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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 글방 / 그대들이 승리자다 (로마8:29~3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2-19 조회수85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 2. 18. 도란도란 글방

(공동번역성서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17,3)

그대들이 승리자다

(로마8:29~30)

29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30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 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광야는 이 세상을 상징하는 장소이지요. 그 라만차 광야에 기사이고 싶어 하는 한 미치광이 노인이 있습니다. 그 라만차의 기사는 세상에 의해 홀대를 받습니다. 그는 나타난 형상 속에서 내용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는 바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입니다. 1600년 초에(전편 1605, 후편 1615) 쓰인 이 소설의 속내를 모르는 에스파냐의 왕은 소설을 극찬했다고 합니다.

'적응이라는 것은 진화 생물학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망해가고 있음에 적응하라'라는 일침을 놓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왕족들이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합니다. '어서 정신을 차리고 너희 자신의 실체를 직시하라'는 내용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많은 경우의 수를 열어 두어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게 합니다. 저는 그 많은 문들 중에 진리라는 문을 열고 그 문을 통해서 봤습니다. 저에게는 정확히 그 이야기였습니다. 돈키호테, 그는 세르반테스의 다른 자아입니다.

그 돈키호테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이 야차들의 세상에서 다른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그를 미치광이로 보지만 그 사람에 의해 그가 보아주는 그 실체로 구원을 받는 여자가 있습니다. 알돈자 라고 하는 창녀입니다 온 세상이 그녀를 더러운 창녀로 봅니다. 그런데 라만차의 기사만이 그 여자 속에서 둘시네아 라는 순결한 숙녀를 봅니다. 그녀는 자신을 둘시네아 라고 보아주는 라만차의 기사에 의해서 자신의 가치를 찾습니다.

보이는 율법이 라만차의 그 미치광이에 의해서 보기 좋게 박살나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이 그녀를 창녀로 여기고 평가하며 가치 없게 보는데 한 사람이 그녀의 실체를 끄집어 내어 그들의 판단을 무참히 박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힘없는 노인과 풍차와의 싸움만큼이나 힘든 싸움이었습니다. 결국 그 라만차의 기사는 그리스도교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소설에서는 구교(로마카톨릭)에 의해 신교(개신교)가 박해를 받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입니다. 종교 재판에 의해서 라만차의 기사는 화형을 당하러 가게 됩니다.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가 화형을 당하기 위해 동굴 감옥을 나가는 그 장면은 은혜의 신교가 율법의 구교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렬한 장면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장면에서 소름 돋는 위대한 승리를 보았습니다. 동굴 감옥에서 법정으로 올라가는 라만차 기사의 그 마지막 모습이 뇌리에 꽉 새겨졌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끌려 올라가 죽는 겁니다. 왜곡된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말입니다.

성도는 그 라만차의 기사처럼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내용을 볼 수 있는 세상 속 미치광이들인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못 보는 것을 보는 이들은 세상이 미쳤다고 합니다. '미쳤다'는 말은 '거기에 당도했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창녀 안에서 순결한 숙녀를 보고 어둠에서 밝은 빛을 보며 밤에 낮을 보고 죄에서 의를 보는 이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창녀도 어두움도 밤도 죄도 아래의 물도 모든 만물(파스pass)이 선(아가도스 ἀγαθός agathos)의 재료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도 없고 도 없습니다. 들에 의해 좌와 우의 세상 속에 갇혀 창녀로 살던 간음한 여자 이야기가 바로 창녀로 간음한 자로 살던 하느님의 신부들이 순결하고 거룩한 아들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아니야 너는 창녀가 아니야!! 왜 자꾸 그 세상의 판단과 가치 기준에 너를 집어넣고 너 스스로 왜 거기에 빠져있니? 아니야 나와!!!" 라고 하십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 모두가 왜곡된 말씀과 변질된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인 것입니다. 라만차의 기사 그들이 승리자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 라만차의 기사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미리정하셨다(προοριζω프로오리조)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울타리가 이미 튼튼히, 견고하게, 곤고히 세워져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지요. '(προοριζω프로오리조)'는 히브리어 호러스 성전, , 성벽의 합성어로 당신의 백성을 성전 삼아 놓은 것이 '미리 정하셨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부르심 '칼레오'는 히브리어 '카라'에서 온 말인데 파괴하고 다시 세우시는 십자가를 말하는 것, '카라'를 파자하면 '파괴하고 다시 세우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인데 그들은 그것을 '부르심'이라고 읽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로 불러놓고 그 십자가에 끌려오는 자만 하느님께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그 십자가의 의미가 진리로 이해되고 마음으로 간직되면 그것을 디카이오쉬네 ',라 하는 것이고, 영화 '독사조( doxavzw )'라 하는 것은 그렇게 마음이 된 의가 밖으로 흘러나오고 터져 나오는 것, 비추어지는 것을 말한다고 했지요. 미리 정하시고, 의롭다하시고, 의롭다한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맏아들이 예수그리스도였습니다.


(요한복음 854~55) 54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 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높인다면 그 영광('doxavzw')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 영광을 주시는 분은 너희가 자기 하느님이라고 하는 나의 아버지이시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알고 있다. 내가 만일 그분을 모른다고 말한다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장이가 될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예수님은 54절 하반부에서 나에게 영광을 주시는 분은 너희가 자기 하느님이라고 하는 나의 아버지이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느님이라 부르는 그분이 바로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에게 하느님으로 존재하면 심판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딱 한 번만 하느님이라고 불렀어요. 그 하느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 마음이 되면 그것을 아브av‘ 라고 해서 아버지라고 해요. 그래서 아버지가 되어야지 여러분에게 그분이 하느님이 되면 그분은 심판의 하느님이에요. 그리고 그분을 두려움을 가지고 열심히 섬기게 돼요.. 그건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반복적으로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는 것 (기노마이γίνομαι)입니다.

55절 후반부의 나는 그분을 알고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는 율법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테레오τηρέω’ ‘‘완성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의 말씀을 완성해. 내 안에서 그의 말씀이 이루어져 이런 의미입니다. 말 듣고 잘 행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거기서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가 나온 것 아닙니까.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완성이 되었습니까? 십자가에서 그의 육이 죽는 것으로 그의 말씀이 로고스가 완성이 되지요. 언약의 기둥에 매달려 죽으면 그의 말씀이 완성이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아버지의 영광이며 아버지를 영화롭게 드러내는 것이에요. 나의 육은 죽고 부정되고 삭제되고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만 영광으로 드러나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버지가 나에게 영광을 부어서 내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데 그 영화로움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내가 그 말씀을 완성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그런데 그 완성은 테텔레스타이 십자가에서 완성된단 말이에요. 그것이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광은 미스코리아들이 왕관 쓰고 행진하며 말하는 영광이 아닌 것입니다. , 그럼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어떻게 하느님께 영광을 돌렸는지 봅시다.

 

(요한복음 21:18) 18 이어서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 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띠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네가 젊어서는 율법으로 그것이 진리라고 우기면서 다녔지만,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속수무책이라는 것이에요. 남이 네게 허리를 묶어(띠 띠우고) 네가 원치 않는 곳(십자가)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로 독사조 (doxavzw)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하느님을 영화롭게 해요? 자기가 원치 않는 밖에서 하느님이 묶으시는 그 진리의 띠로 꽁꽁 묶여 원하지 않는 반대 방향으로 질질 끌려가서 두 팔 벌려 죽는 것이에요. 이것을 영화롭게 했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그 베드로가 그 영화는 풀의 꽃이야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풀은 씨가 없는 육체요 꽃은 그 씨 없는 풀에 붙었다 떨어지는 어떤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죠. 풀은 우리의 육체다 하고 이야기하죠. 육체는 씨를 가질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에서 이렇게 쓰이면 그럼 그것은 씨가 없는 것,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라고 쓰여요. 그리고 그렇게 성경에 나오는 풀은요 무화과를 지칭해요. 당연히 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그 말은 1차적으로 씨를 맺지 못하는 풀인 우리에게 씨를 전해주기 위해 그 풀에 붙었다가 장렬히 떨어져 버린 그 예수 그리스도의 그 씨를 심는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떨어진다는 것은 씨를 심는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씨를 심으면 그 상대방에게 내가 부정당하게 돼요. 아 이것이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 그 사랑 이구나! 내 능력이 아니구나! 하고 내가 떨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꽃이란 말입니다. 그런 씨를 심는 그 죽음을 가리킴과 동시에 그 씨를 전해 받은 뒤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 꽃으로의 삶과 동일하게 그 씨를 먼지가 풀풀 나는 광야인 라만차, 즉 이 세상에 심고 떠나야 하는 그런 성도의 현실을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풀의 꽃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이 풀의 영광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꽃이 떨어지는 순간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풀은 마르고라고 합니다. 율법이 죽어서 떨어져 버리면 예수가 나에게서 떨어져 버리면 아 그렇게 해서 죽으신 것이지 하고 그분의 죽음이 나에게 이해되면 그 예수는 나에게서 떨어져 버린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예수가 나에게서 떨어져 버리면 나의 육신이 부정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의 교통과 교제와 소통 속에서는 육으로 나타는 것으로 판단하고 비판하고 하는 것들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잘 안되지만 말입니다. 그것이 풀은 마르고의 의미입니다. 진리를 알았더니 그 풀은 그 육체는 아니구나라고 이해되는 것입니다. 꽃이 떨어지면 풀은 그렇게 마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꽃이 다 붙어 있습니다. 아직도 그분이 그저 섬김의 대상입니다. '얼마나 아프실까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데' 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특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나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것은 내 밖의 예수입니다. '성도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는 직설법 과거입니다.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은 진리를 깨달아 사는 성도의 삶이 예수그리스도의 그것으로 예약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직설법 과거입니다 "너희는 영화롭게 되었어. 너희는 반드시 그렇게 가!!" 이것입니다.

 

그런데 의롭게 되었다는 말은 다들 좋아하면서 영화롭게 되었다는 말은 별로 안 좋으시지요? ‘아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거야? 떨어져야 하는 거야?’ 라는 생각 때문에 안 좋으시지요? 그래서 로마서829절에서 바오로가 성도들의 삶을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삶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착한 일하고 온 인류를 구원하는 그 삶을 본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정작 아무도 못 구하고 가셨어요. 그리스도의 인 성령이 오셔서 그때부터 하나씩 살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거기서 형상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에이콘 είκών이라는 말입니다. 에이콘은 이미지, 내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 가이사르에게 세금 바쳐야 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동전하나 가지고 오너라 거기에 있는 이 형상이 누구의 것이냐" 라고 하십니다. 그때 이 단어 에이콘은 쓰십니다. 원래 나타난 형상'아이돌론Eidolon '이라고 써야 합니다.. 그런데 에이콘을 쓰십니다. 그때 보이는 대로 가이사르라고 대답하면 틀린 것입니다. ‘에이콘이라고 물었을 때는 보이는 대로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냐?를 물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적힌 글과 거기에 그려져 있는 그 왕으로서의 형상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가이사르 네요 라고 대답한 그들에게 "그래 너희들이 아는 것은 가이사르 밖에 없으니 가이사르의 것은 가이사르에게 주어라. 너희가 가이사르의 것이다 가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그게 바로 내용이란 말입니다. 마찬가지예요.. 맏아들의 그 형상(에이콘)을 본받는다는 것은 그분이 살다간 그 진리의 삶의 내용을 쫓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살다가는 것은 본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뭐 그리 착하게 사셨나요? 그렇게 버릇이 없는 분이 어디에 있어요? 나이 많은 양반들한테 막 독사새끼라고 그러고 남의 장사하는 곳 다 때려 부수고 그것이 착한 것입니까? 여러분은 너무 그렇게 미화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그냥 영웅을 하나 만들어서 그 사람에게 나를 투영시켜 대리만족을 하려는 것 같아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본받는 분이 아니에요. 그것은 신 신학의 아버지인 슈바이처 신학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에게도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그 십자가의 죽음 그것이 삶의 내용으로 결정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죽음!!! 성도는 그 아들처럼 말씀의 완성으로 죽어요. 말씀의 완성은 율법의 파괴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러한 아들의 삶을 가리켜 네가 나를 영화롭게 했다라고 하여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어떤 존재가 돼야 하느님께서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기겠어요? 너무 인생에 가치를 두지 마세요. 인권 인권하지 마세요. 하느님 앞에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 아닙니다. 성도는 하느님의 말씀인 씨를 진리로 전해 받아서 육을 삭제 당하고 아들로 탄생하여 말씀을 완성하는 그 여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돼요.. 성도의 목적지는 바로 거기인 겁니다. 그건 성도의 필연적 통과 의례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언약이었어요. 그러한 풀과 씨 그리고 풀의 꽃에 관한 언약이 창세기 세 번째 날의 記事인 것입니다.

 

(창세기 111-13) 11 하느님께서 '땅에서 푸른 움이 돋아나거라! 땅 위에 낟알을 내는 풀과 씨있는 온갖 과일나무가 돋아나거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2 이리하여 땅에는 푸른 움이 돋아났다. 낟알을 내는 온갖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 나무가 돋아났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13 이렇게 사흗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세 째날은 그저 하느님이 채소와 나무를 만든 날인가요? 채소 만든 날 이에요? 세 째 날이? 그렇게 보이잖아요. 풀과 채소 이것은 히브리어로 '데쉐 דֶּשֶׁא ''에세부 עֵשֶׂב'입니다. 둘 다 , 이라는 의미입니다. 풀이 땅에서 나오면 싹처럼 보이죠?그것이 풀이에요. 싹이에요. 데쉐에세부성경에는 두 종류의 풀이 나오는데 하나는 열매를 맺고 씨를 뿌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풀이고, 다른 하나는 씨와 열매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풀이에요.

농부가 사과씨를 땅에 심으면 땅에서 싹이 나지요? 그리고 그 싹은 풀처럼 보입니다. 그 풀싹에서는 그런데 나중에 열매가 맺히죠. 그러나 그게 어떤 식물인지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건 그냥 풀싹인겁니다. 그게 나무가 될지 뭐가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가능성만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풀이 잡초에 불과한 그야말로 풀이면 열매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에요. 성경에 등장하는 풀은 대부분 후자의 풀이에요. 그래서 베드로가 풀을 육체에 비유한 것이에요. 씨가 없다 열매 맺지 못한다. 그 풀과 싹은 녹색이죠. 아람어에서 녹색, ’푸르다라는 건 텅 비었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봄에 새싹이 막 올라와서 푸르게 되는데 거기엔 열매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을 히브리 사람들은 텅 비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푸르다? 텅 비었다. “눈에 보이는 것? 사실은 텅 빈 거야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빨주노초파남보 빨(),() 적외선 자외선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빨주노초파남보는 텅 빈 거예요.. 그걸 다 섞어 버리면 검정이 됩니다. 그래서 색즉시공 (色即是空 형체는 다 헛것이다) 이 되는 것이에요. 성경에서 풀은 항상 푸른 풀로 등장해요. 히브리어로 푸른색, 녹색은 텅 비었다. 틀이 없다. 내용도 없다. 이렇게 쓰인단 말입니다. 그러면 텅 비었다 틀도 없다 내용도 없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 그럼 풀은 곧 땅의 다른 이름이네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씨를 가질 수 없는 것, 아예 씨가 없는 것. 그것이 푸른 풀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창세기 111, 하느님께서 '땅에서 푸른 움이 돋아나거라! 땅 위에 낟알을 내는 풀과 씨있는 온갖 과일나무가 돋아나거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아마르 엘로힘 -하느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쓰아תַּדְשֵׁא- 이것이 싹트다 라는 건데요 어떤 것인지 여러분이 의미를 아셔야 돼요.. 땅에서 도저히 무엇이 나올 수 없는 것 같은 어떤 곳, 바로 땅에서 무언가가 탁 튀어나온 거예요.. 그리고 에레츠 הָאָרֶץ이죠. 땅에서 뭐가 탁 튀어 나왔는데 이것이 데쉐풀이고 에쎄부싹이에요. 풀싹이 땅에서 튀어나왔어요. 그런데 어떤 풀싹이 나면 '자라-씨를 뿌리다', '제라זֶרַע-씨를 가져 씨를 뿌릴 수 있는 풀' 음만 다른 똑같은 단어인데요. 앞에 것은 동사 뒤에 것은 명사에요. 씨를 가지고 그 씨를 뿌릴 수 있는 풀싹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풀싹()은 씨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면서요? 그런데 하느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냐면, 하느님이 땅에서 그 풀싹 땅과 똑같이 텅 빈 풀싹에서 씨를 뿌리게 만든다는 것이에요. 이것이 하느님의 언약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씨를 뿌리게 하실거냐면 '페리 에츠פְּרִיעֵץ' ‘아싸עֹשֶׂה라는 동사는 일하다, 되게하다, 되다 라는 이런 말입니다. 페리에츠가 무엇이냐면 열매 나무에요. 그 뒤에 '아싸' 역시 뒤에 페리가 있죠.? 열매입니다 이것은요. 이것을 어떻게 번역 하느냐면 열매로~ 일하는~ 열매 나무, 그런데 왜 열매로 일하는 나무냐면 ~을 위하여라는 전치사가 앞에 붙어있고 ''이라는 것이 분배하다 구분하다입니다. 율법은 항상 나누죠? 그렇게 나눈다는 것이 전치사가 위하여니까 그런데 그 라메드가 가르치다 라는 뜻이거든요. 분배하다 나누다 그 나눈다는 것, 그 죄가 뭔지를 가르치기 위하여 열매로 일을 하는 열매 나무. 이것이 뭐에요? 이것이 바로 선악과라는 말입니다.

다시 이 나누다 분배하다 이런 뜻이고 그 앞에 전치사가 가르치다 그리고 ~을 위하여라는 전치사라는 말이에요. 분배 나눔이 무언지, 그렇게 나눈다는 것. , , , , 어둠, 빛 이렇게 나눈다는 것이 뭔지를 가르치기 위해 열매로 '아싸' 일을 하는 '에츠페리' 열매나무, 그 나무로 씨를 가진 그리고 씨를 흩뿌리는 그런 풀싹을 땅에서 만들어내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면 선악과로 생명나무를 반드시 싹 틔우겠다 이런 말이죠. 채소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요 그 밑에 보시면 제라보זַרְעוֹ-בוֹ이것이 ‘~ 에 라는 전치사거든요. 그리고 알 에레츠עַל-הָאָרֶץ땅과 함께 그 안에 씨를 갖고 있는 열매로 일을 하는 나무네요. 그러면 선악과 안에 생명이란 씨가 들어있다는 이야기지요. 율법 안에 진리가 들어있다는 이야기이며 예수 안에 진리가 들어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것으로 잘 가르쳐 좌, , , , , 악 이것이 무엇인지, 나눔을 을 잘 가르쳐 씨를 가진 씨를 뿌리는 ,도저히 될 수 없는 육체, , 싹을 싹 피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악과를 통하여 아래 것을 통하여 바로 그 진리, 위엣 것을 배우면 선악과 열매가 나에게 생명나무 열매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창세기에서 나오는 나무는 모두 남성 단수에요. 중성도 아니에요. 남성 단수 나무는 하나 밖에 없다는 뜻이에요.

그래놓고 선악과 생명나무 이렇게 또 풀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뒤에 보면 또 단수에요. 남성 단수, 예수를 이야기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선악과가 나빠요? 그것 안 먹고 생명나무 알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 선악과를 악자가 들어가서 그런지 너무 싫어합니다. 그 선악과가 있어야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어요.

자 그럼 보세요. ‘얏짜 yatsa’ 이 단어를 설명하자면 하느님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억지로 손잡아 끌어냈지요? 이 단어가 바로 그 단어입니다. ‘얏자끌어내다, 밖으로 나오다, 나오기 싫은걸 억지로 끌어내다 이럴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에레츠땅에서 역시 풀싹 이죠 그렇지요? ‘데세’ ‘ 에세브그렇지요? 그리고 그 분배, 나눔 그것이 무엇인지 잘 가르치면 그 씨를 흩뿌리는 그 씨를 가진 풀싹이 그 아래 세상에서 끌려 나온다는 말입니다. 마치 롯처럼 말입니다.

나눔, , , , , 악 이러한 것을 잘 가르치기 위해 그 씨를 갖고 있는 그 열매 나무, 그 열매로 일을 하는 그 열매 나무로 그 좌, 우로 나눈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치면 그 씨를 흩뿌릴 수 있는 그 풀싹이 땅에서 나온다. 그럼 여러분은 하늘이 되는 것이죠? 그럼 그것이 엘로힘 키 토브אֱלֹהִיםכִּי-טוֹב바로 그것이 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 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그것을 셋, 3 이라고 하라. 그런데 여러분 그때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었어요. 그럼 어떻게 했을까요? 그때는 셋을 이렇게 썼습니다. , 넷은 이렇게 , 하나는 이렇게 썼어요. 넷은 성전, 지성소를 가르켜요. 그리고 요한 묵시록에 보면 정육면체의 가 같다고 합니다.

12,000 스타디움 × 12 (정육면체의 변) = 144,000 인 것이지 사람 숫자가 아닌 것입니다. 완성된 하느님 나라의 백성을 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까지 일관성 있게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첫째 날 낮과 밤, 어두움으로 그 어두움을 설명할 수 있으면 그것을 빛이라 하라고 하셨단 말이죠. 그렇다면 어두움으로 그 빛의 내용을 알고, 다음 날은 궁창 위의 물로 궁창 아래의 물을 알아버리면 나중에 그 사람이 그 안에 씨를 가진 이가 되는데, 궁창 아래의 물, 아래의 어둠 이것이 다 무엇이지요? 선악과잖아요. 그것으로 씨를 맺는 씨를 뿌릴 수 있는 그런 자가 되면 그것을 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세 명으로 이해하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완성입니다. 3은 완성입니다.

그 씨를 가질 수도 없고 맺을 수도 없는 혼돈과 공허의 땅, 흙 여기에 하느님이 선악과에 씨를 담아서 그걸 던져요. 그리고 그것을 먹인 다음에 그리고 이 육을 죽여 버리고 그 씨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목적이고 인생의 목적이고 말씀의 목적인 것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에서 선악과를 먹은 상태가 저녁, 밤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유다도 밤에 나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밤의 사람, 저녁이 먼저 되고 그 다음에 아침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좌와 우가 없는 것입니다. 어둠이 무엇이고 빛은 무엇이에요? 빛은 그 어두움을 나타낸 것이라면서요, 그럼 그것 또한 어두움이네요. 그리고 그 아래의 세상 어두움에 살고 계시잖아요. 그렇게 완성이 여섯째 날에 설명이 되지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의 이야기가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에 다시 한 번 우리의 것으로 설명이 됩니다. 그럼 이 셋째 날의 이야기는 여섯째 날에 완성이 되어져야 하잖아요. 그것을 자칼זָכָר과 네케바קֵבָה남자와 여자라고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자칼זָכָר과 네케바קֵבָה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든다고 하시고 남성 단수로 쓰십니다. 아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들을 만들 것이다.” 라고 하시고 그 아들은 어떠한 식으로 만들 것인가 하면 자칼과 네케바ֵ로 만들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자칼은 무엇이고 네케바는 무엇입니까? 자칼 이라는 남자는 네케바라는 씨를 주지요. 씨가 되어 들어와 이 여자가 아들이 되는 것을 완성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창세기 셋째 날에 선악과로 그 안에 씨를 담아 너희 안에 집어넣어 너의 육을 죽이고 너를 열매 맺고 씨 맺는 풀싹으로 싹 티울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 그렇게 부부를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 항상 함께 있어야 완성 이라는 것을 경험 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자칼과 네케바는 합쳐서 하나의 일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심지어 그 아래 세상에서도 그것을 경험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3으로 완성이 되면 그것이 땅에서 끌려 나오니까 하늘이 되는 것입니다. 삼층천, 3의 하늘이런 것이 거기서 끌려 나온 씨를 가진 여러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성경에서 하늘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절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 땅을 창조 하셨습니다. 그 말은 땅을 통해 하늘을 알라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땅이라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모형이기 때문에 그 땅을 그냥 텅 빈 것 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 만들어서 텅 비었다는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실체가 아닌 모형이기 때문에 텅비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풀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의 것들을 흑암 וְחֹשֶׁ 호셰크 이라 하는 것이고, 그것들을 깊음תְהוֹם테홈, 모인 아랫 물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인 물을 또 소망 מִקְוָה 미크베 라고 하지요.

아래의 물 이것을 바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인 바다를 우리는 소망 이라고 그래요. 그 안에 씨가 담겨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그것을 알면 그게 소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래의 바다는 보이는 소망이고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보이지 않는 소망입니다. 이 사실을 바오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둠을 잘 설명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밝게 드러내면 그것을 빛이라고 하고, 그렇게 어둠을 통하여 빛이 되면 그것이 통일이며 연합이야 에하드אֶחָד입니다. 첫째 날 이라는 히브리어 에하드אֶחָד는 통일, 연합 이라고 읽고 그래서 로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창 라키아 רָקִיע를 두고 그 궁창(창공)이라는 것을 통해서 아래의 물을 위의 물로 알아버리면 그 둘은 둘째 날שֵׁנִי쉐니. ‘짝이야 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러한 것들이 열매로 일을 하는 나무, 그러나 그 속에 씨를 가진 나무를 통하여 씨를 갖고 뿌리는 그 풀싹이 되는 현실을 쉐리이쉬 שֵׁנִי 3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3을 완성을 위해 예수님이 3을 땅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려구요? 그게 씨니까요. 땅속을 상징하는 무덤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무덤 속에 예수님께서 3일을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 낮으로 들어가신 겁니다. 밤으로 낮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무교절에 사흘을 땅에 묻어두었던 그 떡, ‘3의 떡을 먹는다고 했잖아요 우리가.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주기도문 강해 바로 아래에 세 떡을 구하는 친구의 이야기로 붙여놓은 것입니다. 그래 거기서 구하는 세 떡이 바로 이것 입니다. 이 완성 떡인 것입니다. 그 떡을 먹어야 이 3이 되는 것입니다. 그 씨를 갖게 되니까요. 여기까지는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언약의 이야기입니다.

자 이제 그럼 쉐리이쉬שְׁלִישִׁי ’ 3으로 완성된 하느님의 아들 들이 이 땅에 영화롭게 하는 자로 나타나지요? 그걸 넷(4, 레비이רְבִיעִי)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냥 숫자 4가 아닌 것입니다. 3으로 이 땅에서 그 씨를 드러낼 수 있는 자가 되면 그를 레비이רְבִיעִי 4라고 하는 겁니다.

잘 보세요. 이 레비이רְבִיעִי가 넷 인데요. 그때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시한다고 했지요? 삼은 이렇게 쓴다고 했어요. , 3은 언약 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햐요? 을 이렇게 벌려 주어야해요. 이것은 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에스카톨로스 코드란테스마지막 하나로 그것을 완성하지 못하면 호리라도 갚지 못하면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다고 하셨지요?그 호리 가 사각형의 위를 덮는 선분, 마지막 사분의 1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 3을 가지고 그 언약, 진리가 그 하느님을 설명한 것이죠. 그것이 형태로 만들어지면 성전이고, 글로 써지면 성경인 것입니다. 자 이것을 이해하고 내가 마지막 4가 되어서 을 완성하면 그것을 또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완전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정사각형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의 지성소도 정사각형인 것입니다. 그리고 묵시록에 완성된 하느님 나라의 그 예루살렘이 정사각형이 정육면체인 것입니다. 네 번째는 우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럼 거기서 그렇게 된 자의 모습, 우리의 모습이 등장해야합니다.


(창세기 114~15) 14 하느님께서 '하늘 창공(궁창)에 빛나는 것들이 생겨 밤과 낮을 갈라 놓고 절기와 나날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어라! 15 또 하늘 창공에서 땅을 환히 비추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여기서 광명은 마오르 라는 단어로 오르אוֹר빛에 마임מָיִם을 붙이면 장소가 됩니다. 그래서 마오르רואמ는 빛이 비취는 장소를 말합니다. 그 광명으로 그것으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 이러한 것들을 설명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기, 표적 이러한 것들을 말합니다.

마오르רואמ가 하늘의 궁창(창공) 하늘 적 궁창은 아래의 물로 위엣 것들을 알려면 알 수 있는 무엇을 주어야하지 않습니까? 아래의 물과 위의 물이 만나는 곳(아래와 위 원의 교집합) 바로 성경, 성전, 예수입니다. 하느님은 그리로 내려 오시고 우리는 그리고 올라가서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 성전이며 성경인 것입니다. 그것을 라키아 רָקִיעַ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에 라키아 רָקִיעַ를 만들고 라고 합니다. 라키아 רָקִיעַ는 그럼 당연히 성전이지요. 그런데 그 성전이 하늘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면 라키아 샴마임해서 하늘적 성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로 이해된 그것은 그 땅을 비추는 거에요. 해를 만들어서 땅을 비추게 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눈에 다 보이는 걸 뭐하러 성경에 써놨겠습니까. 자 빛을 비추는 곳, 그런데 그것이 하늘의 라키아라고 했으니까 성전에서 빛을 비추는 그 어떤 것이 무엇이에요? ‘등대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등대가 무엇으로 타지요? 등대가 있으면 등경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리고 그 위에 등잔이 있지요? 이것을 성경에서는 대접이라고 번역했어요.

 

여기에 기름을 끊임없이 부어야하지요? 무슨 기름을 부어요? 올리브기름, 그래서 이 등대는 무엇이냐면 이 올리브나무의 기름을 빛으로 드러내는 거에요. 올리브나무는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시나무입니다. 이것이 합쳐지면 포도나무가 됩니다. 포도나무 스네파노스stevfanoz는 여러 개가 달려있는데 이것을 하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스테파노스(포도)가 복음을 전하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포도를 딴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딴다.” 그리고 가시나무에서 스테파노스를 따서 자 땄지?”하는 것입니다.

씨없는 것들을 내가 반드시 거기서 씨 맺게 하고 씨 뿌리게 하고 열매 맺게 할거야. 라고 이야기 한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가면 저 대접에서 기름이 하나하나 쏟아지죠. 다 쏟아지면 이세상의 진리의 불은 꺼지게 됩니다. 그러면 심판입니다.

그래서 인내재앙, 나팔재앙, 을 따죠? 그 단어가 하느님이 입을 열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인을 떼, 열어, 나팔, 말해 그리고는 빛으로 비추는데 나중에는 하나하나 꺼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지금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거의 꺼져가 ,진리가 거의 없어져, 그러나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보입니다. 꺼져가는 등불,

상한 갈대 갈대는 무엇이에요? 척량(심판)하는 자에요 카논κανων. 그런데 그걸 세상은 상하게 만들어요. 그러나 절대 안꺽인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그 갈대가 꺽이는 그 때까지 안꺽어!! 갈꺼야!! 꺼져가는 불빛, 너희들이 보기엔 다 꺼진 것 같지?? 안꺼졌어!! 그럼 진리를 빛으로 드러내는 광명은 밤으로 이 세상으로 낮을 나타내야하는 거에요. 이세상은 온통 밤이니까. 그래서 그 광명을 낮을 주관하고, 밤을 주관하고 할 때 주간하다섬기다라는 말이에요.

낮을 섬기고 밤도 섬겨!! 왜냐면 우리는 밤에 있기 때문에요. 그 밤으로 낮을 알면 되요. 밤과 낮을 나누었다는 그 바달 이라는 단어 자체가 구별, 구분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밤과 낮을 바달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왜요?

아래의 광명으로 큰 광명 알아먹으라고요. 그렇게 되면 이 아래의 것들, 땅의 모든 것들은 합력하여 선이 될 수밖에 없죠.

진리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진리로 설명할 수 있게 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빛이 되는 거잖아요. 타인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되면 바로 그 자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께서 빛으로 오시어 빛으로 어두움에 비추어 인간이 아래의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그들이 그 진리를 가지게 된 것이고 그러면 그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원래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이 세상이 다 어두움이라고 하셨거든요. 그 빛은 없다하셨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너희들은 세상에 빛이라고 칭해지는 어떤 이들이 정말 나타났습니다. 그 빛을 우리 안에 가진 것입니다. 진리로 말씀으로 가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어두움의 세상에서 빛의 세상을 사는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땅에서 그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가 그 묶여 있는 상태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그 광명이라는 것을 작은 광명, 큰 광명으로 나누어서 설명하여 주시고, 그것으로 밤과 낮을 주관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큰 광명이라는 건 진짜 그 마오르를 가리킵니다. 진짜 그 빛. 그런데 작은 광명이라는 건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드릴게요. 큰 광명이 해()에요. ()은 발광체가 아니죠? 그건 달빛이 아닙니다. 해가 있다는 것을 달이 증거 하는 것이죠!! 어둠 저 편에 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달이란 말입니다. 달은 반사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작은 광명이라고 알고 계셨죠? 그렇게 알고 계셔도 되요. 그 작은 광명이 바로 어둠에 살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 진리가 내 안에 씨로 들어오게 되면 내가 밤을 섬기는 자, 밤을 주관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 밤을 진리로 섬기면 그것으로 그 큰 광명을 알게 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작은 것에 충성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큰 것에 충성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 선악과, 이 아래의 율법, 이 죄, 어두움으로 여기에 충성하여 이것으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너희가 그 큰 빛을 알겠느냐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알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전이나 예수나 역사나 인생이나 성경이나 죄나 악이나 어두움이나 아래의 물은 큰 광명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내려와서 모형을 가지고 그 빛을 설명하는 것이 작은 광명들이니까. 그것이 빛의 실체는 아니지만 그걸 영광 독사 나타내는 것들이니까. 그런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을 나누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이 사실은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아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그들을 하늘의 별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주시겠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늘의 별이 되겠다고 나를 섬기겠다고 이 성전에 나와 바다의 모래가 되는 이들도 있을 거야. 둘 다 숫자가 많아 질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늘의 별이 되어 그 빛을 비추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모래라는 것은 예언서에 보면 내가 그 비를 모래로 내릴 것이다라고 하면 심판입니다. 비와 반대 개념입니다. 바다는 역시 아래의 것, (모래, 율법)입니다. 그래서 그 율법에 집을 세워버리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밤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둠이라는 씨 없는 육체를 입고 삽니다.

그런데 그 안에 진리의 씨가 심겨지게 되면 그를 통하여 빛이 비추어지게 되요. 주께서 당신을 빛이라 하셨고 빛이 있는 동안에 다녀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낮은 열둘이야 하셨습니다. 그 빛이 열둘 아들을 만들어 내는 것인데 그 아들로 오신 그분이 죽으면 너희들은 너희 안에 그 빛을 가져야해. 안 그러면 너희 밤에 다니다 실족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나타난 빛으로 오신 그 작은 광명이 이제 사라지고 밤을 사는 우리 안에 빛으로 들어오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며 진리입니다. 그 빛을 드러내는 것을 영화롭게 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리고 그들을 하늘의 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코카부Kochab ‘이라는 단어가 발광체라는 뜻도 있지만 백성, 방백이라는 뜻이 있어요. 빛을 내는 하느님의 백성 그것이 별이에요. 그들이 땅을 비추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들이 땅을 비추게 한다고 써놓으신 것입니다.

 

(창세기 155) 5 그리고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어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 보아라.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별입니다. 코카브Kochab. 여기서 자손이라는 건 아브라함 안에 집에 넣을 씨를 말하는 것입니다 네 안에 생명의 말씀을 집어 넣을 것이다라는 말인데 아브라함이 아들을 주시려나 하고 그래서 우리가 자손이라 해석하는 것이지 사실 그 씨 제라 라는 건 진리, 생명,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이 부르심을 입고 의롭게 되어서 그 안에 진리의 씨를 갖게 되면 그들은 땅으로 하늘을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어둠을 빛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아래의 물로 위의 물을 알 수 있게 되고, 열매로 일하는 나무를 통해서 씨를 전달 받아서 그 씨를 뿌리는 씨 맺는 풀싹으로 이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그라 네비히 이 되는 것입니다. 완성. 완전하라 하시며 사랑으로 주시는 넷. 그 마지막 에스카토스 코드란테스 호리를 갚아. 그 마지막 정사각형의 윗 줄이 되라. 그러면 너를 온완전하다 해주겠다는 것이 마태복음 5장 마지막 절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 그렇게 말씀하시고 마지막 사랑으로 완성하라 하십니다. 아가페의 사랑으로 완성하면 그를 완전하다’ ‘넷 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성도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 자신의 성숙이나 변화나 업적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언약의 기둥에서 부정이 되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만이 오롯이 드러나고 자랑되고 칭찬되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빛을 받아서 비추는 것이지 우리가 빛을 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이 결코 그런 사람의 가치를 알아 볼 수 없습니다. 가치있다 여겨주지 않아요. 그게 성도의 자기부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만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의 자기부인의 현실을 바오로가 로마서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116~21) 16 떡 반죽에서 떼낸 첫부분을 하느님께 드리면 그 반죽덩어리 전체도 거룩합니다. 또 나무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도 다 거룩합니다. 17 올리브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가지 몇 개가 잘리고 그 자리에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를 접붙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접붙인 가지들은 올리브나무 원 뿌리에서 양분을 받게 됩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이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들입니다. 18 그러니 여러분은 잘려 나간 가지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럴 생각이 날 때에는 여러분이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고 뿌리가 여러분을 지탱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19 여러분은 '저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그 자리에 우리를 접붙이기 위한 것은 아닙니까?'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20 그것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그들이 믿지 않은 탓이고 여러분이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여러분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두려워할지언정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21 하느님께서 원 가지들도 아낌없이 잘라내셨으니 여러분들도 아낌없이 잘라 버리실 수 있습니다.

뿌리가 거룩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가지는 아니라 이야기 합니다. 또한, 가지가 얼마가 꺽였는데 돌올리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여기서 돌올리브나무는 나, 우리를 말합니다. 그런 우리가 참올리브나무 즉 진리의 올리브나무의 뿌리의 진액을 받는 것 , 그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가지가 무엇을 맺든 안맺든 그 자체가 생명입니다. 18절에 가지에게 네가 왜 잘난 척이야 하고 있는 것입니다. 20절에 믿지 아니하는 것은 꺽인다고 하십니다. 믿지 않고 유대인들처럼 행함으로 율법을 지킴으로 제사를 지냄으로 뭔가를 하려고하는 이들은 꺽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여러분 농사는 돌나무에다가 참나무의 가지를 붙이는 것이 올바른 농사법입니다. 접붙임을 할 때 항상 열매는 가지의 속성을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돌나무에 참가지를 법붙여야 돌나무에서는 진액만 제공해요 그리고 가지에서는 가지의 성질을 따르는 참 열매가 맺습니다.

이것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의 농사법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거꾸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참나무 진리에 접붙임을 받은 돌나무잖아. 그러면 너희들에게 맺히는 열매가 무엇이겠니? 하고 묻는 것입니다.

돌나무 열매가 맺어야해요. 그런데 사람이 엉뚱하게 하느님께서 맺는 그 열매를 흉내를 내고 있으니까 바오로가 화가 나서 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참나무에 접붙여진 돌나무이니 그 가지에선 돌나무인 너희들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 당연한거야. 너희는 참나무의 열매가 무엇인지 알면 되는거야. 그런데 왜 너희들 가지가 열심을 부려서 너희들의 열매를 맺으려고 하느냐? 아무리 열심히 맺어봐야 너희들이 만들 수 있는 그것 밖에는 만들지 못하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해요? 뿌리에서 진액을 받아 그냥 살아. 이것 자체를 페로phero’ 열매를 맺다 라고 하는데 사실은 이것이 바로 열매가 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열매라고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노력해서 그 가지에 열매를 달아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예수를 믿기 전 죽어라 달려왔던 자이다. 열심히 열매 맺으려 했는데 다 배설물이더라. 그리고 지금 예수를 믿고 나서도 나는 죄인 중이 괴수라는 것 밖에는 내놓을 답이 없어. 그런데 하느님이 모태에서 나를 건져내요. 율법의 성전에서 건져내어 하느님의 빛을 전하는 사도를 만드셨다. 그것을 바로 열매라고 한다. 그런데 왜 너희 돌올리브나무가 참올리브나무가 맺는 그 열매를 맺으려 하느냐?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가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3~8) 3 너희는 내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가지들이다. 4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 나간 가지 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너희가 위대한 열매가 되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네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는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독사조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 그 진리가 생명으로 들어오면 나의 육은 부정되는 것이므로 그것이 영화, 영광 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셋으로 죽고 넷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교절에 그 진리의 양식을 세 떡이라고 하는 것이고, 3으로 땅 속에 들어갔다가 우리가 그 떡을 먹는 것으로 모형화 하여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오로는 함께 장사지낸바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함께 묻히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함께 그 땅에 묻혀서 그 빛을 드러내는 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 같은 네 자손들이 넷으로 나올 것이다.

두를네비이는 4대가 아닙니다. 430년이 어떻게 4대에요? 한 대가 120년씩 됩니까? 넷의 백성으로 나올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자손이 나오게됩니까?

 

(창세기 1516)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나오는 것이죠? 아모리 족속의 죄가 관영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사렘 에본 에모리 에모리 족속이라는 말은 없어요.

에모리 אֻמרִי는 아마르 אָמַר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마르는 하느님이 말씀하시다라는 말이죠. 바로 레마Rhema를 이야기하는 거에요. 에머르하느님의 말씀을 말하는 자들이 에본그 죄가 샤렘완성되면 그들은 애굽에서 4로 나올 것이다라는 말인 것입니다. 선악과가 에본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에서 장성한이란 말이 완성되면이라는 말이라고 했죠? 그럼 어떻게 되요? 이들의 육이 죽고 그 말을 하는 자로 나올 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너희 자손이 그래서 4로 나올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4라고 하는 삶을 잘 보여준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며 그 요셉의 이야기 요한복음에 기록되어있는 것입니다.

공관 복음서 마태, 마르코, 루가와 요한복음의 記事들의 순서가 다르죠? 성전 파괴 사건이 십자가 지시기 전 단 한 번의 사건인데 요한복음에선 2장에 나옵니다. 왜요? 그렇게 죽고 그 빛을 받은 어떤 이들 말씀 육신들이 이 땅에 오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그 삶을 그대로 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전이 파괴되고 다시 서는 것이 요한복음에는 2장에 나오게 되고 그때부터 우리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 요셉의 이야기가 넷 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그 셋을 통해서 삼, 3의 의미를 설명해 주세요. 그 셋의 마지막 사람이 야곱이죠. 야곱은 강도입니다. 그런데 그 강도가 열심히 자기의 것들을 자기의 열심과 노력으로 생산해내요. 그리고 그 것을 가지고 아버지께로 오는데 점 있고 흠 있는 알록달록한 것들이에요.

분명히 삼촌이 알록달록한 것들을 못 만들게 하려고 하얀 것만 줬어요. 그런데 야곱이라는 강도, 실족시키는 자에요. 나쁜 말로 강도처럼 하느님 말씀을 사용하면 그는 실족시키는 자가 되는거에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는 강도요 절도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강도는 희한한 재주가 있는데 어떤 것을 가지고도 하느님께서 싫어하는 알록 달록한 것을 만들어내요. 어떻게 만들어 내냐면 단풍나무 신풍나무 이런 것들을 그 물 먹는 곳 교미가 일어나는 곳에 심어놓으면 지독한 근시인 양들에게 그 너머로 다른 양들이 보이겠죠? 알록 달록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럼 그 알록 달록 한 것들이 가서 교미를 해서 그런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 야곱은 그 양을 가지고 아버지께로 갑니다. 그 때 하느님께서 누가 약속의 땅 베텔에 누가 알록 달록한 양들을 가지고 오라고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내가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네가 남편이 되고 주인이 되고 너의 아내를 얻기 위해 7,7 일하고 가지고 온 것, 그것 알록달록한 점 있고 흠 있는 것 누가 그것을 가져오라고 했느냐? 그래서 너는 죽어야하는 거야!! 그래서 그를 찾아가시는 겁니다.

얍복강 가에서 야곱의 환도 뼈, 남자의 씨가 담긴 그릇을 깨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이라는 씨를 가진 절름발이로 사는 것입니다. 절름발이라는 말은 건너가다라는 뜻입니다.

건너간 자는 반드시 절뚝거리게 되어있어요. 하느님이라는 지팡이 (라메드lamedh)를 의지하지 않고는 단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가 바로 절뚝거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수 있는 이스라엘을 절름발이들아 고침을 받아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건너가는 것입니다.

내가 절름발이면 어떻습니까? 하느님께서 고쳐주신다는데요. 그런데 우리는 그 절름발이를 보고 욕합니다. 너 왜 절름거려? 나타난 현상만을 보고 말입니다. 죄인이면 어떻습니까? 의인으로 만들어 준다는데 죽었으면 어때? 살려준다는데. 그런데 이세상은 전부 그것을 악이라고 합니다.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면 되잖아요. 그걸 못 믿으니 그것을 악이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되면 안돼. 살 방법이 없어.

 

자 그렇게 3이 되면 넷의 사람들, 하늘의 별들이 되는데 아들 그래서 야곱의 열 두 아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영적이스라엘인 우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열 둘 중에 하느님께 바쳐진 자 요셉과 레위가 빠지고 그 안에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갑니다. ? 완성된 야곱을 이 땅에서 그 야곱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보여준 사람이 요셉입니다.

(창세기 372) 2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요셉은 열 일곱 살이 되어 형들과 함께 양을 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두 소실 빌하와 질바의 아들들을 거들어 주고 있다가 아버지에게 그들을 좋지 않게 일러 바쳤다.

야곱의 역사가 이러하니라 하고 요셉이 라고 나옵니다. 야곱이 얍복강 건넌 이후에 그의 삶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왜요? 이제 요셉으로 설명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된 이들이 이 세상에서 진짜 양식을 쥐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가서 얻지 않으면 그 누구도 못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넷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들이란 말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돈키호테가 세르반테스의 다른 자아 듯이 요셉은 야곱의 다른 자아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열 두 아들은 요셉의 아들이기도 해야되죠? 그래서 그 요셉의 아들로 이 열 둘을 설명하기 위해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그 열 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요셉이 아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므낫세 (메낫세)제거되다’, 에브라임(에프라임)많은 열매를 맺다라는 뜻이에요 므낫세 장자 맏아들은 제거되고, 많은 열매라는 아들들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그럼 이 장자가 누구에요? 예수그리스도 잖아요. 예수그리스도께서 한 알의 밀알로 오시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었잖아요.

자 그럼 이 넷인 요셉의 아들이죠?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이름이 뭔가요? 요셉이죠? 그러면 그는 반드시 그 예수로 진리를 알았으면 아브라함처럼 모리아 산에 데리고 올라가 그 아들을 장사 지내야해요. 그럼 예수를 장사지낸 사람인 누구에요? 바로 아리마테 요셉. 그래서 요셉이 낳고 요셉이 묻는 겁니다. 4는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그 삶을 사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를 살려서 그저 섬김의 대상으로만 삼고 있으면 여러분은 그 안에 빛을 가진 자가 안되요. 그런데 그 밖에 있는 빛은 떠나버렸어요. 그럼 그걸 어둠 이라고도 해요. 그분이 안의 빛으로 오면 밖에서 그분이 하신 일이나 그분의 생애는 여러분의 인생에서 삭제되는 거에요. 이렇게 그 아들을 장사지내야 자기도 거기에 함께 묻히는 거에요. 그 아들을 장사지내지 못하면 영원히 그 아들을 섬김의 대상으로 섬기면서 율법적 신앙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게 성도들은 셋으로 완성이 되어서 넷의 삶의 사는 사람이에요. 그들을 하늘의 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셋은 열매로 일하는 선악과 나무, 그러나 씨를 가진 그 나무를 통해 씨를 받는 형국으로 완성이 되요. 반드시 여러분은 그 말씀을 먼저 율법으로 받게 돼요. 그러나 거기서 머물면 안되는 거에요. 그리고 선악과 따 먹어요. 안먹으면 안되요. 그러나 그것으로 진리와 합일이 되는 겁니다. 스테파노스(stevfanoz) 포도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율법을 통하여 선악과 그 열매로 일하는 씨가진 그 열매 나무를 통하여 씨를 흩뿌리는 씨 맺는 풀싹이 되어 여러분은 생명 그 씨를 또 전하는 이가 되는 겁니다. 생명나무 열매는 여러분이 그 진리를 말할 때 열리는 겁니다. 그걸 따먹는 거에요. 사람들이. 예수의 말 그 말로 진리를 아는 것이 그 생명나무에서 열매를 따먹는 거란 말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생명이다 내가 나무다라고 하시잖아요. 생명나무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십니다. 생명나무를 에덴동산에서 찾지 마세요. 마찬가지에요. 그 씨 그 진리를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가지고 있고 말하고 흘릴 수 있으면 거기서 생명나무 열매가 열리고 그 열매로 살아나는 이들이 있는 거에요. 그런데 그는 그 씨를 심고 부정되어 죽는 거에요. 라만차의 기사처럼. 율법을 통하여 율법으로 율법에 대하여 죽어요.

예수를 통하여 예수로 예수에 대하여 또 죽어야 해요. 예수를 낳았으면 그를 장사지내야 하는 거에요. 넷의 사람들은 씨를 받아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는 변종 같은 풀싹. 열매가 나고 씨를 갖게 되는 그 풀싹, 그들은 그렇게 넷이 되어서 큰 광명을 증거 하는 작은 광명을 역할을 하면 되요. 그러나 세상은 그들은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 라만차의 기사들의 광야에 외치는 소리들은 세상에서 업신여김 당하다가 심지어 종교에 맞아죽어요 변질된 그리스도교가 그들을 죽여요. 그러나 그렇게 맞아 죽는 삶이 바로 올바른 삶이에요. 라만차의 기사들 여러분들입니다. 그대들이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그 라만차의 기사가 세상을 향해 외치던 단말마 같은 대사 한마디를 읽어드리고 오늘 마치도록 하지요.

진리는 현실의 적이지! 천 번을 치시오! 천 번을 다시 일어날테니!” 이것이 여러분의 인생이 되어야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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