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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기석 신부님 / 마르 6,14-29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21-02-09 조회수1,330 추천수0 반대(0) 신고

제23회 마르 6,14-29 


복음의 시작 마르코가 전한 예수

 

안녕하십니까? 복음의 시작 마르코가 전한 예수 박기석 신부입니다. 헤로데 안티파스 왕을 매개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사람들의 여론과 또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이것을 전하고 있는 단락이 바로 6,14-29절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입니다. 


*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사람들의 여론 마르 6,14-16 

  세례자 요한의 죽음 6,17-29


열두 제자의 파견과 또 파견된 제자들의 보고 사이에 바로 우리가 살펴볼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의 정체에 관해서 사람들의 대중 여론을 조사하는 경우 백성들의 반응, 세 가지 견해가 있지요. 이것은 사실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8,20-30 절에 다시 한번 언급이 돼요. 그러기 때문에 당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사람들의 의견은 환생한 세례자 요한 혹은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인 엘리야 혹은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이 많았던 것처럼 그런 예언자들 중 한 명 예언자가 왔다. 이런 하마평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 기사는 지금의 본디 문맥과 상관없이 따로 전해 온 독립된 전승이었을 거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것을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연결을 시켰다는 거죠. 누가? 마르코가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마르코가 자기의 어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사람들이 환생한 세례자 요한이나 예언자나 엘리야 이렇게 당시 예수님에 대한 어떤 여론들로 전해져 내려왔던 독립 전승을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연결시켜서 자기 복음서 안에 구성을 했다는 그런 얘기가 되겠습니다. 


동일한 내용이 두 가지 전승으로 나뉘어서 마르코에게 전달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고, 마르코가 아마 8,27-30절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나왔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니까 예수님이 물어 본, 예수님이 궁금해했던 것을 마르코가 다시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연결해서 마치 헤로데 안티파스가 물어보는 것처럼 이렇게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이 아니냐라고 보는 학자들의 의견이 있습니다. 


마르코는 기존의 예수님 활동의 중심이었던 가르침을 좀 더 강화하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즉, 유다인을 넘어 이방인도 구원의 보편성을 향하고자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바로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의도적으로 마르코가 바꿔주고 있어요. 우리 독자들에게 마르코는 예수님에 대해서 떠돌고 있던 다양한 소문들이 당시 갈릴래아 지역을 다스리던 봉분왕, 총독 정치가 아니라  지역인이 로마 제국을 대신해서 다스리는 봉분왕이죠. 영주 개념입니다.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마르 6,14) 마르코는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라는 말을 14절에 제일 먼저 꺼내 놓고 있어요. 헤로데가 들은 소문이 사실 바로 이 앞의 내용이 뭐죠? 열두 제자의 활동이잖아요. 여장 규범과 전도 규범으로 악령을 쫓아내고 기름으로 병자를 치유하는 이런 제자들의 소문을 들었다 해야 되는데, 제자들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게 아니라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 내에서 발생한 일들에 대해서 모두 알고 싶어 하는 헤로데 안티파스, 이건 지도자들이라면, 통치자들이라면 다 마찬가지예요. 자기가 다스리는 국가의 모든 정보를 자기가 다 수집하기 위해서 정무 기관을 두는 거잖아요. 우리도 국정원이 있고 미국도 CIA가 있고 이런 식으로 정보를 쥐고 있는 사람이 군력 자거든요. 그건 당연한 겁니다. 자기가 모르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어느 지도자가. 그런 어떤 사실에 대해서 갑작스럽게 알게 되어 허를 찌르게 되는 경우를 제일 싫어합니다. 지도자는. 그러기에 그런 경우를 막기 위해서 정보 수집을 늘 했다고 볼 수 있죠. 

 

헤로데 임금이 들었다는 해석을 이렇게 할 수도 있겠고 또 다른 해석도 할 수 있겠습니다. 헤로데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다양한 대중의 어떤 의견도 청취하려고 했다는 식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하간 이 두 가지 사실은 동시에 발생했다는 거죠, 그렇게 놀라운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이 사람 도대체 과연 누굴까 하는 사람들의 추측이 난무했다는 겁니다. 헤로데가 사람들의 그런 다양한 추측들을 들었다는 거죠. 

 

그 다양한 추측 중에 어떤 의견이 쏙 들어왔는지가 중요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이 의견이 헤로데를 굉장히 당혹스럽게 했다는 거예요. 그 이유는 이제 16-29절에 나옵니다. 그건 나중에 살펴볼 것이고요. 여하간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체포되기 전에는 활동하지 않으셨어요. 세례자 요한이 체포된 다음에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했다고 마르코는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은 기적을 행했나요? 신비스러운 일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한 일은 회개해라. 주님의 날이 다가왔다. 주님의 길을 준비했을 뿐이지 그가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했다는 표현은 없어요. 그저 회개를 선포했을 뿐입니다. 세례를 베풀었다는 거죠. 회개의 세례를. 그런 신적 권능을 세례자 요한이 가졌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그저 광야에 나타나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을 뿐이에요. 

 

대체로 봐서 예수님이 죽음에서 되살아난 세례자 요한일 것이라는 생각은 일부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매우 혼란스러워했다는 것, 무척 궁금했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이런저런 소문을 만들어 내는 거죠. 그리고 그런 것들을 즐겼다는  거예요. 오늘날 누가 한 사람 유명해져 보세요. 연예인. 그 사람이 유명해지면 그 사람에 대한 "나 과거 그 사람이 뭐 했다는 거 다 알아!" 여러 가지 소문, 그렇다 하더라, 뭐 뭐 하더라 만들어 내잖아요. 그런 식을 즐겼다는 거예요. 

 

헤로데 안티파스는 예수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소문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였다(15절)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이 소문은 세례자 요한의 부활보다는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놀라운 기적을 행했던 예언자예요. 구약 성경 열왕기에 보면. 특히 엘리야 생의 마지막에 엘리야가 죽지 않고 하늘에 불가마를 타고 올라가거든요. 

 

또 예언자 말라키는 엘리야가 바로 주님의 날에 하느님의 사자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래서 종말 심판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르게 인도하려고 내려올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그 이후 예언은 전설이 되어 많은 유다인들에게 널리 유포되어 있었어요. 이처럼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내고자 고심을 했고, 그 해결책으로 아마 엘리야가 되돌아왔을 거다. 이럴 가능성이 높았던 겁니다. 

 

이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저 예언자 중에 한 명, 구약 성경에 예언자들이 많이 활동했기 때문에 그런 예언자 중에 한 명이 아니겠느냐? 실지로 루카복음이나 요한복음에 보면,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얘기하는 경우가 있어요.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루카 7,39) 예수님이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실 때 루카복음에 사람들이 얘기하는 장면에 예수님을 예언자로 얘기하죠.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 우물가에서, 여기서도 사마리아 여인이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요한 4,19) 당대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다는 것은 다른 복음서의 예를 통해서도 쉽게 이해가 가는 내용이에요. 여하간 사실 세례자 요한의 출현 이전까지 수 세기 동안 예언자가 없었어요. 예언자가 없었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다는, 하느님이 당신 말씀을 예언자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들려주시는데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이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생각했다는 거, 있을 수 있고 다양한 의견들 중에 하나였구나. 예수님의 신원, 그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게 수수께끼처럼 신비였다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죠. 결국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그분의 신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될 점이 있어요. 

 

마르코는 시종일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신학적 주장이 예수님은 누구이시냐? 그래서 처음 복음서 시작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죠. 중간에 8,28절에 베드로의 신앙고백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15,39절 백인대장이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셨다." 거기에 이제 함구령, 메시아 비밀, 예수님의 신원, 정체성을 강조하는 게 마르코복음의 특징인데 여기서 보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왔다. 엘리야가 돌아온 거야. 예언자 중에 하나야라고 하지만 정답은 없잖아요. 

 

즉 지금까지 예수님이 병자 치유하고 풍랑을 가라앉히시고, 야이로의 딸을 회생시켜 주고, 여러 기적을 행하셨는데,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일 거야, 이 말은 없다는 거예요. 백성들한테. 우리가 기대하는 그 진술은 정확한 진술은 나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물론 실제로 깨닫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학자들은 마르코복음의 신학적 의도, 마지막에 가서야 십자가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하느님의 아드님 올바른 정체성 파악 때문에 함구령, 메시아 비밀 때문에 여기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마르 6,16)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데 헤로데 안티파스의 귀에 들렸을 때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기이한 것, 신빙성이 제일 떨어지는 것을 얘기한단 말이에요. 그걸로 자기는 확신을 갖는다는 거죠.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되살아났다. 엘리야다 또는 예언자 중에 하나다 이건 있을 법한 얘기예요. 추측인데. 죽은 자가 다시 되살아나는 것, 그것도 내가 죽인 자, 내가 목을 베서 죽인 그 사람이 되살아 났어. 이거는 사실 가능성이 없는데 여기에 꽂혀 있다는 거. 

 

그것은 무슨 말일까요? 그 헤로데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을 반영해 준다는 거죠. 자신이 사형 언도를 내렸던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 났다. 여기에 헤로데 안티파스가 한 표를 던지고 있는 겁니다. 자기를 끈질기게 괴롭혔던 그리고 그것 때문에 두려움을 늘 안고 사는. 불안 속에 사는 거죠. 불편한 양심. 세례자 요한이 생전에 자신에게 했던 말이라든지, 그의 참수된 목이 떠오를 정도로 밤마다 세례자 요한이 꿈속에 나타난다든지 바로 그런 트라우마 같은 거예요. 불안감이 막 밀려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이런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기서 사용된 단어예요.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목을 베다' 자연스럽게 요한의 참수죠. 죽음을 얘기하는 것인데 목이 잘린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되살아났다는 동사. 부활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다. 일으키다. 중풍 병자를 일으켜 세우다. 부활을 상징한다고 그랬죠. 일으켜 세우다는 부활을 뜻하는 단어인데 되살아났다는 표현도 부활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암시해 줄 수도 있겠구나. 이제 서서히 부활을 얘기하는 거구나. 단 부활에 앞서 세례자 요한도 목이 베어 죽었다. 예수님의 죽음도 더불어 암시해 주는 것. 따라서 이것이 실제로 요한의  환생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통해 요한의 선포와 업적이 이어지고 있다는 뜻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일단 우리는 여기서 헤로데가 예수님을 두고 제2의 세례자 요한으로 여겼다고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마르코는 왜 헤로데 안티파스가 이렇게 불안해하는지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그런데 사실 여론 조사는 8장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다시 한번 마르코가 활용한다고 그랬어요. 8장은 예수님이 직접 여론 조사를 물어보는 거잖아요. 제자들한데. 그게 더 맞을 것이고, 이거를 확장해서 헤로데 안티파스가 여론 조사를 한 것처럼 6장에 먼저 소개하는 것은, 원래 이야기 속에 다른 이야기를 삽입하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더 암시해 주는 것인데요. 이것을 위해서 얘기하다 지금 헤로데 안티파스가 왜 불안해하는지, 현실 가능성이 제일 떨어지는 세례자 요한의 부활, 다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지 이제 이유를 얘기해 줘야 해요. 이런 장면을 설명해 주려면 영화나 드라마 같으면 어떤 장면을 써야 될까요? 플래시백, 회상이라고 소설이나 영화, 연극에서 회상 장면 이것을 사용해서 지금 세례자 요한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마르 6,17) 여기서 헤로데는 헤로데 안티파스라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같은 이름의 다른 왕을 기억합니다. 마르코복음에는 안 나오고 마태오나 루카복음에 나오는 헤로데 대왕, 마태오복음에 헤로데 대왕은 동방 박사의 방문을 받고 예수님 태어난 거를 알려달라고 그랬는데 안 알려주니까 영아들을 다 살해해 버리는 헤로데 안피파스의 아버지예요. 


그래서 여러분들 구분해야 됩니다. 헤로데 대왕이 아니라 헤로데 대왕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를 얘기합니다. 이 헤로데 안티파스가 여론 조사를 했고 확신한 게 예수는 제2의 세례자 요한이야 이렇게 확신했는데 왜 그렇게 불안해 하느냐? 이제 그 사연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거를 알기 위해 헤로데 가문의 가족사를 알아야 해요. 자곡이 조금 복잡해요. 

 


그리고 마르코가 전해주는 정보랑 실지 역사 정보랑 달라요. 예수님 탄생 때 영아를 살해한 헤로데 대왕은 열 명의 아내가 있었어요. 거기서 태어난 자녀들 간에 근친결혼이 성행했어요. 우선 헤로데 대왕이 마리암느 1세와 사이에서 이리스토불이 태어나는데 이자에게서 헤로디아가 태어나요. 그러니까 헤로디아는 헤로데 대왕의 손녀에요. 


그리고 마리암느 2세와 헤로데 대왕이 결혼해서 별명이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 헤로데가 태어납니다. 이자가 헤로디아의 첫 남편이에요. 이 결혼에서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말타케라는 부인 사이에서 지금 두려워하는, 세례자 요한을 죽였다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태어납니다. 이자가 바로 갈릴래아 지방과 베레아 지방의 영주예요. 


헤로데 안티파스는 나바테아 왕국의 아래타 4세의 딸과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지금 헤로디아와 결혼한 거예요.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헤로데 대왕이 필리포스를 낳았는데 이자는 이두래아와 트라코니투스 지방의 영주로 군림을 합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이 필리포스랑 결혼해요. 그러니까 필리포스는 헤로디아의 남편이 아니라 사위였고,  따라서 지금 마르코가 전해주는 6,17절은 역사적으로 보면 잘못된 보도예요.


제가 지금까지 얘기한 거는 역사가 플라비우스가 전해주는 이스라엘 유다사예요. 그게 더 맞아요. 그런데 마르코가 이걸 어떻게 바꿔주죠? 필리포스의 아내가 헤로디아가 아닌데 필리포스의 아내로 헤로디아를 소개하고 있다는 거. 살로메는 헤로디아의 딸은 맞지만 이 살로메는 헤로디아가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지 필리포스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 아니에요. 그런데 여하간 마르코는 필리포스의 아내인 헤로디아가 형과 결혼했다 이렇게 얘기를 해 주고 있는 겁니다. 좀 복잡해요. 


엄밀히 따지면 헤로데 안티파스는 조카이면서 또 제수도 되는 헤로디아와 결혼한 셈이고 결국 헤로디아는 두 명의 삼촌이랑 성공적으로 혼인을 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더욱 복잡한 것은 역사가는 그의 남편 두 사람 이름 모두를 그냥 헤로데라고만 얘기를 해요. 그래서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뭐냐 하면, 마르코가 여기서 무엇을 전하려고 했느냐는 것이겠죠.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마르 6,18) 여하간 근친상간이 성행했고, 물론 이스라엘 법에 형이 아내를 두고 먼저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것이 있어요. 하지만 형이 살아있는데 결혼하면 그건 문제가 되겠죠. 바로 레위 18,16절과 20,21절에 보면, 


"네 형제의 아내의 치부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네 형제의 치부이다."(레위 18,16) 

"어떤 사람이 자기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 그것은 불결한 것이다. 그가 제 형제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므로, 그들은 자손을 보지 못할 것이다."(레위 20,21) 


즉 근친상간에 대해서 세례자 요한이 꼬집었다는 거죠. 왜냐하면 죄의 회개, 윤리적 회개를 강조했던 게 세례자 요한이었기 때문에 헤로디아와 헤로데 안티파스의 흔히 말하는 간통이죠. 형이 동생의 아내와 정을 통한 것이니까요. 이것을 분명히 얘기했다. 그러니까 헤로데 가게도는 역사 정황하고는 안 맞지만 분명한 것은 헤로데 안티파스가 헤로디아와 결혼해서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 이거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겁니다. 


* 헤로데 안티파스의 소행으로 이스라엘에서 비난받은 점은 역사적 사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마르 6,19) 아마도 헤로데 안티파스가 권한이 있었다는 거죠. 세례자 요한을 목을 벨 수 있었던 권한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고요. 헤로데는 자신의 혼인에 대해서 대책 없이 떠들어 대는 세례자 요한, 떠돌이 예언자를 입다물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마르 6,20)   마르코가 세례자 요한을 어떻게 소개했죠? 광야에 살고 있고, 낙타 털옷을 입고 있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는다. (마르 1,6 참조) 그런데 헤로데 안티파스 왕은 궁이 세 개나 될 정도로 권력자고 부자예요. 굉장히 대조되죠. 


그런데 헤로데가 그런 요한을 두려워했다? 죽일 수도 있었지만 죽이지 못하고 두려워하면서도 관심이 많았다는 겁니다. 그에게 매료되었다는 거죠. 그가 하는 말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잘 들어보면 그가 의롭고 옳은 얘기를 하니까 감옥에 가둬 놓으면서도 찾아가서 그의 조언을 듣기도 했다는 거예요. 실제로 마르코는 세례자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것을, 헤로데가 감금했다는 것을 마르코가 두 번 얘기합니다. 마르 1,14절과 마르 6,17절. 


그러면서 마음으로는 괴롭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는 저 사람 참 매력 있는 사람이야, 올바른 얘기를 해 주니 우리 거짓말만 하는 신하들보다 저 이가 낫다고 인간적으로 좋아했다는 거죠. 하지만 반대로 헤로디아는 그렇지 않아요. 자신의 혼인을 정당화시켜 줘야 되는데, 괴롭히니까 언제든 죽이고 싶은 사람이죠. 그렇게 때를 기다리다 결국 성공을 거둡니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마르 6,20) 잔치, 연회와 함께 생일을 기념한다는 것은 사실 유다인들의 풍습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풍습입니다. 여기 참가한 사람들이 우선 헤로데파 사람들, 헤로데 당원들이죠. 3,6절에 이 헤로데 당원들은 먼저 언급이 됐는데,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예요.


이 연회, 헤로데 안티파스의 생일잔치에 참석한 인물들이 다 남자라고 하는 점에서 여러분들 신경 쓰셔야 돼요. 물론 그 남자들이 부하들, 장군들, 신하들, 지역 유지들이죠. 그런데 왜 제가 남자라는 걸 강조하느냐 하면,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마르 6,22)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사실 제가 살로메라고 했지만 마르코는 살로메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요. 


살로메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얘기한 정보에 의해서 헤로데의 딸이 살로메라는 거지, 마르코는 전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하간 공주예요. 그리고 헤로데 안티파스에게는 친딸은 아니죠. 의붓 아버지죠. 

살로메에게는. 그런데 잔치에 여성이 참여하지 않은 그런 잔치에 공주가 춤을 췄다? 여러분들 있을 수 있겠어요? 손님을 그것도 즐겁게 해 주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성적 유희의 자리에 참여했다는 얘기예요. 


*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마르 6,22) ⇒ 성적 유희의 자리가 되었음을 함축.


공주가 남자들 앞에서 춤을 추는 일, 사실 그런 일이 있으면 창녀들이나 무희들이 할 일인데, 공주가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스캔들이 되는 겁니다. 딸로 안 보여요. 공주로 보이지 않습니다. 무희로 보고, 여자로 보이는. 거기에 홀딱 빠져버린 겁니다. 정신을 잃게 되는 거죠. 특히 헤로데 안티파스는 왕으로써, 아버지로서, 의붓아버지이지만 체면과 권위를 다 잃어버린, 그러면서 백지 수표를 건넵니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마르 6,22) 여기서 이 백지수표는 굉장히 큰 문제가 됩니다. 단순히 터무니없는 약속을 들어주겠다 그런 것이 아니라, 굳은 다짐으로 자신이 실없는 사람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겁니다.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마르 6,23) 여러분들 임금이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라는 사실 구약성경 에스테르기에 보면, 에스테르 왕비가 남편인 크세르크세스 왕이 에스텔 왕비에게도 이런 표현을  씁니다. 


임금이 그에게 말하였다. "에스테르 왕비, 무슨 일이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오? 왕국의 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소." (에스 5,3) "그대의 청이 무엇이오? 그대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오? 왕국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소."(에스 3,6) "에스테르 왕비,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오? 왕국의 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소."(에스 7,1) 이렇게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렇게 임금이 '내 왕국의 반을 주겠다는 말은 정말 그렇게 해 주겠다는 게 아니죠. 이 말은 임금의 관대함을 드러내는 상투어입니다. 

 

* 자신의 왕국의 절반을 준다는 것은 임금의 관대함을 드러내는 진부한 상투어. 


그런데 이것이 연회에서 술에 취해서 하는 말과 연결이 되면서 문제가 되는 거죠. 즉 여흥을 돋우는 단순한 행위가 악행과 결합하여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듭니다. 세례자 요한이 실제로 죽게 되는.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마르 6,24) 


그런데 헤로디아는 자신의 딸에게 주어지는 헤로데의 제안에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응답을 하죠.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 즉 그의 죽음을 달라는 겁니다. "소녀는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마르 6,25) 


이게 한 나라 공주, 어린 소녀가 할 얘기예요? 여러분들 쟁반이라면 연회 잔치에서 쟁반은 요한의 머리가 아니라 먼저 무엇이 담겨 있어야 되죠? 풍성한 음식, 맛있는 음식이 담겨 있어야 되는데, 그 쟁반에 사람의 머리를, 목을 달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예요. 그런데 당당하게 얘기합니다. 왜 당당하게 얘기하냐? 바로 헤로데 안티파스의 성격 때문입니다. 다시 재고하지 않도록, 흔들림이 없이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마르 6,26) 몹시 괴로웠다. 헤로디아도 살로메도 남편, 아버지의 성격을 너무 잘 알았던 거죠.  그리고 이미 6,20절에 헤로데가 평상시 세례자 요한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밝혀주고 있죠.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했기 때문이다."(마르 6,20) 


그래서 다시 재고의 여지없이 분명하게 하려는 겁니다. 거기에 헤로데 역시 남자로서, '남아 일언 중천금'이에요. 또 술자리에서 다른 부하들 앞에서 한 얘기인데 그 말을 지키고 싶었겠죠. 죄에 대한 인식보다는 남의 눈을 더 인식한 셈입니다. 무죄한 이의 생명이 이렇게 권력자의 명예를 위해서 희생되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죠.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마르 6,27-29)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여기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 2,18절에도 한 번 언급이 됐었습니다. 이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의 시신을 이렇게 거두고 있는 거예요. 그래요. 주님의 길을 곧게 내고자 했던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마르코가 이렇게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자세하고 6장에서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은 그가 이 지상에서 어떤 일을 했죠? 주님이 길을 준비하는. 그뿐만 아니라 그 지상 사명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도 또한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해 주는 것이라고 예고해 주는 것이다. 바로 그 목적으로 다룬다는 거죠. 


* 세례자 요한 죽음 언급은 그의 지상 사명뿐 아니라 그의 죽음도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고자 하는 목적


그래요. 헤로데 같은 권력자 하고 윤리적으로 문제 있는 이들에게는 언젠가 제거돼야 할 위험한 인물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회개를 외쳤죠. 그런데 예수님 또한 회개를 말씀하셨고, 더 많은 것을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셨어요. 그렇다면 권력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 또한 제거해야 될 인물이라는 거죠. 특별히 산헤드린 최고 의회의 대사제들, 종교지도자들은 더욱 그리했었습니다. 더욱 강력한 도전이 그들에게 던져지는 것 같이 느껴졌을 거예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 굴하지 않고 당신의 사명을 다하시는 모습, 그리고 당신 자신을 위에게 내어 주시는 모습이죠. 그러나 그 강력한 도전을 권력자들은 가만두지 않고 "없애버려야지!" 그리고 실제로 실행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요. 주님 보시기에도 요한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담대히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증언했던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순교를 합니다. 

 

마치 구약성경에 페니키아 공주 이베벨과 결합했던 아합, 그 이제벨이 엘리야 예언자를 죽이려고 했던 사실들, 그 장면을 우리에게 연상시켜 주는데요. 이제벨은 심부름꾼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렇게 전하였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그대의 목숨을 그들의 목숨과 한 가지로 만들지 못한다면, 신들이 나에게 벌을 내리고 또 내릴 것이오."(1열왕 19,2) 

 

그런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마르코가 굳이 역사적 정황이 분명치 않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 헤로데 가게도를 통해서 분명하지 않았지만 엮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는 것. 이 역시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해 주는 그런 모습이었고, 세례자 요한의 지상 사명과 또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까지도 자신의 죽음으로써 예시해 주려는 모습이었다는 거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주에는 당시 회상했던 장면을 떠나서 본래의 의도대로 제자들이 파견되었었죠. 지난주에. 이제 그들이 돌아와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여러분들과 6장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정리 (마르 6,14-29) 

주제 

- 예수님 신원에 대한 사람들의 여론과 세례자 요한의 죽음


특징 

- 예수님에 대한 백성의 세 가지 견해와 세례자 요한의 사망 전설을 연결함

- 예수님과 열두 제자에 고정되었던 시선을 (당시 갈릴래아를 다스리던 헤로데에게 ) 의도적으로 바꿈 

- 메시아 함구령, 메시아의 비밀을 유지

- 플래시백 (회상 장면)의 사용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

-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 


예수님의 가르침 

-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이 참으로 따라야만 하는 강력한 도전으로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 

-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실현한 사건으로 이를 통해 자신의 말고 행동에 대한 책임을 성찰하게 함 

- 세례자 요한처럼 의로운 이가 되도록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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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박기석 신부님 마르코복음, 헤로데안티파스, 헤로디아, 살로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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