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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1.02.06)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1-02-06 조회수1,118 추천수5 반대(0) 신고

(안동 교구 순교 사적지, 상주 옥 터 성모상)

2021년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복음 마르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성지순례나 여행을 가게 되면 많은

사진을 찍습니다. 제가 방문한 곳에 대한

기억을 위한 것이지요. 사실 너무나

좋았던 곳을 찍기도 하지만, 반대로

최악의 장소 역시 기억하기 위해서

사진으로 찍습니다.

언젠가 글을 쓰기 위해 충청도의 어느 펜션에

23일 동안 묵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펜션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가격은 저렴했지만, 너무 작았고 또 지저분했습니다.

여기에 계속 비가 멈추지 않고 와서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방안에만

머물러야 했지요.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또 이렇게 방에만 있으니 사진 한 장

찍어놓지도 못했습니다.

둘째 날 밤이었습니다. 창밖을 보니

비가 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펜션의 조명에 아주 멋져 보였습니다.

사진기를 들고 나가서 야경을 찍었습니다.

며칠 뒤, 인터넷에 올린 이 사진을 본

어떤 지인이 장소를 묻습니다.

자신도 가 보고 싶다면서 말이지요.

23일 동안 최악의 시간을 보낸 곳인데,

누구는 사진 몇 장만을 보고서는 가 보고 싶어 합니다.

사진 몇 장만으로 그 장소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의 단편적인 지식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과 살아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을 보고서 하느님을

판단하고 때로는 불평불만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 곁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놀라운 기적과

힘이 되는 말씀으로 인해서 예수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고

복음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어려움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습니다.

마치 맡겨둔 것을 찾아가는 사람처럼

예수님을 찾아왔고, 심지어 어디를 갈 것 같으면

미리 가서 기다릴 정도였습니다. 개인의 사생활은

전혀 보장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안 다면 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들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해도 해도 너무하네.”

라면서 화를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이기적인 우리의 사랑과 달리, 무조건적인

주님의 사랑이 크게 비교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나 자신의 말과 행동만을 드러내면서

욕심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주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의 품 안에서

참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인생이란 결코 공평하지 않다.

이 사실에 익숙해져라.(빌 게이츠)

공감의 마음

중학생 딸이 펑펑 울고 있습니다.

아빠는 다가가서 왜 우는지를 물었지요.

딸은 아빠에게 남자친구가 그만 만나자는

통보를 했다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자기는 그만 만날 생각이 전혀 없는데,

여전히 남자친구를 좋아하는데

이별 통보를 받으니 너무나 화가 나고

슬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빠는

어떻게 말해줘야 딸이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이 아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나쁜 놈이 있나. 울지마.

네가 아까워. 그냥 훌훌 털어버려.”

아빠 말처럼 훌훌 털어 버리기가 쉬울까요?

불가능한 말은 오히려 거리감만 줄 것입니다.

딸이 자신의 슬픔을 아빠에게 말했다는 것은

그만큼 아빠가 공감해주길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한 심리학 연구에 의하면 친밀한 사이일수록

상대방이 공감을 더 많이, 더 강하게,

더 정확하게 해주길 기대한다고 합니다.

아빠는 딸의 슬픔에 공감해주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러나 해결책을 이야기하니 거리감만

더 생겼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이웃의 말에 해결책을 먼저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공감인데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공감의 마음이었습니다.

(안동 교구 순교 사적지, 상주 옥 터 순교자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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