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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야훼이레 (창세22,1-1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2-28 조회수794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 2. 28. 사순제2주일 독서묵상

공동번역성서

야훼이레

(창세22,1-19)

1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2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분부하셨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 주는 산에 올라 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종과 아들 이사악은 데리고 제물을 사를 장작을 쪼개 가지고 하느님께서 일러 주신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 4 길을 떠난 지 사흘만에 아브라함은 그 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 다다랐다5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거라. 나는 이 아이를 데리고 저리로 가서 예배드리고 오겠다.' 하고 나서 6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씨와 칼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둘이서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7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불렀다. '아버지!' '얘야! 내가 듣고 있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8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나, 9 하느님께서 일러 주신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은 다음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더미 위에 올려 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11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12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13 아브라함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수양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아브라함은 곧 가서 그 수양을 잡아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다. 14 아브라함은 그 곳을 야훼이레라고 이름붙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 고들 한다15 야훼의 천사가 또다시 큰 소리로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16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17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18 네가 이렇게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19 아브라함은 종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 와서 그들을 데리고 걸음을 재촉하여 브엘세바로 돌아 갔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눌러 살았다.

 

오늘 본문은 너무나 잘 아는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이사악을 하느님께 아낌없이 바치는 모리아 산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 에피소드를 통하여 단순히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도 아낌없이 하느님께 바치는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고 그러한 결단을 하는 것에서 그친다면 우리는 성경이 이이야기를 통해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 우리 인간 쪽에서의 행위를 배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만 머문다면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일관성의 맥이 끊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모리아 산 사건을 하느님의 열심과 주권의 측면에서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 한편 그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이끌려가며 자연스럽게 격발되어야 하는 하느님 백성들의 삶의 측면 또한 함께 나눌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느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상관관계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주권과 그 분의 열심의 측면에서 바라본 모리아 산 사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대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의한 하느님 백성들의 탄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게 되는 약속의 후손, 즉 예수 안에 聯合된 하느님 백성들의 탄생을 알기 쉬운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이 바 로 아브라함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우상을 만들어 팔던 아버지 데라와 함께 세상의 상징인 바벨론(갈대아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셔서(소명) 그에게 믿음을 허락하시고(신앙) 그를 의롭다 하신 후에 그를 진정 의로운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聖化)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의 이야기 안에는 구원의 서정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이자 결론이 바로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여정 전체의 주도권을 하느님이 쥐고 계십니다. 찾아오신 것도 하느님이요, 그를 값없이 의롭다 하신 분도 하느님이시며 40여 년간의 방랑 생활을 통하여 하느님을 알게 하시고 하느님께 순종하게 만드시는 분도 하느님이시 며, 마지막으로 그를 모리아 산에 세우시고 그를 시험하여 합격 판정을 하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먼저 그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보자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을 22장의 모리아 산에서의 순종의 제사를 드리는 하느님 백성으로 완성시키시는 방법으로 하느님 당신 자신의 쪼개짐을 택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시면서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심으로 아브라함의 후손,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의 탄생은 하느님의 自害 사건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힌트 하셨고, 창세기 16장에서 인간 쪽에서의 노력과 열심의 産物인 이스마엘을 등장시키심과 동시에 그를 기각시키시고, 17장에서 할례를 명하심으로 교회는 하느님의 쪼개짐 (할례)을 통해 탄생하게 될 것이며 그 쪼개짐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전가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17장의 할례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들의 탄생은 죽어야 할 자 대신에 어린양의 모습으로 살해당하는 하느님의 십자가 할례(쪼개짐)로 이루어지게 됨을 조금 더 구체적인 그림으로 오늘 본문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훼의 천사는 성자 예수님이지요. 예수님께서 그로부터 이 천년 후에 당신이 직접 쪼개져 죽으실 예루살렘의 시온 산에 오셔서 아브라함에게 십자가의 내용을 암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는 희망에 차 있었고 과연 그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요한8:56)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골고타 언덕에서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어지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 역시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자해 사건인 십자가를 記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이사악은 자신이 매달려 죽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주님처럼 자신을 불태워 죽일 번제 나무를 짊어지고 모리아 산으로 오릅니다. 이사악은 약속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 속에서 그와 연합되어 구원 얻게 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심판대를 향해 자신이 매달려 죽어야 할 형틀을 짊어지고 올라가 처참하게 찢겨 죽어야 하는 죄인들 대신에 그 자신이 죄가 되셔서(고후5:21) 연약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죽으시는(쪼개짐, 할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의 복음을 모리아 산의 이사악과 어린양이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시 구약의 제사 제도로 연결이 되어 구체적 실습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죽어야 할 죄인 대신에 도 없고 도 없는 제물이 대신 죽어 죄인의 죄를 대속하는 쪼개짐의 제사가 바로 구약의 성전 제사입니다. 죄인들의 구원은 바로 그러한 모양으로 주어지게 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가르쳐 주시고 그 것을 실습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쪼개짐의 제사가 드려지는 성전은 바로 죽어야 할 이사악 대신에 어린양이 죽어서 이사악을 살려낸 모리아 산, 즉 시온 산에 지어 졌습니다. 오늘 본문의 모리아 산 사건이 어떻게 시온 산의 성전으로, 성전 제사로 이어지게 되는지 아시겠지요? 그러나 그 모리 아 산에 선 성전에서 드려지던 성전제사도 원형은 아닙니다.

 

(히브9:9-12) 9 이 모든 것은 현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제도를 따라 봉헌물과 희생제물을 바치지만 그것이 예배하는 사람의 양심을 완전하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10 그것은 다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여러 가지 씻는 예식에 관한 인간적인 규칙들로서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바로 잡으시는 때가 올 때까지 유효할 뿐입니다. 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좋은 것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사제로 일하시는 성전은 더 크고 더 완전한 것이며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창조된 이 세상에 속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창조된 이 세상에 속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12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 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모리아 산에 선 성전에서의 제사의 본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비유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제사의 본체이시며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는 그 모형인 성전과 제사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로 그 모리아 산에 지어진 성전 앞에서 그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고 당신이 사흘 만에 다시 세우시겠다는(요한2:19) 장담을 하셨던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성전이시니까요.(요한2:21)

실제로 주님은 이사악이 올라갔던 그 모리아 산, 예루살렘에서 어린양이 되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진짜 성전, 진짜 제사, 진짜 모리아 산의 정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밝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진짜 제사이며, 진짜 제물이시며, 진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이 자연스럽게 모형을 파괴하고 기각해 버린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과 10장의 이야기가 모두 그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약속의 자손은 하느님이 준비하신(야훼 이레)어린양에 의해 죄와 죽음(死亡)에서 건져지게 된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게 야훼 이레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야훼 이레 하면 으레 우리가 필요한 것은 하느님이 모두 미리 준비해 놓으신다는 식의 아전인수격 해석을 하곤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야훼 이레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연합되어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탄생에만 적용이 되는 단어인 것입니다. ‘야훼 이레는 엉뚱하게 우리의 일상에 아무렇게나 적용을 해서 주님이 다 준비해 주실 거야, 그러니 걱정 마라고 막 써 먹을 수 있는 그런 단어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의 준비하심에 의해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이며 우리가 도달하려하는 참 행복과 만족의 高地도 하느님의 준비하심에 의해서만 주어지게 되는 것임을 告知하는 어구가 바로 야훼 이레인 것입니다.

이렇게 모리아 산의 야훼 이레사건은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된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대단원의 결론이며 요약입니다. 하느님께서 엉터리 아브라함을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을 만드신 것이 자신의 쪼개짐을 근거로 한 하느님의 열심에 의한 것인 것처럼 우리 성도들의 탄생과 완성도 그렇게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시작되고 완성이 되는 것임을 모리아 산 사건이 결론지어 강하게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굳이 오늘 본문의 요절을 한절만 고르라면 8절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창세22:8) 8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나,

 

이게 바로 여 야훼 이레입니다. ‘죽어야 할 자 대신에 제물을 준비하시는 하느님아브라함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믿음이 나온 것일까요? 분명 하느님께서 자기 아들을 죽여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음에도 번제할 어린양은 하느님이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히브리서 記者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11:17-19) 17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시험하시려고 이사악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기꺼이 바쳤습니다. 이사악은 외아들이었고 그를 두고 하느님께서 약속까지 해 주신 아들이었지만 그를 기꺼이 바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18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에게서 너의 후손이 퍼져 나가리라' 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었던 사람들까지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는 이를테면 *죽었던 이사악을 되찾은 셈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이사악을 다시 살려 내실 것임을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정말 이사악을 죽이실 것으로 생각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그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반드시 자기 아들을 살려 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지요?

아브라함은 40여년 이상을 하느님과 함께 동행 하며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고 경험했습니다. 애굽왕 파라오와 그랄왕 아비멜렉 까지도 벌벌 떨게 하시는 하느님, 도저히 불가능한 마른 막대기 같은 자기 부부에게서 새 생명을 탄생케 하신 하느님,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밀어 올리시는 하느님, 그렇게 당신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내시는 하느님을 배우게 된 아브라함은 이사악에 관한 하느님의 약속 또한 실패치 않고 지켜질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어떤 약속이지요?

 

(창세17:19) 19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네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사악이라고 하여라. 나는 그와 나의 계약을 세우리라. *그와 그의 후손의 하느님이 되어 주기로 영원한 계약을 세워 주리라.

 

하느님께서 여전히 이스마엘에게 애착을 갖고 있었던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시면서 이름까지 지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직접 그 약속의 자손 이사악과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장가도 못간 이사악이 죽는다면 하느님의 약속은 지켜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기나긴 신앙의 여정 동안에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엄위하심과 신실하심을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백세에 낳은 자식, 즉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자기의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 내어 놓는 참된 순종의 예배자로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과 신앙의 여정을 통하여 하느님을 배우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가지며, 그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항복하는 자로 성숙되어지고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의 유일한 目標지점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주권과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모리아 산으로 끌려가는 하느님의 백성들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 아니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드린 것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아니 자기 자신을 하느님 앞에 드리는 항복과 순종의 자리, 다른 말로 예배의 자리를 향해 성숙되어져 가는 것이고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聖化입니다. 그리고 終局에는 하느님의 마지막 시험에 멋지게 통과하여 靈化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한 마디로 이 땅에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예배의 삶을 배우고 참 禮拜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느님께 온전히 항복하고 순종하여 하느님 앞에서의 나의 무력함과 불가능함과 피조물 됨을 인정하고 그 분께 나를 온전히 드리는 것이 바로 禮拜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바로 그 예배의 삶을 배우고 익히며 경험하다가 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의 목적은 피조물들이 완전한 마음으로 진심에서 우러나와 당신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영원토록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자기 인생의 왕이 되어 살겠다고 하던 그 자리에서 내려와 하느님께 항복하고 그 분께 순종하며 예배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救援이라는 것은 자신을 예배하던 자들을 돌이켜서 하느님을 禮拜하는 자들로 바꾸어 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명12:914) 9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유산으로 주시는 정착지에 아직은 다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0 너희가 요르단강을 건너 들어 가서 야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물려 주시는 땅에 자리를 잡으면, 하느님께서는 너희로 하여금 주변에 있는 원수들에게 위협을 받지 않고 편히 살게 해 주실 것이다. 11 그렇게 되거든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골라 주신 곳으로 내가 명령한 모든 것, 번제물과 친교제물과 십일조와 흔들어 바치는 예물과 고르고 골라 야훼께 바치는 서원제물을 가져다 바쳐라. 12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를 모시고 그 앞에서 즐겨라. 너희뿐 아니다. 너희 아들 딸, 또 너희 남종과 여종, 또 너희처럼 유산으로 받은 몫이 따로 없이 너희 성문 안에서 사는 레위인들도 함께 즐기게 하여라. 13 부디 명심하여 눈에 든다고 아무 데서나 번제를 드리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14 야훼께서 너희 중 한 지파에서 한 곳을 고르실 터이니, *곳에서 만 번제를 드리고 내가 너희에게 지시한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어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시는 이유를 하느님이 택하신 곳에서 제사, 곧 예배를 하게 만드시기 위함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자기가 하느님처럼 되겠다고(창세3:5) 예배의 삶을 잃어버린 당신의 백성들을 돌이켜 당신을 예배하는 자리로 다시 불러 들여 그들에게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허락하시기 위해 獨生子를 죽이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성전 제사의 원형에 대해 이렇게 기술합니다.

 

(히브8:5) 5 *사제들은 하늘 성전의 *모조품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모세도 천막 성전을 지으려고 할 때에 '산에서 너에게 보여 준 그 본을 따라 모든 것을 만들도록 하여라' 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성전은 하느님 나라의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께 드려지는, 하느님 나라 백성들의 참 예배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히브리서의 내용과 신명기 12장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확실하게 답이 나오지요

하느님은 우리 聖徒를 구원하셔서 하느님 나라에서 당신을 온전히 예배하는 자들로 완성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 씩이라도 모여서 미사를 통해서 그 하느님 나라에서의 예배의 삶을 모형으로나마 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당신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것처럼 일주일 동안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여 그 정복한 결과를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와 완전히 예배드리는 그 천국의 삶을 미리 조금 맛보는 자리가 바로 오늘 이 미사예배의 자리인 것입니다. 하느님 저는 돈에게 지배당하지 않고 이렇게 돈을 지배하여 하느님 앞에 순종시킵니다. 하느님 저는 세상 쾌락에 지배당하지 않고 이렇게 그 모든 욕구들을 쳐서 하느님 앞에 복종시킵니다.’그게 예배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의 삶 전체를 예배로 드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로마12:12) 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보다시피 구약에 성전 제사가 있었다면 신약 시대에는 산제사가 있습니다. 제사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물이 바뀐 것뿐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물이 송아지와 염소와 양등의 짐승들이었다면 신약 시대의 제물은 바로 성도 자신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자신의 모든 삶을 하느님 앞에 복종시켜 산제사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성도는 가장 행복합니다. 하느님 백성들의 창조의 목적이 바로 예배의 삶이니까요.

그러니까 성도는 주일에 한번 모여 예배를 드리고 나머지 시간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전심으로 예배를 하고 그 마음으로 나머지 시간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삶을 누리 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행복 지수 1위인 곳이 바누아트라는 섬입니다. 그 바누아트는 세계 극빈 국 중의 하나입니다. 가장 가난한 곳에서 어떻게 행복지수가 가장 높게 나올 수 있을까요?

세계 유수의 방송국 기자들이 그 것이 궁금해서 취재를 해 본 결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욕심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꿈도 없고 야망도 없습니다. 얼핏 들으면 그런 바보 같은 삶이 어디 있나 하시겠지만 그게 바로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없는 대로 많이 가진 사람은 그 자리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며 사는 것입니다.

정 가진 것이 없어 배가 고프면 바다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아 배를 채웁니다. 갯벌을 파서 게를 잡아 구워 먹습니다. 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기도 합니다. 그렇게 먹다 남은 것은 이웃과 나눕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난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드리는 삶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상황을 허락하셔도 그 속에서 만족하고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드릴 예배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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