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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로마8:29~3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2-14 조회수851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 2. 14. 도란도란글방

(공동번역성서)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로마8:29~30)

29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30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 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세상 풍조에 이끌려 가는 거예요. 속고 있는 거죠. 한마디로~하느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는 역사 속 아담들은 끊임없이 자기들이 상정하고 합의하고 정의한 그런 자신의 아름다움을, 잘남을 추구하고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해요.. 그러한 인간들의 추구는 단지 외모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능력, 도덕성, 인간성, 선행 등 다방면에 걸쳐서 일어나요.

이 역사 속 아담들은 너 나할 것 없이 그들 속에 있는 두려움을 해소하고 뻥 뚫려 있는 공허를 무언가로 든 메꾸어 내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은 외로우면요 그걸 어떤 방법이든 그거는 풀어요. 근데 고독이라는 건 무엇으로도 메꾸어 지지가 않거든요. 그건 완전히 다른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 고독은 모든 인간들이 갖고 있어요. 태어나면서 부터. 그걸 메꾸기 위해서 인간들은 그렇게 자기의 인생을 올인 하는 거예요.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를 개발하고 자기의 능력을 쌓으며 자신의 외모를 가꿔요.

그도 저도 안되면 육신의 힘을 써서 라도 자기의 비교 상대 우위라는 그 자리를 점거하고 싶어 해요. 그래서 힘 있는 이들이 모여서 무슨 폭력 집단을 결성하기도 하고 그것으로 자기를 과시하고 자랑하려고 그래요.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자비, 온유, 선행 여러분 그거는 좋은 거예요. 좋은 건데~ 그것밖에 할 게 없어서 그것으로만 나를 드러내려고 하는 그건 사실 비루한 겁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그 스스로 강해지려는 시도. 스스로 자랑스러운 자가 되고 싶어 하는 그 욕망, 그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고 싶어 하는 그 저질스러운 욕구로 자기의 고독을 메꾸려고 그래요. 성경은 그걸 뭉뚱그려서 그래요. 사람들은 신앙생활도 그런 식으로 합니다.

스스로를 열심히 가꾸고 단장하고 성숙시켜서 하느님 앞에서의 당당한 나를 구축하려고 해요. 그리고는 그것을 나의 구원의 자격으로 삼아요 스스로.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라 스스로 자위하며 살고 있는 거예요. 그들은 입만 열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너스레를 떨죠.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의인이 삶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나의 정성과 나의 열심, 그리고 나의 변화와 나의 성숙이 하느님께 드리는 치성. 최고의 정성이 된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가꾸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의 생각에 자신이 그러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라는 생각이 들면 마치 얼굴 뜯어고친 그 여자들처럼, 당당한 자신감으로 하느님 앞에 서서 이렇게 당신의 영광을 위해 열심을 부린 나를 이뻐해 주세요. 칭찬해 주세요. 나를 기뻐해주세요. 라고 요구하고 싶은 거예요. 당신의 기쁨을 위해서 내 몸을 이렇게까지 아름답고 성숙하게 가꾸고 왔으니까 내 사랑을 받아달라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하느님을 사랑해서 그러는 거예요? 아니면 자기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예요? 그러한 왜곡된 신앙생활로 치성을 드려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성취해 낸 충만한 그 자존감과 비교 상대적 우월감에 아주 만족스러워하면서 살아요. 그래서 그들의 열심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치열해집니다. 나중엔 집도 팔아요. 가족도 없어요.

이단들은 그걸 잘 자극해주는 실력들이 있는 놈들이에요. 그게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일까요? 그렇게 하면 정말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겁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지 못해서, 그분에게서 흘러 내려오는 그 사랑과 그 은혜를 알지 못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스스로의 구원을 쟁취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아담들의 처절한 몸부림일까요?

여러분께도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십니까? 보이지 않는 그리고 본적도 없는 그분을 정말 사랑하세요? 추측하지 말고, 조작해 내지 말고 보지도 못했고 본적도 없는 그 하느님을 진짜 사랑하냐구요. 혹시 사랑하고 싶고 사랑해야 했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실망 때문에 보이지 않는 어떤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 그 대상의 이름을 그냥 하느님!’ 이라고 이름 지어 놓은 건 아닙니까?

성경은 인간의 직접적인 하느님 사랑을 불가능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인간들의 치사랑을 이웃을 향한 내리사랑으로 확인하라~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그것으로 확인하라~ 라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주님은 온 율법. 온 하느님의 말씀. 그 하느님의 말씀 전체가 하느님 사랑이웃 사랑’  으로 그렇게 완성이 된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는 그 둘이 정확하게 하나다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 둘은 같은거야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왜 굳이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마태 2236-40) 36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37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38 이것은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39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40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에서 이 둘째, ‘듀테로스이라는 뜻이에요. 샤네. . 듀오에서 나온 단어에요. 이 둘은 그냥 짝이야. ‘그와 같으니이거는 호모에서 나온 거예요. ‘같은 거다이 말이에요. 이 둘은 정확히 같은 거야~이렇게 이야기한다니깐요. 하느님 사랑은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짝으로 하여 나타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들은 아예 하느님 사랑의 부분을 빼버리고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갈라디아 5:14) 14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은 어디로 사라졌네요?

(야고보2:8) 8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최고의 법을 지킨다면 잘 하는 일이지

아니, 아무리 주님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같은 것. (호모이오스)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치더라도 솔직히 하느님 사랑이 조금 더 가치 있는 것같이 보이지 않아요? 근데 왜 사도들이 굳이 그걸 다 빼버렸을까요? 인간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라!” 라고 하면요, 그걸 즉시 섬김’, ‘드림으로 재해석해버려요. 그래서 예언서에서 너희들이 드림으로 망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언제 하느님이 나한테 드리라고 그랬니? 그 드리라는 건 하느님이 너희에게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먹으라고 이야기 아니었어?” 이 이야기하잖아요.

有限한 인간들이 無限의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섬김밖에 없어요. 그들의 상식 수준에서 섬김밖에 없어요. 몸이 부서져라 섬겨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를 사랑이라고 하죠? 라고 우기고 싶은 거예요. 그거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리고 그 섬김의 도구는 당연히 우리에게 준 게 하느님 말씀. 성경밖에 없으니까 율법이에요.

율법으로 자신을 담금질해서 인간 중의 인간이 됨으로 해서 아주 이쁜 여자 중의 이쁜 여자가 되어서 하느님이 기뻐하신 자녀로 거듭나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게 아담들의 자기 구원 프로젝트에요. 근데 실제로 그렇게 여자들이 이뻐지고 싶은 게 진짜 남편을 위해서에요? 아니면 자기를 보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입니까? 자기 위해서에요. 자기 섬김이라니까요. 그거. 성경이 그걸 우상숭배라 그래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십계명을 다시 풀어주실 때 하느님 사랑의 부분인 위의 다섯 계명은 아예 말씀도 안 하세요. ‘이건 너네 거 아니다! 근데 이거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는 가르쳐 줄게그렇게 해 놓고 육(6)계명부터 이야기를 하세요. 그걸 넷(4)으로 이야기를 해주세요. “살인하지 마!, 간음하지 마!, 거짓증거 하지마!, 이거를 다 알아서 제대로 너희들이 이해하고 흘려주면 그걸 사랑이라 그래~ 그러면 너희는 완전한 거야이렇게 이야기한다니까요. 하느님은 오히려 그러한 방식의 섬김의 사랑을 네가 어찌 나를 대적하느냐?” 라고 이야기를 하세요. 재밌지 않아요?

구약시대에 수많은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이들이 성전에서 식음을 전폐하며 그 하느님을 섬겼어요. 율법을 지키겠다고 적이 칼을 들고 뒤에서 쫓아오는데 안식일이라고 뛰지를 않았던 사람들이에요. 목숨 걸고 지킨 거죠. 그런데 하느님이 그들을 향해서 뭐라 그러냐면 너가 왜 나를 향하여 그 사랑을 부어?” 그걸 뭐라 그러냐면 너 왜 나를 대적해?” 그런다니까요. 네가 내 사랑을 받았으면 돌아서서 흘리라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 성전에서요. 제물을 여기다 두고 여기서 그 죄 사함을 원하는 제사를 드리러 오는 이들이 있죠? 그럼 제사장이 여기에서 서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느님은 원래 율법은 제사장이 요기서 제사를 드리죠? 그렇죠? 요기서 이 제물을 여기다 놓고요. 요 사람들과 요 제물을 자기가 안수해서 연결을 시켜요. 그리고는 요 죄를 여기다가 전가한 다음에 요걸로 하느님께 태워서 받으세요. 라고 드리는 게 제사였어요. 근데 하느님은 예언자들을 보내서 내가 언제 너희보고 이런 제사 드리라 그랬어? 라고 이 마당에 가서 전하라 그래요.

그러면 이 제사장들은 어떻게 해야 되냐? 원래 정말 중보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이 제사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서요~ 이리로 넘어가서 여기에 지성소가 있으니까 하느님을 등지고 이리로 사랑을 흘려보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서서 같이 드려버리면 하느님이 "너희들이 왜 나를 마주 보고 있어?” 라고 하고 왜 너희들이 나를 대적해?” 라고 했다니까요.

 

여러분. 天干地支 라는 게 있죠. 十干, 十二支이게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해서 열 개죠? 근데 그거를 하늘이라 그래요. 거기에 첫 번째가 입니다. 그리고 이 땅지, 십이지여기보세요. ‘’10 , ‘열둘’12이잖아요. 이게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뭐 이렇게 해가지고 12개에요. 그럼 이게 뭐냐면요. 천간 하늘의 10열가지 기둥을 갖고 요 12열둘이 다 짐승이란 말이에요. 이게요. 제가 토끼띠거든요.^^ 그 용이 뭐냐면 나머지 11 짐승의 특징을 이렇게 모아서 가상으로 만들어 놓은거에요. 짐승의 대장! 그래서 성경에도 용이 나오는거에요. , 돼지 코, 뱀 몽뚱아리, 닭 발, 쥐 꼬리, 뭐 호랑이 이빨 다 모아놓은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짐승의 불과한 이 아래의 것들이 이 (하늘의 열 계명이죠?) 열을 제대로 알아 12이 되면 그게 어떻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12이 되죠? 1012와 하나하나 다 만나면 60이죠? 그래서 40不惑이라 그러고 50을 지천명 하늘의 뜻을 알았다 그러고 60還甲이라 그러는데 환갑이 뭐냐면 ..그들이 다시 그걸 깨달아 하늘이 되었구나 이런 말이에요.

그럼 환갑상은요 늘 여기에서 같이 밥을 먹다가 이 분이 일로 가서 이 환갑상을 제사상으로 받습니다. 잘들 몰라서 그러지 환갑상을 차리는 의식은 제사상하고 똑같아요. 당신은 땅에서 죽었다 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축하했다는 거예요.. 요즘 뭐 오래오래 산다고 이 환갑을 축하하는 것도 이제 없어졌는데 그건 이게 뭔지 몰라서 그런 거예요.. 오래 살아서 축하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냥 당신은 진리를 알았군요. 그래서 땅에서 죽었군요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은 항상 죽음은 병풍 뒤로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병풍이 열폭 휘장을 똑같이 본떠서 만든 거거든요. 근데 그 휘장은 언제 찢어지냐면 그 사람의 육신의 숨이 멎어야 찢어져요. 비밀(무스테리온)은 열린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우리가 아무리 좋은 것으로 하느님을 섬긴다 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하느님을 향하여 자꾸 뭔가를 갚으려는 의도에서, 섬김으로 내놓아 버리면 하느님은 네가 나를 대적한다 라고 이야기 한단 말입니다. 그걸 기특하다고 하지 않아요 성경이요. 옆집 아저씨가 내걸 갖고 와서 나한테 이걸 드리면서 ~잘했죠?” 이러면 너 미쳤니?” 그럴 거 아니에요. “왜 내걸 가지고 네가 생색을 내?” 그럴 거 아닙니까? 아니 하느님께서 이 천지만물을 왜 만들었다 그랬어요? 창세기 11절에서. 내가 이 아래의 것으로 위의 것을 샤마임그 물이 있는 거기를 설명해 주기 위해 에레쯔. 이 땅의 것을 만들어 이 세상을 만들어 너희들에게 설명해줄거야~ 어떻게? 엘로힘으로. 그래서 만든 거라 그랬잖아요. 그러면 이 땅의 것, 아래의 것은 그 하느님, 하늘의 것이 우리에게 알려지면 이제 소멸되어질 것이죠? 근데 이 땅에서 우리가 만들어서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은 아래의 것밖에 없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그걸 알았으면 그 아래의 것은 필요 없는 멸해질 거 아니겠어요? 근데 멸해질 것을 갖다 드려놓고 이쁘죠?” 그러면 이게 말이 되냐구요


(1사무15:21~22) 21 단지 군인들이 죽여 없애야 할 짐승 가운데서 양과 소를 좋은 놈으로만 잡아 왔습니다. 그것도 길갈에서 선생께서 모시는 야훼 하느님께 잡아 바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22 그러자 사무엘이 말하였다. '야훼께서,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 번제나 친교제 바치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 같소? 순종하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그분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염소의 기름기보다 낫소.

성전 안의 제단에서 드려지던 제물이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을 위하여 당신으로 드릴 그 제물을, 그 번제단 위의 제물로 보여주신 거잖아요. 우리에게 드리라는 게 아니라~물두멍에서 우리 보고 거기서 깨끗이 씻고 오라는 거예요? 아니면 내가 하늘의 물. 그 말씀으로 내가 너희를 깨끗이 씻겨서 내 백성으로 만들거야! 새 언약이에요. 이게! 그걸 보여주기 위해 물두멍을 준거에요. 후자죠? 진설병. 내가 하늘의 떡. 그 만나. 말씀. 진리로 너희를 먹일거야! 그러니까 나에게 받아먹어라~라고~라고 주신 거예요? 아니면 내 배고프니까 떡 좀 바쳐라 하고 주신 겁니까??

성전의 모든 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실 것을 그려놓은 거지, 희들이 나한테 갖다 바쳐야 할 것을 내가 이렇게 모형으로 준다 라고 준 건 하나도 없다 말입니다. 그러면 그 성전 안에 그것들 . 그 차서. 티데미 된 그것들을 글로 적어준 게 성경이니까 우리는 그러면 그 성경을 갖고 하느님이 나를 섬겨주신 그 진리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고 애를 써야 돼죠. 근데 성경을 갖고 예배당에만 오면 무얼 그렇게 갖다가 바치려고 들 하는지 말이죠~ 몸뚱아리. 자기의 그 몸뚱아리까지 바치려고 한다니까, 하느님이 그것 대적한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엉뚱하게 네 것으로 나한테 와서 하느님 사랑해요라고 갖다 바치지 마! 그럼에도 주님만 영광을 받으시라는 둥, 주님만이 나의 사랑이라는 둥, 주님이 다하셨고 나는 먼지라는 둥.’ 그런 엉뚱한 소리들을 해대고 어떤 이들은 그게 부러워서 아. 언제 나는 당신처럼 그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러고 신파극들을 하고 앉아 있는 거예요.

여러분. 그리스도교 신앙을 섬김의 신앙, 드림의 신앙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는데, 그렇게 무엇으로라도 열심을 부려서 하느님이 기뻐하는 어떤 걸 만들어 내려고 하는 이런 율법주의적 신앙으로 하나는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당신이 다 하셨죠. 당신의 피, 당신의 십자가, 다 이루셨죠? 그러니까 저는 아무것도 할게 없는거죠?”라고 그걸 그냥 우상으로 갖고 있는 거. 이 둘로 나타나요. 둘은 완전히 다른 거 같죠? 그래서 서로들 욕하고 지랄들을 떤다니까요. 지금도. “너네는 율법주의야. 너네는 너무 방종해”~ 이러고 앉아 있어요. 내가 보기엔 둘이 똑 같은 거예요. 그 십자가. 그 성경, 그 성전을 섬김의 대상으로 갖고 있으면 사람은 반드시 율법적 열심을 부리게 되어 있거나, 아니면 그걸 그냥 우상화 시켜놓고 나는 거기서 제외시켜 버리는 이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니깐요. 근데 똑같은 놈들이 서로 대척점에 서갖고 내가 잘났다! 네가 잘났다!” 이러고 앉아 있다니까요.

주님이 다 하셨고 나는 먼지에 불과하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에요. 나는 그 십자가, 그 주님을 섬기는데 기념하는 데에 머물겠습니다! 이게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그건 내 밖의 우상이라니깐요. 그거는. 내가 그 주님이 하신 일의 진의를 마음으로 알았다면 그 예수와 그의 하신 일은 섬김과 기념의 대상으로 길이길이 보전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나오는 너희들이 뭐 성찬식 하면서 나를 기념하라 이건 다 기억하라! 에요. 뭘 기념을 해요? 기념을 하기는... 내가 무슨 의도로 그걸 하라고 했는지 꼭 기억해! 라는 말이지, 나를 기념해! 이런 말 아니라니깐요. 뭘 기념해요~?그건 내가 그걸 그 내용을 진의로 알아먹었으면 즉시 두들겨 패서 파괴해야 할 거라니까요. 그거는.

그래서 구하라 (아이테오) 찾으라(제테오) 그다음에, 두드려서 부수어라(크루오) “너희들이 구하고, 그렇게 구해서 찾으면, 너희들은 니들이 섬김의 대상으로 갖고 있던 그걸 두드려서 부술 것이다라는 이야기에요. 그게 내가 문이라고 했던 예수에요. 율법으로 오신 예수. 그분을 섬김의 대상으로 갖고 있으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우리 옛날에도요. 우리가 입주식 같은 거 하잖아요. 집 지어 놓고. 그러면 대 목수가요. 문을 이렇게 다는데 문을 잘라서 달지 않습니다. 원래. 요렇게 하나로 나무로 딱 대어 놓고 입주식 할 때 톱으로 위로부터 이렇게 깨요. 문을. 그리고는 문을 열고 박 밟아서 깨고 불씨 들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은 두드려서 깨는 거라니깐요.

예수님이 그 문으로 오셨단 말이에요. 여러분이 그 문 안으로 들어가려면 저 문을 두드려서 (나카) 살해할 목적으로 패서 없애버리는 거예요.


(갈라디아 511~12) 11 형제 여러분, 만일 내가 여전히 할례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면 왜 내가 지금까지 박해를 받겠습니까?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하고 있다면 내가 전하는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12 할례를 주장하여 여러분을 선동하는 자들은 그 지체를 아예 잘라 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는 너희에게 할례를 전하던 사람이다. 할례가 우리는 택한 백성이라는 표식을 스스로 자기 몸에 스티그마, 흔적으로 남기는 거죠? 그런데 당시에는 날카로운 메스나 칼이 없었기 때문에 돌을 던져서 파편이 튀잖아요. 그때 날카로운 돌 하나를 잡아서 표피를 잘라버렸어요. 그게 근데 얼마나 아팠는지, 그리고 부작용은 또 얼마나 많이 났겠어요. 그래갖고 세겜과 하몰이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했을 때 그 시므온하고 레위가 너네 다 할례해~ 할례도 안한 사람에게 내동생 못줘~” 그래서 다 할례하게 만들어 놓고 둘이 가서 다 죽여버렸다니까요. 못 일어나가지고.. 제일 아플 때 사흘 때가서. 그만큼 힘든건데~난지 팔일 만에 애기들한테 행했다니까요. 그게 내 몸을 드려서라도 당신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나는 변하고야 말겠습니다. 이런 의지였어요. 근데 그거 하느님이 나쁘다고 했다니까요. “내가 할례를 그런 식으로 너희에게 주었느냐?” 근데 이스라엘은 주구장창 그런 할례만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바오로가 그러는 거예요.. 당연히 자기도 할례를, 율법을 전하던 사람이었죠. 너희들이 내가 십자가 복음을 전했을 때 너희들을 미혹하는, 너희들을 어지럽게 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지금 있는데,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점이었잖아요. 그것이. 그거 계속하려면 아포 콥토. 아예 잘르라고 해~ 이런 말이에요. 비아냥이요. 베지 말고. 아포콥토. 아예 싹둑 짤라~ 그거 그렇게 좋아하면 아예 잘라버려라~

(갈라5:13) 13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여러분의 욕정을 만족시키는 기회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십시오.

, 자유를 위해서 너희는 부름받았잖아.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받았잖아. 그걸 왜 할례만 하고 있어~ 내 몸을 드려 그 하느님을 섬기려고 하고 있어? 아니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그거 준거 아니냐~” 이런 말이에요.

(갈라5:14) 14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그 하느님께 네 몸 드려서 뭐 할 거야? 아 그렇게 좋으면 잘라!” 이런 말이에요. 그게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거예요. “너희들, 서로 그 진리의 말씀을 흘려줘야지~ 그게 하느님 사랑 아니야?” 이렇게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1고린13:3) 3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푸쏘미조, 먹을 것을 공급하다 라는 뜻이에요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너희들을 먹이고, 그런 말이에요.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그게 사랑이 아니냐? 그게 무슨 구제고, 무슨 선행이냐? 이런 뜻이에요. 근데 왜 그런 것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하려 그래? 사랑으로 기쁘게 하라 그랬잖아. 이런 말이에요 그게 하느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이유 아니겠냐~

여러분 생명, 생명 하니까 자꾸 여러분이 오해를 하시는데 나랑은 존귀한 존재를 위해서 그 하느님이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셨다! 꼭 이렇게 그것도 자기 증명의 재료로 갖다 써버려요. 이런 분들을 위해 하느님이 자기 목숨까지 끊어버린 거예요? 십자가가 그런 겁니까? 하느님이 영이시라며 어떻게 그분이 생명을 잃어요?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셨다라는 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건 신의 자기계시, 신과 인간이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포착되지 않을 때 신이에요. 근데 신이 자기를 계시하기 시작했다는 건 내가 너희에게 만큼은 내가 신의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뜻이에요. 하느님이너를 나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걸 신의 죽음이라 그런다니까요.

성경은 예수 안에 생명이 있다 그러죠?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을 줬다는 거예요.. 단순히 목숨 끊었다는 게 아니라~ 그거에 너무 감동받지 마시라니깐요. ‘‘나 같은 걸 위해 예수가 죽으셨데로 가지 말고 그분이 갖고 있던 유일한 생명. 이 세상에서는 없다던 그 생명이 거기 있었는데, 그 생명이 그 생명을 담은 육이 터져버리자, 언약의 기둥에서 터져버리자 그것이 영으로 나에게 전해졌다 가 예수님이 나에게 생명을 전해주셨다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는 그분의 육신이 하신 일과 그분의 육신이 하신 말이 나에게 율법이나 아니면 어떤 감동적인 사건으로 여겨지다가 그것이 삭제되었을 때 나에게 진리로 이해되어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육인 예수가 죽는거네?” 그로 말미암아 그분의 생명이 나에게 오는 거잖아요.

그러면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그 진리를 전해서 그가 생명을 얻게 하고 내가 죽는다는 건 뭐예요? 내가 누군가에게 그 진리를 설명하면 그 사람이 진짜 창세전에 택함 받은 하느님의 아들이었을 때 그런거구나~ 그 진리, 그 사랑, 그 은혜가 저를 구원한 거구나 라고 그의 육이, 전한 자의 육이 먼저 죽는 거예요. 그리고는 생명이 내 안에 있던 생명이 그에게 나누어지는 거고~ 그게 나를 죽여 그에게 생명을 주는 거지! 내가 죽도록 고생해갖고 무슨 그를 구원해 내고 이따위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당신의 육적 공 생애를 삭제 당하신 분이에요.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고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고 많은 말씀을 던지셨어요. 진리로 던지셨는데, 그리고 십자가에서 수난당하시고 죽기까지 하셨는데 그 사건이 육적 공 생애와 그 예수가 아무도 구원 못 했다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삭제되어야 그것이 의미하던 진리가 영으로 침투해 들어올 거 아니에요. 그게 예수의 죽음이라니깐요.

여러분은 이 역사 속에서 뭘 훌륭한 이름을 남기기 위해 무얼 구축해 나가는 게 아니라 그걸 오히려 삭제 당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말씀이 일을 하시는 그 기적의 현장의 증인으로 서는 거예요.. 대단한 그런 존재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예수의 육이 삭제되고 그분의 공생애 전체가 그냥 삭제 돼버리고,, 아무도 못 구했으니까. 그분이 이제 그 진리로 살아나시자 진리의 영으로 살아나시자 많은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했죠. 그니까 그분이 우리에게 붙어서 죽으신 그 죽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제라, 씨를 심어놓고 죽으신 죽음이었단 말이에요.

우리도 그러한 길을 가게 되어 있어요. 그게 주님이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사랑이었어요. 예수님이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하셨어요? 이 역사 속에서.. 잘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사랑을 해야 돼요? 그 하느님을.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육을 부정당하고 그 안에 아버지가 사랑으로 부어주신 그 사랑을 드러내는 길 밖에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길도 역시 그 방법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라는 말을 딱 한 번밖에 안 하세요.. 많이 하신 거 같죠? 아니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다그랬지!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 라는 말은 딱 한 번밖에 안 했어요.. 십자가에서 죽을 때요. “내가 아버지를 사랑해. 그러니까 그 아버지 뜻대로 죽을거야.” 이 말할 때 딱 한번 했어요. “내가 진리를 담은 그릇으로서 깨지게 되면, 그 아버지가 내 안에 담아 놓은 진리가 많은 열매가 되어 씨가 되어 당신의 택한 아들들에게 들어갈 거야. 이게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유일한 길이야.” 거기서 딱 한번 밖에 이야기를 안 했어요..

(요한1431) 31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 , 일어나 가자.'

주님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말이에요. 근데 그게 자신의 육체가 삭제당하고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영으로 전달해 주는 거였단 말이에요. 그게 십자가며, 그게 하느님 사랑이에요. 근데 그 사랑은 아버지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사랑이었죠? 주님은 그 사랑을 흘려보내준 것뿐이에요. 이게 이웃사랑, 하느님 사랑이란 말이에요.

(요한복음159)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잘 보세요. 아버지의 사랑이 나에게 흘러 내려온 것처럼 나도 저희에게 이 사랑을 흘려 보내줬데요~그런데 그 사랑을 받은 자가 어떻게 되나 한번 보세요~

(요한복음1017~18)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 18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

내가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는 게 무슨 말이에요? 여러분, 레위기에 보면 주검은 절대, 시체는 절대 만지지도 말고 가까이하지도 말라 그러죠? 그때에 그 주검이라는 말이 네베라 라는 말인데요. 스스로 죽은 자라는 뜻이에요. 그럼 스스로 죽는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주님도 자기도 스스로 죽는다. 자살? 자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내가 자살을 하겠다, 스스로 죽겠다고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는데 내 목숨을 붙들고 있는 이가 허락을 안 하면 스스로 죽을 수 있어요? 못 죽습니다. 그 생명을 그 호흡을 붙들고 있는 누군가가 허락해야 죽을 수 있어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스스로 죽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어요. 그럼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자는 이 땅에 하느님으로 오신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기 전에 바리새인들이 그를 데리고 왜? 빌라도에게 갔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일 권한이 없었어요. 그런데, 빌라도는요? “내가 아무리 봐도 너는 정치범이 아닌데? 너는 죽을 사람이 아니야. 너 나한테 이야기해 네가 죄 없다고 한마디만 하면 놓아줄게그랬는데 예수님이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래요. 그럼 빌라도는 죽일 마음이 없었고, 이스라엘은 죽일 권한이 없었어요. 그때 스스로 죽을 수 있는 분은 하느님 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느님이 스스로 죽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아 이 육은 이것 자체로 가치가 아닌 거구나라고 알았을 때 그걸 스스로 죽는다 그래요. 이 육이 너무 가치 있는데 내가 원하는 데로 안 되어줘서 죽는 걸 자살이라고 그래요. 그건 스스로 죽는 게 아닙니다. ‘이 육신이라는 건 진리 앞에서 하느님 앞에서 무가치한 거구나, 진리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 나에게 주신 거구나알면 그걸 스스로 죽는다 그래요.

근데 성경에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니까 만지지도 말라라는 건 뭐냐면,너희들, 예수를 통하여 니들이 그게 뭔지를 알았다면 그 스스로 죽은 그거는 이제 버리고 돌아서서 그 사랑을 이야기하라"는 거지, 그걸 기념하라는 게 아니라니깐요. 그래서 스스로 죽은 거 네베라만지지도 말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일부러 단어를 그런 거를 갖다 썼다니까요.


(요한복음 1512-13) 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13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보세요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우리도 스스로 죽어, 진리를 전하면 우리는 당연히 스스로 죽게 되는 거예요. 이건 아무것도 아니란다 라는 걸 스스로 이야기하는 거니까. 친구를 위해서 그냥 목숨도 버리고 뭐 희생해라 이런 말이 아니라..

이렇게 설명해 볼게요. 성경은 언약의 기둥에서 당신의 육과 생애를 삭제 당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신랑이라 그러죠. 율법으로 오신 십자가 이전의 예수는 첫 번째 남편, 죽어야 하는 남편. 죽기 위해 오신 남편. 그런데 그 신랑이 죽고 새로운 신랑이 오는데 그 새로운 신랑은 불의 혀처럼 오시는 혀, , 말이라는 신랑입니다. 말씀, 그리스도의 영! 프뉴마 라는 신랑이라니깐요. 새신랑은.

신랑이라는 개념은 연합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된 것이에요. 신랑이 없으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과부, 당시 고대시대의 과부는 그런 존재였어요. 그래서 고아와 과부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구제의 대상을. 구네 네케바. 신부에게 꼭 필요한 반쪽 부분. 그 반쪽 부분, 그 분깃, 기업(유산) 그것의 의미로 동원된 게 신랑이란 말이에요.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느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는데 그게 사람이다 그래요.  그 사람을 하 아담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래놓고 이건 남성 단수로 써 버려요. 근데 이 하 아담, 사람을 만들었다 하면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그럴 때는 자칼이라는 말과 네케바라는 말을 써요. 근데 이거를 합쳐서 남성단수로 써버려요. 그러면 이 자칼이라는 건 뭐냐면 원래는 이쉬 이사 이렇게 쓰거든요. 남자 여자 할 때는요? 근데 꼭 거기서만 여섯째날. 자칼 네케바 이렇게, 남편 아내 이런 개념으로 써버려요. 그래놓곤 이거는 합쳐져서 하나야 이야기한다니깐요..

그래서 하느님이 천국에는 있지도 않은 결혼이라는 이 세상에서 만들어 놓은 거예요. 이거 배우라고요.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정에서는 항상 이 하나가 되기를 힘써야 되는 거죠.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잠자리에서도 하나 가 되는 거예요. 에하드에요. 그게. 통일. 하나. 연합이라는 거예요. 네케바 라는 그릇이 자칼이라는 내용을 받게 되면요, 요철처럼 딱 합쳐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반, 이게 반 이렇게 돼요.. 비로소 하나, 아들이 되는 거거든요.

근데 이게 반씩 나누어져 버리면 이거를 성경이 獨處 라 그래요.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 그러죠? 좋지 못하다는 단어도 토브 라는 뜻이에요. 이게 뭐냐면 선하지 않다. 악이다 라는 말이에요. ! 그러면 이렇게 하느님도 우리 인간도, 관계없이 그냥 홀로 있으면 인간은 물론 악이지만 하느님도 악하기로 결정해 버린 거예요. 그니까 반드시 하느님은 당신의 아내, 신부를 만들어 내셔야 돼요..

그래서 이렇게 둘이 하나가 되면 이 남편이 이렇게 아내에게 가서 요 아내를 아들로 만들어 내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 신랑을 성경은 또 부모라고도 써요. 이게 다 그냥 말씀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의 남편이 그 진리의 말씀이고, 우리를 낳는 아버지, 어머니가 바로 그 말씀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이.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는 육신의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는 한 군데도 없고, 전부 나를 낳는 그 하나님, 그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네 부모를 공경해라!” 마찬가지예요.. 나를 낳아주는 그 말씀을 가치 있게 여겨야죠. 공경해야죠. 자랑해야죠. 그것이 사랑인데, 그것이 말씀을 전하는 거고, 그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이렇게 신랑이 신부와 연합을 하게 되면 그 존재가 아들이 돼요.. 비로소 그에게 생명이 부어지게 되어서 아들로 탄생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랑에 의해 신부가 아들로 탄생하는 거죠. 따라서 신랑은 그 여자를 아들로 만드는 반쪽이 되는 거예요.

(에페5:31-32) 31 성서에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32 참으로 심오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준다고 봅니다.

이 이야기 그건 하느님과 교회. 우리의 이야기래요. 그게 하나가 되어야 그것이 바로 아들로 새 생명으로 탄생하는 거다이걸 설명해주기 위해 결혼이라는 것 만들었데요. 신랑과 신부라는 것을 만들었데요. 이거는 창세기 224절을 그대로 옮긴 거죠?

(창세2:24)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게 되었다.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다바크 라는 말이 아교로 딱 붙여버렸다는 말이에요. 남자가 떠나요. 이 떠나다 라는 이 말도요 용서라는 말이 있어요. 남자가 용서를 하기 위해 떠나는 거예요. 에츠 아 (아버지에요) 에츠 에미 아버지와 어머니로, 전치사 에트(~) 이쉬 여자에게 가서 딱 붙어버려요.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이렇게 딱 붙어버리니까 어떻게 된다구요? 바싸르 에하드. 에하드는 첫째 날이.. 통일, 연합 이런 말이라고 했잖아요. 에하드가.. 그게 연합이야 이런 말이에요. 남자가 뭐 부모를 떠나가지고 여자와 한 몸이 되니까 절대 시댁에는 가면 안 돼 이런 말이 아니라, 떠났으면 그만이지 이런 말이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떠나오셔서 붙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하늘에 계신 그 말씀을 어머니 라 그래요. 새 언약을. 어머니 라 그러고 우리 안에 계신 그것을 아버지라고 하죠? 근데 내가 하느님의 집, 성전, 이거를 아버지라고 읽는다고 그랬어요. 내가 그 말씀을 안에 가져 하나님의 집이 되면 내가 또 아버지죠? 그래서 하느님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이야기하는 게 그 말이라는 거예요. 난 또 아버지가 되어서 누군가를 또 낳죠? 그래서 바오로가 디모테오 보고 내 아들! 그러는 거예요. 내가 그 말씀으로 낳은 아들.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오늘 본문에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맏아들이 되게 하셨다 그러죠? 그 맏아들이라는 건 그 맞이,. 첫째라는 건 항상 그 나머지 것들의 대표로 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 나머지 것들이 진짜! 강세는 거기에 있어요. 그것들을, 이것들을 어떻게 아들로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주는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다고 하는 거예요. 그분이 맏아들. 그러면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되겠네요! 우리 안에 진리가 있으면, 우리 안에 있는 그 말씀이 찬송을 받는 자가 된 자이기 때문에 내가 그 언약의 기둥에서 파괴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맏아들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은 아버지요, 어머니예요.. 나를 아들로, 생명으로 낳을 수 있는 유일한 부모. 진짜 생명으로 낳는 거. 그 진리의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그 진리라는 씨를 가진 이들을 성령이 하는 하느님의 성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그러잖아요. 그건 우리가 아버지가 되어서 또 그 사랑을 이렇게 전해주는 거 그걸 아버지 사랑. 엉뚱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해 놓고 내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절대 안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 그 말씀대로 너는 아들로 낳아져라!” 그 말을 십계명에서 이렇게 쓰는 거예요.

(출애굽20:12) 12 너희는 부모(아부와 엠)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영화롭게 하다. 독사죠. 그 단어가 이 단어에요. 네 부모를 공경해! 카바드 영화롭게 해~ 너를 낳은 그 말씀, 그걸 드러내! 나타내! 이런 말이에요. 자랑해! 그러면 너의 하느님, 나 야훼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오래 살리라. 그 말은 뭐예요? 그게 내 안의 생명, 땅에서의 너희들의 진짜 생명이야 이런 말이에요. 땅 많이 준다는 게 아니고 장수한다는 말이 아니라. 오래 살면 뭐 할 거예요? ^^ 수명이 점점 길어져 갖고 말이에요. 문제에요. 문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어디 갈 데가 없어가지고 파고다 공원에 전부 모여서 말이에요. 그게 내 안에 있는 그 말씀을 흘려주는, 그 생명을 흘려주는 게 그게 내 생명이라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땅에서의 네 생명이야. 유일한 확인할 수 있는 진짜 생명은 그것밖에 없어이런 말이에요.

(에페소서 61-4) 1 자녀된 사람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2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신 계명은 약속이 붙어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3 그 약속은,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은 복을 받고 땅에서 오래 살리라는 것입니다. 4 어버이들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주님의 정신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잘 기르십시오.

너희를 낳은 그 부모 그 말씀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율법으로 전해주면 아비라는 작자들이. 그게 자녀들에게 짐을 지우는 거죠?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교양과 훈계로 그들을 양육해라 그러는 거예요.. 그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짐으로 힘들게 하지 말고. 주님께서는 코르반이라는 걸 예로 들어서 그러한 율법과 진리를 설명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마태152-10) 2 '당신의 제자들은 왜 조상들의 전통을 어기고 있습니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으니 어찌 된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왜 너희의 전통을 핑계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느냐? 4 하느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 고 하셨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을 받아야 한다' 고 하셨다. 5 그런데 너희는 사람을 가르칠 때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해드릴 것을 '하느님께 바쳤다'(코르반) 고 말만 하면 6 아버지나 어머니를 봉양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다. 이렇게 너희는 전통을 핑계삼아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다. 7 이 위선자들아, 이사야는 바로 너희를 두고 이렇게 예언하였다.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9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 10 예수께서 군중을 가까이 불러 모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렇게 자기 안에 들어와서 자신을 아들로 낳아주는 부모로서의 말씀을 마음으로 간직한 그 상태를 라고 하고 그 부모를 자랑하고 전해주는 것이 영화롭게 하는 거. '독사조( doxavzw )' 에요.

(로마8:30) 30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 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미리 정했다는 건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 울타리를 미리 쳐 놓으셨다 라는 의미에요. 그 프로 이전이라는 전치사와 호리조 라는 동사의 합성어거든요. 그 호리조가 울타리를 치다. 결정짓다, 경계 짓다, 경내 이런 말이에요. 그렇게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경내에 두셨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진짜 중요했던 게 뭐였냐 면요, 성전이 아니라 성벽이었어요. 그래서 즈룹바벨이 바벨론에서 돌아오자마자 재건한 게 성전 아닙니다. 성벽이에요.

성벽은 뭐냐면요, 하느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이렇게 예루살렘 성벽을 둘러쳐 놓고 이 밖은 이방, 물론 상징적인 거죠. 여기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이걸 되게 중요하게 여겨가지고 이게 무너지면 이것부터 지어버렸다는 거예요. 미리 정하셨다는 게 그런 말이에요.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이미 이 울타리 안에 넣어놓으신 거예요. 창세 전에. 그래 놓고는 이 울타리 밖으로 내 보내시는 겁니다. 이 울타리 안으로 말씀을 의지하여 들어오라고. 그래서 성경에 보면 나와라, 들어가라, 별 똑같은 덴데 그런 말을 많이 하시죠? 이런 것들로 이해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들을 의롭다 하신다 그러죠, 디카이오 가 의롭게 하다 라는 말이거든요? 동사에요. 그런데 하느님이 이게 의롭게 하시다 라는 말을 명사로 쓰면 디카이오스 에요. 근데 헬라에서는 오미클론 시그마가 붙으면 항상 존재이거든요.. 이거를 라고도 쓰지만 公義, 이렇게 쓰는데, 그 의가 뭐나면 이렇게 좌와 우가 없이 그냥 이거와 무관한 자로 똑바로 서버리면, 선과 악 이런 거 관계없이 똑바로 서면 그걸 그냥 의 라고 해요. 그리고 그게 뭐냐면 그거의 내용이 하느님이에요. 그래서 디카이오스 그러면 이거를 하느님이라고도 쓴단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그 디카이오쓰 이 의를 내 마음에 그 말씀을 통하여 갖게 되어 선악, 좌우, 죄의 이런 거와 상관없이 되어 버리면 그를 義人이라 그래요. 그리고 그를 디카이오수네 라고 그래요. 다 의라고 번역성경은 해 놓아갔고, 수네 는 내가 마음으로 가지고 있는 상태. 그래서 그게 내 안에 있으면 그게 나잖아요. 그 상태를 디카이오수네라고 그래요.

다시, 하느님이 우리를 디카이오 의롭게 해버리시면 그 의롭게 하는 게 뭐냐면 우리 안에 이 디카오쓰 의를 집어넣으신 건데, 그 의가 뭐냐면 말씀으로 좌도 없고 우도 없고 되어버리는 그 똑바로 위에 서있는 그것. 그거 하느님 이란 말이에요. 그걸 내가 받게 되면 내가 디카이오수네. 의가 되는 거예요.. 의인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내가 그 의를 가져 이게 그거구나?” 라고 이 좌도 없고 우도 없는 걸 드러내는 걸, 보이지 않는 걸 그 하느님을 보이게 나타내는 걸 영광!

하느님이 미리 정하신 그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그들은 당연히 영화롭게 되어있어요. 그 일을 하도록 정해져 있단 뜻이에요. 그 말이에요. 영화롭게 하다. 이제 죽었다고 복창해야 된다 라는 말이에요 ^^ 나의 육을 부정, 삭제 당하고 그 진리, 그 사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다. 결정되어있다 그래서 다 과거시제에요. 의롭게 하셨고, 영화롭게 하셨다. 번복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하느님의 백성이 나타내야 할 영광은 지금까지 설명해드린 진리의 말씀을 흘려내는 것과 그 진리의 말씀이 옮음을 드러내기 위해 부인되는 그 자기 육신으로 이렇게 축약이 되는 거예요.. 그게 '독사조( doxavzw )' 에요. 영광을 드러내다. 영화롭게 되다.

(1베드로123-24) 23 여러분은 새로 난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썩어 없어질 씨앗에서 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앗 곧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났습니다. 24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인간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있다'.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우리가 거듭난 것 아노뗀. 위로 다시 난 것은 썩는 것으로 된 게 아니라 썩지 아니할 하느님의 말씀으로 되었데요. 그리고는 그걸 씨라 그래요. . 너희에게 씨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말씀이 씨로 내 안에 들어오게 되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난데요. 내가 풀이래요. ‘풀이 마르고 꽃이 떨어진다그래요. 그래놓고는 말씀만 영원토록 있다그래요.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인데 씨가 너희에게 들어가면 너희의 육신이 마르고 너희의 꽃이 떨어진다그래요. 이 떨어진다는 말도 스스로 떨어지다라는 말이에요. 스스로 죽다. 그 꽃은 당연히 나에게 붙은 예수에요.

성경은 풀이라는 개념을 씨가 없음이라는 뜻으로 써요. 진짜 풀이 씨가 없나요? 잔디도 씨 있어요. 그런데 굳이 그런 개념을 성경이 동원해서 써버려요. . 씨가 없다. 그러면 근데 여기선 뭐라 그래요? 풀은 우리라 그래요. 육신이다. 그럼 내가 풀이면 나는 씨가 없네요? 근데 그 앞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씨를 주셨다 그래요.

그러면 풀이 씨를 갖기 위해선 뭐가 있어야 됩니까? 사과나무를 심었어요. 그래서 이 봄에 잎사귀가 나고 이제 파릇파릇 나무가 살아납니다. 근데 씨가 생길 라면, 열매가 생길 라면 꽃이 피어야 되죠? 꽃이 피고 그 꽃이 떨어지면 씨방이 생기고, 그 씨방이 열매가 되는 거거든요. 그럼 씨가 생기려면 반드시 꽃이 있어야 돼요.. 근데 성경이 예수님을 뭐라고 부르냐면 들의 꽃이라고 그래요. 사실 샤론의 꽃이라고 이렇게 기록해 놓은 성경은 없어요. 구절은. 근데 이 들이 샤론이니까, 샤론 스톤은 들의 돌이에요. ^^ 광야의 돌?


그러니까 그 꽃이, 들이라는 거는 물이 없고 씨가 없는 거라는 또 상징이니까 꽃이 풀에 붙어버리면 당연히 씨가 생기게 되어 있어요. 근데 씨는 반드시 꽃이 떨어져야 돼요.. 스스로 떨어지게 돼요.. 떨어져야 씨가 생기고 거기에서 생명이라는 열매가 생기게 되어 있어요. 이거를 성경이 뭘로 설명해 주냐면 무화과로 설명해 주세요. 무화과라는 건 꽃도 아닌 것이, 과일도 아닌 것 이런 뜻이에요. 꽃이 없이 과일만 있다 이런 말도 아니에요. 사실은. 무화과라는 건 그 열매가~ 그 자체가 꽃입니다! 열매가 아니에요. 그건요.

그래서 열매 없는 나무의 대표로 무화과가 쓰인 거예요.. 그 안에 바삭바삭 씹히는 게 수술. 꽃 암술 수술할 때 수술머리란 말이에요. 수술을 씹어 먹는 거예요. 그래서 무화과는 그냥 심어놓으면 자기만 커져요. 우리 인간들하고 똑같아요. 나누기 싫어하고 자기만 커지는 거. 자기만 위해서 사는 거. 무화과에요. 꺾꽂이로 항상 번식을 시켜줘야 해요. 누군가의 손에 항상 닿아져야 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이 무화과는 씨도 없고 꽃도 없는 것이 열매인 척하는 그런 나무에요.

근데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창세기에는 동산에 나무가 있었다 그래놓고 그걸 단수로 써버립니다. 분명히 우리는 늬앙스로 생명의 나무 선악과 두 개 정도는 있어야 될 거 같잖아요? 그래서 한문에서도 수풀 자를 나무 두 개를 쓰잖아요. 생명나무, 선악나무. 아니에요. 원문을 보면 나무 하나라고 쓰여 있어요. 그러면 나무는 하나밖에 없었어요. 거기에. 상징적인 거죠.

그러면 그 나무에는 열매가 맺혀 있었어요. 그러니까 따 먹었겠지. 아담과 하와가요. 그렇죠? 그걸 따먹고 금방 자기가 부끄러운 존재라는 걸 깨닫고 하느님을 탄핵한 거죠.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옷이라도 입혀놓았어야지~” 그게 선악 구조 속의 아담들이라는 거죠. 그런데 뭐라 그러냐면 그들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띠에요 원래. 진리의 띠를 자기들이 맘대로 치마를 해 입었다 그래요.

그래놓고는 그 나무 뒤로 숨었다 그래요. 그러면 뭐예요? 선악과라는 건 열매도 아닌 것이 열매인 척하는 무화과나무 같은 거라는 거예요. 그리고 너희들은 고작 그거의 잎사귀로 너희들의 부끄러움을 가리려 할 텐데 그것으로 내 앞에 부끄럽지 않게 올 수 있을 거 같아? 라는 걸 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거거든요.

이렇게 꽃도 없고 열매도 못 맺는 이것을 하느님께서 포도원에 심으시고 내가 너에게서 반드시 포도송이를 딸 거야이렇게 이야기해요 성경을 보면.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를 심는 것도 이상한데. “내가 기다린다! 열매를 따고 말거야!” 라고 이야기를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건 우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씨도 없고 열매도 없는 것에, 꽃이 갔다 붙어 그것이 떨어지면, 다른 말로 우리가 진짜 씨를 받게 되면 그 예수는 떨어지는 꽃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나에게 늘 만개해 피어있으면 안 돼요.. 그건 조화에요. 인간들이 조작해 놓은 예수. 근데 우리는 그분을 기억에서 지우는 걸 너무 불경스럽게 생각해. 그래서 늘 살려 놓는 다니까. 그럼 그분은 여러분에게 안 죽은 예수에요. 그러면 늘 여러분은 희생 제사를 다시 드리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희생제사 드리고, 아니면 거기다 그냥 살려 놓고'“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신이 다하셨어요이러고 앉아 있는 거예요.. 둘이 똑같은 놈들이에요.

그런데 중요한 건 우리의 영광이 모든 영광, 사람의 (안트로피스 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는데), ‘사람의 모든 영광은 이 꽃 같애’~ 그럽니다. 어떻게 된다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은 씨 심고 떨어져 죽으라는 뜻이에요. 그게 우리에게 나타나는 독사( doxa), 영광이라는 뜻이에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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