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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5주일 복음을 묵상하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2-06 조회수981 추천수0 반대(0) 신고

 

다음 포탈에서 기사 하나를 봤습니다. 비닐을 사이에 두고 노부부가 허그를 하는 장면입니다. 생활보호시설에서 치매에 걸려 머물고 있는 남편을 껴안는 장면입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8개월 만에 만나 이것도 마이어라는 단체에서 팬데믹으로 인해 서로 소통을 할 수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한 과정에서 비닐을 통해 그 사이로 손을 넣어 서로 허그를 할 수 있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비닐을 통해 바이러스는 차단을 시킬 수가 있지만 그들이 8개월이라는 시간을 떨어져 재회를 하면서 비록 비닐 때문에 살을 맞닿은 접촉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그래도 얼굴을 보며 비닐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체온은 느낄 수가 있었을 겁니다.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코로나는 침투할 수 없었습니다. 마이어 단체가 말을 하기를 그 노부부 사이에 가로막힌 비닐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행복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이 연상이 됩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시고 여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그러자 열병이 치유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손을 잡지 않으시고도 충분히 그 여인의 병을 치유하실 만한 충분한 기적을 일으키실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인의 손을 잡으셨을까요? 부인이 일어난 것에는 부활을 상징하는 성경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요 저는 그런 걸 차치하고서라도 이런 걸 묵상해봤습니다.

 

부인의 열이 예수님의 손을 통해 예수님께로 전달되어 열병이 가시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서로 반가움의 표시로 악수를 하곤 합니다. 손의 접촉을 통해 살갗으로 전해지는 촉감을 통해 따뜻한 인간적인 정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부인의 병이 나은 것은 예수님께서 부인의 병을 감싸 안은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게 사람의 눈에는 그저 열이 달아난 것처럼 보일 수가 있고 또 그렇게 느낄 수가 있을 겁니다. 복음은 단순히 부인이 시중을 들었다는 사실만 언급을 하고 전혀 다른 이야기로 전환이 됩니다. 전체 복음의 내용을 봤을 때 이런 사실은 어쩌면 사족과도 같은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 뭔가 숨은 의미가 있을 거라고 보여집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왜 그런 추리를 했는지 한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겠습니다. 이 이야기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병과 마귀를 몰아내시고 난 후에 외딴곳에서 기도를 하신 후에 또 다른 마을로 복음을 선포하러 가십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병을 고쳐주시는 것도 하나의 복음선포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단순히 성경적인 구원의 소식만을 전하시는 것만 복음선포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그런 치유의 기적을 통해서 어쩌면 그게 그 당시 사람들의 굳어진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단초가 되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단초가 되었다면 그것도 넗은 의미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것과 동일할 것입니다.

 

다른 곳에 가셔서 또 복음을 전해야 하신다고 하신 말씀 속에도 이런 의미가 조금은 숨어 있지 않을까요? 그건 어디까지나 저의 상상일 뿐입니다. 허나 여기서 오늘 제2독서와 병행해서 이 부분을 다시 한 번 더 묵상해보면 이런 뜻도 숨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복음선포의 일이 그저 남에게 자랑을 할 만한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말을 합니다. 자신은 이런 걸 자신의 자유의사로 하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해석을 하면 강제적인 힘에 의해 한다는 말과 같을 겁니다. 근데 이때의 강제적인 힘은 외부의 강압적인 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것이라 거부할 수 없는 그런 강제적인 힘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세상에는 일을 하면 반드시 그 일, 노동에 대한 대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건 당연한 사회의 논리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보시다시피 자기가 복음을 선포하는 일로 인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만약 받게 되는 삯이 있다면 그 삯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그저 복음을 전하는 것밖에는 없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에도 나옵니다만 자신은 많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려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려고 스스로 자처했다고 나옵니다. 이런 일을 함에도 하느님과 어떤 조건을 걸고 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한 몸을 복음전파라는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바쳤고 오로지 그 어떤 대가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 일을 한 것에 대해 한토막이라도 자신의 일에 대해 생색을 낸 적도 없습니다. 그렇게 철저히 자신의 일생을 복음전파에 독서 마지막에 나오는 표현처럼 동참했을 뿐입니다.

 

그럼 다시 복음으로 되돌아가서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가 앓았던 열병을 치유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하신 모습을 보시면 아무런 언급도 없으십니다. 예를 들어서 치유를 해 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라는 둥 그 어떤 생색도 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지금도 저의 신앙은 아직까지는 철부지 신앙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 일이라고 본당에서나 아니면 어떤 명목으로 하느님 일을 한답시고 겉으로는 겸손한 모습을 하지만 속으로는 진정한 겸손으로 일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것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일 겁니다. 누구나가 한 번쯤은 다 이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누구나 하느님 일을 한답시고 봉사를 하거나 하면 칭찬이나 좋은 평판에 귀가 쏠리는 것은 십분 이해가 되지만 이것도 초보 신앙일 때는 당연히 그럴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아기일 때는 유아식을 해야 애가 소화를 시킬 수가 있습니다. 유아식을 해야 할 때 성인이 먹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 이치와 동일할 겁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남의 평판에만 의식을 하는 생활로 하느님 일을 한다면 그건 성인이 되어서도 젖병을 빨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몰라줘도 하느님만 알아주시면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하는 성숙된 신앙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누구나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에 이게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런 수준을 뛰어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고 그래야 진정 하느님의 어엿한 아들, 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십자가 성 요한은 진짜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설령 하느님께서 자신이 하느님을 위해 한 일조차도 하느님께서 기억을 하시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마저도 개의치 않는 영혼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에서처럼 남남으로 부부라는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도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몸이고 법적으로 이혼을 하면 남남이 되는 그런 관계이지만 부부로 맺은 몇 십년간의 그 부부의 정이 한낱 비닐 조각을 사이에 두고 비록 서로의 살갗은 직접 맞닿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 사이로 흘러내리는 행복의 눈물 속에 있는 부부의 따뜻한 사랑만큼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도 이 부부가 나누는 이런 사랑처럼 우리와 하느님과의 사랑도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베드로의 장모가 앓은 열병이 가시는 것처럼 몸소 우리 자신이 남의 아픔을 껴안을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건 그 어떤 마귀와 악마도 방해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비닐 사이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통과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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