 바로 삶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따르는 데는 신학적인 지식이 필요할까요? 신학적인 지식이 없어도 얼마든지 하느님을 잘 섬길 수가 있습니다. 영혼이 맑고 깨끗하면 됩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 지식을 잘 이용해서 선용하면 좋은 유익을 내지만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지식이 독이 될 수가 있을 겁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도 들판에서 일하는 촌부가 어쩌면 더 성인이 될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역설적인 표현일 겁니다.

 

하느님을 아는 데에는 지식도 중요할 수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깨끗한 양심입니다. 또 선한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로부터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과 지혜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으면서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런 기적과 지혜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과 무시로 일관하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났겠습니까? 또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건 바로 사람들의 잘못된 고정관념과 편견 때문일 겁니다. 그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기적은 차치하고서라도 놀라운 지혜를 보여주셨는데도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눈으로 직접 보고 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예수님을 예전의 모습인 목수의 아들이라는 그런 모습만을 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하나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사람은 항상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남긴 말을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자주 남을 판단한다. 누구는 선인이고 누구는 악인이고 누구는 어리석은 사람 또 누구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사람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다. 날마다 똑같지 않다. 어리석은 사람이 현명해지고 악한 사람이 선해지고 또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판단하는 순간에도 그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을 수가 있다.

 

톨스토이의 말처럼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과거 예수님의 모습만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 환경에 사고가 고정된 것입니다. 아무리 목수의 아들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었다고 해도 지금 변화된 모습 즉, 지혜가 풍부하신 모습이라든지 이런 결과가 눈에 보이면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들은 그들 눈으로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은 고정관념이 무서운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또 하나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쳐주시는 기적밖에는 다른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고 나옵니다. 이 말씀을 좀 다른 시각 역발상을 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단순히 몰라주고 존경하지 않아서 기적을 베풀지 않으신다고 보는 것보다 역으로 여기서 표현된 기적은 또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은총과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은총은 은총을 받을 그릇이 되지 않으면 그저 누릴 수 있는 은총도 오늘 복음을 보면 스스로 거부하는 것과 마치 흡사합니다. 이런 것도 어떤 사물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혜안이 부족해서 생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혜안이 풍부하다면 올바른 시각으로 판단을 할 수가 있고 또 예수님을 더 잘 받아들일 수가 있었을 겁니다. 혜안이 풍부하려면 세상적인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하느님의 말씀과 훈육을 잘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밑바탕 없이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그럴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항상 우리의 행동거지 하나하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성찰해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말씀에는 말씀 그 자체에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이 우리를 채찍질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채찍질이 지금은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할 수가 있지만 이건 오늘 제1독서에도 나오지만 나중에는 이런 훈육이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준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훈육이 장기적인 면에서는 풍부한 지혜와 혜안을 갖출 수 있는 첩경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과정에서는 오늘 독서에서도 나옵니다만 그걸 우리는 슬픔으로 여길 수 있지만 장차 그건 의로움이라는 열매가 맺어지고 그 의로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해 줄 거라고 봅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을 뵙지 못한다고 하셨고 하느님을 뵙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런 훈육을 감내해야 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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