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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3주간 토요일] 祈禱 (루카18,9-1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13 조회수2,42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3월 13일 토요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祈禱 (루카18,9-14)

   

 

1독서<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信義.>(호세6,1-6)

주님께 돌아가자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그러니 주님을 알자주님을 알도록 힘쓰자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에프라임아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유다야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화답송 시편 51(50),3-4.18-19.20-21(◎ 호세 6,6 참조)

◎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 하느님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하느님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당신의 자애로 시온을 돌보시어예루살렘의 성을 쌓아 주소서그때에 당신이 의로운 희생 제사제물과 번제를 즐기시리이다

 

복음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18,9-1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느님제가 다른 사람들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하느님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호세6,1-6)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 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1-2)

 

여기서 '자' 또는 '오라'로 번역될 수 있는 '레쿠'(leku; come)은 어원상 걸어가는 행위를 지칭하는 동사 '얄라크'(yallak)의 2인칭 복수 명령형으로서 '너희는 걸어가라'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죄악과 범죄의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 적극적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자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가자'에 해당하는 '웨나슈바'(wenashubah; and let us return)의 원형 '슈브'(shub)는 호세아서 5장 13절에서 주님께서 당신 자리로 돌아갈 것임을 나타낼 때 사용한 것과 동일한 단어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호세아서 2장 7절에서 이 단어는 간음을 행한 여인으로 비유되는 이스라엘이 본 남편인 주님께로 돌아감을 지적하는 데 사용되었고, 호세아서 3장 5절에서는 이 단어가 이스라엘이 오래동안 하느님을 떠난 상태로 살아가다 다시 그분에게로 돌아갈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그들은 원래 하느님의 품에 있으면서 평화를 누리던 자들이었는데 주님을 떠나버렸다. 마치 고메르가 남편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에게 갔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을 떠나 바알을 중심으로 해서 이방의 각종 우상들을 오래 동안 섬겼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결국 이스라엘에게 주님의 심판을 초래했다.

 

이스라엘은 죄에 대해 주님께 이미 심판을 당했든, 아니면 아직 심판을 당하지 않았든 원래 있어야 할 곳을 떠나 엉뚱한 곳에서 인생을 허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속히 그들의 영적 고향인 주님께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이 본문은 훗날 이스라엘이 아시리아를 통해 당하게 될 극한 고난, 즉 멸망과 포로 생활을 상징하고, 그 후에 주님의 회복하심의 은혜가 있을 것을 예언하는 구절이다.

 

원문에는 이유 접속사 '키'(ki)로 시사하는 문장으로서 왜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께로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 준다.

비록 죄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국가적 멸망은 불가피하지만, 그후에 주님의 회복의 은총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 본문에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에 해당하는 '타라프'(taraph; has torn us to pieces)의 기본형은 호세아서 5장 14절에서 '잡아 찢어가고'로 번역된 '에트로프'(etroph)의 원형과 동일하다.

 

이러한 일치는 비록 하느님께서 그들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사자(a lion)처럼 이스라엘을 움켜쥐고 갈기갈기 찢어버리셨지만, 이후(以後) 정한 시기에 이르면 고쳐주시는 회복의 은총을 베푸실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에 해당하는 '웨이르파에누'(weirphaenu; but he will heal us)의 원형 '라파'(rapha)는 어원상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이다(레위13,18; 신명32,39).

특히 신명기 32장 39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치기도 하고 고쳐 주기도 하는 유일한 존재로 선언하신다.

 

사실 하느님께서 찢으신 것을 고쳐줄 다른 세력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찢으신 상처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오로지 하느님만이 치료하실 수 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주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상처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한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 징계를 당할 때,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께 돌아가 회복의 은총을 누리지만, 어리석은 자는 그분께 대해 더욱더 적대적인 마음으로 끝까지 대항하다가 최종적으로 멸망을 당하고 만다.

 

호세아서 6장 1절 후반부터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에 해당하는 '야크 웨야흐뻬셰누'(yak weyahbeshenu; he has injured us but he will bind up our wounds) 호세아서 6장 1절 전반부와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같은 내용의 병행 대구 문장으로서 하느님께 돌아가는 자에게 회복의 은총이 보장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한다.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 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2)

호세아서 6장 2절의 예언은 주님께서 고난 중의 이스라엘을 회복하게 하시는데, 조속한 시일 내에 그들에게 회복의 은총을 누리게 할 것을 강조하는 예언이다.

 

여기서 '이틀 뒤에' 그리고 '사흘 째 되는 날에'라는 표현에서 '둘', 혹은 '셋'이라는 숫자는 구약 성경에서 수나 양이 그리 많지 않은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많이 쓰였다(욥기5,19; 잠언30,15).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틀 뒤에', 그리고 '사흘 째 되는 날에' 일으킬 것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조속한 시일 내에, 그리고 확실히 회복시킬 것을 강조한다.

 

예를 들자면, 금요일 오후에 무덤에 묻혀 안식일인 토요일 하루를 지내고,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인 주일 새벽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활 시간은 날짜로 보면 사흘이요, 시간으로 보면 이틀이다.

그리고 '우리를 일으키시어'에 해당하는 '예키메누'(yeqimenu; he will restore us; he will raise us up)의 원형 '쿰'(qum) 어원상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이다(창세19,1; 24,54).

 

여기서는 사역 능동형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었으며, 앞의 '우리를 살려 주시고'라는 표현과 같은 뜻의 병행 대구를 형성하는 단어로 쓰였다.

즉 이 단어는 하느님께서 멸망과 죽음의 형편에 놓인 이스라엘을 새롭게 회복시키실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본문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 결과 그들이 경험하게 될 일을 나타내는 예언이다.

'우리가 ~살게 되리라'에 해당하는 '웨니흐예'(wenihyeh; and we shall live)의 원형은 문두에 나오는 '우리를 살려 주시고' ('예하이예누'; yehaiyenu; he will relive us)에 해당하는 단어의 원형과 동일한 '하야'(haya)이다.

 

이것은 어원상 목숨을 스스로 유지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사역의 의미, 누군가가 살게 하는 것, 살리는 역사(役事)로 인해 생명이 영위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여기서는 미완료 1인칭 복수로 쓰였으며,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회복과 소생의 역사(役事)하심으로 살아나서 하느님 앞에서 살게 될 것임을 강조한다.

 

특히 그들이 하느님 앞에 살게 되리라는 표현은 그들이 더 이상 하느님을 떠나지 않고, 더 이상 우상을 쫓지 않고, 하느님과 평화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느님으로 인해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갈 것임을 나타낸다.

즉 그들은 외적 상태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영적 상태까지 회복될 것임을 가리킨다.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복음

 

천국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는 곳

천국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는 곳이지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해서 가는 곳이 아니고 하느님의 은총(은혜)으로 가는 곳이지 사람의 행위로 가는 곳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루카18,9-1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교회에는 의롭다고 착각하는 죄인들과 죄인임을 아는 죄인들두 부류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이는 다 죄인이라 하셨습니다.

 

(로마3,10-12) 10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의로운 이가 없다하나도 없다. 11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이 없다12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하나도 없다.

하느님의 뜻인 하늘의 생명을 얻기 위한 깨달음이 아닌 사람의 뜻땅의 목숨을 위한 신앙을 살고 잇기에 영원한 생명을 위한 하느님의 자비그 호의를 전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느님제가 다른 사람들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두 사람기도의 두 모습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강도짓과 불의간음을 하지 않으며 단식과 감사의 십일조를 바치는 종교인참 신앙의 모델이 아닌가요?

그런데~

(루가12,1) 그러는 동안에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다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바리사이들의 그 자기 의로움은 위선이라 하십니다세상에 자기 명예영광을 위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자기 의로움으로 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마10,2.3) 2 나는 그들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그들은 하느님을 위한 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열성입니다.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로움으로 간다면 죄인들의 대속으로 죽으신 십자가의 예수님그분의 죽음그 하늘의 의로움을 헛되게 하는죄가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늘의 대속그 의로움으로 가는 곳입니다그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2코린5,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1베드2,24)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로마3,24)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하느님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늘의 대속으로 받는~용서의로움이 필요한 죄인입니다그래서 하늘의 의로움으로 구원의 완성을 이루고 우리 창조의 목적인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이사43,7) 그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참 신앙인입니다.

 

(에페1,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은혜선물)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인간들의 계명으로 이룬 그 자가 의로움으로 드리는 영광이 아닌하느님의 계명인 나무의 희생(탈출15,25),

곧 십자가의 예수님 그분의 의로움으로 드리는 영광입니다하느님은 그 영광만 받으십니다.

 

(요한5,41)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죄인만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습니다십자가의 대속을 진리로 깨닫고믿어서~~

 

1내가 너희에게 말한다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인간들의 자기 의로움이 아니라 하늘의 대속으로 받은 의로움으로 입니다.

하늘의 대속그 죄에서의 자유그 약속의 말씀은 죄인임을 깨달은 그 낮은 자리에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야고1,21.25)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25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아멘,

자유의 법십자가의 사랑그 복음을 기억하는 것그것이 실천하는 신앙입니다하느님의 대속 그 사랑으로 가는 천국입니다.

♡ 아멘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복음(루카18,9~14)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느님제가 다른 사람들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하느님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9-14)

 

루카 복음 18장 1~8절의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절망하지 말고 인내하며 항상 기도해야 할 것에 대해 교훈을 주었다면루카 복음 18장 9~14절의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대조하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다.

 

'스스로 의롭다고'에 해당하는 '에프 헤아우토이스 호티 에이신 디카이오이' (eph' heautois hoti eisin dikaioi; in themselves that they were righteous)에서 '에프 헤아우토이스'는 직역하면 '그들 자신들'로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당시 유대 사회의 종교 지도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려고 위선적인 의()를 행하는 자들이었다(마태6,1).

 

고전 희랍어 문헌에 보면, '의로운 자'란 그 행위가 자신이 소속된 사회의 구조와 조화를 이루고신들과 이웃들에 대한 정당한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자를 말했다그러한 의무 이행은 그 사람을 불의한 자들과 구별해 주는 기준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해야 할 정당한 의무도그리고 이웃에게 행해야 할 진정한 사랑과 공의도 완벽하게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의로운 자라고 불렀다(루카20,20).

 

아마도 그들은 율법에 해박하였고비록 위선일 수밖에 없었지만적어도 그들 스스로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열성적인 율법 이행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저버림으로써하느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지도 못하면서껍데기 외형적 행동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자신들의 고정 관념의 테두리 안에서 안주하며스스로를 의롭다고 높여 세우는 위선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이었는데, '업신여기는'으로 번역된 '엑수테눈타스'(eksouthenountas; despised; looked down on)는 '경시하다', '얕보다'는 뜻을 지닌 동사 '엑수테네오'(eksoutheneo)의 현재 분사로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에 해당하는 '호이 로이포이 톤 안트로폰'(hoi loipoi ton anthropon; other men)는 그들에게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데그들은 자신들 집단 외에는 모두 의롭지 못한 부정한 자들로 여기는 극히 독선적이고 편협한 의식의 소유자들이었다.

 

루카 복음 18장 10절에서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모든 도시의 건물들 위에 높은 지대인 모리야 산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고또한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에 대한 외경심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루에 보통 세 번씩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현재의 시각으로 말하자면오전9정오오후3시이며유대의 시간법으로는 각각 제369시였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기도하던 장소는 성소가 아니라 성전의 뜰로서 '여인의 뜰'이라고 불리워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세리는 루카 복음 18장 13절의 '멀찍이 서서'라는 표현을 볼 때, '여인의 뜰'이 아니라 그 바깥에 있는 '이방인의 뜰'에서 기도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두 사람중 하나는 '바리사이'에 해당하는 '파리사이오스' (pharisaios; a pharisee)이고다른 하나는 바리사이와 확연히 구분되는 '세리'에 해당하는 '텔로네스'(telones; a publican; a tax collector)이다.

 

바리사이는 율법의 외형적 준수를 중요시하던 당파로 자신들 스스로에 대하여 의롭다고 여겼지만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과 형식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셨다반면에 세리는 로마 정책에 따라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수탈하언 자로서사람들에게는 죄인으로 여겨졌지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의 잘못을 자책하고 있는 그의 친구가 되어주셨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바리사이는 의()를 대표하는 자처럼세리는 마치 부정과 불의의 대표처럼 여겨졌다.

 

한편루카 복음 18장 11절에 나오는 '서서기도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기도자세였다여기 '서서'에 해당하는 '스타테이스'(statheis; stood)는 '서다', '두다', '위치하다'는 뜻을 가진 '히스테미'(hystemi)의 과거 수동태 분사이다.

 

루카 복음 18장 13절의 세리가 서서 기도했다는 표현이 능동형으로 쓰인 것과 달리바리사이의 경우에 수동태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표현이다.

이것은 바리사이가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즉 자신을 드러내고자 의식적으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위치에서 기도하고 있었던 태도를 암시한다.

 

그리고 바리사이는 '꼿꼿이서서 혼잣말로 기도한 것으로 나오는데원문에는 '꼿꼿이'가 '프로스 헤아우톤'(pros heauton)이다여기서 '프로스'(pros)는 '~에게로 향하여'(towards)라는 뜻의 전치사이며, '헤아우톤'(heauton)은 '그 자신'(himself)이라는 뜻의 재귀 대명사이므로, '그 자신에게로'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자신을 치켜세우면서 기도했다는 의미도 있고문맥상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도록 무리들과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자신의 자랑거리만을 늘어놓으며 하느님께 거만하게 기도했던 것으로도 보며혹자는 바리사이가 하느님께 아닌 자기 자신에게 기도한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이제 바리사이는 세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서 기도하는 것으로 나온다.

'강도 짓'에 해당하는 '하르파게스'(harpages; robbers)는 형용사로이리처럼 '탐욕스러운', '게걸스럽게 먹는'이라는 뜻이며명사로는 '강도', '사기꾼'이라는 뜻이 된다.

 

그 당시 세리는 로마에 고용되어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일을 했으며그래서 세리는 지배자들인 로마보다 더 악하고 불의하다고 여겨졌고동족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했다더군다나 단순히 로마에서 원하는 세금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리를 위해 세금 외의 돈을 뜯어가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바리사이도 너무나 잘 알기에 세리의 죄를 간접적으로 들추어내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세리는 '강도짓뿐만 아니라 '불의'를 저질렀다고 지적받는다.

'불의'에 해당하는 '아디코이'(adikoi; unjust; evildoers)는 정의를 해치거나 범하는 자들에 대한 표현으로서여기서는 다른 사람을 속임수로 대하는 행동을 가리킨다그리고 '간음'에 해당하는 '모이코이'(moichoi; adulterrers)도 '강도짓'과 '불의'와 다 연결될 수 있는 범죄이기에 여기서 나열한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강도짓을 일삼았고(마태23,14),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한 '불의한 자들'이었고(마태23,28), 여자를 보고 음란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신다(요한8,7~9; 마태5,28).

 

루카 복음 18장 11절에서 바리사이는 세리의 죄를 지적하면서 자신들은 이들과 구별되는 자로서 의롭다는 것을 드러낸다바리사이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회개해야 할 것이 없었다그리고 부족한 것이 없기에 구할 것도 없었다.

바리사이는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루카 복음 18장 12절에서 말한다.

 

구약에서는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단식(레위16,29~30; 민수29,7)하도록 되어 있지만바리사이들은 율법의 규정에 없는 경건의 습관으로 일주일에 두 번 단식했다고 자랑한다.

바리사이들은 시나이 산에 계약을 맺으러 올라간 날로 여겨지는 목요일과 내려온 날이라고 여겨지는 월요일에 단식했던 것이다.

 

사실 모든 재산과 소득의 십일조를 준수하는 바리사이들은 신명기 14장 22~23절의 규정을 능가하는 봉헌을 했던 것이다여기서 '단식'하다에 해당하는 '네스튜오'(nesteuo; I fast)와 '십일조를 바치다'에 해당하는 '아포테카토'(apodekato; I give tithes ;I give a theuth of)가 바리사이들의 자랑거리인데그들은 하느님 앞에 겸손하기보다는 자신만이 의롭다는 교만과 자신이 정작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기도를 바치고 있다.

 

한편루카 복음 18장 13절에서 세리는 죄인과 같이 취급당하여 거룩한 성소 가까이 가는 것조차 부끄러웠다또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바리사이 옆에 서서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었다.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의 일반적인 자세인데세리는 눈을 들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기를 원치도 않았다.

 

세리는 자신의 더러움과 비천함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에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을 생각조차 못했으며겸손함과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의 자세를 가지고 기도했다그의 기도의 내용은 너무나 단순했으며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루카 복음 18장 13절의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힐라스테티' (hylastheti)는 '힐라스코마이'(hylaskomai)의 수동태 명령형이다이 단어는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게 만들다', '자신과 화해시키다'는 뜻인데가슴을 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참회와 겸손의 극치이다이것은 '하느님자비를 베푸소서', '호의를 가지소서'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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