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더함과 제함의 저주 (창세3,1?2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2-12 조회수1,13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 2. 12. 연중제5주간 금요일 독서(창세3,1-8)

(공동번역)             설날이지만 참고로 보시고 신축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더함과 제함의 저주

 

(창세3,124)

1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3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6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7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8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9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16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17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18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19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20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23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24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火焰劍)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오늘은 3장 전편에 흐르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받아들이거나 불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남편인 아담에게도 그 선악과를 주어 남편까지도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1디모2:14) 14 그리고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 넘어가서 죄를 지었습니다.

 

분명 성경은 하느님께서 여자를 돕는 배필로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를 도와 그가 하느님의 생명에 이르게 해 준 것이 아니라 저승사자가 되어 남자를 죽이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여자를 가리켜 돕는 배필이라 말씀하신 것이 아담의 죽음을 돕는 배필이라는 의미였을까요? 지난번에는 남자인 아담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여자인 하와의 자리에 교회인 하느님의 백성을 넣어서 그 사건에 나타난 상징적 의미를 살펴보았으니까 이번에는 남자인 아담의 자리에 하느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을 그리고 여자인 하와의 자리에 아담의 갈비뼈로 창조된 인간인 여자를 넣어서 그 돕는 배필의 이야기가 역사 속에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그를 에덴동산에 두신 목적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에덴동산에 두신, 겉으로 드러난 목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아담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는 삶을 영위하며(하느님의 영광을 반사적으로 드러내며)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함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목적은 더 깊고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그냥 겉으로 드러난 목적만을 짚어보는 것입니다. 하와는 바로 그 것을 도와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최초의 인간들은 서로 도와가며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돕는 배필입니다.

 

(창세2:1617) 16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16절의 명령하다라고 번역이 된 짜바라는 동사는 히브리어 'Piel'동사입니다. 히브리어 동사에는 일반적인 형태 의 'Qal' 동사와 강조형의 ‘Piel'동사 그리고 사역형의 ’Hiphil'동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강조형의 ‘Piel’ 동사가 쓰인 것입니다. 그 말은 아담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먹어야 하고, 선악과는 절대 먹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게 ‘Piel'동사입니다. 그 말은 태초의 인간은 생명나무열매를 반드시 먹고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최종 목표는 생기를(니스마트 하임) 소유한 아담이 아니라 생명나무열매를 먹은 영생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 일을 위해 돕는 배필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돕는 배필은 아담으로 하여금 생명나무열매를 먹도록 도운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게 만듦으로써 오히려 아담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은 여자라는 돕는 배필의 등장과 그 돕는 배필의 실패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 생명나무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는 것에, 인간 측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대할 때 영적 관점의 메시지와 역사적 관점의 메시지를 잘 구별하여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담에게 있어서 진정한 돕는 배필은 누구여야 합니까? 여기 창세기의 돕는 배필이라는 단어에 쓰인 에제르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가 시편 115편에 나옵니다.

 

(시편115:911) 9 이스라엘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 10 아론의 집안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 11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

 

여기서 쓰인 주님은 도움이며라는 어구에 쓰인 단어가 에제르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즉 하느님의 백성들의 돕는 배필은 하느님 자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 명확한 증거는 신약에 나옵니다. 에제르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바꾸면 파라클레토스입니다. 그 단어를 신약에서 찾아볼까요?

 

(요한14:16)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여기서 보호자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바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counselor, helper'라고 번역 이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창세기 2장의 돕는 배필은 성령 하느님이셔야 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백성들을 영생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돕는 배필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생명나무열매를 향한 인간 측의 모든 시도와 노력은 다 허사입니다. 하와라는 여자는 그러한 인간의 나약함과 불가능함을 폭로하여 진정한 돕는 배필의 필연성을 주지시키기 위한 돕는 배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구원받은 돕는 배필은 그 안에 성령이 계시므로 진정한 돕는 배필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도가 배우자를 고를 때 첫 번째 보아야 하는 것은 학벌이나 외모나 재산 정도가 아니라 그가 과연 거듭난 사람인가 아닌가?’여야 하는 것입니다. 청년들은 명심하세요. 자칫하면 여러분의 배우자가 돕는 배필이 아닌 여러분을 죽이는 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그러한 배경 속에서 오늘 본문의 하와의 타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3:1) 1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모세는 뱀을 수식하는 형용사로 아룸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아룸이라는 단어를 간교하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만 원래 히브리 원어의 뜻은 ’clever'에 더 가깝습니다. 현명하다, 지혜롭다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더 원문 에 맞는 번역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뱀처럼 슬기로워라는 말씀을 하시지요? 거기서 쓰인 헬라어 프흐로니모스가 오늘 본문의 아룸이라는 히브리어와 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단어를 통해서 하느님을 떠난 지혜와 명철은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라는 어구에 쓰인 동사가 히브리어 아마르라는 동사입니다. 그 동사는 ’Qal'동사 와 우 계속 형입니다. 그 말은 이미 오래도록 서로 말하고 사귀었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와는 현명하고 지혜로웠던 뱀과 자주 함께 했던 것 같습니다. 사탄은 그렇게 하와와 친밀한 관계였던 뱀을 사용해서 하와를 유혹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교훈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성경의 내용을 교회에게 주심으로 해서 여자인 교회는 언제든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대상은 머리에 뿔을 달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친밀하고 현명하고 신뢰할 만한 존재의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이 창세기 3장의 이야기를 근거로 교회에게 마귀의 유혹에 조심하라고 경고를 하는 것을 보아도 이 창세기는 그저 최초의 인간의 우발적 타락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히 드러납니다.

 

(고후11:3) 3 그러나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을 미혹하는가? ‘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3:1) 1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언뜻 보기에는 뱀의 질문에 아무 문제가 없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 질문을 자세히 뜯어보면 그 질문 속에는 아주 사악한 계략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뱀의 질문과 하느님의 명령을 잘 비교해 보세요. 먼저 하느님의 명령을 보지요.

 

(창세2:1617) 16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느님은 분명 동산 각종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악과에 대해서만 금식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 그러한 하느님의 명령에 정말, 참으로라는 단어와 어떤, 모두라는 단어를 넣어서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라고 질문을 함으로써 하느님의 엄격함과 극단성을 의심케 한 것입니다.

이렇게 마귀는 하느님의 말씀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할 때도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들고 하느님의 백성들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느님의 말씀을 살짝 왜곡시켜서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을 혼란케 만드는 것입니다. 수많은 이단과 사설들이 성경을 완전히 부인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異端이라는 말은 끝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다 같은 것 같은데 끝만 살짝 왜곡시킨 것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 말씀에 실존주의 철학을 살짝 가미시켜 놓은 것이 정통주의입니다. 성도는 성경을 통해 실존주의 철학을 해석해야 하는데 실존주의 철학으로 성경을 재해석함으로 해서 그리스도교에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묵시나 하느님의 말씀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무오성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틸(Van Til)교수는 신정통주의를 자유주의보다 더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과정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정신학은 진화론적인 학설을 가지고 성경을 재해석해 놓은 것입니다. 해방신학은 정치적인 해방철학을 가지고 성경을 재해석해 놓은 것입니다.

통일교, 알매니안 주의, 몰몬, 여호와의 증인 이 모든 것들이 진리와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 아니라 진리를 약간 틀어서 진리와의 구분이 모호하게 만들어 사람들을 혼란케 하는 비 진리들 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다음 장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살짝 왜곡해서 하느님께 정면으로 대드는 인간이 나옵니다.

 

(창세4:12,16) 12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16 카인은 주님 앞에서 물러 나와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았다.

 

하느님께서 동생을 살해한 아담의 맏아들 카인을 저주하시면서 카인은 遊離 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유리하다라는 말은 ‘vagabond''방랑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카인이 어디 가서 정착을 합니까? 놋 땅에 가서 정착을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노드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유리하다’ ‘방황하다’ ‘nood'와 같은 뜻입니다. 카인이 너는 유리 하는 자가 되라는 하느님의 저주가 무슨 뜻인지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가 편한 데로 살짝 바꾸어서 , 방랑이라는 땅에 가서 정착을 해 버렸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하느님의 말씀을 잘 따른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해 볼테면 한번 해보자라는 도전적 심보가 들어있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살짝 왜곡하는 것은 사실은 하느님께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보태거나 빼서 전달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말씀을 전하는 사역에 부름을 받은 교사들은 더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해서 제시하는 행위는 하느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신도들을 공격하기 위해 설교자가 하는 말이나, 하는 일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삼대가 저주를 받는다느니, 주교(사제)는 하느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고 성도는 사람에 의해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느니, 오병이어의 기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니 빚을 내서라도 헌금을 한번 해 보라느니, 십일조를 열심히 해서 하느님이 정말 축복을 하시나 안 하시나 하느님을 시험해보라느니이런 말들은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거니와 상식적으로도 수긍할 수 없는 아주 저속하고 치졸한 하느님을 향한 반역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성경을 살짝 틀어서 이용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을 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이 살짝 왜곡이 되자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심각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창세3:23)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3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탄이 하느님의 말씀을 살짝 왜곡해서 하느님의 과격성과 엄격함과 극단성을 의심케 하자 하와가 금방 넘어가서 하느님에 대한 섭섭함을 표시합니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만 말씀하셨는데 하와는 하느님께서 선악과를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의 섭섭한 마음을 첨언하여 하느님의 포악함과 과격함을 토로합니다.

일단 인간이 그렇게 하느님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겁이 없어집니다. 그게 3절에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게 되면 정녕 죽으리라‘’무트 타무트‘’죽고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겁이 없어진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 ‘’죽을지도 모른다라고 하느님의 말씀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정확한 이해는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의 진의가 살짝만 왜곡이 되어도 이렇게 엄청난 결과가 배태(胚胎)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교회에게 말씀의 정확한 해석과 적용을 무서운 경고의 말씀으로 명령하신 것입니다.

 

(묵시22:1819) 18 나는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보태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보태실 것입니다. 19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에서 무엇을 빼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거룩한 도성에서 얻을 그의 몫을 빼어 버리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걸려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에 그 것이 정말 성경이 담고 있는 진의인지를 열심히 상고하고 묵상하고 연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17:11) 11 그곳 유다인들은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보다 점잖아서 말씀을 아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

 

베레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도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그 설교가 정말 성경에 근거하여 옳은 것인가를 날마다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말씀을 향한 똑같은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는 언제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 게 될지 모릅니다.

그렇게 여자가 마귀의 미혹에 이끌려 하느님을 의심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흔들리자 마귀는 여자에게 치명타를 가합니다.

 

(창세3:4)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마귀는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완전히 부정해 버립니다. 하느님은 분명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마귀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하와는 마귀의 그 거짓말을 기어코 믿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마귀에게 속아 하느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게 되자 그 후에 일어 난 일이 뭡니까? 여자가 냉큼 손을 내밀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드디어 라는 것이 가시적 열매로 맺혀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죄의 발단은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섞거나 곡해를 하는데서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교회 강론대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그 진의를 따라 제대로 강해되어지고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걸린 문제이니까요.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의 진의를 정확하게 배우고 익혀 그 분께서 하지 말라 하시는 것은 그 말씀이 아무리 이해가 안 가고, 그 금하시는 일이 너무 너무 하고 싶어도 그냥 안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느님께서 하라 하시면 내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가 죄를 멀리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내 생각에는…….’하고 내 사견이 개입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때 망하는 것입니다. 왜 말씀 공부가 중요한지 아시겠어요? 이렇게 마귀는 늘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어겨서 결국은 하느님의 진노를 사는 방향으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죄의 원인은 마귀니까 하느님은 우리에게 죄책을 물으시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마귀가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해서 유혹하지 않으면 우리는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 이런 질문이 마음속에 슬며시 일어나는 분들이 계시지요? 아닙니다.

성경은 지금 유혹하는 마귀라는 존재를 대표로 세워서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도덕적 피조물들의 추구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느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경향으로 내닫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당신의 백성들의 그러한 죄에로의 경향을 은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설복(說服)하여 소화(消火)시켜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당신의 백성들이 하느님의 은혜 앞에 꼼짝없이 항복하도록 이 역사를 경륜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타락의 경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게 되면 인간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창세3:6) 6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의 추상같은 명령이 우습게 여겨지자 여자는 하느님이 금하신 것을 욕망을 품고 바라봅니다. 그랬더니 정말 보암직도 했습니다. 안목의 정욕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든 생각이 먹음직도 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육신의 정욕입니다. 또 한 가지가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입니다. ‘너희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라는 사탄의 유혹을 따라 인간에게 하느님의 지혜에 닿고 싶어 하는 종교적 욕망이 생긴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하느님은 역사와 성경을 통하여 우리 성도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떠나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서 나오게 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얼마나 인간을 파괴하고 피폐하게 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심으로 우리 성도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러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교육하시고 설득하시는 것입니다.

그 작업이 지금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에덴동산의 사건을 포함한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에게 무언가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얼마나 일관성이 있는가 보세요.

 

(요일2:1517) 15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17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사도 요한도 하느님의 은혜를 떠나 세상을 사랑하는 타락한 인간이 갖고 있는 문제를 세 가지로 지적하지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과 대조하여 기록된 것이 17절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자들은 치명적인 병에 걸리게 되는데 그 병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잠시 후면 사라져 버릴 것들이므로 너희들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라는 권고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느님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의뢰하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임을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 반복적으로 기록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러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저버림으로써 모든 인간들에게 닥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벗어나서 살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 오신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승리를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 창세기 3장의 실패가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회복이 됩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예수님의 廣野 시험 사건입니다.

마귀가 40일을 주리신 예수님께 다가와서 속삭입니다.돌로 빵을 만들어 먹어라 뭡니까? 육신의 정욕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의 육신의 정욕을 부추깁니다. 그 때 주님께서 무엇이라 대답을 하십니까? 신명기 83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성경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대답이 바로 아담과 하와의 입에서 나왔어야 하는 대답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는 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육신의 정욕을 누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창세기3장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인간에 의해 그냥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바로 그 사실을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해 일어난 사건인 것 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이외의 모든 열매를 먹을 수 있었던 최고의 풍요의 상태에서도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게 온전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우리 주님은 40일을 주리신 상태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쫒고자 육신의 정욕을 누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승리를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 승리가 우리의 것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떠나서는 첫 번째 아담과 하와처럼 살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은혜를 쏟아 부으셔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자들로 새롭게 창조해 주실 것임을 창세기와 마태복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인간들을 하느님의 저주로 몰아넣은 첫 번째 아담과 하와의 육신의 정욕이 해결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마귀가 주님을 시험한 것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러면 천사들이 수종을 들것이라는 것이지요. 성전에서 네 힘으로 너를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생의 자랑입니다. 종교적 욕망을 부추긴 것입니다. 주님은 사탄에게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 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 고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거기에서 모든 인간들을 하느님의 저주로 몰아넣은 이생의 자랑이 해결된 것입니다.

세 번째로 마귀는 주님께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자신의 말만 들으면 그 세상을 모두 주겠다고 미혹했습니다. 안목의정욕입니다. 주님은 사탄아, 물러 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고 하시지 않았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목의 정욕이 해결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의 경로를 정확하게 거꾸로 되짚어 올라가시면서 마지막 아담이신 주님은 그 실패를 회복하십니다.

 

성경은 주님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 중에 마지막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사가 없이 죽어 버리심으로 더 이상 아담의 후손은 없어지게 된 것이고 그 후로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의 후예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일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 속의 아담의 대를 끊어 버리시고 아담이 실패한 모든 것들을 온전하게 회복시키신 주님의 회복을 그들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고전15:45) 45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여기 보면 사도 바울로가 주님을 가리켜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르지요? 주님은 마지막 아담이 되셔서 그 아담에게 떨어진 저주를 모두 안고 죽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타락한 아담의 후예가 아닌 것입니다.

 

(로마5:1419) 14 그러나 아담부터 모세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은 자들까지도 죽음이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입니다. 15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16 그리고 이 선물의 경우도 그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경우와는 다릅니다. 한 번의 범죄 뒤에 이루어진 심판은 유죄 판결을 가져 왔지만, 많은 범죄 뒤에 이루어진 은사는 무죄 선언을 가져왔습니다. 17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성도들의 저주가 벗겨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도 보면 타락한 아담이 주님의 표상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그 말은 아담은 우연히 우발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은혜의 선물을 설명하기 위한 예형으로 등장했던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와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들인 것입니다. 너희들은 하느님의 은총 아래에서만 살아야 한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너희들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일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너희들은 영생에 이르러 참 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를 설명하시기 위해 이 역사가 아담으로부터 이렇게 흘러오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떨어진 하느님의 저주는 모두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저주의 원인이 되었던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자랑은 우리와 관계없는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은 시험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안목의 정욕에 끌려 다니고. 육신의 정욕에 맥을 못추고, 이생의 자랑에 목숨을 걸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에게 그러한 것들을 조심 하라고 경고하는 것이고 이기라고 독려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제 너희들은 그러한 것들로 너희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에 올려놓으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우리가 극복해 내야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곳에서 예수님께서 다 이겨내시고 극복해 내신 그 저주의 원인들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신앙생활 속에서 채워주겠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너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충족하게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인간의 타락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지 인간이 채워야 할 것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건 마귀의 속삭임이지 절 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나의 생각과 사견을 덧붙이거나 제하여 버릴 때 우리에게 닥치게 되었던 것임을 잊지 마세요. 따라서 우리가 거듭난 자로서 하느님의 자녀로 그 신분에 맞게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 진의대로 잘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더욱 더 진지하고 부지런히 하느님의 말씀을 일점일획도 歪曲하지 말고 常考하고 黙想하고 工夫하고 硏究해서 목숨 걸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도록 힘을 쓰십시다.

 

 *창세기를 알면 성경 전체의 맥을 잡을 수 있습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