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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낱 체면 때문에 살인자가 된 헤로데 대왕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2-05 조회수1,171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저는 예전에는 그냥 흘려서 본 복음인데 막상 묵상글을 쓰기 위해 보다 보니 참으로 무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위신과 체면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헤로데 왕은 세례자 요한을 죽이게 합니다. 이런 비극의 발단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일 근본적인 원인은 한 사람의 앙심이었습니다. 그 다음 원인은 헛맹세였습니다. 그 다음은 헛맹세를 한 것에 대한 왕으로으서의 체면과 위신을 지키려고 하다가 결국 한 사람의 귀중한 예언자의 목숨을 거두어가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큰 줄기입니다.

 

그럼 좀 더 복음의 스토리를 자세히 한번 살펴보면서 따져보겠습니다. 먼저 헤로데 왕은 자기동생의 아내를 취했습니다. 이에 대해 요한이 도덕적인 선생 노릇을 했습니다. 그건 도덕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여러 차례 왕에게 진언을 했습니다. 이에 헤로디아가 앙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왜 앙심을 가지게 된 건지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시숙의 여자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 자리가 그냥 단순한 평범한 사람이였다면 그렇게까지 앙심을 품지는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건 자리가 보여주는 신분 때문에 한마디로 왕비가 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앙심을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앙심이 최후에는 살인으로 이어지는 참담한 결과가 발생했습니다. 헤로디아가 앙심을 품고 요한을 죽이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근데 일은 이상한 데서 사단이 난 것입니다. 자기 생일날에 유지들과 고관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베풀다가 헤로디아의 딸이 그러니까 의붓딸이 잔치의 흥을 돋구었는데 그때 헤로데가 그만 그 여흥에 젖어 허언과 어처구니없는 맹세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단순히 자기 생일날에 잔치 분위기를 흥겹게 흥을 돋구었다고 해서 의붓딸에게 자기 왕국의 절반이라고 주겠다고 맹세하는 그 맹세가 얼마나 어이가 없는 맹세이지 않겠습니까? 근데 이 맹세가 비극으로 갈지 어찌 알았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불똥이 헤로디아 여인에게 자신의 의붓딸이 자신의 엄마에게 어떤 청을 할까? 라고 청하는 말에 요한의 목숨을 요구하게 될 줄을 말입니다. 이런 청을 요구하자 헤로데는 복음에서 보면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연출이 된 것입니다. 이젠 복음에서 한걸음 나와서 일반적인 상식을 가지고 한번 살펴봤으면 합니다. 보통의 상식이라면 아무리 왕이지만 맹세를 했다고는 하지만 이건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청은 들어줄 수가 없고 다른 청을 들어주겠다고 하는 게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근데 헤로데는 그런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했습니다. 바로 자기가 한 허언과 같은 맹세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왕이라는 위치에서 한 맹세이기 때문에 왕의 체면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 상황이 그냥 단순히 왕과 왕비, 딸 이런 주변관계에서만 일어났다면 그와 같은 비극이 아마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요는 그때 손님들이 주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있었기에 체면을 구기지 않으려고 했던 게 화근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런 체면도 남과 주변을 의식했기 때문에 소중한 생명을 잃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은 세 가지가 원인이 된 것입니다첫째는 앙심, 둘째는 허언, 셋째는 체면입니다. 요한을 죽이게 한 가장 큰 요인은 체면일 것입니다. 원인 제공은 헤로디아가 했지만 최종적인 책임은 헤로데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알량한 자존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체면은 자신의 위신이 떨어질 때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입장을 잠시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작용하는 것입니다. 왕으로서의 위신은 왕으로서의 위엄과 신망입니다. 그런 위치에서 위엄과 신망은 외적인 요인에 의해 평가되는 게 아닐 것입니다. 왕 스스로 자신이 왕으로서의 위엄과 신망이 우러나올 때만이 진정한 위신이 서게 되는데 되려 외적인 환경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위신이 추락한 결론이 났던 것입니다.

 

저도 솔직히 고백하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어리석은 짓을 자주 하게 됩니다. 바로 남을 의식한다는 것입니다. , 신앙생활을 하면서 타인의 평가를 많이 신경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할까 말입니다. 결국 신앙생활도 자신의 인생의 일부분입니다. 너무 남을 의식해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정작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본질을 놓치는 우를 범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오늘 헤로데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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