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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12 조회수2,452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바리사이와 세리입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서 일어나는 일화입니다. 특별한 내용도 없고 어려운 성경 내용도 없습니다. 내용도 쉽습니다. 이 예는 실제 일어난 것을 그대로 묘사를 한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실제 일이 아니고 여기서 어떤 의미로 말씀하셨는지 그 의미를 찾는 게 관건일 것 같습니다. 실제 묘사이면 좀 더 사실적으로 다가올 텐데 말입니다. 가장 주된 핵심은 겸손입니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오늘 복음을 살펴보기 전에 하나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죄라는 것은 어디서 왔을까?입니다. 사실 비근한 예로 야고보서에서 보면 욕심에서 또는 욕망에서 죄가 파생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죽음이 뒤따릅니다. 또 다른 면은 비교를 통해서 욕망이 상대적으로 충족이 덜할 때 여기서 시기와 질투가 생깁니다. 이로 인해 죄를 짓기도 합니다.

 

신앙을 떠나서 일반적인 사람의 심리 속에는 누구나 시기와 질투의 욕망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정도의 차이가 다를 뿐입니다. 아무리 의로운 사람이라도 인간이라는 본능 밑바닥에는 누구나 다 이게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걸 이성적으로 통제를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표출되는 정도가 다를 뿐입니다.

 

저는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교육에 한번 적용을 해봤습니다. 제가 딸처럼 여기는 애를 오랫동안 지도한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10년 가까이 인연이 되어 지도한 애입니다. 사실 이 애는 거의 맨투맨에 가까울 정도로 지도를 했습니다. 한 번은 친한 친구와 단둘이서 수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차별은 교육에 좋지 않기 때문에 제가 서로 분발하게 하려고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도록 경쟁심을 자극하였습니다. 혼자 지도할 때는 사실 애가 어떤 경우는 말을 잘 듣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착한 것하고 이런 부분은 좀 별개입니다. 원래 여학생은 좀 케어하는 게 힘듭니다. 예민하기 때문입니다. 애를 자극하기 위해서 친구를 한 번씩 활용합니다. 간접적으로 칭찬을 합니다. 저는 그걸 일부러 오랜 시간 지도한 아이가 듣도록 의도적으로 합니다.

 

혼자 지도했을 땐 그런 걸 직접적으로 표현해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친구를 아주 돋보이게 칭찬을 할 때는 표정이 묘합니다. 저는 속으로 웃음이 납니다. 이처럼 이런 걸 친구한테도 적용을 합니다. 그럼 이 친구도 얼굴 표정이 묘합니다. 심리를 이용해서 간접적으로 교육에 활용을 하면 유익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건 여학생이 상대적으로 남학생보다 잘 적용이 됩니다. 여학생이라고 해서 모두가 적용이 되는 게 아닙니다. 오랜 경험을 통해서 애 성향을 잘 파악해서 성향에 맞게 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 느낀 게 있습니다. 사람은 비교의 대상이 있을 때 그 대상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보려고하는 심리가 있다는 걸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사실 우리가 의식을 잘 하지 못해서 그렇지 남과 늘 비교하는 의식이 무의식 중에 있습니다. 비교가 꼭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니고 제가 예를 든 경우처럼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것보다 오히려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월감을 가지면 교만으로 흐를 수가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열등감을 가지면 시기, 질투로 이어질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활용하고 이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오늘 바리사이는 우월감으로 남을 업신여겼습니다. 마치 자신은 계명을 잘 준수하고 지킨 사람으로 부각시키면서까지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잠시 나오는 대목 중에 다른 건 몰라도 간음을 언급한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지만 실제 바리사이가 이렇게 말했다면 이 부분에 대해 바리사이가 착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간음에서만큼은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때 바리사이는 육적인 간음을 생각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육적인 간음도 간음이지만 실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마음으로 간음을 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말하는 바리사이처럼 이 부분만큼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만약 이런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자신을 속이고 또 하느님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솔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부분에 다소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의로움으로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감출 수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장하고 은폐를 한 셈입니다.

 

사람에게는 이게 어느 정도 통할지 모르지만 오늘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두고 말을 하는 것이라 하느님을 속이는 모습입니다. 과연 이런 모습을 보이는 바리사이의 모습을 보시면서 하느님께서 어떤 생각을 하실 것 같습니까? 차라리 비록 죄를 지었지만 세리처럼 자신이 나약해서 죄를 지은 것을 인정하고 감히 하늘을 향해 쳐다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가슴을 치며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세리의 모습에 더 짠하셨을 것 같습니다. 진정으로 통회하는 마음을 보시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십니다. 왜 그럴까를 묵상해봅니다. 바리사이가 세리보다는 그래도 좀 더 의로운 모습으로 지낸 건 사실일 겁니다. 그렇지만 그는 상대적으로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단죄를 했습니다. 그 잣대로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한 기준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허물과도 같은 부분은 자신이 얼마든지 율법으로 합리화를 해 교묘히 자신의 잘못을 가리는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를 보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세리는 비록 죄는 지었지만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라는 것을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있고 그런 부족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진심으로 통회를 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그게 어쩌면 나약한 인간이지만 더 하느님 앞에 진실한 모습이 될 수가 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죄인이라는 걸 알아야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의로움을 향해서 나아갈 수가 있겠지만 바리사이처럼 저런 행동을 한다면 날로 갈수록 자신의 교만이 하늘을 찌를 수도 있는 수준까지 걷잡을 수가 없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어쩌면 예수님께서 세리가 더 의롭게 되어 돌아갔다고  하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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