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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1주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2-20 조회수1,173 추천수1 반대(0) 신고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셔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단식을 하셨기 때문에 배고픔의 고통 속에서 이런 유혹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상황을 묘사를 하긴 하되 조금은 뉘앙스가 다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성령의 인도는 마치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런 느낌이 들지만 오늘 복음 마르코 복음에서는 성령이 광야로 내보내신 것은 마치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 강압적으로 예수님께서 광야로 내몰리는 상황과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광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허허벌판처럼 광활한 땅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모습이 연상이 됩니다. 외롭고 고독한 이미지도 상기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그들은 40여 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었습니다. 실제 거리는 불과 얼마 되지도 않은 거리였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백성을 그토록 오랜 시간을 고생하게끔 하셨을까요? 바로 그 기간은 인내와 시련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려는 하나의 시험장이었던 것입니다.

 

광야를 걸어갈 때는 수많은 무리를 지어서 갔을 겁니다. 광야가 상징하듯이 광야의 그 여정은 메마름을 또한 상징할 겁니다. 우리의 삶 또한 메마른 광야를 지금 순례하는 순례자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무리 속에서 간다고 하지만 자신이 주체가 되어 홀로 걷는 과정입니다. 40일 동안 단식을 하시면서 광야에서 지내신 것도 세례를 받으신 후에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40일이라는 숫자가 여러 가지를 상징하지만 여기서 저는 ‘정화’를 상징한다고 묵상하고 싶습니다. 40일은 우리의 삶에서는 우리가 사는 삶 전체와 같을 거라고 봅니다. 태어나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시간 말입니다. 또 하나는 세례를 받은 후부터 하느님 나라에 가는 시간까지로 봐도 될 것입니다. 아마도 후자가 더 가까운 뜻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정화는 어떤 정화일까요? 바로 죄를 씻는 과정일 겁니다. 죄를 씻는 과정에서는 고난이 수반되는 게 하나의 법칙과도 같습니다. 그 고난을 우리는 일명 이름하여 ‘보속’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제2독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불의한 자 즉, 저희를 위해 고난을 겪으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 고난은 바로 예수님의 피 흘림으로 인한 '예수님의 죽음'을 말할 겁니다. 몸은 죽으셨지만 영으로 다시 생명을 받으셨다고 베드로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영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일 거라고 보여집니다.

 

제1독서에서도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노아의 방주를 통해 방주에 들어간 사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때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2독서에도 나옵니다. 바로 물입니다. 아마 이 물이 성령을 상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독서 21절에 이것이 세례를 상징하고 또 이게 구원으로 이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베드로 사도는 이때의 이 세례는 단순히 몸의 때를 씻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로 이어져서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좀 더 단순화시켜서 한번 정리를 한다면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삶과 그 삶의 궤적을 따라 걸어야 할 겁니다. 예수님의 그 고난의 최종 종착역은 구원입니다. 그 과정의 일부가 바로 세례였던 것입니다. 그 세례는 그 고난의 끝에서 이루어진 영광스런 부활이 가져다준 힘으로 바른 양심을 청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른 양심이 과연 무엇일까요? 모르긴 몰라도 아마 하느님의 마음과 같은 게 아닐까요? 죄로 물든 몸을 성령의 물로 깨끗하게 씻어져 거룩한 하느님의 영으로 다시 거듭나야 하는 것일 겁니다. 우리는 새롭게 부활할 몸을 입기 위해서 지금 예수님과 함께 나흘째 골고타 언덕을 올라가고 있습니다. 골고타 언덕 너머에 영광스러운 부활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언덕을 올라가는 게 힘에 겹습니다. 조롱과 멸시도 있습니다. 그 조롱과 멸시도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당신의 자녀들이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을 살리시고자 그 모진 고통을 오로지 당신 혼자의 몸으로 모든 걸 감당하시면서 이겨내셨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도 광야의 여정과 똑같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악마로부터 받은 유혹 외에도 골고타라는 그 광야를 지나면서도 아마 스스로에게서도 유혹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묵상을 한번 해봅니다. 그 유혹은 아마도 십자가를 지시는 걸 포기하고 싶은 유혹 말입니다. 왜 그런 추측이 가능하느냐면 예수님께서는 신성만 가지고 계신 게 아니라 한편으로는 인성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절대 그런 유혹이 있었다고 하셔도 굴하지 않으셨습니다. 골고타 언덕을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설령 넘어지시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당신의 십자가는 끝내 당신의 힘으로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할 겁니다. 그 힘은 고통 속에서 그 고통을 인내하면서 얻어진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때 그런 인내력을 키우지 않으면 부활의 힘은 그만 좌초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영광을 맛볼 수도 없습니다. 이 부활의 영광은 마치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모든 세대를 위해 세우신 계약의 표징인 무지개와 같을 것 같습니다. 이 무지개는 하느님의 아름다운 약속의 징표입니다.

 

맑고 화창한 날에는 아름다운 무지개를 볼 수가 없습니다. 무지개는 비가 온 뒤에 볼 수가 있습니다. 비도 구름이 있어야 내릴 수 있습니다. 구름 뒤에 있는 해가 비를 향해 햇빛을 비쳐줄 때 아름다운 무지개를 볼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 비는 우리의 삶에서 비바람과도 같은 고난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이 무지개가 우리와 하느님을 이어주는 든든한 다리가 되어 줄 겁니다.

 

이 다리는 하느님이 만들어주시지는 않습니다. 노아가 구원의 방주를 스스로 만들었듯이 이 다리도 스스로 자기가 놓아야 할 겁니다. 그 다리는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일어나는 모든 유혹을 잘 이겨내면 그냥 덤으로 비온 뒤에 구름 뒤에 해만 있으면 자연적인 현상으로 생기듯이 힘든 인생이라는 광야를 지나는 저희 뒤에서 태양처럼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실 겁니다. 그러니 희망의 무지개를 향해 오늘도 다시 한 번 더 힘차게 골고타 언덕을 올라갔으면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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