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2-20 조회수1,297 추천수0 반대(0) 신고

 

 

죄인과 의인을 구분할 때 그 기준을 무엇을 가지고 나눌 수 있을까요? 액면 그대로 말하면 죄를 짓고 안 짓고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얼핏 보면 그런 의미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말은 죄를 짓지 않으면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그렇다면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서 의인이라고 말한다면 좀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의롭게 살거나 의로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단순히 죄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은 무리가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의인 정도가 되려면 당연히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상태에서 한걸음 나아가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을 거슬러 거룩한 삶을 향해 거룩한 길을 걸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만약에 누군가 죄를 지으면 일단 먼저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 생각의 근저에는 사회에 해악을 끼쳤다는 사실만을 놓고 판단했을 때 그렇습니다. 일차적인 원인은 사회에 해악을 끼친 사람에게도 원인이 있겠지만 그런 원인을 전적으로 그 사람에게만 돌린다는 것도 조금은 무리가 될 수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 가령, 생존의 수단으로 그런 동기가 유발되었다면 좀 더 달리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복음에서는 죄인의 대표격으로 세리와 창녀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리와 죄인들이라고만 나오지만 이때 죄인에는 다른 곳에서는 창녀도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창녀에 대해 예전에 개인적으로 종교적인 시각을 떠나서 많이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회적으로 봤을 때 지탄과 질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맞습니다. 그건 일반적인 사람들의 시각에서 봤을 때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덜하지만 예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보면 열악한 가정 환경에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그 길을 걸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런 걸 두둔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여자의 몸으로 가족의 생계가 걸린 문제이고 딱히 어떻게 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길이라고는 그 길만이 유일한 출구가 되었을 때 그 길을 선택한 본인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자신도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더라면 그런 길을 하고자 선택을 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런 사람이 향략의 길을 걷고 싶어서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본다면 사회가 만약 사회보장시설과 복지가 잘 되어 있다면 국가적으로도 도움의 손길을 줄 수가 있다면 그런 길을 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국가에 책임 소재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국가나 사회가 소외된 계층을 좀 더 보살펴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책임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 관점에서 그들을 향해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지 말았으면 하는 게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요즘 그런 일에 대한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에 대해 악의적인 댓글을 다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런 댓글을 다는 사람들 마음도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좀 더 우리가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령 그들도 그저 힘든 일을 하지 않고 편하게 돈을 벌려고 그렇게 한다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오죽했으면 그렇게밖에 할 수가 없는 그들만의 말할 수 없는 피치못할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봤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말을 하는 것처럼 그런 사람이 설령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그런 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들을 좋게 보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그런 영혼을 더 애석하게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제가 가진 제 지론입니다.

 

제가 그렇게 많은 세월을 살아 본 사람은 아니지만 중학교 때부터 RCY 써클 활동을 하고 또 대학 때에도 적십자 활동을 하면서 구호 활동인 봉사를 하면서 사회 소외 계층을 볼 때 그때 느낀 게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삶 그 자체 속으로 들어가보면 눈물나는 사연도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바라볼 때 겉으로 드러나는 겉모습만 보고 어떤 사람을 일방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금물일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언젠가 자신도 그런 위치로 바뀌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본다면 그런 여인들도 단순히 외형적인 결과만 가지고 본다면 예수님께서도 예수님 당시에 그들과 함께 어울리셨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오늘 복음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회개시키려고 하는데 그 내용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삶에 대해 단죄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 이전에 그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는 모습이 연출이 됩니다. 이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흥청망청 세상을 즐기는 그런 타락의 모습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예전에 이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어느 순간 공감이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일단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아무도 온정의 눈길을 주지 않는 그런 소외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계층의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그들의 마음을 같이 나누고 함께 지내면서 그들도 하나의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엉어리진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훈화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의 마음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도 있을 것이고 그런 변화가 바로 회개의 삶으로 이어질 것 같다고 묵상을 해 봅니다. 이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처음 언급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우리의 고정된 시각으로 그들을 마치 죄인처럼 낙인을 찍고 그들을 계속 그런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우리가 그들이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는 계기를 원천적으로 가로막는 역할을  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또 다른 걸 하나 느낍니다. 소외된 사람들과도 함께 마음으로 서로 소통하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소외된 이들에게 엄청난 위로와 또 신앙과 영적인 측면에서 이런 행위가 그들을 하느님과 예수님께로 갈 수 있도록 하는 구원의 손길이 우리의 작은 관심과 배려에 달려 있다는 것도 새삼 새롭게 다가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