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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용서의 완성은 그 사람과의 관계 회복으로 얻는 기쁨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08 조회수1,926 추천수5 반대(0) 신고

 

2021년 나해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용서의 완성은 그 사람과의 관계 회복으로 얻는 기쁨>


복음: 마태오 18,21-35



성모자


부티노네(Butinone) 작, (1490),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오늘 복음은 용서가 주제입니다. 베드로는 하루에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사실 우리가 용서 못 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평생 한두 가지 잘못 한 것이지 하루에도 일곱 번씩이나 잘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베드로가 무척 화가 나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만 탈렌트 탕감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는다면 어떻게 하느냐는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수조 원을 탕감받은 사람이 수천만 원 빚을 진 사람의 멱살을 잡는다면 하느님도 정의상 다시 수조 원을 갚으라고 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일만 탈렌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피 흘리심으로 죄가 씻긴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해 누군가 사업에 실패하여 부도가 났을 때 돈 많은 사람이 그냥 100억을 거저 주려 하는데 그 사람이 100만 원 빚진 사람을 재판에 걸면 100억 주려는 마음이 싹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더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용서가 결코 빚진 것을 탕감해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빚을 탕감해준다는 것은 이전의 빚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 모든 죄를 잊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의 완성은 잊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다시 회복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일만 탈렌트를 탕감해 준 임금은 그 빚 때문에 자신에게 오지 못하는 사람과 다시 회복되는 관계 때문에 기쁩니다. 또한, 그 탕감받은 사람이 누군가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을 보면 더 기쁠 것입니다. 용서의 궁극적 목적은 관계의 회복에 있습니다.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의 마지막 부분에는 가시밭길 위의 보속이란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모니카 자매님의 이야기입니다.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니카 자매는 평생 여섯 동생을 키우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남의 집 식모살이하며 살았고 결혼도 하지 못했습니다. 유방암에 걸렸지만, 돈이 없어 치료도 못 받고 병만 키우다 도저히 안 되어 이젠 혼자 호스피스 병원에서 죽게 해 달라며 찾아온 것입니다. 동생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고 하여 연락도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수술을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돈도 없고 그러면 조금 더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수술을 거부했습니다. 동생들을 위해 살 만큼 살았으니 빨리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수녀님은 삶의 의욕이 없는 그 자매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여 수술비를 마련해 드렸습니다. 자매님은 온종일 기도만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성모님께서 딸아, 내가 다 안다.”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자매는 주인집에서 일할 때 음식을 몰래 가져다 동생들에게 준 사실을 성모님께서 다 안다고 하시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은 주인에게도 이미 용서를 받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도둑질한 것이 창피해 고해성사는 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수녀님은 병자성사 때 고해성사를 하라고 했지만, 창피해서 못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에게 미리 그 사실을 말씀드렸고 신부님도 고해성사 중에 그 죄는 다 알고 있으니 괜찮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니카 자매는 대신 그 이야기를 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수녀님께 말했습니다. 모니카 자매는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수술을 잘 받고 70세가 넘기까지 잘 사셨습니다.

 

모니카 자매는 동생들을 위해 행한 작은 죄까지도 하느님께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는 그만큼 자신도 남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자매는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에게 보답하지 않는 동생들을 다 용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기 싫고 빨리 죽고 싶은 만큼 삶에 의욕과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 그만큼 용서받은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너무 엄하신 분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도 동생들을 용서하는 것이 그만큼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삶이 너무 어려워 그냥 죽는 것을 원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미워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상대가 나에게 한 일을 잊는 것이고 그것을 넘어서서 상대와 함께 있어도 기뻐야 합니다. 기쁨이 없으면 용서도 진정으로 할 수 없고 한 것도 아닙니다. 미운 사람을 안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어도 행복할 만큼 일만 탈렌트 탕감 받은 사실을 즐겨야 합니다.

 

마리아 고레티 성녀는 자신을 찌른 사람을 용서하느냐는 사제의 질문에 죽어가면서도 저는 그분을 용서할 뿐 아니라 하늘 나라에서 함께 살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이유는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또한 쉽지는 않겠지만 용서의 최종 목적지는 그 원수와 같은 사람과의 기쁜 관계 회복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https://youtu.be/GVKr2QjJEtE

유튜브 묵상 동영상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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