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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안드레아신부님복음묵상/의미 있는 고통은?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1-02-28 조회수762 추천수1 반대(0) 신고

안드레아신부님복음묵상

의미 있는 고통은?

사랑하올 형제자매님,

지난 한 주간 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셨나요?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백신접종이 시작되었으니까

점점 상태가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그러나 아직은 신규 확진자가 많이

나오고 있어서 사회적 거리두기와

5인 이상 모임 금지가 유지된다고 하니

좀 더 인내심을 발휘해야할 것 같습니다.

형제자매님,

저는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신부님,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했는데

왜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전례의 독서들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 지내는 사순 시기는

예수님께서 걸으신 수난의 길에 우리가

전례를 통해서 동참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전례의 독서들은 파스카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감동적이며 극적인 내용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의

갈등과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단지 아브라함의 순명과 그 결과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99세에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는 하느님의 약속과 함께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들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내 사라가

이사악을 낳았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온전히 믿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얻은

귀하디귀한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자신의 살을

도려내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자신의 분신이라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신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는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신뢰하며

즉시 그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본뜻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은 이사악의 생명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진실한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신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많은 후손과

땅을 주실 것과 그의 후손이 세상 만민에게

복을 주는 민족이 될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1독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따를 때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축복이 반드시 주어진다는 확신을

우리 모두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형제자매님 그리고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한 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을 듣고

바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아들까지도

제물로 바치는 믿음의 결단을 내렸을 때

축복이 주어졌듯이 그리스도 자신도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영광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확증을 앞당겨 체험시켜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리셨던

제사를 당신 아들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가져다 줄

무서운 고통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최고조로 보여주실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전지전능한 개입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약한 인간의 조건을 고려하시고

참으로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셔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하느님께서

고통을 당하셨다이 얼마나 엄청난 말입니까?

참으로 알아듣기 어려운 말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두시는 광경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15,39)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순전히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처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결과는 부활이라는

영광으로 갚음을 받았습니다.

형제자매님, 오늘은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날인만큼

신부님의 삶의 한 토막을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담당하는 조선의 5

(충청도, 경상좌우도, 전라좌우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

곳곳에 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공소는

자그마치 127곳이나 되고, 교우들을

다 합치면 5,936명이나 됩니다.

한 공소에 고해자가 마흔 명 내지

쉰 명이 있어서 그들 모두에게 하루 안에

고해성사를 다 집전해주어야 합니다.

반면 고해자가 두 명이나 세 명밖에 없는

공소에서도 다음날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에게 성체를 배령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하루를 묵어야 합니다.

저는 밤에만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해야 하고, 공소 순방이 끝나면

한밤중에 모든 일을 마치고 새벽녘

동이 트기 전에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이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아셨기에

매년 2,800Km 이상을 걸으시면서 116개월을

그렇게 기쁘게 사목생활을 하셨습니다.

신부님은 결국 과로와 장티푸스로

문경 인근의 길에서 쓰러져 진천의

한 공소로 옮겨졌고 푸르티에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올 형제자매님, 우리는 일상생활 중에

크고 작은 많은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 나에게 있을 수도 있고,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면 누구나 대인관계 안에서

고통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당하는 그 고통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더 가지고 싶고 나의 결점을 버리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라면

우리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을

잘 사랑하기 위해서 당하는 고통,

하느님의 뜻을 잘 행하기 위해서

나 자신의 뜻을 죽이기 위해서

당하는 고통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피해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쁘게

껴안아야하는 가치 있는 고통입니다.

고통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수단으로,

사랑의 행복에 관하여 우리를 교육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서 겪는 고통은

결코 고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큰 기쁨과 일치를 낳습니다.

형제자매님, 때로는 나의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나의 모든 희망을

빼앗아갈 것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고통을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고통으로 바꾸기 위해서 노력합시다.

그때는 우리도 2독서의 바오로 사도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울릉도 도동성당에서)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 드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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