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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하늘 나라의 열쇠 (마태16,13-1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2-22 조회수1,295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2월 22일 월요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하늘 나라의 열쇠 (마태16,13-19)

   

 

1독서<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인 원로> (1베드5,1-4)

사랑하는 여러분, 1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원로들에게 같은 원로로서또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이며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동참할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그들을 돌보되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화답송 시편 23(22),1-3.3ㄴㄷ-4.5.6(◎ 1)

◎ 주님은 나의 목자아쉬울 것 없어라.

○ 주님은 나의 목자아쉬울 것 없어라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당신 이름 위하여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당신 함께 계시오니두려울 것 없나이다당신의 막대와 지팡이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제 한평생 모든 날에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복음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16,13-19)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너는 행복하다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너는 베드로이다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제1독서 (1베드5,1-4)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해서 지배하려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2-3)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 전서 5장 2절과 3절에서 원로들을 양 떼를 치는 목자로 비유하면서 그들에게 목자로서 갖추어야 할 필요한 세 가지 자세에 대한 지침을 주고 있다.

이러한 베드로 사도의 권면은 요한 복음 21장 15-17절에 기록된 그와 부활하신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상기시킨다.

 

즉 부활하시어 베드로 사도에게 나타나셨던 예수님은 그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21,16)고 당부하시며, 그 '양'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였지만 그 양을 돌보는 직책은 베드로 사도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제 베드로는 그 '양'이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 속하였다고(사도20,28) 언급하면서 원로들 역시 베드로 자신처럼 그러한 하느님의 양 떼를 돌보는 직책을 가지고 있음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돌보되'로 번역된 '포이마나테'(poimanate)는 '포이마이노'(poimaino)의 명령형이다. '포이마이노'(poimaino) 동사는 '양치는 목자'를 뜻하는 명사 '포이맨'(poimen)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가축떼를 돌보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마태오 복음 2장 6절과 묵시록 7장 17절에서는 '목자가 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원로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양 떼, 곧 성도를 먹이고 돌보아야 하는 목자라는 철저한 자각을 가져야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다.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원로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양 떼를 돌볼 때 첫째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억지로 하지 말고'에서 '하지'로 번역된 '에피스코푼테스'(episkopuntes)는 '에피스코페오'(episkopeo)의 명령적 의미를 지닌 분사로서  2절의 중반절과 하반절에 있는 네 개의 분사에 모두 걸린다.

 

'~위에'란 의미의 전치사 '에피'(epi)와 '주시하다', '돌보다'라는 의미의 동사 '스코페오'(skopeo)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위에서 돌보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에피스코페오'(episkopeo)는 신약 성경에서 여기 베드로 전서 5장 2절과 히브리서 12장 15절 두 곳밖에 용례가 없는 동사이다.

 

이 단어의 명사형은 '감독'이라는 의미의 '에피스코포스'(episkopos; 사도20,28; 1티모3,2; 1베드2,25)인데, 이것은 이 동사 '에피스코페오'(episkopeo)가 '돌보고 감독하다'라는 의미인 것을 알게 한다.

 

한편 본문에서는 '억지로'라는 말과 '자진해서'라는 단어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먼저 '억지로'라고 번역된 '아낭카스토스'(anangkastos) '아낭케'(anangke)의 부사형이다. '아낭케'는 '꽉 누르다'라는 의미의 동사 '앙코'(angcho)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필연성', 강제', '고통'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이 용어는 어떤 일을 기쁜 마음으로가 아니라 의무감이나 어떤 외적 요인들에 의해 마음이 눌려진 상태에서 하는 것을 뜻한다(1코린7,37; 필레몬1,14). 따라서 '아낭카스토스'를 '하기 싫은 상태에서 억지로', '강제적으로', '강요로'라고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과 대조를 이루는 '자진해서'라고 번역된 '헤쿠시오스'(hekusios)는  '자유 의지를 사용해서', '자발적으로', '자의로'(필레몬1,14)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 속에는 인간의 자발적인 열의가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본문에서 이 단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라고 번역된 '카타 테온'(kata theon)이라는 표현에 한정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발적인 인간의 열심도 중요하지만, 그 인간의 열심이 오직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고 성령께서 주신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인간의 자발적인 열심은 교만으로 바벨탑을 쌓는 것처럼, 오히려 하느님의 일에 해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양 떼를 치는 원로들이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양 떼를 치는 자들은 자신의 눈에 보기에 좋을 대로 행할 것이 아니라 그 양들을 맡기신 분의 뜻을 쫓아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하느님의 양 떼를 치는 목자가 기억해야 할 두번째 자세는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이다. 여기에서는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와 '열성으로 하는 것'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먼저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로 번역된 '아이스코로케르도스'(aischrokerdos)는 '부끄러운', '추한', '상스러운' 등의 뜻을 갖는 '아이스크로스'(aischros)와  '얻다'라는 뜻이 있는 '케르도스'(kerd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혐오스러운 욕심을 가지고','부끄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열성으로 하십시오'로 번역된 '프로튀모스'(prothymos)는  '~앞에' 라는 뜻의 전치사 '프로'(pro)와  '열망', '욕정', '열성' 등의 뜻이 있는 명사 '튀모스'(thym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기꺼이 ~하는', '간절히 바라고 열망하여' 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이 '기꺼이 ~하다'라는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마르코 복음 14장 38절과 마태오 복음 26장 41절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인간 자신의 의지뿐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지지가 앞서야 한다.

결국 이 두번째 지침도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양 떼를 자신의 욕심이 아닌 하느님의 뜻대로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양 떼를 치는 자들은 삯꾼 목자와 같다(요한10,12.13). 이들은 하느님 대전에 부정한 욕심을 가지고 부끄러운 이득을 취하기 위해 양들을 돌보는 까닭에 위험이 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하지만 참된 목자는 오직 양 떼를 맡기신 하느님께서 힘을 주시는 대로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기쁨으로 양 떼를 돌본다.

 

결론적으로 베드로 전서 5장 2절을 통해서 강조하는 것은  양 떼를 돌보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 양이 비록 자신에게 맡겨진 양일지라도 자신의 임의대로 혹은 자신의 힘을 사용해서 돌보는 것이 아니라 그 양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를 분명히 깨닫고 오로지 맡기신 분의 뜻을 따라서 그분이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3)

 

하느님의 양 떼를 치는 목자에게 요구되는 세번째 자세는 '위에서 지배하려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이다.

여기서 '맡겨진 이들을'로 번역된 '톤 클레론'(ton klleron)에서 '클레론'(klleron)의 원형 '클레로스'(klleros)는 '제비', '몫', '분깃', '유산', '기업'등의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마태오 복음 27장 35절,  요한 복음 19장 24절에서는 '제비'로, 사도행전 26장 18절과 콜로새서 1장 12절에서는 '상속 재산'(상속의 몫)으로 각각 번역했다.

 

이것은 원로들에게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양 떼를 의미한다. 여기서 베드로 사도가 '클레로스'(klleros)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드러내기를 원했던 것은 하느님께서 원로들에게 양 떼를 돌보는 임무를 맡기셨지만, 그들에게 그 양에 대한 소유권까지 이전해 주신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분배받은 몫의 주인은 여전히 하느님이기시에 원로들은 하느님의 소유인 양 떼들을 청지기(관리인)적 자세로 잘 보호하고 양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양 떼를 맡은 원로들은 양 떼를 위에서 지배하려는 자세를 가져서는 안된다.

 

여기서 '위에서 지배하려 하지'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가 대조되고 있다. '위에서 지배하려 하지'로 번역된 '카타퀴리유온테스'(katakyrieuontes)는  '복종시키다','주(인)가 되다'(마르10,42; 마태20,25)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카타퀴리유오'(katakyrieuo)의 명령적 의미를 지닌 현재분사이다.

이 단어는 원로들이 그들에게 맡겨진 교회안의 사람들에게 주인 행세를 하려는 행동을 묘사한다.

 

이러한 행동이 금지 부정어 '메드'(med; '말고')와 함께 쓰여 양 떼를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것은 베드로 전서 5장 2절의 연장선상에서 금지되고 있는 행동임을 알게 해준다.

또한 여기서 '모범'에 해당하는 '튀포이'(typoi)의 원형 '튀포스'(typos)는  '모방해야 할 표본'이라는 의미이다. 즉 원로들 모두가 양떼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어야 함을 나타낸다.

 

이런 것들을 통해 베드로 사도는 교회의 주권이 철저히 하느님께 있음을 밝히면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할 일은 겸손과 신실한 마음으로 모범을 보이며 하느님의 뜻대로 맡은 양떼들을 잘 돌보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2월 22일 [베드로사도좌 축일]

 

하늘과 땅어느 열쇄를 갖고 있나요?

 

(마태16,13-19)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람들과 제자의 고백이 달라야 합니다그러나 말만 다르면 안 됩니다.

지난날  베드로의 오늘 고백이 사람들과 똑같은 자신의 뜻욕망을 위한 사람의 일그 사람의 길로 따랐던 잘못을 봤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더 하십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너는 행복하다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살과 피자신()이 깨달은 것이 아닌하느님의 은총선물로 알려주신 것입니다성경속 인물들의 말 속에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음을 놓치면 안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죽이려 모인 율법학자들~

(요한11,50-52)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악인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너는 베드로이다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시몬이었던 베드로입니다물이 나오지 않았던 조약돌(시몬)이 물이 나오는 반석(베드로)이 된 것입니다그 물()- 생명의 말씀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그리고 그 말씀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루가1,78) 78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어둠)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그 죄에서 해방시키시어 자유하늘의 쉼 평화를 주시려 오신 빛이십니다그 죄에서의 해방~십자가의 대속입니다.


(골로2,14)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로마8,1-3)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곧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로마6,23) 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쁜 소식복음그 하느님의 약속죄의 대속그 말씀 위에 세워진 교회가 저승의 세력죄 의식과 죽음을 왜 두려워해야 합니까?

우리는 성당에 다니면서도 죄에서 자유쉼이 없습니다오히려 신앙이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두려워서 다닙니다그래서 온갖 열심한 행위의 신앙생활그 행위로 때우려 더 열심을 부리며 만족하려 합니다.

십자가의 대속 그 죽음십자가의 사랑을 구원의 진리로 갖지 못했기(믿지 못했기때문입니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늘 문을 여는 열쇄 입니다하느님 백성 모두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쇄 입니다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라는 것을 믿고 의탁하는 삶을 사는 것하늘의 열쇄를 이미 받은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뜻말씀복음을사람의 뜻(), 곧 땅의 것을 위한 말씀으로 받으면 땅에서부터 하늘이 매이는 것입니다그러나 그 땅(사람)의 존재를 하늘의 존재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한그 사람의 죄를 덮으시기 위한 대속그 하느님의 복음으로 풀려 믿으면(받으면땅에서 부터 하늘이 풀리는 것입니다십자가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마태27,50-52)  50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대속의 죽음) 51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하늘의 성전이 찢어짐.하늘이 열림) 52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

성도믿는 자들의 무덤이 열리는 것입니다.

 

(묵시1, 17-18) 17 나는 그분을 뵙고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그러자 그분께서 나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18 *살아 있는 자다나는 죽었었지만보라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내 죄를 위한 대속그 주님의 십자가가 내 십자기 였음을 믿음으로 가지고 가야(죽어야그 무덤(죽음)이 열립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희망으로 죽는 것입니다그래서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그에게 있어 죽음이 끝이 아니라 천국 삶의 시작이니까요사람의 열성 그 어떤 행위로 열 수 있는 무덤이 아닙니다.


(묵시3,7)  7 “필라델피아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거룩한 이진실한 이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어떤 열성으로도 열 수 없습니다주님의 십자가의 길이 구원의 진리임을 믿는 그 믿음만이 열 수 있습니다.

알아들었으면 좋겠습니다꼭이요~~!!!!

♡ 아멘 -*^^*-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복음 (마태16,13-19)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5~16)

 

마태오 복음 16장 15절에서 한글 새 성경에는 번역이 생략되었지만, 원문에는 '그들에게'에 해당하는 '아우토이스'(autois; to them)이 나온다.

그리고 '물으시자'에 해당하는 '레게이'(legei; he asked)는 '말하다'는 뜻을 가진 '레고'(lego)의 현재 능동태 직설법 3인칭 단수이다.

 

희랍어의 현재형은 단순히 현재 뿐만 아니라 현재의 계속적 동작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의 질문이 모든 세대의 믿는 이들에게 계속되고 있는 물음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에서 '그러면'에 해당하는 접속사 '데'(de; but)는 이 질문이 앞의 대답과 대조됨을 나타낸다.

 

일반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기대와 욕구에 따라 그들에게 현세적 부귀영화를 가져다 주고, 그들을 구원할 정치적 메시야로만 보지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일반 사람들보다는 더 나은 대답을 기대하고 계시는 것으로서, 사랑하는 당신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소망이 엿보이는 질문이다.

그리고 '하느냐?'에 해당하는 '레게테'(legete; say)는 '말하다'는 뜻을 가진 '레고'(lego)의 복수2인칭으로 '너희는 말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문은 여기에 '너희는'에 해당하는 인칭 대명사 주격 2인칭 복수형인 '휘메이스'(hymeis; you)를 첨가하여 '너희'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궁금하셔서 하신 질문이 아니라 당신의 메시야적 정체성(Identity)의 명백한 고백을 제자들로부터 도출시키기 위한 질문이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앞의 마태오 복음 16장 13절의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는 질문은 마태오 복음 16장 15절의 질문을 이끌어 오기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군중들의 생각과 관심보다는, 당신의 가르침을 직접 받던 제자들의 생각과 고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질문은 동시에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스승님'으로 번역된 '쉬'(Sy; You)는 인칭 대명사 주격 2인칭 단수형으로 '당신'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십니다'에 해당하는 '에이'(ei; are)은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에이미'(eimi) 동사의 2인칭 단수형으로, '당신은 ~ 이십니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스승님'으로 번역된 '쉬'(Sy)는 강조형으로 고백의 대상이 되는 '당신', 즉 예수님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또한 원문에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크리스토스'(christos; Christ) 앞에 정관사 주격 남성 단수인 '호'(ho; the)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당신은, 그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직역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오실 메시야로 예언된 바로 그분이심을 뜻한다.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비로서 여기서 처음으로 베드로의 입을 통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살아계신'에 해당하는 '존토스'(zontos; living)는 '살다'는 뜻을 가진 '자오'(zao)의 현재 능동태 분사이다.

이것은 이방의 죽은 신들과 대조되는 표현으로서, 하느님께서 스스로 영원토록 자존(自存)하시는 '영원자존자'(永遠自存者)이시며, 또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생명의 근원되신 분이시고, 그리고 과거와 더불어 지금과 미래에도 살아 역사(役事)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또한 원문에는 '아드님'에 해당하는 '휘오스'(hyos; son)앞에 정관사 '호'(ho; the)가 기록되어 있어, 직역하면 '살아계신 하느님의 그 아들'(the son of the living God)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예수님께서 영원자존자이신 하느님의 독생성자 되심을 나타낸다(요한1,14.15; 3,18; 1요한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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