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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빛을 진 사람? (로마8,12-1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2-07 조회수1,004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 2. 7. 도란도란글방

(공동번역성서)

빛을 진 사람

(로마8,12-16)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과연 빛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빛을 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 의무는 없습니다. 13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14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을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 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아멘


 하느님의 그 말씀을, 성경을 세상의 법 수준으로 이해를 해서 육신이라는 도구를 갖고 그냥 열심히 행해버리면 그것이 바로 자기를 스스로 율법으로 묶는 종의 영이 되는 거고요.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아들로 창조해내시는 그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 알게 되면 그것이 바로  아들이 되게 하는 말씀, 진리를 받은 것이다, 그 사람을 아들이라고 이렇게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아들로 낳게 한 그 아들 안의 그 진리의 말씀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것을 가진 이를 또 아빠 아버지이렇게 부르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에 의해 아들이 된 자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아고라는 그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그랬죠?

아고인도하는 이라고 그렇게 한글 성경에는 기록해 놨는데 그건 굉장히 점잖은 표현이고 꽁꽁 묶어서 가기 싫어하는 그런 이를 꽁꽁 묶어서 억지로 끌고 가는 거 이게 아고 이지요. 그래서 아고, 아고곡소리가 나는 거예요. 끌고 가는 거죠. 하느님이 십자가로 끌고 가요. 그래서 곡소리가 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넌 후에 광야라는 길을 40년간 그렇게 꽁꽁 묶여서 질질 끌려 다니다가 결국에는 가나안으로 입성하게 되는 그 이스라엘의 광야인생, 그것을 떠올리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 40년간에 이스라엘의 1세대가 다 죽죠? 하늘에서 떨어진 하늘의 양식에 맞아 죽는 겁니다. 모형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그 애굽의 장자스러움 이것을 애굽에서 다 뺏기고 나오는 거예요. 원래가. 그래서 어린 양이 애굽에서 죽자 애굽의 장자들이 모두 죽죠? 그거는 하느님이 겁 줘갖고 이스라엘을 풀어주려고 그런 장치를 거기에다가 그렇게 설치 해놓은 게 아니라 너희들이 어린 양 안에서 이렇게 애굽의 장자 됨을 죽이지 않으면 절대 이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못 나간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장자가 다 죽자,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나와서 광야인생 기간 동안에 몸으로 그 애굽의 장자스러움이 죽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거예요. 그리고는 거기서 1세대가 죽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양식, 그것으로 새로 난 자. 광야에서 난 자들만 새 사람이 되어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그런 그림을 보여주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미 애굽의 수치는 다 굴러간 거예요. 하느님이 거기서 끄집어냈기 때문에. 그렇지만 길갈에서 또 할례를 하라고 그러면서 몸으로 그 수치가 물러가는 게 어떤 것인지, 그 할례라는 건 육적죽음이에요. 생식기를 자른다는 건. 그런 의미가 있거든요. 생명을 절단해버리는 거거든요. 그것을 이렇게 경험하게 하는 게 이스라엘의 40년 인생 이였습니다.

마찬가지에요. 여러분이 진리를 알고 아들이 되어도 그걸 우리가 몸으로 알아야 돼요. 배워야 되기 때문에 그것을 아고의 삶으로 하느님이 이렇게 끌고 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힘들다고 그랬죠? 그러나 그러한 하느님의 그 구속, 하느님이 꽁꽁 묶어버리는 거, 진리로 꽁꽁 묶어 버리는 그것이 진짜 자유라고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꽁꽁 묶어서 당신이 정하신 목적지, 진짜 생명이 있는 곳, 그러기 위해서는 가짜 생명, 육적 생명이 죽어야 된단 말이에요. 이 육체의 호흡을 뺏겨야 된단 말에요. 그래서 그렇게 꽁꽁 묶어서 당신이 정하신 목적지로 끌고 가는 게 그게 진짜 자유라고 그랬잖아요. 그게 진짜 풀려나는 거거든요. 그 자유. 그 자유는 그리고 반드시 생명을 출산해내게 되어 있는 거죠.

그 논리를 뒷받침 해주는 단어가 노예의 영, 앞에 붙어있는 그 무서워하다, ‘프호보스라는 그 단어에요. 노예()의 영, 즉 율법적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마음의 근저에는 반드시 그 프호보스’, 두려움이라는 것이 그 신앙행위의 동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종의 영이에요. 율법적으로 뭔가를 열심히 행해서 결과물을 내어놓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그 마음의 根底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거예요. 무서워서. 아니라고 해도 사실은 그렇다는 얘기죠.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왜 그리스도인이 되셨어요? 천국가기 위해서, 바꾸어 말하면 지옥 가기 싫어서죠? 그러면? 그게 무엇 때문이에요? 두려움이에요. 그거요. 그걸 바오로가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자라고 한다니까요. 예수는 지옥 가는 게 무서워서 믿는 게 아니에요. 물론 시작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거기에서 한 발 더 올라서셔야 되는 겁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은혜에 감사한다, 아무런 보상도 필요 없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기실 그 행위의 동기는 두려움인 사람들이 태반이에요. 그래서 결국에는 그 두려움을 에너지 삼아 열심히 일하다가 그걸 시킨 그 하느님을 미워해요. 마음속으로. 불편해요. 그래서 천국에 가면 그 영감은 좀 없었으면 좋겠다, 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니까요. 내가 주인공인 천국. 그걸 기다리는 거예요.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히브2, 15) 15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진리는 죽기를 무서워해서 일생에 이렇게 매여서 종노릇하는 그런 자들을 그렇게 풀어주는 거라는 거예요. 풀어, 풀려나게 하는 거라는 거죠. 여기서 죽다, 라는 단어가 다나토스예요. 그 다나토스는 좋은 죽음이죠. 말씀의 완성. 무르트의 죽음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내가 말씀의 완성으로 죽으면 나의 존재성이나 주체성은 상실되는 거거든요. 그렇잖아요? , 은혜, 그 사랑이지? 그것이 생명이지? 내가 내놓는 이런 것들은 하느님이 가치있게 여기시는 게 아니지? 라고 죽으면 그걸 다나토스라고 하는데 그걸 인생들이 무서워한다는 거에요. 그게 푸호보스, 오늘 본문의 그 단어와 똑같아요. 무서워. 죽는 게 무서워요. 그렇게 그 죽는 게 다나토스로 죽는 게 무서워 그냥 억지로 율법적 행위를 내놓는 그들을 종이라고 한단 말에요. . 진리는 그러한 종들을 풀어놓아주는 거라는 거예요. 그 다나토스로 죽는다는 것을 무서워한다는 게, 그냥 말 그대로 육신의 숨을 놓는 그 죽음이 무서워서, 죽는 게 무서워서 종노릇 한다, 그런 말이 아니라 다나토스의 죽음은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의 육적 자아가 부정되는 죽음이잖아요.

그런데 이 세상,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아담안의 인간들은 그렇게 자기가 하느님 앞에서 자기의 그 꼬리로, 육적 꼬리로 열심히 일을 해서 내어 놓는 그것에 의해 하느님은 나를 상을 주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곳을 이렇게 선물해 주기도 한다, 라는 그런 인과율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내가 다나토스로 죽어버리면 내가 하느님께 내놓을 게 없다는 걸 인정해버리는 거잖아요? 그러면 불안해한다니까요. 그걸 푸호보스두려움 이라고 하는 거예요.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시간 들여서 교회에 와서 그냥 죽도록 일하고. 집은 아주 그냥 쓰레기장 만들어 놓고. 무서워서. 그런데요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아들이 되지 못한 자, 진리로 아들이 되지 못한 자들의 그 열매들, 그들의 업적 이런 것들은 쳐다보지도 않으세요. 하느님의 눈에는 종은 안 보여요. 아들만 보여요. 당신의 진리를 품은 아들만 보이기 때문에 그러한 세상 속 열매들은 하느님이 안 보신단 말입니다. 그 무서워하다, 푸호보스라는 그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이 있는데, 보세요.


(요일4,18)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 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 두려움으로 신앙생활 하는 자들은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룬 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완전하게 마음으로 가진 그들은 절대로 그 두려움을 근거로 하여 열심을 내는 그런 엉터리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그런 뜻이에요. 진리는 그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 그 인간의 자존심과 가능성을 몰수당하는 그 다나토스에 대한 그 두려움의 결박을 끊어낸다는 말이에요. , 이렇게 죽는 게 맞지? 이렇게. 두려운 게 아니라니까요. 그거는. 이게 맞지, 하고 인정을 하게 한단 말에요.


(갈라4,7) 7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인 것입니다.

상속자, ‘클레로모노스’. 원문에는 디아 크리스토스 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말이 붙어 있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의 상속자라는 거예요. 아들이에요. 종이 아니란 말에요. 그래서 그 안에 진리의, 그 생명의 말씀이 상속 물로 들어가 있어요. 생명이 들어가 있어요. 그 안에. 그건 아버지의 생명이에요. 아버지의 말씀이거든요. 아버지의 생명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 껍데기는 죽던지 말든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세상에 대하여 죽고, 세상이 나에 대하여 죽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니까요. 진짜 생명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 다나토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여전히 율법적 신앙생활만 하고 있는, 그렇게 종노릇만 하고 있는 그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이 맞겠느냐 라는 그런 말입니다.

살았다, 라는 건 , 나는 죽은 자구나를 아는 게 산거거든요.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난 죽은 자구 나를 아는 게 사는 거니까. 그렇게 산 자들은 그렇게 죽는 게 당연하다는 걸 안단 말이에요.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니까요. 이게 내 실체가 맞아, 라고 인정하게 된단 말에요. 그래서 무서워하는 프호보스, 종의 영 그거 받으면 안 된다.

영이라는 것은 말이니까. 말이요 생명이다, 그랬으니까. 영은. 그런 무서워하는 종을 만들어버리는 그런 말, 그걸 복음으로 듣고 거기에 묶여 갖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억지로 살아가는 그런 거, 거기가 지옥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그래서 그렇게 종노릇만 하는 자들이 가는 곳을 성경이 이렇게 묘사하고 있어요.


(묵시21,8) 8 그러나 비겁한 자와 믿음이 없는 자와 흉측스러운 자와 살인자와 간음한 자와 마술장이와 우상숭배자와 모든 거짓말장이들이 차지할 곳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죽음이다.'

바다(호수)인데 물이 없고 불이 있어요. 불로 가득 찬 곳. 그들은 그걸 좋아해요. 그래서 성경을 율법으로만 보는 사람들은 다 뜨거워. 그냥 뜨거워요. 아주. 원래 냉정이라는 게 차갑고 깨끗하다는 뜻이거든요. 냉랭해야 되는데, 원래 그런데 다 뜨거운 것만 좋아해요. 그래갖고 그냥 뜨거운 걸 내놓으려고 그래요. 기도도 뜨겁게 하고 예배도 뜨겁게, 찬송도 뜨겁게. 해갖고 유황불 못으로 가는 거예요. 그렇게 뜨거운 거 좋아? 거기에 보내줄게 이러고 유황불 못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거죠.

이건요 이 세상과 구원받지 못한 아담들의 終局. 결국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지금도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한 거예요. 그 불 못의 현실은. 그 율법의 종살이, 그 세상 풍조의 그 종살이. 거기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야 되고 어떻게 해서든지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라는 이 압박감에 무서움과 두려움 속에서 그 무거운 짐으로 살아가는 그곳이 불 못이에요. 치열한, 뜨거운 곳,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가 불 못인지 몰라요. 불 못이라는 건 진리의 생수를 닮은 그 진리의 우물과 대조되는 개념이에요. 거기에 쓰이는 립네이 못, 호수라는 단언데 바다에도 이 단어를 쓰더라고요. ‘립네라는 그 단어가 신약성경에도 몇 번 나오는데 그 단어가 쓰인 곳이 군대 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가 빠져 죽는 그 호수, 거기를 바다라고도 그러고 호수라고도 그러고 못이라고도 하는데 그게 립네에요. 불 못.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가장 부정한 짐승이라고 여겼던 게 돼지거든요. 그래서 탕자도 세상에 나갔더니 아, 여기 돼지우리네 하고 깨닫고 온 거예요. 그리고 나는 돼지네. 그리고 돼지들과 쥐염 열매, 그 돼지 먹이를 치열하게 경쟁하는 그런 인간이 나구나, 하고 알고 온 거예요. 그러니까 그 돼지 떼 안에 귀신, 귀신이라는 말이 원래 한문으로도 귀() 라는 게 모르는 신()은 아는 신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냥 좋은 말이에요. 원래가. 그런데 그걸 뭐 이상한, 입에 케첩 흘리고 머리 길고 머리도 안 깎고 나온 그런 처녀귀신 이런 걸 자꾸 떠올리셔서 그런데 귀신은 푸뉴마 다이모니온, 나쁜 말. 그것이 담겨져 있는 자들이 돼지들인 거예요. 만군의 하느님이신 그 군대가 아닌 저쪽 다른 군대, 그 나쁜 말 그걸 가진 돼지 떼들이 거기가 사는 곳인 줄 알고 그곳에서 열심히 자기 꼬리로 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게 진짜 사는 것인 줄 알고 거기서 열심히 사는 거 이게 엉뚱한 귀신을 품고 거기에서 죽은 돼지로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세상의 모습인 거예요. 그거를 립네라 그래요. , 이라 그래요. , 불 못 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 돼지 떼 안의 그 비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나를 떠나세요. 그런다니까요. ? 죽기가 두려우니까 그래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받아들이면 내가 죽는 거기 때문에 나를 떠나세요. 그런다니까요. 무서워서. 그래놓고는 그 진리가, 그 생명이 있는 반대쪽으로 립네’, 불과 유황 못으로 달려가더니 거기로 퐁당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한군데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풍랑이 이는, 광풍이 이는 연못, 게네사렛 호수를 건너가시죠? 그 때도 립네라고 써요. 성경에서 못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로 나오는데 이 저주의 바다, 이 유황 볼 못 이런 심판의 바다, 이런 것을 설명하려고 할 때는 립네라고 쓰고 그렇지 않을 때는 다른 언어를 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몇 번 안 나오는 그 단어가 요런데서 쓰인단 말에요. 광풍이 이는 그 바다, 유황 불 못, 그 립네. 그 립네에서 제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는지 한 번 보세요.


(루가8,23-25) 23 일행이 호수를 건너 가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는 잠이 드셨다. 그 때 마침 뭍으로부터 호수로 사나운 바람이 내리불어 배(성전)에 물이 들기 시작하여 사람들이 위태롭게 되었다. 24 제자들은 예수께 가서 흔들어 깨우며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과 사나운 물결을 꾸짖으시자 바람과 물결이 잔잔해지고 바다가 고요해졌다. 25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다 어떻게 되었느냐?' 하시며 책망하셨다. 그들은 두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도대체 이분이 누구신데 바람과 물결까지도 그 명령에 복종하는가?' 하고 서로 수군거렸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그 저주의 광풍의 바다와 아무 상관없는 존재라는 뜻이에요. 너무 잠이 부족해서 피곤해서 주무신 게 아니라 그걸 보여준 거예요. 요나도 마찬가지에요. 광풍이 이는 바다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운반하는 그는, 그 아들은 그 광풍과 아무상관 없는 자로 자는 거예요. 자는 게 뭐냐 하면 거기에 대해서 죽었다는 거예요. 성경은 잠을 잔다, 라는 걸 항상 죽음을 메라포(비유) 하는데 쓰니까. 죽은 자라는 거예요. 그런데도 못 알아먹어. 그거 몰라? 그래 그게 이거야. 이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그 배 안에서 그 성전 안에서 잔다, 라는 건 이거야. 라고 보여준 게 저주의 바다 속에 빠트려서 그 바다 속에서 죽은 자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보여줄 건 요나의 표적밖에 없어, 라고 해 놓고는 그 배에서 요나처럼 주무시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죽는 거야. 신앙이란 그런 거야. 진리를 담은 아들은 그런 거야. 라고 보여준 거란 말입니다. 베드로가 다음 날 참수당하는 날인데 그 전날 감옥에서 쿨쿨 잤죠? 하느님의 아들은 이 감옥, 이 지옥 같은 이 세상에서 그 죽음에 대해 죽은 자라는 걸 보여주는 거지 베드로가 내일 죽을 사람이 미련하고 둔해서 잠만 퍼질러 잔 게 아니라니까요. 완전히 잔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차는 그림까지 써놓은 거예요. 그게 아들의 삶인 겁니다. 고 이야기 바로 밑에 저주의 그 못, 립네로 돌진해서 빠져 죽는 고 군대 귀신 들린 돼지 떼 이야기가 붙어 있어요.

성경은 일관성 있는 네러티브로 기록이 되어 있어요. 성령이 편집했잖아요. 그러니까 아무 에피소드나 턱턱 붙여놓은 거 아니에요. 그래서 거기서 하나하나 빼서 거기서 교훈을 얻어 내라고 성경을 기록한 게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만을 차서 있게 설명한 거라니까요. 그래서 그 립네라는 단어가, 몇 번 안 나오는 단어가 붙어서 나온단 말에요. 이게 전부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란 말에요.

그 두려움은 저주의 바다에 빠져죽은 그 돼지들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자들의 것이다, 를 보여주는 거예요. 거기가 바로 유황불 못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르는 거예요. 그냥 자기들의 그 꼬리의 힘으로 열심히 살면 어떤 초월자가 그 속에서 가장 왕성한 꼬리의 산물을 생산해 낸 이들의 그 차서를 먹여서 그들이 좋아할만한 것으로 보여주고, 보내주고 또 상도 주고. 차서 있게 차별 있게 주고 하는 그런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여기고 그런 것을 경연하는 경건의 경연장. 열심의 경연장. 이런 거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다른 이들과 겨루어서 이겨내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분주히 움직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다른 사람보다 더 이뻐야 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나야 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돈도 많아야 되고 다른 사람보다 더 공부도 많이 해야 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자식도 잘 돼야 되고 이런 거 그게 유황불 못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도 그렇게 해요. 전부 그냥 무슨 팀들이 되어 갖고 저 팀보다는 우리가 더 잘해야지, 기도도 더 잘해야. 헌금도 더 많이 해야지. 선교도 더 잘해야지. 더 많은 열매를 결과물을 맺어야지,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 자체가 지옥입니다.

이 두려움의 불 못 이야기가 어디에서부터 이렇게 흘러 내려오는지 아세요? 이렇게 차서있게? 씨 뿌리는 자에서부터 이렇게 흘러내려 오는 거예요. 이 립네 이야기가. 아들의 이야기라니까요. 고 씨. 하느님의 말씀, 아들, 진리의 이야기에요. 그것이 되지 못한 자들에게 오는 게 이 두려움이다, 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가졌다 하는 이들이 그 두려움으로 살면 돼? 그 무서운 종노릇으로 이 신앙생활을 점철하면 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죠.


(루가 8,5-8) 5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서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가 쪼아 먹기도 하였다. 6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서 싹이 나기는 하였지만 바닥에 습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나무들이 함께 자라서 숨이 막혀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잘 자라나 백 배나 되는 열매를 맺었다' 하시고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하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씨는 후손이고 아들이고 자손입니다. 그리고 그건 말씀이에요. 성경입니다. 그런데 그 씨, 씨를 뿌리는 이가 있다는 거죠? 지금. 누가 뿌려요? 하느님이 뿌려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실수로 길가에 떨어트리거나 실수로 가시덤불에 떨어트리거나 실수로 바위위에다가 떨어트린 게 아니죠? 하느님은 그렇게 실수하시는 분이 아니니까. 하느님이 일부러 거기에다가 떨어트린 거라니까요. ? 필요해서요. , 그 씨는 우리를 반드시 아들로 만들어 내는 양자의 영으로 우리에게 와야 돼요. 종의 영, 비 진리로 우리에게 오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아들로 만들어 내면 그걸 성경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이라고 해요.

여기에서 백배라고 쓰인 이 헤카톤 티 플라씨온이라는 이 단어는 헤카톤이 백이고 플라쏘가 빚다. ‘야차르라는 히브리어를 이렇게 번역한 건데 빚다, 빚어내다, 만들다, 이런 뜻이니까 백으로 완성하다, 이런 뜻이에요. 백배가 아니라. 좋은 씨는 백으로 완성해 낸다는 거예요. 백으로 결실을 맺는다는 거예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백이라는 건 완성, 뜻을 이룸. 아들, 언약의 성취 등의 의미로 사용이 돼요. 히브리어로 성경이 기록될 때만 해도 아라비아 숫자는 없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단순히 그런 것은 숫자로만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면 안 되고 거슬러 올라가서 그것들이 어떤 의미로 쓰여 있는지도 아셔야 돼요. 몇 군데 찾아드리죠.


(창세11,10) 10 셈의 후손은 다음과 같다, 셈은 홍수가 끝난 지 이 년 뒤 그의 나이 백 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다.

창세기 10장에 가면 셈의 아들, 셈의 아들이 다섯 명으로 나와요. 그런데 여기는 셈의 아들이 한 명만 나오죠? 아르박삿 그리고 그 낳았다, 라는 동사가 야라드라는 동사가 히펠 동사로 쓰여 있어요. 그러니까 야라드라는 동사가 히펠 동사로 쓰이면 말씀으로 낳게 하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섯 명의 아들 중에 셈이 아들로 낳은 자, 진리로 낳은 자는 아르박삿 하나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그 때가 언제예요? 홍수 후 2. 왜 이런 말을 썼을까요?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어 홍해를 건너게 한 다음에 성막을 주시고 그 성막을 완성시키세요. 언제? 2 년 후에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고 때가 언제냐 하면 백의 때에요. , . 그러니까 아들을 진리로 낳은 그 때가 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셈은 히브리 온 자손의 조상이라 그래요. 성경이. 고거는 히브리 사람, 고게 이름이라는 뜻이거든요. 그 히브리 사람들의 대표, 그러니까 그는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돼요. 진리를 낳아야 된다니까요. 그런데 그 때가 언제냐 하면 백이다! 그래요. . 그러면 자타가 공인하는 약속의 후손, 이사악이죠? 몇 세에? !

성경은 아브라함이 몇 살에 이사악을 낳았는지를 교훈하는 거에는 관심이 없어요. 백이라는 그것의 의미. 이사악이라는 존재가 원래 그런 존재 아니에요? 약속의 후손이라는 건 하느님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구원이 뭔지 생명이 뭔지 그 씨, 자손이 뭔지를 설명해주고 싶었는데 아브라함이 뭐라 그랬느냐 하면 내게 아들을 주시려나? 이 수준으로 이해를 했단 말에요. 그러면 내가 그 수준으로 가르쳐 줄게 하고 내려가셔서 아들을 주신 게 이사악이에요. 그러면 그 이사악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약속의 후손인, 믿음의 조상인 내가 어떻게 그 하느님의 백성이 된지를 배우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 이사악으로. 그래서 그 이사악으로 그걸 깨닫게 되자 하느님이 그러면 그거 이제 필요 없지? 죽여! 라고 이야기한 거란 말입니다.

마찬가지에요. 여러분들이 그 생명, 그 아들이 뭔지를 모르니까 하느님이 아들을 줬어요. 예수를 줬다니까요. 그것으로 내가 어떻게 그 아들이 됐는지를 알면 그 예수가 한 일이나 그거는 더 이상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내가 아들이 됐기 때문에. 그래서 그 예수를 죽이라, 라고 제가 말씀을 드리는 거지. 괜히 예수를 왜 죽이느냐고요? 그 의미를 알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뭐예요? 아브라함에게 그 구원이, 그 씨가 그 자손이 뭔지, 그 아들이 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아들을 주고 그 아들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게 했다면 그게 아브라함의 아들이잖아요. 그러면 우리에게 온 예수는? 내 아들이라니까요.

말씀이라는 고 씨는 백으로 완성이 돼야 돼요. 그래서 이사악, 약속의 후손인 그 이사악이 땅에서 성전을 의미해요. ‘하 에레트이거는 항상 성전으로 번역하면 돼요. 그래서 호게신약에서도 헬라어로 호게그러면 그냥 성전,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아래 것, 땅의 것. 그것으로 열심히 일하여 백을 낳으면 고 사람이 아들이다,를 성경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보세요.


(창세26,12) 12 이사악은 그 땅에 씨를 뿌려 그 해에 수확을 백 배나 올렸다. 야훼께서는 이렇듯 복을 내리셔서

이사악은 약속의 후손이에요. 그는 하느님의 복을 받았어요. 그럼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돼요. 그래서 그 성전을 통하여 백을 얻는 거예요. 이거는 단순히 백배가 아니라니까요. 도대체 어떤 농사법을 개발을 했기에 다음해에 백배가 나오느냐고요. 그 백배는 아닐 거 아니에요? 그러면 성경이 어떨 때는 이렇게 과장해서 읽고 어떤 때는 그냥 그대로 읽고 그러는 거예요? 그 얘기하는 게 아닐 거 아니에요? 그렇죠? , 그가 백을 낳았다는 거예요. 이렇게 말씀이라는 씨는 반드시 아들로 완성이 돼야 돼요. 백이 돼야 돼요. 그런데 그 말씀이 길가에 떨어지면 어떻게 돼요?

하느님이 길가에 뿌리세요. 길은 뭐죠? 예수님이? 자기의 이름으로 말해주는 거예요. ‘호호 도스내가 길이야. 그런데 그 길의 멀리도 아니고 그 옆에 떨어져버리면 어떻게 돼요? 파라볼레가 비유죠? 옆에다가 떨어트려 주고 그것으로 이것을 알아라고 준 게 비유예요. 그래서 파라볼레가 거기 쓰인 거예요. ‘파라볼레’. ‘파라 호호 도스’. 그 길옆에다가 뿌려주고 그 길, 그 길을 알면 돼요. 그런데 그 길 가운데 떨어지면 그게 진리죠? 그런데 길옆에 떨어진 걸 그냥 그것대로 받아들이면 그걸 율법이라 그래요. 길 가운데 떨어진 게 아니라 파라, 옆에 떨어져버린 걸, 그냥 그걸로, 껍데기로 비유로 알아버리는 그거. 거기엔 내용이 있는데 그러면 뭐가 와서 먹어버린다고 그래요? 공중의 새. 공중의 새는 항상 성전이에요. 그 공중의 새 날개가 성전에 구조되어 있단 말에요. 그래서 호로스, 우라노스‘, 호르니스. 이건 전부 성전을 가리켰단 말에요. 그러니까 옛 성전, 율법의 성전이 그 율법은, 그 씨는 당연히 먹어버리죠. 홀랑. 율법으로.

두 번째, 반석에 떨어져요. 반석은 페트라‘, 반석. 그야말로 반석이에요. 그런데 그 반석은 생수를 내는 반석이어야 됩니다. 고린도서의 말에 의하면. 그런데 무슨 반석이라고 그래요? 물기가 없는 반석. 그거는? 성경이 율법이 되면 진리의 물로 우리에게, 우리의 이 갈증을 해갈시켜주지 못해요. 그냥 율법이 되는 거죠. 그래서 결실하지 못해요. 말라 죽어요. 그 반석에 떨어지면 안 돼요. 성경이 그 반석을 뭐라 그래요? 거치는 반석. 부딪치는 돌이라고 한다니까요. 그러니까 예수예요. 그 돌은. 돌판, 하나님이 돌 판에다가 당신의 말씀을 써서 줬죠? 그런데 그 말씀으로 내 마음에 새기면 그걸 심비에 새겼다, 그래요. 예수라는 그 인물을 성경이 왜 자꾸 돌이라고, 산돌이라고 그러고 모퉁이 돌이라고 그러고, 구약에선 계속 돌이라고 그런단 말에요. 왜 돌이라고 하느냐 하면 그 예수가 적혀있는 게 성경이니까. 성경을 통하여, 예수를 통하여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돌에 적혀있는 그 계명으로만 봐버리면 그 돌에 내가 찍혀 죽는 거예요. 그래서 살인하고 간음하고 그러면 돌로 찍어 죽여라, 라는 게 돌로 막 찍어서 죽을 때까지 찍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너희들은 그 돌에 맞아 죽는다는 뜻이에요. 예수가 진리로, 생명으로 그 생수로 이해되지 못하면 그 돌에 맞아 사람들이 죽는 거예요.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간다니까요. 신앙생활 열심히 하다가.

세 번째 가시 떨기는 뭡니까? 당연히 율법이죠. 가시와 엉겅퀴만 내는 땅이라고 그랬으니까. 하나님이. 그걸 율법에다가 던져버리면. 그 씨가, 그 진리가 율법에 던져지면, 율법으로 이해되어지면 가시와 그와 함께 자라서 그걸 막아버려요. 율법이 막아버리면 결실이 안 돼요.

그런데 좋은 땅에도 떨어진대요. 거기서 좋은 땅은, ‘호게 호 아가도스거든 요. ‘아가도스라는 거는 선이죠? 선인데 성경에는 칼로스아가도스라는 단어가 두 개가 나와요. 선이라는 단어가. ‘칼로스는 밖으로 드러난 선이죠. 보이는, 나타난 선.

아가도스는 그 선의 실체를 아가도스라 그래요. 그런데 호게 아가도스성전인데 그것이 진리를 담고 있는 성전이네요. ‘호 아가도스니까. 그런데 그 안에 말씀이 떨어지면? 그건 그야말로 진리 아닙니까? 그래서 그건 백이 된다. 그러는 거예요. 백으로 완성된다. 아들로 완성된다. 씨는, 아들은, 성경은, 말씀은 그렇게 진리로 와줘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 들려져야 하는 거란 말이에요.


(루가8,15) 15 그러나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중간에 열매, 그 전에 인내(꾸준히)라는 과정이 들어가 있네요. ‘휘포모네’. ‘휘포는 어디어디 아래 이니까. ‘휘포모네라는 건 아랫것을 가지고 아랫것 안에 갇혀서, 몸에 갇혀서 위의 것을 추구하며 그 위의 것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 삶 전체를 인내라고 그래요. ‘휘포모네’. 이 악물로 견디는 걸 인내라고 하지 않고 아랫것 안에 갇혀서 그게 얼마나 힘이 들면, 아래 것 안에 갇혀서 그 위의 것을 알아버렸는데 내가 여전히 아랫것 안에 갇혀서 거기에 또 가끔 휘둘리고 흔들리고 그러네? 그 삶이 얼마나 힘들면 그걸 휘포모네’. 인내라 그래요. 그러니까 인내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내 열심, 내 능력으로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끌고 가는 아고의 삶 전체가 인내에요. ‘휘포모네’. 그래서 끝까지 이기는 자는, 인내하는 자는 하느님께서 상 준다. 이런 말이 하느님의 백성은 그 인내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말이에요. 잘 견뎌, 그럼 상 줄게. 이런 말이 아니라.

그렇게 말씀이라는 씨에 의해서 아들이 되는 걸 씨의 생명력이라 그래요. 탄생을 하게 만들어요. 생명력이라 그러고 그 아들 안에 완성된 언약의 그 완성으로서의 그 진리. 그 언약의 완성으로서의 그 진리를 뭐라 그래요? 소금이라 그래요. 소금언약. 배웠죠?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 소금처럼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고 뭐 이런 말 아니라고 그랬잖아요. 그건 다른 종교인들도 다 하는 거니까. 소금이라는 건 네 안에, 그 하느님의 말씀, 그 계명이 언약의 성취로 그게 사랑이니까, 모든 계명은 사랑으로 완성된다. 며요? 그 사랑으로 갖게 되면 그걸 소금이라 그래요. 그리고 그 소금이 이제 밖으로 그렇게 흘려지고 드러나는 걸 빛이라 그래요. 그래서 너희들은 소금이다, 빛이다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금이면 당연히 빛인 거예요.

이걸 빛이라고 그래요. 여러분도 그게 당연히 나온다니까요. 그런데 이게 필요 없는 거예요? 이걸 내가 일부러 하는 겁니까? 무슨 유익이 있어요? 우리한테 그게. 아니, 어디서 그 복음을 들을 사람이 있다고 그러면 불원천리 달려가는 우리 교인들 많은데 그분들에게 그게 무슨 유익이냐고? 가서 욕이나 먹지. 그런데도 가서 들려주고 싶은 거. 이걸 행위라고 그래요? 마치 그것도 하면 안 되는 거처럼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아니라니까요. 여러분은 반드시 들어야 돼요, 맞아요. 들음에서 시작해서 그럼 내가 알아요. 깨달아 압니다. , 앎의 단계로 가요. 그러면 내 안에서 됨, 이라는 그 단계가 있어요. 돼요, 내가요. 그래서 죽음도 두렵지 않아. . 그러면 그걸 누려야 되는데 어떻게 누리느냐 하면 그걸 서로 교제 안에서 소통하면서 누리는 거예요.

그래 이거지, 이게 사는 거지. 이게 생명이지. 이게 누리는 거예요. 거기까지 가야 돼요. 그런데 듣고, 알았어? 그러니까 이제 맘대로 살아도 돼! 개판으로 살아도 돼! 이게 앎에서 그친 영지주의라고 하는 거예요. 그거는 율법주의보다 더 무서운 겁니다. 더 위험한 거예요.

나와 아무 상관없는 십자가 나와 아무 상관없는 그 빛, 그건 우상이지 뭐예요? 그래서 그게 내 밖에 있으니까 자꾸 뭐라도 해야 되는 거야. 이게 종의 영이에요. 여러분. 겉으로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하면서도 되게 무서워합니다. 여러분. 그 사람들. 뭐가 뭔지, 뭣 때문에 그러는지 모르지만 그렇게들 초조해해요. 나는 자기네한테 관심도 없는데 자기들은 설교 때마다 내 이름을 들먹거리면서 뭐가 그렇게 초조한지 몰라? 그거는 우상숭배에요. 씨가 백으로 결실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바로 밑의 절을 보세요.


(루가8,16-18) 16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아 방에 들어 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17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서 세상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18 내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너희들이 뭘 듣는지 잘 생각해 봐. 그걸 너희들이 들었다면 그래서 그게 마음이 되었다면, 언약의 소금이 되었다면 당연히 감추어지긴 어떻게 감추어져? 흘러 나가지 그게. 이런 말이에요. 그건 우리가 열심을 부려서 그리고 우리가 인위적으로 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내 백성은 내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내가 만들었다, 라고 했기 때문에 그건 당연한 거예요. 하느님의 그 열심 이 생산해내는 당연한 결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라. 신앙은 사는 겁니다. 치열하게 사는 거예요. 역동적인 거라니까요. 아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걸 말씀의 영향력이라고 그래요. 생명력 있는 그 씨를 가진 자는 그 씨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어요. 그걸 빛이라 그래요. 그건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독사(영광),나타내는 거라니까요.

그들은 말씀이라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의해서 아들로 탄생이 되고 다시 자기를 아버지로 어머니로 낳아서 위급한 형제들에게 그 씨를 흘려주는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등불의 이야기 바로 밑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이야기가 또 붙어 있는 거예요. 갑자기 왜 예수님이 이렇게 싸가지 없는 인물로 나오나? 그런 생각 안 드셨어요? 아니, 갑자기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등불의 비유 그 다음에 싸가지 없는 예수. 그 다음에 돼지 이야기, 이게 연결이 되느냐고요? 그렇게 씨를 가진 자는 반드시 등불이 되어 그 소금을 흘려주게 되어 있어요. 그 언약을 흘려줘요. 그 사랑을 흘려준다고요. 이게 온전한 자의 삶이니까. 그게 내가 진리로 다른 이를 낳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나를 낳는 거예요.

새로운 나, 바오로가 그랬잖아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느님의 은혜로 된 거다, 했을 때 그 나. 를 낳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위급한 상황에 있는 자, 그 자에게 그 위급한, 그가 필요한 그걸 전해주어 그를 나의 반열로 끌어올리는 걸 히브리사람들이 형제, 라고 쓰거든요. 그게 형제라는 거예요. 지금 그 예수님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등불의 비유로 무얼 설명해주는데 마침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어요. 내가 이걸로 진리를 다시 한 번 설명해주마.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냐? 그래요. 그 진리가 내 안에 그 씨로 왔다면 그게 백이 되는 거고 그 백으로 다른 이를 백으로 만들어야 되는데 그게 어머니의 일이고 그게 형제의 일이잖아. 그들이 그 말씀을 듣고 그것을 마음으로 가진 그들이 어머니요, 형제지. 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루가8,19-21) 19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 왔으나 사람들이 많아서 만날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선생님을 만나시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 밖에 서 있어요. 일부러 이런 상황 설정을 하는 거예요. 길 가에 떨어져 있는 어떤 이들의 모습인 거죠. 예수 밖에 그들이 서 있다. 이런 말, 원문으로 보면. 예수 밖에 서 있으면 그들은 어머니가 될 수도 없어요. 아들이 될 수도 없어요. 형제가 될 수 없다니까요. 줄 게 없어요. 그 형제들한테. 그러니까 이렇게 밖에 서 있으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그대로 실행하는 이라고 번역 해놨어요, keep.그들이 형제야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이해가 가니?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이렇게까지 내가 우리 엄마와 동생들까지 이렇게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하면서 설명을 해주는데 그래도 몰라?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의 새로운 설정으로 끝이 나요. 보소서, 아들입니다! 아들을 낳는 거예요. 어머니로. 뭐가? 그 언약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게 되는 그리스도의 영, 진리가. 아들아! 네 어머니다. 내가 그거 만들려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거야. 하고 이야기하는 거죠.


죽은 흙에 불과한 땅에 씨를 주어서 그 씨로 아들을 만들어내는 게 어머니에요. 그리고 그러한 죽은 흙의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어서 그 위태한 상황에서 건져내는 게 형제란 말입니다. 그런 행위를 등불이라 그래. 어떻게 네 안에 그 생명이 있는데 그게 감추어지고 숨겨진 상태로만 있겠어? 아니 내가 그렇게 안 써. 너희들은 내 영광을 위해 나타내기 위해 내가 택한, 내가 창조한 내 백성이거든. 이런 말이에요. ,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로 듣고 그 말씀을 아가페로 가지게 되면 그것으로 반드시 아들, , 후손을 낳아요. 그들은 예수라는 아들을 낳고 나라는 아들을 낳으며 성도라는 아들을 낳게 하는 역할로 부름을 받는 거예요.

그러한 중보자, 중재자들의 도움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뽕하고 그냥 진리를 깨닫는 그런 사람은 없어요. 하느님이 그렇게 일 안 하시기로 했다니까요. 그래서 그들이 어머니이고 그들이 형제야 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한 거죠. 바오로는 그렇게 아들을 낳는 어머니를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갈라4,21-31) 21 율법으로 살기를 원하는 여러분, 한 가지 물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까? 22 율법서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둘을 두었는데 하나는 여종의 몸에서 났고 하나는 종이 아닌 본부인의 몸에서 났습니다. 23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인간적인 육정의 소생이었고 본부인에게서 난 아들은 하느님의 약속으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24 이것은 비유로 한 말인데 그 두 여자는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산에서 나와서 노예가 될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그것이 하갈입니다. 25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나이산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지금의 예루살렘(율법)에 해당합니다. 현재 예루살렘은 그 시민들과 함께 종노릇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26 그러나 하늘의 예루살렘은 자유인이며 우리 어머니(진리)입니다. 27 성서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즐거워하여라. 아기 못낳는 여인이여, 홀로 사는 여인의 자녀가 남편있는 여인의 자녀보다 더 많으리라.' 28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사악과 같은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29 그러나 그 때 육정으로 난 자식이 성령으로 난 자식을 박해하였는데 지금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30 그런데 성서에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여종과 그의 자식을 쫓아 내어라. 종의 자식은 결코 본자식과 같은 상속자가 될 수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3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라는 여종의 몸에서 난 자녀가 아니라 자유인의 몸에서 난 자녀입니다.

두 어머니가 있잖아요. 하나는 시나이 산이라 하는 율법의 어머니 하나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자유자라는 은혜의 어머니. 둘 다 아들을 낳아요. 그런데 성경이 두 언약이라네요? 당연히 앞에 거는 구약, 뒤의 거는 신약이겠죠? 그렇다고 뭐 구약 성경이 하갈, 신약성경이 사라,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성경 전체가 법으로 읽혀지면 그걸 구약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진리를 깨달아 아들이 되면 그걸 신약이라 그래요. 새로운 언약이라 그래요. 그러면 구약 없이 신약 있을 수 있어요? 그러면 신약으로 끝나지 않는 구약은? 악이다! 그래요. 죽이는 거다, 그래요. 그거는. 그럼 당연히 구약은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럼 이스마엘은 잘 못 난 게 아니에요. 당연히 낳아야 할 거였어요. 이스마엘을 통해 약속의 자손이 무엇인지를, 이사악이 무엇인지를 알아먹도록 그 하갈과 이스마엘이 준비된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이 보호한다니까요. 결국은 쫓아낼 거다,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건 쫓아 내야할 거야. 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에는 하느님이 그걸 보호해요.

카인을 통하여 셋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 카인을 죽이면 안 된다, 라고 보호하듯이 그걸 통하여 그 셋, 그 약속의 자손, 그 셋이 오기위해 죽은 그 하벨, 낫띵이라는 그 존재가 뭔지를 알면 카인은 그걸로 구원 받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모르고 아래의 것으로만 이해해버리면 자기의 재산을 끝까지 지키려고 하면 그건 그냥 죽어야할 카인 되는 거고. 그러니까 이스마엘, 아래 것, 율법 사실은 다 필요한 거예요. 세상의 것, 광풍이 이는 바다, 호 코스모스의 세상. , 악 어두움, 더러움 필요한 거예요. ? 그것을 통하여 하늘의 것을 설명해줘야 되거든요. 세상에는 하늘의 것이 들어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걸로 그것을 설명해줘야 되기 때문에 그건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되는 거라니까요. 그걸 알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돼요. 그걸 용서라 그래요. 그게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자는 거라니까요 그게. 이걸 어쩌면 좋아? 가 아니라 이건 나와 상관없는 게 되는 거야, 하고 그 풍랑에 대해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갈이라는 이 땅의 예루살렘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죄를 낳아보지 않은 사람은,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자신이 내어 놓은 모든 게 사실은 하느님께서 쫓아내기를 원하시는 엉터리 열매, 이스마엘 같은 것이었음을 아는 그들이 이사악을 낳는 거예요. 그들이 올바른 씨를 가진 자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 이스마엘로 이사악에 이르지 못하는 자는 그 이스마엘로 쫓겨나는 거예요. 율법이 되어 쫓겨나는 거예요.

따라서 진리를 씨로 가진 아들들은 풍랑이 이는 아랫물의 저주 속에서 두려움으로 살면 안 돼요. 그 저주의 아랫물을 진리의 윗물로 덮어버릴 줄 알아야 돼요. 그걸 용서라고 한다니까요. 풍랑이 이는 아래의 물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이렇게 폭로해 내고 그래서 그것으로 아, 나는 그런 존재야. 라고 알게 되면 그걸 다나토스의 죽음이라고 한단 말에요. 그렇게 폭로해내고 그 속에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뭔지를 올바로 깨달아서 하느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다른 말로, 하느님의 백성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 주어진 하느님의 시청각 교재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둠도 진리를 알게 되면 사실은 나쁜 게 아니에요. ? 진리를 안 그들에게 있어서 도대체 죄가 뭐냐고요? 원래 그들은 그것과 상관없는 자들이었다니까요.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자들에게 있어서 선악과나무가 뭐냐고요? 도대체가?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 풍랑의 정체, 아랫물의 그 광풍이 이는 바다의 정체, 립네의 정체를 이렇게 이야기 해줘요.


(예레미야 3135) 35 해를 두어 낮을 환하게 하시는 이, 달과 별을 두어 밤을 비추도록 정하신 이, 파도소리 요란하게 바다를 뒤흔드시는 이, 그 이름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바다를 격동시켜서 아래의 것으로 풍랑을 우리에게 경험하게 하는 건 하느님이 너희들에게 뭘 소리치고 싶어서 너희들에게 말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거예요. 그럼 그걸로 그 말을 들으면 되는 거지. 그러면 그건 이미 나와 아무 상관없는 게 된 거예요. 그런데 그 저주의 그 바다를 그냥 치워달라고, 어떻게 해서든지 여기에서 나를 건져달라고 그러고. 그게 그거 아니에요? 여기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걸 극복할 거야. 라는 게, 여기에서 나는 대장 될 거야. 이거랑 똑같은 거거든요. 사실은 그게 무서워서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서 어떻게 해서든지 일등이 되고 싶은 거예요. 무서워서. 그건 신앙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을 일깨우며 이게 신앙이잖아요? 이거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랬더니 주님이, Where is your 네 믿음 어디 있어? 그게 믿음이야? 그랬다니까요.

여러분은 그 풍랑과 상관없는 자로 그냥 서시면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명이며 우리를 아들로 탄생케 만드는 유일한 근거에요. 그래서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을 부모라 그래요. 예수가 바로 우리 보모다, 그 진리가 우리의 부모다! 나를 아들로 낳게 하는 부모다, 라는 것만 마음에 잘 새겨두면 돼요. 그래서 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그 부모에게 순종해! 라고 하는 거예요. ? 그 부모가 너를 아고의 삶으로 끌고 가서 결국 스타오로스의 십자가에, 언약의 십자가에 매달아 버릴 거거든. 그러니까 도망가지 말고 그 부모에게 순종해. 쫓아 가. 쫓아가서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죽어!!


(에페6,1-2) 1 자녀된 사람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2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신 계명은 약속이 붙어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약속 안에서 최고의 것이야, 이런 말이에요. 하느님의 약속은 말씀이죠? 성경말씀 안에서 최고의 것. 최고의 명령이 뭐냐 하면 그 부모 쫓아가서 죽어! 이거야. 이런 말이에요. 이게. 그 하느님의 성경, 그 약속 안에서 최고의 것이 뭐냐 하면 그 부모에게 순종하여 그 부모가 아고의 삶으로 이끌어가는 그걸 쫓아가는 거야, 이런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삶을 없애 달라 그러고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걸 신앙생활의 내용이라고 아는 그런 이들이 무슨 신앙인이에요. 그게? 그래서 히브리 기자가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히브12,8-9) 8 자녀는 누구나 다 아버지의 견책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런 견책을 받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서자이지 참 아들이 아닙니다. 9 우리를 낳아 준 아버지가 견책(파이데이아, 징계)해도 우리가 그를 존경한다면 영적인 아버지께 복종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영의 아버지가 뭐예요? 내 안에 있는 진리잖아요? 그 아버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아들 만드는 양자의 영, 그 아버지. 그 진리 육신의 아버지도 너희를 자식 만들기 위해 너희를 징계하고 너희들을 야단치기도 하고 그런단 말이야. 그런데 너희들 그 말은 듣잖아? 하물며 너희를 하느님의 아들로 만들기 위해. 내가 아들 만들기의 그 삶으로 너희들을 인도한다고 하면 당연히 그것도 수긍해야지. 안 그러면 아들 아니야. 그래요. 그 아고의 삶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거죠. 끌고 가야되는 거, 그러므로 그 아래의 것, 광풍의 바다를 무서워하지 마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 이 꼬락서니로 어떻게 하느님 앞에?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다니까요. 그건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심판자인 하느님 앞에 선다고 보세요. 그 무서운 분하고 어떻게 사느냐고? 그 사람은 아들 아니라니까요. 혹시나? 이런 마음이 요만큼이라도 있으면 안 된다고요.

죄도 악도 고통도 고난도 행복도 기쁨도 모두 그 아담 안의 그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새로운 그 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느님의 은혜다의 그 나, 그 나를 살리기 위한 하느님의 아들 만들기 재료들이란 말에요. 적어도 아들들에게 있어서는. 그 모든 게 다. 이스마엘까지도, 카인 까지도. 그러면 여러분은 그 풍랑에 대해 죽은 거라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을 세상의 종으로 묶는 그런 자들의 말에 현혹되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영, 아들 만들어 내는 그 영 안에서 자유하시란 말에요. 그리고 그것이 너무 좋아 내 형제들에게 흘려주고 싶은 그 마음을 하느님이 주시면, 아니 그렇게 쓰시고자 하실 때 치열하게 헌신하시라니까요. 이젠 아무것도 안 해도 되나? 가 아니라. 아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2베드2,17-19) 17 이런 자들은 물 없는 샘(유황 불 못)이며 폭풍에 밀려 가는 안개입니다. 이런 자들을 위해서 깊은 암흑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18 그들은 허무맹랑한 큰소리를 하며 그릇된 생활을 하는 자들로부터 가까스로 빠져 나온 사람들을 육체의 방탕한 정욕(음란, 에피뚜미아)으로 유혹합니다. 19 그들은 남들에게는 자유를 약속하면서 그들 자신은 부패의 노에가 되어 있습니다. 정복을 당한 사람은 누구든지 정복자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를 준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실상은 율법의 종으로 만들어내는 자들. 그게 물 없는 샘이에요. 그게 물 안 나오는 샘이요, 길 가요, 가시덤불이라니까요. 죽기 않을 때 까지만 고통이 오는데 죽지 않을 때 까지만 와요. 너무 큰 거야. 그러니까. 그죠? 그런데도 안 죽여. 그 고통은 너를 강하게 만드는 거야. 이런 말이 있어요. 그런데 하느님은 죽여 버려요. 그 고통은 죽이는 고통이야. 이 속담, 격언에 나오는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예요. 다나토스로 죽이는 고통이라니까요. 아들 만들기 그 아고의 삶은. 그건 아들 만들기 위함이란 말이에요. 그걸 알면 거기에서 그 풍랑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어요. 무섭지 않을 수 있어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어요. 일등 못하면 어때요? 사람들이 나를 좀 그렇게 평가하면 어때? ? 좀 아프면 어때요? 많이 배우잖아요. 그걸 통해서.

몸이 안 좋아서 수지 치료라는 걸 받았는데 무지무지하게 아파요. , 정말 어디 끌려가서 고문당하는 거보다 순간 통증의 강도는 더 커. , 막 찍어! ㅎ ㅎ 얼마나 아픈지 몰래몰래 눈물을 닦아야 돼. 창피해서. 여러분, 사람이요. 고문을 당할 때, 이를 악 물고 내가 너희들 앞에서 비명을 지를 거 같아? 이러고 꾹 참잖아요? 고통이 들어오면 호흡이라든지 비명으로 팍 토해내야지 그 고통이 내 안에 안 쌓이거든요. 그런데 꾹 참으면 나중에 막 웃음이 나와요. 그런 경험 있으시죠? 너무 아파갖고 그냥 꾹 참으면 웃음이 나와요. 그럼 이게 비웃어? 그러고 더 때려요. 그런데 그거 보다 더 아파요. 그런데 그 고통을 당하기 위해 돈을 들고 줄을 서있어. 일주일에 두 번씩. 그건 나를 살리기 위한 고통인 걸 알기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닙니까? 누가 고문을 당하러 돈을 들고 일주일에 두 번씩 거기를 찾아가요? 그런데 거기는 가더라는 거예요. ? 의미가 달라요. 성도라는 이들이 그런 고통, 그런 고난쯤. 아버지가 나에게 주시는 아들 만들기의 작업, 아고의 삶, 인내의 삶이라는 걸 확실히 안다면 지면 안 되죠. 살아 있어야죠. 그게 휘포모네인내라는 겁니다. 그러니 열심히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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